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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G. Deleuze, 1925-1995)/들뢰즈

들뢰즈의 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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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성

 

 

내재성의 개념에는 들뢰즈의 미소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쟁하던 모든 철학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철학에 쏟아 부었던 한평생의 수고에 던지는 회심의 미소이다. 내재성은 들뢰즈의 사유가 도달한 최후의 높이, 긍지의 높이를 표시한다. 우리는 적어도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2장(「내재성의 평면」)에 펼쳐진 눈부신 문장을 읽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내재성은 물론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찍부터 들뢰즈 철학을 상징하는 어떤 구호나 문양 같은 구실을 해왔다. 어쩌면 고추장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은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손 등을 하나의 사발 속에 뒤섞기 위해 끌어들인 공통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비빔밥의 고추장에 해당하는 이 개념에 의존하여 들뢰즈는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에 맞서는 철학사의 전통을 일으켜 세우고 현대적 사유의 이미지를 주조하고자 했다.

 

이때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은 초월성의 이름 아래 집약된다. 니체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초월적 사유의 본성은 삶의 바깥에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세우는 데 있다. 문제는 이상적인 모델에 의거하여 삶의 세계를 분석, 해석, 평가하다 보면 삶의 세계를 단죄하거나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령 영화 속의 주인공을 기준으로 자신의 연인을 자꾸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해보라.

 

남과 비교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격모독이기 쉽다. 마찬가지로 초월성의 철학은 생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던가? 유한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체적 삶의 세계, 우연으로 가득한 이 생(生)을 긍정하는 철학은 불가능한가? 생에 맞서 있는 낯설고 외재적인 기준이 아니라 생에 고유한 기준으로 생을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내재적 사유는 왜 초월적 사유보다 우월한가? 어떻게 더 엄밀하고 심오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들뢰즈의 철학을 끌고 가는 일관된 물음이다. 이런 물음 속에서 내재성은 생에 대한 긍정과 같고, 초월성은 생에 대한 부정과 같다. 들뢰즈의 초기 철학(초월론적 경험론)에서 초월적 사유는 재현적 사유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차이(즉자적 차이)나 구별을 개념적 동일성이나 유비적 추론 등을 통해 환원적으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말한다. 재현주의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은 즉자적 차이(강도적 차이)를 삶의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서 옹호한다.

 

이런 의미의 내재성이 문제일 때 들뢰즈 철학의 주요 고비는 플라톤주의 전통의 형상-질료 모델이나 거기서 비롯된 거푸집 모델을 거부하면서 개체화를 설명하는 데 있다. 원형에 해당하는 어떤 초시간적인 형상(본질)이 개체화에 선재한다는 것, 개체화는 무형의 질료에 대하여 그 항구적인 형상이 거푸집 구실을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재현주의 전통의 오래된 믿음이다.

 

그러나 내재성의 사유에서 개체화를 주도하는 것은 질료에 외재적인 불변의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질료 자체에 내재하는 창조적 변이의 능력에 있다. 이는 이질적인 재료들이 상호 공속(共續/共束)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형상을 조형하는 능력과 같다. 이때 공속성consistance은 어떤 주름운동 속에 함께 엮이고 함께 지속한다는 것se tenir ensemble을, 함께 지속하면서 어떤 잉여를 낳는 가변적 회로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개의 고원』(1980)에서 내재성은 질료의 이런 자기 조형화 역량에 해당하는 공속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특히 11장 참조).

 

생에 대한 긍정이자 차이에 대한 옹호가 내재성 개념의 배후인 한에서 들뢰즈를 인도하는 궁극의 안내자는 니체이다. 특히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내재성의 사유가 도달해야할 최고의 정점을 표시한다. 그러나『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내재성의 사유를 구현하는 최상의 사례는 스피노자로 바뀐다. 스피노자는 이제 내재성의 철학을 완성한 유일한 철학자, 따라서 “철학자들의 왕자”(p. 49) 혹은 “철학자들의 그리스도이며,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신비에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고 있는 어떤 사도들에 불과하다”(p. 59).

 

내재성 개념의 역사적 준거점이 니체에서 스피노자로 바뀐 것은 그 개념 자체의 함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달라졌다. 내재성은 이제 반-플라톤, 반-기독교의 전통을 회집하는 개념이나 개체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의 가능성 자체를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가령 철학은 어떤 조건에서 비로소 철학일 수 있는가? 철학이 철학일 수 있는 최소 요건, 철학과 비-철학을 가르는 최후 요인은 무엇인가? 철학이 종교나 예술 혹은 과학과 달라지는 분기점, 또는 철학이 시작되는 절대적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상대적 출발점이 아니라 절대적 출발점. 들뢰즈는 그것을 “설립instauration”의 계기로 간주한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인 동시에 〔내재성의〕 평면의 설립이다. 개념은 철학의 시작이지만, 평면은 철학의 설립이다. 〔……〕 철학의 절대적 토양, 대지, 또는 철학의 탈영토화, 철학의 정초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내재성의 평면이다. 철학은 그런 것들 위에서 자신의 개념을 창조 한다”(pp. 43~44). 내재성의 평면은 그 밖에 지평, 사막, 환경, 혹은 추상적 기계 등으로 불린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개념의 체계로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개념적 유희는 개념화하기 어려운 어떤 암묵적인 직관 속에서 비로소 지속적인 역동성과 방향을 얻는다. 해석학에서는 그런 직관을 선-이해라 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철학자는 평생 오로지 한 가지 직관에 대해 말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론이 존재에 대한 어떤 선-존재론적 이해 속에 펼쳐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혹자는 철학을 어떤 세계관의 표현으로 보지 않는가.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평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개념적 유희가 태어나고 진화해가기 위해 철학자가 먼저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어떤 선-개념적 직관의 세계에 해당한다.

 

이 직관적 이해의 세계는 “무제한의 단일한 전체, 총체성Un-Tout illimité, Omnitudo”을 이룬다. 이 열려있는 총체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한한 운동에 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왕복이다. 〔……〕 그것은 어떤 가역성réversibilité, 어떤 직접적이고 영속이며 순간적인 교환이다”(pp. 40~41). 그러나 무엇과 무엇 사이의 왕복과 교환인가? 그것은 “사유의 이미지”와 “존재의 질료”(p. 41) 사이의 가역적 운동, 어떤 주름을 만드는 이중화 운동이다.

 

이때 사유의 이미지란 사유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말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권리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가령 광기는 정당한 사유에 속하는가? 무엇이 참된 사유이고 의미 있는 사유는 어떤 위험이나 대가를 무릅써야 하는가? 철학적 사유는 이런 물음에 관련된 무의식적인 이해 위에 성립한다. 그 자체로는 개념적으로 사유될 수 없는 암묵적인 전제. 그런 전제는 사유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존재의 질료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개념적 유희는 사유에 대한 묵시적 가정 못지않게 자연 일반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선-이해 속에서 펼쳐진다.

 

들뢰즈의 내재성은 묵시적 직관의 상관 항이다. 아직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내용들이 회오리치는 세계. 그 세계는 개념적 유희와 더불어 시작되는 철학의 평면과 구별되어야 한다. “만일 철학이 개념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내재성의 평면은 전-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p. 43).

 

내재성의 평면은 전-개념적 이해의 세계인 한에서 전-철학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외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전-철학적”은 시간적으로 철학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슐라르가 가리키는 인식론적 장애는 개념적 사유와 더불어 비로소 성립하는 어떤 반-사유였다. 사유와 더불어 사유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바깥. 들뢰즈의 내재성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전제하되 철학의 바깥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같은 곳), 철학의 심층 속에 자리하는 외부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사유되어야만 하되 동시에 결코 사유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유 속의 비-사유라 할 수 있다. 〔……〕 그것은 사유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이지만 또한 절대적인 외부이기도 하다. 외적인 세계 전체보다 훨씬 먼 어떤 외부, 왜냐하면 내적인 세계 전체보다 훨씬 깊은 어떤 내부이기 때문이다”(p. 59). 우리는 이런 문장 속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식별할 수 있다. 가령 라캉은 의식에 대하여 무의식이, 또는 상징계에 대하여 실재가 내부적인 동시에 외부적임을 역설했다. 외심성 혹은 외밀성extimié이란 용어는 그런 위상학적 역설을 표현하는 신조어이다.

내면과 외면의 이분법적 대립을 깨뜨리는 이런 역설은 푸코와 데리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에서 근대적 코기토의 상관 항으로 등장하는 비사유l’impensé, 데리다의 해체론이 가리키는 바깥(형이상학적 울타리의 바깥)이나 해체 불가능자(대리적 보충, 흔적, 유령 등등) 등은 모두 외심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내재성의 특징을 꼽을 때 외밀성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가역성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은 두 얼굴을 지녔다. 사유와 자연, 퓌지스Physis와 누스Noûs가 그것이다”(p. 41). 내재성의 영역은 개념적 유희에 지속적으로 영감을 제공하는 두 가지 직관, 사유와 존재에 대한 암묵적 직관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하지만 규정성을 결여한 그 두 직관은 정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무한한 가역운동 속에 빨려 들어간다. 가역성 혹은 왕복운동. 정신과 자연에 대한 직관은 끝없이 서로 촉발, 중첩, 확장하면서 점차 식별 불가능해지고 마침내 어떤 단일한 전체를 직조해간다. 사유와 존재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베틀 북”(p. 41). 그것이 내재성의 평면이다. “그 평면의 쉼 없는 왕래, 그 무한한 운동. 아마도 이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제스처일 것이다”(p. 59).

 

내재성이 평면이라 불리는 것은 사유가 그 위에서 “무한한 속도”로 “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p. 44). 이때 무한한 속도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영감, 통제 불가능한 가속적 리듬 등과 관련된 표현일 것이다. 반면 질주는 변신 혹은 타자-되기와 관련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것, 사유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로 되돌아와서 사유를 다시 유발하는 어떤 동물, 식물, 분자, 입자 등이 되지 않는다면 사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같은 곳). 내재성의 평면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때로 어떤 광기와 착란을, 때로 어떤 비명과 도착을 통과한다는 것과 같다.

 

내재성이 현기증을 일으키는 어떤 무한한 가역운동의 세계라면, 그 운동의 무한성은 카오스에서 온다. 철학이 진정한 의미의 창조, 개념의 창조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개념이 무화되는 어떤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점의 한없는 폭력, 무의미의 회오리를 살아낼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어떤 최초의 구도와 방향을 어림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토대가 처음 설립되는 장소는 그런 원점에 해당하는 카오스이다. 거기서 그려지는 내재성의 평면은 “카오스의 절단면,” 카오스를 가르는 “어떤 체”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체와 같아서 카오스에서 무한한 운동을 선별하되 거기에 공속성consistance을 부여한다. “철학의 문제는 사유가 침잠해 있는 무한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어떤 공속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p. 45).

 

공속성은 이미 『천 개의 고원』(1980)에서 내재성의 다른 말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영토적 배치나 기계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질료들이 상호 중첩, 촉발하면서 어떤 가변적 회로(식별 불가능한 지대, 근방들)를 구성하는 자기 조형화 능력이 공속성의 초보적 의미이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유와 존재 사이의 공속성이다. 여기서 내재성 혹은 공속성의 새로운 개념화를 향도하는 거울은 사유의 속성과 연장의 속성을 동일한 외연 속에 겹쳐놓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을 완성했다. 철학이 상정하는 전-철학적인 바탕을 메웠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서 내재성은 실체나 양태로 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실체와 양태의 개념이 자신들의 전제인 내재성의 평면으로 귀속된다. 그 평면은 연장과 사유라는 두 얼굴을 우리에게 내민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존재의 역량과 사유의 역량이라는 두 역량이다. 스피노자, 그것은 내재성의 현기증이다”(p. 50).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성을 실체나 양태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둔다는 데 있다. 즉 스피노자의 속성은 개념 이전의 차원, 카오스에 최초의 원근을 개방하는 차원에 해당한다. 상호 평행-공속하는 사유의 속성과 연장의 속성. 그것은 단일한 내재성의 경제를 구성하는 두 반쪽이다. 이 두 반쪽이 하나의 동일한 외연 속에 겹쳐지기 위해서는 카오스의 운동을 따라잡는 무한한 속도의 사유가 실행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을 그런 무한한 속도의 사유가 실행되는 절차로 간주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초월성과 타협하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로 간주한다. 이때 초월성은 내재성을 어떤 기체나 실체 혹은 어떤 주체나 대상에 귀속시킬 때 성립한다. “내재성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재하고 〔……〕 자신이 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속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어쨌든 내재성이 어떤 존재자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될 때마다 언제나 이 존재자는 틀림없이 초월자를 다시 끌어들이게 된다”(p. 47).

 

초월적 사유는 내재성을 어떤 것=X에 부여하는 여격(與格)의 사유와 같다. 여격의 사유에 힘입어 내재성을 참칭하게 된 존재자=X는 어떤 초월자로 둔갑한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신, 실체, 정신, 물질, 자연, 주체, 리(理), 기(氣) 등등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 다시 말해서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착각해온 역사로 바라본다. 들뢰즈에게 철학사는 내재성 망각의 역사, 다시 말해서 내재성의 자기내재성을 잊고 특정한 존재자에 내재성을 부여해온 역사이다. 가령 유물론은 물질에, 유심론은 정신에, 코기토 철학은 주체나 의식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내재성의 개념에 들뢰즈 최후의 미소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들뢰즈는 이 개념에 힘입어 마침내 서양 철학사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에 올라섰다. 서양 철학사의 유래와 종말, 수많은 방황의 고비들, 근본적인 가상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통쾌한 논리를 얻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들뢰즈가 남긴 마지막 글이 「내재성: 어떤 생명」(1995)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짧은 논문에서 죽음을 앞둔 철학자는 자신이 개체화의 바탕이라 부르던 선험적 초월성의 장(초월론적 장champ transcendental)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내재성의 평면을 다시 어떤 무-규정의 생명(정관사의 생명 la vie와 구별되는 부정관사의 생명 une vie)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들뢰즈가 내재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초기 철학과 후기 철학을 다시 통합하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내재성의 개념을 “모든 철학의 뜨거운 시금석”(앞의 책, p. 47)으로 삼고 있는 철학사 해석의 방법은 무엇보다 연속적인 변이의 과정을 보여주었던 들뢰즈 자신의 철학적 여정을 평가하는 데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http://webzine.moonji.com/?p=2301

 

현대프랑스철학의 개념들/김상환/웹진 문지/문학과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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