20세기는 언어 혁명의 시대였다. 언어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도, 소쉬르(F. Saussure)와 촘스키(N. Chomsky)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언어학'과 '변형 생성 문법' 언어학이 식자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도 20세기였다. 이런 성과는 언어 연구에 있어서의 혁명이라고 평가되곤 한다.
아니 차라리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겪으면서, 제각기 흩어져 있던 수많은 견해들이 서로 널리 교환되고 실험되기 시작한 것이 20세기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20세기가 그 이전과 차이가 난다면 역사상 유례없는 지역간 교통(交通)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이다. 교통은 거의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동시에 저울에 올려놓게 한다. 물론 보편의 이름을 한 자기만의 저울에. 언어학에 있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는 소쉬르의 언어학과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학의 기초가 이들에게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언어학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언어학을 상기해 보자. 물론 우리는 '언어학'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배우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어, 영어, 다른 외국어를 배우면서, 그 발음, 어휘, 문법을 배우면서 그것을 배웠다.
이제 이러한 언어관을 관통하는 몇 가지 기본 전제들을 뽑아내 보자.
1. 언어는 정보 및 소통과 관련되어 있다.
2. 언어라는 추상 기계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다.
3. 언어의 상수 또는 보편자가 있는데, 이것은 언어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게 만든다.
4. 다수어 또는 표준어의 조건 아래에서만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기본 전제는 마구잡이로 뽑아낸 것이 아니다. 소위 혁명적 언어학이라고 얘기되는 소쉬르와 촘스키 등의 언어학이 갖고 있는 전제들과 그것의 오류를 비판하는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의 글에서 추려낸 것이다(그들의 저서 『천 개의 고원』의 네 번째 고원인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이 필자가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바이다. 필자는 특히 전제1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전제1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이고 그것의 목적은 의사 소통이라는 점. 이 당연한 듯 보이는 사실에 반대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여교사가 학생에게 질문을 할 때 그녀는 정보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교사가 문법 규칙이나 계산 규칙을 가르칠 때에도 그녀는 정보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기호를 부과하고" 명령을 내리고 지시한다. 선생의 명령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에 외부적인 것도 아니고 부가되는 것도 아니다. 명령은 일차적 의미 작용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보의 귀결도 아니다.
요컨대 언어는 곧 명령어(mot d'ordre, order-word)이다. 이처럼 언어를 명령어로 정의할 때 우리는 그것을 명령문(명령법)과 혼돈하기 쉽다. 보통 명령문은 서술문, 의문문, 가정법 등과 나란히 놓이는 언어 구사의 한 양태라고 이해된다. "가서 공부 해!" 같은 식의 문장이 곧 명령을 나타내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면 언어는 곧 명령문인 것이 아니라 명령문은 단지 언어의 한 양태일 뿐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명령문만이 명령과 지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가 일차적으로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어를 명령어로 정의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명령어라고 정의되는 언어는 "간접 화법(discours indirect)"이다. 앞서 말한 서술문, 의문문, 가정법, 명령문 등은 직접 화법의 분류 양태이다. 반면 이런 모든 양태들이 명령어인 언어를 표현하는 간접 화법이라고 한다면 사태는 자못 달라진다. 아주 단순한 문장 몇 개만 놓고서 살펴보자(우리는 이런 단순한 예가 아주 일상적이며 우리 언어 생활의 근간이 되고 있음을 안다).
예1. 밖에 비가 온다. (서술문)
예2. 만유인력의 법칙이 뭐지? (의문문)
예3. 만약 이 일에 실패한다면... (가정법)
이와 같은 예에서 우리는 주어와 서술어, 그리고 각각의 문법적 요소들을 분해하고 종합해서 그 말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 말은 정확히 '상황과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각각 그 상황을 고려하면서 예들을 이해해 보자(물론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우선 예1의 상황.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방에 앉아 있다가 밖에 비 듣는 소리가 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건넨 말이다. 이 때 며느리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마도 며느리는 밖으로 후다닥 뛰어 나가서 널어놓은 빨래를 걷을 것이다. "밖에 비가 온다"는 말은 단순히 밖에 비가 온다는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빨래를 널어놓았으니 빨래를 걷어야 한다는 명령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밖에 비가 온다'는 의미만을 지닌 직접 화법이 아니라 '빨래를 걷어라'라는 명령을 내포하고 있는 간접 화법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예2의 상황은. 단적으로 말해 시험지에 씌어 있는 문제이다. 학생은 이 질문 앞에서 답해야 한다. 모든 의문문은 답변을 요구하기는 한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이, 모든 의문문이 답변을 요구한다고 해서 꼭 답변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변을 강제하는가? 이와 일련의 문제들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학생은 시험에 떨어질 것이고 그 이후의 나날은 꽤나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배경이 전제된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은 시험장을 박차고 나올 수도 있고 아예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음을 물은 사람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뭔지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만 한정되지 않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명령을 내포하고 있는 간접 화법.
예3은 암흑가 보스가 똘마니에게 말을 하는 상황이다. 상상 가능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 말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이 일에 실패하면 네 목숨은 없는 거야,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성공해야만 해!'라는 강한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 역시 간접 화법이다.
앞서 든 세 가지 예가 그다지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는 점은 우리의 언어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각자 "널 사랑해"라는 말을 돌이켜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말이 정보 전달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요('그래, 나는 널 정말 사랑하는 거야') 상대방에 대한 약속이며('나는 앞으로도 널 사랑할 거야') 나아가 상대방에 대한 명령이기도 하다('그러니 너도 날 사랑해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해'). 우리는 누구나 언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한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이런 측면, 다시 말해 언어와 행위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암시적 전제" 혹은 "비담론적 전제"라고 부른다. 언어의 이런 측면들을 발전시킨 것이 오스틴(J. L. Austin)과 설(J. Searle), 뒤크로(O. Ducrot) 등에 의해 개진된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 또는 화행론(話行論)이다. 이런 접근은 다음의 세 가지 귀결을 가져온다.
1) 그것은 언어를 코드(=약호 체계)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코드란 설명을 가능케 해주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발화를 정보의 소통으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명령하기, 질문하기, 약속하기, 주장하기는 지시, 의문, 서약, 단언을 알려주는 일이 아니라 내재적이고 필연적으로 암시적인 이 구체적인 행위들을 수행하는 일이다. 2) 그것은 의미론, 통사론, 나아가 음운론마저도 화용론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언어 과학 영역으로 규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화용론은 "쓰레기장"이길 멈췄으며 화용론적 결정은 '언어의 외부로 다시 떨어지느냐' 아니면 '그것을 통사론화하고 의미론화하는 명시적 조건에 대답하느냐' 하는 양자 택일이길 멈췄다. 그와는 달리 화용론은 모든 다른 차원의 전제가 되었고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 3) 그것은 랑그-파롤의 구분을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제 파롤(=발화)은 원초적인 의미 작용의 외적 개별적 단순 사용이나 미리 존재하는 통사법의 다양한 적용에 의해 정의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랑그(=언어)의 의미와 통사법은 그것이 전제하는 파롤(=발화)의 행위와 무관하게 정의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귀결은 앞서 언급했던 언어학의 몇 가지 기본 전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이 점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나아가 이런 이해는 언어가 권력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십분 드러낸다. 왜냐하면 언어는 앞서 언급했듯이 결코 상황을 떠나서는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라고 얘기하기에 이른다. 누구든 "저 놈을 감옥에 처넣어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짜로 수행되는 것은 권력이 함께 있을 때뿐이다. 상황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권력 관계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표 행위의 배치물"이라고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어에 대한 얘기를 하는 글의 제목을 다시 보자.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1923년 11월 20일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던가? 독일에서 화폐 개혁이 있었다. 기존에 통용됐던 화폐인 라이히스마르크는 더 이상 돈이 아니라고 선포되었고 이제부터는 렌텐마르크가 돈이라고 선포되었다. 라이히스마르크로 가치가 매겨졌던 모든 동산, 부동산은 이제 더 이상 가치가 없으며 렌텐마르크로 다시 가치가 매겨져야 한다. 이 엄청난 사건! 이 선포가 갖는 힘, 이 선포가 실제로 작동될 수 있게 되었던 권력, 이것이 상황이고 맥락이며 "언표 행위의 배치물"인 것이다. 언어는 그러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언어는 명령어이고 화용론이며 상황이나 권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발견이야말로 20세기 언어학에서의 새로운 통찰이며 새로운 언어학을 위한 도약판이다. 소쉬르와 촘스키가 놓치고 있는 부분도 이것이고, 그들의 발견이 한낱 공허한 사념으로 그칠 수도 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의 언어학 이론 자체가 하나의 주요한 권력 행사가 될 수 있는 지점도 이 부분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언어학계에서 꽤나 큰 권력을 행사해오기도 했던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디지털 언어 역시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다룰 필요가 있지만 이 문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더 자세하게 고찰하는 편이 낫겠다. 어쨌건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 연구에 있어 새로운 발판, 적어도 철학적인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우리에게는 그 발판을 딛고 힘차게 도약하는 일이 남게 되었다. 이 일 역시도 못지 않게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동국대 교지 <동국> 42호(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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