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서동욱
Ⅰ. 하나의 개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에 진입하는가?
하나의 낱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의 필연적인 주춧돌, 필연적인 개념으로 채용되는가? 어떤 개념이 도무지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 그리하여 글읽기의 진행을 사사건건 방해할 때 우리는 그 개념이 어떻게 텍스트의 중심에 뛰어들어 그런 불유쾌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 묻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이 바로 그렇다. 인문·사회과학의 텍스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낱말은 어쩌자고 그들의 글 한복판에 진입했는가? 들뢰즈도, 도무지 분명한 글을 써내지 못하는 일부 프랑스 철학의 풍토병-혹자는 이 전염병을 '문학적'이라며 찬양하지만-에 전염되어 자기 텍스트에 바로크적인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일까? 다시 말해 기계 개념은, 만일 오캄이 글쓰기에도 면도날을 장치해놓았더라면 마땅히 그 목이 잘려나가야 할, 무의미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나 들뢰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기계는 은유로부터 독립해 있다"라고 강조하였다.1)
이 글의 목적은 제목 그대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함의를 밝혀보자는 데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이 낱말이 그들의 글에 도입되었는지 밝혀볼 실마리를 우리는 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적 문제들, 혹은 어느 단계 혹은 다른 전개 과정중 문제가 되는 어떤 공리들을 다루는 가운데 사람들이 도입하게 된 것들 같은 유의 글쓰기의 기술이 관건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 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기계이다."2) 즉 기계 개념은 어떤 특정한 문제를 취급하기 위해 도입된 '글쓰기의 기술' 같은 것이다. 어떤 사유에 필요한 표현을 찾아내는 일은 어느 학문에서든 필수불가결한 일인데, 왜냐하면 칸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사유자는 자기의 개념[생각]에 정확하게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여 당황하며, 또 그러한 말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조차 자기 생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3) 때문이다.
들뢰즈는, 새로운 문제와 사유를 떠내기 위한 일종의 '뜰채'로서 특정한 개념을 도입하는 글쓰기의 방식은 그 자신이 유별나게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자들에게서 빈번하게 발견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를 통해 밝히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주의는 하나의 체crible로서 취급된다. 그러나 이럴 때 여기선 하나의 새롭고도 놀라운 학문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철학과도 관련이 없고 또 데카르트주의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는 절대로 스피노자의 사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표현 기술' 같은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주의를 그가 필요로 하는 표현 기술로 사용한다."4)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과 더불어) 많은 개념들(실체·속성 등)을 그 정의에서부터 상당 부분 공유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그 자신의 독특한 사유를 써내기 위한 '작문법'으로서 데카르트주의의 개념들을 빌려온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은 선대의 업적을 뛰어넘는 많은 창조적인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우리는 칸트에게서도 비슷한 개념의 사용법을 발견한다. 칸트는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성에 뿌리를 둔 표상을 가리키기 위해, 플라톤으로부터 '이념'이라는 용어를 빌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칸트는 플라톤의 계승자가 아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의 차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큰 심연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있다. 그러면 어떻게 칸트는 플라톤의 사상엔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의 개념은 가져왔는가? 칸트는 이렇게 항변한다: "일상의 담화나 저술에서 한 저자가 자기의 주제와 관련해 표현한 생각들을 비교해봄으로써, '그 저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저자를 이해하게 되는 일'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5)[강조: 인용자]. 즉 이념이라는 말의 저자는 플라톤이지만, 이 말이 뜻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한 사람은 칸트 자신이고,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플라톤의 표현법을 사용해 자신이 이해한 바를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요컨대, 칸트와 스피노자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개념들을 그 원저자들보다 '더 잘' 이해함으로써, 그 개념들의 속을 채우고 있던 본 주인의 생각을 낙태시켜버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배태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면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그들 자신의 필기구·작문법·표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말이다.
이렇듯 스피노자와 칸트는 새로운 사유를 담아내기 위해 타인이 쓰던 개념을 빌려 쓴다. 왜 새로운 사유에 적합한 개념을 창안하지 않고, 마치 불구자가 타인의 어깨에 기대듯, 이미 있어온 개념에 의지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칸트에게서 들을 수 있다. "새 말을 주조하는 일은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는, 언어에서의 입법에 대한 월권(越權)이다. 이런 가망 없는 수단에 의지하기 전에, 지금은 죽은 고전어 중에서 자기의 개념과 이 개념에 적합한 표현이 있지 않은가 찾아보는 일이 현명하다. 어떤 개념의 옛적 사용이 그 개념의 창조자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어느 정도 불분명했을지라도, 그 개념에 특징적으로 귀속하는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그 개념이 당시나 지금이나 엄밀히 동일한 의미로 쓰였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스스로 우리의 생각을 이해 불능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의 목적을 망쳐버리는 것보다 낫다."6) 언어의 탄생과 소멸이 한 개인에 달린 것이 아니고, 특정 학문의 용어도 많은 경우 그 분야에 종사하는 자들이 고안한 인공의 부호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할 때-예컨대 플라톤은 당대의 종교 용어를, 칸트는 그 시대의 법률 용어와 생물학 용어를 자기 철학에 도입했다-독단적인 새 말의 주조를 일종의 월권이자, 표현코자 하는 사유를 이해 불능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고 본 칸트의 견해는 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차라리 의미가 동요하고 있는 기존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그 개념의 본 주인의 모순된 쓰임을 밝혀내고 그 개념의 의미를 새로이 확정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좋은 예로,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ce qui peut exister par soi'이라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으로부터는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다수의 실체가 도출될 수 없으며, 오직 유일 실체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스피노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 안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사유를 부어넣는다7)).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그들만의 특정한 문제를 작문하기 위한 표현 기술로서 '기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개념은 임의적으로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사용되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인가? 다시 말해, 이 개념은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이 개념의 주목할 만한 사용은 이미 라캉에게서 나타나며 라캉의 용법은 직접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말하자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개념을, 칸트가 플라톤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라캉의 개념을 라캉보다 더 잘 이해해보고자 시도한다. 다른 한편, 이 개념의 또 하나의 원천은 칸트의 기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원천(칸트, 라캉)과 더불어 '사용' '절단(혹은 재단)'이라는 기계 개념의 두 가지 주요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시켜야 할 것 같다. 기계 개념의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발생적 관점)? 그 개념의 용법들은 어떤 것인가(체계적 관점)?
Ⅱ.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
비교적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는 후자 쪽, 즉 기계 개념의 칸트적 전통부터 살펴보자. 이 역사적 원천에 대응하는 기계 개념의 함의는 '사용'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그 용법을 묻는 것, 즉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어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요약하는 테제이다. 동일한 어조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무의식은 의미에 관해선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용에 관한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욕망의 문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떻게 동작하는가?"9) 어떤 것(이를테면, 욕망)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즉 기계의 기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용법이다. 예컨대, 기계로서의 자동차는 의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는 데 사용됨'이라는 그것의 용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의미가 아닌 사용'의 측면에서 무엇을 규정하려 드는 이 기획을 비트겐슈타인보다도 직접적으로는 칸트에게서 빌려왔다. 왜냐하면 칸트의 비판 철학이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려는 기획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기계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용법을 묻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칸트적인 질문이 도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것이 기계의 올바른 사용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사용인가? 다시 말해, 칸트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 철학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성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들뢰즈도 칸트의 어조로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 기계는 작동한다. 이 점은 믿어도 좋다. 내가 그것을 시험해보았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기계 장치이다. 다만, 의미란 용법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결정적인 원리가 되는 것은, 합법적인 용법을 규정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을 우리가 마련했을 때만 그럴 수 있다. 합법적인 용법과 대립되는 비합법적 용법은…… 일종의 초월을 복원시킨다. 초월적 분석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내재적 기준에 대한 규정이다."10)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 전체가 욕망이란 기계의 합법적 사용을 규정하고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는 시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이란 바로 다름아닌 욕망의 외디푸스적 사용, 다시 말해 욕망의 투자investissement 양식을 아빠-엄마-유아라는 가족 제도의 삼각 구도 안에 가두어놓는 것을 말한다.11)
프로이트에 있어서 이 욕망의 투자는 하나의 회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욕망의 투자를 방향지어주는 그 회로가 바로 외디푸스이다. 그런데 외디푸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이성의 합법적 사용의 규준을 마련하고 그것의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고 했던 칸트의 기획을 모방하고 있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의식의 종합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구별하기 위해, 인식에 대해 내적인 기준을 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초월'(칸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기준들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보이던 그런 초재적 사용을 고발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자신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고, 외디푸스를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12) 칸트가 '변증론'을 통해 이성의 비합법적 사용의 귀결인,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불멸하는 영혼·세계·신을 비판했듯, 들뢰즈는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의 귀결인, '정신분석학적 실재'로서의 외디푸스를 비판하고자 한다. 결국 들뢰즈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내재적 규준을 마련코자 한 칸트의 기획을 정신분석학의 영역에도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외디푸스를 마치 형이상학에서의 가상Schein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서 비판한 후 "어떤 해석과도 독립된 욕망의 상태"13)(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디푸스적 해석에서 자유로운 욕망의 상태)를 그려보이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사용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욕망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예술에 관한 논의, 구체적으로 들뢰즈의 소설에 관한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 작품도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그 사용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현대의 예술 작품은 의미에 관한 문제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사용의 문제만을 제기한다."14) "현대의 예술 작품은 이것이 되었다가 저것이 되었다가 다시 저것이 되었다가, 여하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이 예술 작품의 특징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된다는 점,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스스로를 중층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예술 작품은 작동하니까. '현대의 예술 작품은 기계이며 그러므로 작동한다'"15)[강조: 인용자]. 구체적으로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예로 든다. 이 소설은 어디에 '사용'되는가?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자기의 작품을 읽지 말고 그 작품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을 읽어보라고 충고한다"(같은 곳). 프루스트 소설의 화자는 기계로서의 자기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은 돋보기 같은 일종의 확대경일 뿐이다. 내 책 덕분에 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었다."16) 이런 확대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설 기계를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예술은 생산하는 기계, 특히 효과들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프루스트는 이 점을 아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효과인데, 왜냐하면 독자나 관객들은 예술 작품이 생산해내는 효과들과 비슷한 효과들을 자기 내면이나 자기 외부에서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예전의 그들과는 다르다. 사실 이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여자들로서, 우리는 예전에는 이런 여자들을 볼 수가 없었다. 마차들 역시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마차이고, 물과 하늘도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자기가 쓴 책들을 안경 혹은 광학 기구라고 일컫는 것이다."17) 요컨대, 예술 작품은 우리가 우리 내면이나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데 사용하는 기계이다. 사용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우리는 뒤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절단'이라는 기계의 또 다른 함의와 관련하여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Ⅲ. 대상 a(objet petit a), 라캉의 기계 개념
가타리가 직접적으로 라캉의 '대상 a'를 매개로 자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는 만큼18) '절단'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또 다른 기계 개념의 함의를 이해하기에 앞서 라캉에 관한 논의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1964년 1월부터 행해진 세미나-이 강의는 『세미나 ?』라는 제목으로 1973년 출판된다19)-에서 라캉은 자신의 유명한 '대상 a'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대상 a로서 분석되는 것은,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대상인 '눈초리le regard'이다(라캉이 60년대 '눈초리'에 대한 분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퍽이나 의미심장한 일로서, '눈초리'는 60년대 현상학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20)). 라캉의 논의를 따라가기에 앞서, 우선 기본적으로 instinct(임시로 이 글에선 '욕구'로 옮기겠다)와 pulsion(이것은 프로이트의 용어인 Tribe의 역어로, '충동'이라 옮기겠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아두어야겠다. "충동과 욕구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21) 욕구의 목적은 '만족'인데 이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컨대, 식욕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욕구가 이러한 만족을 통해 해소되는 반면, 충동은 해소되지 않는 항상적인 힘이다22)(왜 그것이 만족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힘인가에 대해선 대상 a와 관련하여 이제 다루어질 것이다). 또한 욕구가 의식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힘이라면, 충동은 우리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힘이다.
라캉은 우리의 성적 충동pulsion이란 통일적인 하나를 이루지 않는 부분적인 여러 개의 충동들이라고 주장한다. "심리적 실재에 나타난 것으로서의 충동은 부분적 충동들이다"23)라고 그는 말한다. 각각의 부분적 충동은 그 각각에 고유한 대상들을 추구하는데, 부분적 충동에 대응하는 이 부분적 대상들을 일컬어 바로 대상 a라고 한다. 라캉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에겐 네 가지 부분적 충동이 있는데, 시각적 충동, 후각적 충동, 입의 충동, 그리고 청각적 충동이 그것이다. 눈초리·배설물·젖가슴·목소리는 이들 각각의 충동이 추구하는 대상 a이다.24) 그 일상어적인 명칭에서 보자면 이것들은 우리의 의식 세계 안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대상들 같지만 실제적인 함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욕구의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의식에 표상 되는 대상(즉 우리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예컨대, 식욕에 대응하는 대상인 '음식'이 그렇다), 이 대상 a는 결코 의식의 대상 혹은 표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욕구의 경우 의식에 표상 되는 외부적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지만, "어떠한 욕구의 대상도 충동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25) 충동은 그것이 추구하는 고유한 대상인 대상 a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시각적 충동은 대상 a로서의 '눈초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 충동은 결코 눈초리를 소유할 수 없고 따라서 만족을 얻을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인 타인의 눈[目]은 지각할 수 있는 반면, 대상 a인 눈초리를 시각적 충동은 결코 볼 수 없다.26) 즉 시각적 충동은 그것이 추구하는 바 대상 a(눈초리)를 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 체험한다("우리와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그 관계가 시각을 통해서 구성되는 한에서, 그리고 표상의 형태들을 통해 질서지어지는 한에서-미끄러져나가고 지나쳐지는 어떤 것이 있는데 [……] 이것이 눈초리이다"27)). 요컨대 의식의 차원에서 '시각적 욕구'는 눈을 볼 수 있는(표상할 수 있는) 반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시각적 충동'은 눈초리를 마치 '베일'이 쳐진 듯 볼 수 없는 것으로(즉, 표상할 수 없는 것으로) 체험한다.
라캉은 이 점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홀바인H. Holbein의 유명한 그림 「대사들Les Ambassadeurs」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 그림은 충실한 사실적 기법을 통해 그린 초상화이다. 그림 한쪽에는 당시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장 드 탄드바르가, 다른 한쪽에는 조르주 드 세르비가 서 있다. 그리고 이 두 인물 사이에는 시대상을 반영해주듯 지구의를 비롯한 많은 당대의 과학적 발명품들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마치 이 그림의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원근법을 비웃기나 하려는 듯이 그림 아래쪽 중앙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타원형의 물체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물체는 실은 그림 감상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해골이다. 그러나 홀바인은 이 해골을 원근법을 왜곡시켜 기형적인 대상으로 그려놓았다. 그런 까닭에 감상자는 도대체 그 괴상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원근법을 통해 그려진 기형적인 대상을 일컬어 왜상(歪像)anamorphose이라고 한다. "미술사에서 퍼스펙티브는 일반적으로 삼차원을 작도하는 사실주의의 요소로 여겨졌다."28) 왜상은 관점을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이 삼차원의 질서를 일그러뜨려 만든 환상apparition이다. "왜상이 이끈 결과, 요소들과 기능들은 결정된 (특정) 관점에서 다시 일어선다."29) 이를테면, 홀바인의 그림 속의 해골은 초상화 전체를 삼차원으로 구성하는 관점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그림을 옆에서 비스듬히 볼 때(즉 해골의 왜곡을 위해 설정된 관점을 따라서 볼 때) 비로소 해골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홀바인은 이 숨겨진 해골을 통해, 죽음이 늘 어디선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잘 차려입은 고귀한 인물들 틈에서, 과학적 발명품들 속에서, 그리고 예술을 상징하는 악기 속에서 죽음은 항상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우리는 결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죽음을 볼 수 없지만 말이다(그림에 이런 교훈적 내용을 삽입하는 것은 당시의 유행 가운데 하나였다30)). 홀바인은 우리는 결코 볼 수 없지만,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을 기분 나쁜 이 죽음의 성질을 표현하기 위해 해골을 원근법의 왜곡을 통해 일그러뜨려버린 것이다. 이제 그림 속의 해골은 우리를 볼 수 있어도 우리는 해골을 보지 못한다. 해골은 보이지 않는 대상, 도달할 수 없는 대상, 라캉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잃어버린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주목하는 것은 죽음의 허무함이라는 이 그림의 교훈적 테마가 아니다. 라캉은 이 초상화의 사실적인 삼차원적 질서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식 세계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본다. 초상화 속의 두 인물의 '눈'을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은 포착(표상)할 수 있다. 반면, 기형적인 대상인 해골은 우리의 시각적 충동이 결코 거머쥘 수 없는 대상 a로서의 '눈초리'를 나타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해골의 눈초리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고, 또 마치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는 베일처럼 여길 뿐이다. 그 이상한 베일 뒤에 무엇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베일이 가리고 있는 것은 바로 베일 그 자신일 뿐이다.' 우리의 시각적 충동은 이 베일 뒤에 무엇인가 볼 수 있는 대상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베일 자체가 대상일 뿐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듯 우리의 시각적 충동은 대상 a를 추구하면서도 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홀바인의 그림 앞에서 그 기형적인 대상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궁금하게 여기면서도 결국은 알아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각적 충동은 타자의 눈초리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 해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를 탄생시킨다. 요컨대 주체는 그 자신을 타자의 결핍 속에서 체험한다. 그러므로 라캉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는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동, 더 정확히는 좌절하도록 운명지어진 충동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경우 주체는 타자의 눈초리로 인한 수줍음을 통해 스스로를 체험하고, 레비나스의 경우 주체는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했듯,31) 라캉에 있어서 주체란 타자의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는 편의상 '타자의 결핍'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엄밀히 말해 타자의 결핍 혹은 타자의 눈초리의 결핍 등은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초리, 즉 대상 a를 추구하다 좌절하는 충동은 주객 관계를 전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주객 관계를 창출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기술하고자 하는 바는 주객이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어떻게 주객의 분열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주체가 탄생하는가 하는 것이지, 이미 전제된 주체와 타자, 혹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캉은 충동과 그것의 대상이 분화되기 이전의 유아기 상태를 가정한다. 이때 유아는, 입은 젖가슴과, 시각적 충동은 눈초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의 충동이 추구하는 타자의 눈초리, 젖가슴 등은, 오히려 자아의 신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충동의] 대상은 필수적으로 외래적인 어떤 것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주체의 신체의 부분과 같은 것일 것이다."32) 그런데 대상 a를 소유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충동을 통해, 나(주체)와 나에게 결여된 것(대상)의 관계, 즉 주객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즉 원래 주객의 구별이 없던 자아는 (대상과) 분열된 것, '나누어진 것'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a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누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이다(이 점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제 보겠지만, 가타리는 라캉의 대상 a의 이 나누는 기능 혹은 절단하는 기능으로부터 '절단'이라는 자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러한 늘 실패하는 충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어서,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눈초리, 청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목소리, 후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똥, 입의 충동이 추구하는 젖가슴-이 대상 a들은 결코 표상적인 차원에서 소유될 수 없는 것이며, 이 충동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의식의 차원, 표상적 차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보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듣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냄새 맡는 것은 진정 우리가 냄새 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욕구하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진 것'이며, 우리의 이면에는 결핍되어 있는 항상적인 에너지로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여기서 라캉의 기계 개념이 나온다. 그는 표층적인 욕구와 심층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조가 기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계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상징적 활동을 구체화한다"33)라고 라캉은 말한다. 라캉은 『세미나 Ⅱ』에서 자주 인간을 '인공 두뇌'에 비유하는데, 이는 인간 두뇌의 활동을 상징적으로 모사하는 이 기계의 표층적 면모와 실제로 이 기계의 작동을 지배하는 심층적인 면모의 이중성 때문이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두뇌를 꿈꾸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꿈이 현상적인 것이라면, 이를 가능케 하는 그 두뇌 기계의 내부는 신경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34) 인공 두뇌의 활동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의 기계적 원리에 지배받는 것처럼 의식적인 차원에서 자연적인 욕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도 그 이면에 충동에 의해 구조지어진 무의식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같은 맥락에서, 라캉이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잘 나타내준 그림으로 본 홀바인의 「대사들」도 기계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 대한 라캉의 논의에 많은 영향을 준 발트루사이티스35)는 두 개의 상이한 기하학을 하나의 화폭 속에 담은 이 그림을 "예술과 과학이 뒤섞인 하나의 복합적인 기계"36)라고 불렀다. 이 그림에서 예술이 삼차원의 사실적 초상화로 표현된 표층적인 의식을 가리킨다면, 과학은 왜곡된 기하학이 구성해낸 해골을 통해 표현된 무의식을 가리킬 터이다. 이 그림은 이런 이중성을 지닌 기계이다). 또한 라캉은 무의식 혹은 무의식을 형성하는 충동이 인간 정신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이 에너지를 발견한 프로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헤겔에 있어서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 프로이트에게서는 언급된다. 바로 에너지가 그것이다. 그것은 [……] 헤겔 시대의 의식과 프로이트 시대의 무의식에 관해 우리가 이야기했을 때 다루었던 것이다. [……]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엔 기계 시대의 도래가 있다. 에너지는 기계가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 프로이트적 생리학은 에너지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상징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 프로이트의 모든 논의는 에너지와 관련하여 무엇이 프시케, 즉 영혼인가라는 문제의 주위를 맴돈다. [……] 그의 모든 저작을 통해 프로이트는 에너지의 기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 만약 우리가 이 에너지의 신화의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안다면, 우리는 기계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메타포 속에 암시된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37) 요컨대, 무의식은 인간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라캉의 기계 개념의 두 가지 함의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의식적·표층적 욕구와 무의식적·심층적 충동의 이중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의 표층적 기능은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기계 내부의 장치들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다. 예컨대 시계의 표층적 기능은 시간을 측정하는 상징적 활동이지만, 그 시계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들의 구조는 표층적 기능과 전혀 부합하는 점이 없다(이 시계 메타포는 라캉이 데카르트로부터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의 말미에서 시계의 상징적 활동에 대해 좀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 라캉은 무의식이 의식 세계를 이끄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가 그 내부에 동력을 가지듯 인간도 동력을 가지는데,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Ⅳ.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
이제 다시 들뢰즈와 가타리로 돌아와보자.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38)라고 그들은 말한다. 절단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두번째 함의이다(첫번째 함의는 이 글의 2장에서 이미 살펴본 '사용'이었다). 그들은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라캉이 욕망의 근원, 꿈의 중심점으로 묘사한 대상 a 역시 폭탄machine infernale과 같은 방식으로 개인의 구조적 균형의 중심으로 돌연히 침입해 들어간다"39)라고 라캉의 대상 a에 대해 언급한다. 이미 보았듯 라캉에 있어서 대상 a는 (마치 주체 안에 내장된 폭탄40)처럼) 주체를 이중적인 것으로 절단해버린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절단하는 기계' 개념은 바로 대상 a의 이 쪼개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에 착안한 것이다. 구조를 전복시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대상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가타리는 라캉을 모방해 '대상-기계 a'라는 새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구조와 상반되는 것으로서 욕망의 대상인 "대상-기계 a의 현존은 구조적 준거점들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41)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절단하는 기계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들은, 어느 것이건 본질적으로 라캉과는 꽤 먼 거리를 두고 진행된다.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은 라캉의 대상 a로부터 '절단'이라는 함의만을 받아들여 자신들 고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도대체 무엇을 절단하기 위한 기계인가? "절단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차원에서 행해진다."42)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기계의 절단 양태들을 살펴볼 것이다. 기계가 절단하는[재단하는 copupere] 것은 1) 사회 구조와 2) 형이상학의 체계이다.43)
1) 구조와 기계: 가타리는 절단으로서의 기계를 '정태적 구조'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통시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의 본질이란 구조적으로 수립된 사물들의 질서에 대해 이질적인 절단"이다.44) 우리는 정태적 구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타리의 비판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절단이라는 우연한 발견물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어떤 구조적 공간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 '순수하고' '기초적인' 기표적 사슬, 즉 일종의 욕망의 잃어버린 낙원 혹은 '기계주의 이전의 좋은 시절'은 [……] 절대적 좌표계로 고려될 수 있다. 우리는 절단의 진리, 주체의 진리를 부당하게도 [……] 다른 모든 구조적 결정 양태의 층위에 위치시킬 것이다."45) 정태적 구조는 마치 임의적으로 부당하게 설정된 절대 좌표계 같다는 비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어떤 보편적인 문법을 확립하려는 구조주의적 시도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가타리는 동태적이며 혁명적인 기계와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구조는 인간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기계들의 체계에 대해 구조적 질서는 결코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며,"46)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다."47) 요컨대, 기계는 하나의 구조를 파괴하고(절단하고) 다른 구조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 이른바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타리가 첫번째로 드는 예는 산업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던 기계, 즉 공장에서 돌아가는 '진짜' 기계이다. "산업자본주의와 더불어 기계주의의 발작적인 진보는 수공업들의 현존하는 질서를 절단하고 또다시 절단한다."48) 즉 증기 기관이라는 기계는 기존의 수공업 구조를 무너뜨리고 산업자본주의라는 구조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단계에 있어서 테크놀러지의 역사는 주어진 기계의 현존하는 유형에 따라 구분된다."49)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절단하는 기계로서의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발자크와 말콤 로리Malcolm Lowry의 소설이다. 구체적으로 이 두 사람의 소설에서 "제도적 전복의 기계화로서의 혁명적 기획"50)을 발견한다. "말콤 로리는 멋지게도 자기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것[로리의 소설]을 일종의 교향곡이나 오페라, 아니면 심지어 웨스턴 오페라로 생각해도 된다. 그것은 재즈이고 시이고 노래이며, 비극, 희극, 익살극, 기타 등등이다. [……] 그것은 예언이고, 정치적 징조이고, 암호문이고, 미친 영화이고, '므네-므네-드겔-브라신'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기계' 장치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기계는 작동한다'"51)[강조: 인용자]. 이 인용에서 로리의 소설의 혁명 기계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 바로 '므네-므네-드겔-브라신'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은 바빌론의 벨사살 왕의 잔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성벽에 쓴 글인데, 예언자 다니엘은 이 말을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예고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보시고 마감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드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브라신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시아에게 갈라주신다'는 뜻입니다"52)라고 예언자는 왕 앞에서 암호의 뜻을 풀이한다. 벨사살 왕은 그날 밤으로 살해되고 메대 왕 다리우스가 나라를 차지한다. 현대의 바빌론 제국인 자본주의 세계의 예언자 로리는 다니엘처럼 그의 소설 기계를 통해 자기 시대의 제국의 종말을 예언한다. 그의 소설이 바로 예언이며 동시에 혁명 기계이다. 이 점은 기계로서의 로리의 소설은 "자본주의의 빗장을 파괴한다"53)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로리의 경우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들은 발자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엥겔스는 이미 발자크에 관하여 어떤 작가가 위대한 작가인지를 밝혔다. 위대한 작가는 자기의 작품의 정상적이며 독재적인 시니피앙을 무너뜨리고 [……] 혁명 기계를 키우는 흐름들을 묘사하여 이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사람들이다."54)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외디푸스는 욕망을 가족주의라는 제도적 질서 속에 가두어두는 기재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문학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문학을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그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소비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데서도 역시 외디푸스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55) 이러한 외디푸스화된 문학 작품과 상반되는 절단 기계로서의 문학 작품을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로리와 발자크라는 것이다.
구조와 대립된 것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가타리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아마도 현실적인 제도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재단하는 기계의 파괴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타리는 자주 '전쟁 기계machine de guerr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어떤 것이 구조적 평행성을 깨뜨릴 때 그러한 상황은 전쟁이 일으키는 효과를 방불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전쟁 기계라는 용어를 '국가 기구appareil d'Etat'라는 용어의 반대말로 사용한다.56) 가타리는 앙드레 말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19세기가 국제주의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국가들의 세기라고 말한다.57) 그런데 가타리가 '국가에 의한 지배'라고 말할 때 이는 정태적 구조를 통한 지배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상상적 덫, 함정-이는 오늘날 구조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분절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적 계획은 '국가의 정치 권력의 지배'를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가는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 도구의 토대와 동일하게 되었고, 생산 수단의 소유의 제도적 보장과도 동일한 것이 되었다. 혁명적 계획은 이런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이 계획은 그 자체, 사회적 의식에 배태된 이 목적이 더 이상 경제적·사회적 충동에 대응하지 않음에 따라 미끼로서 구조화되었다."58) 사회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혁명적 계획이란 한낱 국가 기구에 의한 지배라는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미끼,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사회주의가 이룩한 국가 기구란 계급 혁명의 동인인 경제적 충동과 대응하지 않는 엉뚱한 정태적 구조가 되었을 뿐이다. 이는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 자기 바깥에 어떤 잠재적인 분절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내부의 정태적 항으로 환원하는 구조적 질서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사회주의가 도달한 바는 그 형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국가 기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정태적인 구조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화염이 사라지면, 그저 새로운 관료주의의 화분이 남을 뿐이다."59)
요컨대, 사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본 절단하는 기계는 다름아닌 혁명의 원천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가 기구의 대립 개념이다. 국가 기구를 유기체에 비유할 수 있다면, 기계는 이 유기체의 해체자이다. 그러나 유기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우리는 들뢰즈의 고전 형이상학 비판에서 보다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2) 형이상학과 기계: 절단하는 기계는 전통 형이상학도 예외 없이 자신의 먹이로 삼는다. 들뢰즈는 유기체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계, 기계주의, '기계적machinique.' 이것은, 기계론적·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기계론은 의존적인 항들 사이의 점점 더 근접하는 연관의 체계이다. 반대로 기계는 비의존적인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이다."60)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두 가지다. 1) 기계와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유기체란 어떤 것인가? 2)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로서의 절단하는 기계란 무엇인가? 첫번 문제부터 살피자면, 들뢰즈는 이 유기체의 면모를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한다.
먼저 플라톤식의 변증법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해보자. 들뢰즈는 플라톤 변증법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각각의 사물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한다. 2) 그리고 나서 그 전체의 법칙을 통해 사물 각각을 전체의 부분으로서 사유한다. 3) 마지막으로 전체는 그 자신을 전체성의 이념을 통해 각각의 부분들(각각의 사물들) 속에 나타낸다."61) 여기서 각각의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형성하는 관절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들뢰즈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플라톤주의에서 보듯이 부분들은 하나의 거대한 동물을 형성하는 [……] 관절들(분절들 articulations)을 따라 구성된다"62)고 말함으로써, '유기적인 전체-개별자들'을 '거대 동물-관절들'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와 같은 하나의 유기적인 동물에 비견되는 전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결합의 방법과 분할의 방법이다. 결합은 흩어져 있는 것(종적 형상)들을 총괄하여 오직 하나의 유적 형상 아래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뒤 거기에 종차를 주어서 분할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유적 형상이란 곧 그 사물의 본질, 즉 에이도스(이데아)이며, 종차는 '현상 중의 어떤 대상으로 있는 바'이다. 반면 분할의 방법은 우선 '자연 상태의 분절대로 형상에 따라 나눈다'. 이 나누는 일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종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분할된 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종개념을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전체 아래,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 종속시킨다는 말은 결국 존재자들을 '유종(類種)의 체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위에서 소개한 '분할의 방법'을 통한, '전체성'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서의 존재자 파악이, 인간 심성의 능력과 관련하여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 심성의 능력들 가운데 하나인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플라톤의 상기론(想起論)을 살펴보자. 플라톤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감각 세계 안의 생성 변화하는 이런저런 분할된 개별자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기억은 감각 성질의 도움을 받아 고정된 본질인 이데아라는 종착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출발점[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도착점[이데아]을 미리 모방하는 능력일 때만 가치가 있으며, 그 결과 [플라톤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분할적 용법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동일한 로고스 속에서 결합시켜버리는 변증법의 '전주곡'일 뿐"63)이라는 점이다. 상기를 통해 정신은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되는 유로서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되고, 바로 그때에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제대로 역할을 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현상 중의 생성 변화하는 개별자들을 그 아래 포섭하는 '동일성의 형식'이며, 참된 인식이란 이런저런 개물(個物)들이 아니라 바로 이 동일한 대상 형식, 즉 동일자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미리 모방하지 않는 능력으로서의 '상기,' 존재자들의 차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기가 가능한가?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와 대립되는 이런 또 다른 상기를 재미있게도 프루스트에게서 찾는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도 '배운다는 것은 다시 기억해 는 것'이다.64) 프루스트의 상기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대상(예를 들면, 마들렌 과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도달점은 플라톤과 정반대로 통일성이 없는 분할된 부분들의 세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프루스트의 유명한 마들렌 체험, 즉 마들렌 과자로부터 비자발적으로 과거의 고향 마을 콩브레를 상기했을 때의 행복의 체험을 들뢰즈는 현재와 과거간의 공명(共鳴)의 효과라고 말한다. "기계는 공명들 혹은 공명의 효과들을 생산한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비자발적인 기억이 일으키는 효과들이다. 이 효과들이란 현재와 옛날 두 순간이 공명하게끔 만드는 효과들이다."65)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 프루스트적인 상기가 바로 공명을 일으키는 기계이다. 플라톤의 상기에서도 공명의 효과가 일어날까?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현상 중의 이런저런 대상들이 상기를 통해 인식하게 된 동일자, 즉 이데아에 종속될 뿐이기 때문이다. 공명은 두 개의 대상이 상위의 동일적인 대상으로 환원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플라톤이라면 프루스트와 같은 상황에서,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는 개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두 대상간의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공명을 어떻게 이루어내겠는가? 오로지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만 그 차이로 인해 공명의 효과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서로 다른 대상이어야만 한다. 즉 서로간에 차이를 지닌 전체화하지 않는(동일한 이데아에 종속되지 않는) 조각들이어야 한다. "공명이란 [플라톤의 상기와 달리] 다른 영역으로부터 올 조각들을 전체화하는 일이 아니다. 공명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조각들을 추출해내며 그 조각들이 가진 고유한 목적에 따라 조각들이 공명하게끔 하지만 그것들을 전체화하지는 않는다."66)
들뢰즈는 조이스에게서도 프루스트에서와 같은 '공명'을 찾아낸다. 그는, 조이스 소설의 경우 단어들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간의 유사성의 극대치까지 다가가면서 공명한다고 주장한다. 단어들이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하기 때문에 쌍방간에 가능한 공명을 가리켜 들뢰즈는 '현현'이라 일컫는다. "언제나, 서로 부조화하는 계열들(극단적인 경우엔 모든 계열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우주[작품]를 구성한다)의 극대치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이다. 불길한 언어적 전조(前兆)들을 가동시키면서 말이다. [……] 특히 이 언어적 전조들, 즉 말들은 원리상 동일화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그 말들의 체계 전체 속에서, 차이 자체의 차이화 과정의 귀결로서 유사성과 동일성의 극대를 이룩해낸다. 불길한 언어적 전조의 활동 아래서 서로 공명하는 계열들 사이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것을 가리켜 '현현'이라 부른다."67) 이러한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공명의 효과, 즉 전체화하지 않는 조각난 항(項)들의 차이의 효과를 들뢰즈는 당착어법(撞着語法)alliance de mots에 비교하기도 한다. 당착어법이란 서로 모순되는 단어들을 이웃시켜 새로운 의미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서로 차이나는 조각들간의 공명의 효과는 바로 이런 당착 어법의 효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공명의 효과는 하나의 전체로 맞추어지지 않는 조각들이 이웃해 있는 세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매개로 얻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 사의의 공명의 즐거움은 세계가 전체화하지 않는 부분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음에 대한 증언이다.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의 중요성이다. "프루스트의 독창성은 고전적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구분……을 추출해냈다는 점이다."68) 이는 곧 전통 형이상학의 구분법(예컨대, 유와 종의 체계)을 해체하고자 한 들뢰즈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의 철학적 기획이란 하나의 통일적인 세계의 분절들[관절들]이 실은 어떤 전체성의 이념(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 아래에서도 통일을 이루지 않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69)
요약해보자.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각각의 분절들이 하나의 거대 동물의 관절을 이루는 유기체를 지향한다. 이때 각각의 조각들로부터 출발해 이를 하나의 통일적인 이데아의 질서 속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하는 주체의 능력이 상기였다. 반면 프루스트의 상기는, 세계를 전체화하는 플라톤의 상기와 반대로, 세계를 '절단'하는 기계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체화할 수 없는 부분적인 조각들을 이웃시켜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내는 기계이다(앞서 소개한, '기계는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라는 들뢰즈의 정의를 상기할 것). 그리고 역으로, 우리가 상기를 통해 겪는 공명의 즐거움이란, 세계가 동일적인 것(이데아)의 질서 아래 전체화하지 않는 파편난 조각들로 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말하자면, 회상(回想)으로부터 오는 공명의 행복감은, 오로지 차이가 내재하는 세계가 줄 수 있는 선물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인 동물의 신체로 비유되는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기계의 절단 작업이다.70)
Ⅴ. 맺음말
이 글의 목적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 일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사상이 전개되는 다양한 장에서 기계라는 개념이 어떤 용법들로 쓰이는지 추적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장황하리만치 다양한 논의들이 기계 개념이라는 하나의 바늘에 꿰어 이 글 안으로 쏟아져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라캉, 가타리, 들뢰즈로 이어지는 기계 개념의 역사는 어떤 것이며, 구체적으로 그들 각자는 선배의 업적으로부터 무엇을 발전시키고자 했는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한 탐구의 장에서 기계 개념은 어떻게 쓰이는가?-발생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 이 두 가지 질문의 날실과 씨실이 짜내는 영역이 우리의 탐구 대상이었다.
기계 개념이, 역사도 정의(定義)도 없는 속 빈 장식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은유든 아니든 왜 서양인들은 무엇인가를 궁리하기 위해서 기계라는 말을 필요로 했을까? 라캉은 자기의 기계 개념의 철학사적 원천을 밝히면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메타포로서 기계에 관심을 가졌던 최초의 인물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구체적으로 데카르트가 관심을 두었던 기계는 시계이다("데카르트가 인간 속에서 찾고자 했던 기계는 시계이다"71)). 근대 과학과 함께 출현한 여러 기계들은 그 이전에 인간이 사용하던 도구들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계는 단순한 물품, 즉 의자·책상,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그저 조금 상징적인 물건들이 아니다. [……] 기계는 다른 어떤 것이다. 기계는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멀리 나간다.
[……] 기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징적 활동을 구체화한다."72) 우리 주위의 도구들은 대부분 인간 신체의 기능을 연장해주는 기능을 한다. 망치는 주먹을 연장해주며, 바퀴는 발을 연장해준다. 반면 시계라는 기계는 신비 중의 신비인 시간을 구체화하는 놀라운 일을 해낸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우리 몸의 기능의 연장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속한 실재적인 세계와 어떤 연관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혹은 허구적인 가상의 선(線)을 허공에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기계의 형이상학적 성격에서 수많은 상징 활동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도구가 인간 신체의 표현이라면 기계는 영혼의 표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73) 이것이 데카르트와 라캉의 경우였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히려 세계를 온통 새로 편성해버리는 증기 기관의 찢는 듯한 힘에, 햄을 써는 기계의 파괴력에 매료당한 자들이다. 마치 폭탄machine infernale처럼, 유기체적으로 질서지어진 세계를 조각내버리는 기계를 그들은 발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다시, 또 하나의 주제·의미가 아니라 사용을 묻는 현대 철학의 테마가 기계의 모습으로 둔갑한 채 두 사람의 철학에 스며든다.
각주)
1)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aris: Minuit, 1972, pp. 7, 43; 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aris: Minuit, p. 146을 참조할 것. 이 글 전체를 통해 이제 밝혀지게 되겠지만,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사유의 필연성에서 요구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임의적으로 채용된 수식어구가 아니고, 이런 의미에서 분명 수사적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의 '은유'는 아니다. 그러나 '사용'과 '절단'이라는 기계의 두 가지 내포를 통해 어떤 것이 파악될 때, 그것에 대해 기계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명식은 결국, 그 어떤 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문체적 기재로서의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라캉은 들뢰즈와 반대로 기계 개념을 '은유'로 본다. "기계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메타포 속에……"(J. Lacan, Le s minaire II, Paris: Seuil, 1978, p. 96).
2)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 Paris: Fran ois Maspero, 1972, p. 240.
3)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1956, A 312/B 368-9.
4) G. Deleuze, Spinoza-Philosophie pratique, Paris: Minuit, 1981, p. 16. 이 인용에서 la rh torique를 '표현 방식'이라고 번역한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한마디 해두어야겠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의 기계 개념이 단순한 수사적 장식품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스피노자의 글쓰기 방식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글을 한낱 글을 장식하는 기술, 즉 수사학la rh torique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 시대에 수사학이란 말은 건전치 못한 허풍과 같은 글쓰기란 뜻의 나쁜 의미를 가진다. "19세기의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수사학은 악평을 받기 시작했고 더 이상 다양한 교육 제도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수사학'이라는 단어는 멸시의 뜻을 담게 되었고, 공정치 못한 속임수·사기·책략의 사용을 암시하게 되었다. 혹은 겉치레뿐인 속 빈 단어들의 나열, 진부한 표현, 단순한 상투어 등을 의미했다. 수사학적으로 된다는 것은 허풍을 떤다는 뜻이었다"(S. Ijsseling, Rhetoric and Philosophy in Conflict,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6, p. 1). 그러나 이와 달리 고대 그리스 이래로 수사학은 본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수사학을 '잘,' 그리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글쓰는 '기술'ars bene dicendi and ars persuadendi"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는, 아름다움과 건전한 설명을 위한 규칙들과 조건들을 마련해주는 이론 과학과 마찬가지로, 수사학이 선으로 인도해주는 기술이며 설득력 있게 말하는 실천적 기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같은 곳). 즉 수사학은 무엇을 '잘'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문법, 표현 기술이었다. 위에서 스피노자가 자기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개념들을 수사학적 기재로서 빌려왔다고 말할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5) I. Kant, 위의 책, A 314/B 370.
6) 같은 책, A 312/B 369.
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스피노자의 실체, 속성, 양태」, 『철학논집』 제7집, 서강대 철학과, 1994를 참조할 것.
8) 이 후자 쪽 전통에 대해서는 칸트적 기획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칸트적인 기획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정신분석학 비판'이라는 프로그램에 그대로 응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9)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aris: Minuit, p. 129.
10) 같은 책, p. 130.
11)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투자' 개념에 대해 잠깐 설명해야겠다. 프로이트에게는 두 가지 표상 개념이 있다. 욕망이라는 힘이 의식 속에 자기를 새겨넣을 때, 이 활동을 가리켜 표상repr sentieren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을 가리켜 표상Vorstellung이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젯밤 꿈에 사람을 죽였는데, 아버지였어"라고 진술한다면, 여기서 표상된 것은 성적 욕망이다. 그리고 이 표상 활동의 결과로서 의식의 차원에 나타난 것이 바로 '포어슈텔룽'으로서의 이 진술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종종 'repr sentieren'의 동의어로 '투자'라는 말을 대신 쓴다. 즉 투자란 욕망이 의식 속에 스스로를 새겨넣는 '활동'이며, 욕망이 스스로를 투자해서 의식의 차원에서 얻은 '결과물'이 포어슈텔룽인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R. Bernet, "The unconscious between representation and drive: Freud, Husserl, and Schopenhauer," The Truthful and the Good, John J. Drummond & James G. Hart(eds.), The Hague: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6, pp. 81∼95).
12)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89.
13) G. Deleuze & F. Guattari, Kafka-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 15.
14) 질 들뢰즈, 서동욱 외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 p. 230.
15) 같은 책, pp. 226∼28.
16) M. Proust,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Paris: Gallimard, Tome 3, 1954, p. 1033.
17)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0. 작은따옴표 안은 M. Proust, 위의 책, Tome 2, p. 327.
18) 구체적으로 가타리는 「기계와 구조Machine et structure」(1969)라는 논문을 통해 라캉의 '대상 a'를 자기식으로 해석해 '대상-기계 a(objet-machine a)'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필자가 알기로 아마도 가타리의 이 글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모든 글을 통틀어 기계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첫번째 글일 것이다. 그런 만큼 가타리가 라캉의 대상 a를 왜곡시켜 기계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이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19) 『세미나 XI』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점은, 이 저작의 논의들은 많은 부분 프로이트의 "Triebe und Triebschicksale"에 대한 비판적 주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라캉은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많은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우리는 때에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 작품으로부터 유용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20)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21) J. Lacan, Le s minaire XI, Paris: Minuit, p. 49.
22) "충동은 [……] 어떤 항상적인 힘Konstante Kraft으로서 작용한다"(S. Freud, Gesammelte Werke X, 1946, Frankfurt: S. Fischer Verlag, p. 212).
23) J. Lacan, 위의 책, p. 160.
24) 같은 책, p. 219.
25) 같은 책, p. 153.
26) '눈초리'(대상 a)와 표상적 대상인 '눈'(대상)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이 둘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은 마스크의 경우를 예로 분명하게 설명된다. 마스크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을 뿐 눈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두 개의 구멍이 거기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마스크에 눈초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눈초리는 눈과 달리 결코 표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27) J. Lacan, 위의 책, p. 70.
28) J. Baltrusaitis, Anamorphoses ou Thaumaturgus opticus, Paris: Flammarion, 1996, p. 7.
29) 같은 곳.
30) 이에 대해선 P. 아리에스, 유선자 옮김, 『죽음 앞에 선 인간(下)』, 동문선, 1997, 5장 참조. 아리에스는 직접 홀바인의 이 그림을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그림은] 삶 속에 은폐된 죽음의 존재를 그려내고 있다"(같은 책, p. 387).
31)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에 있어서, 타자의 개입을 통한 주체의 발생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32) S. Freud, 위의 책, p. 215.
33) J. Lacan, Le s minaire II, p. 95.
34) 위의 책, p. 96.
35) 라캉과 발트루사이티스 사이의 상호 영향에 대해서는 J. Lacan, Le s minaire XI, pp. 80 이하, J. Baltrusaitis, 위의 책, pp. 299∼300 참조.
36) J. Baltrusaitis, 위의 책, p. 300.
37) J. Lacan, Le s minaire II, pp. 95∼96.
38) G. Deleuze & F. Guattari, L?nti-?ipe, p. 43.
39)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4. 『앙티 외디푸스』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 "대상 a는 폭탄, 즉 욕망하는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적 평형에 침입한다"(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99).
40) 폭탄machine infernale을 '지옥의 기계'라고 오역해보면, 주체를 절단하는 기계로서의 대상 a의 뜻이 더 분명해진다.
41)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4. '구조' 개념과 상반되는 개념으로서의 '기계'를 우리는 아래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42)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p. 43∼44.
43) 이 두 가지 외에도 주체, 소설의 화자, 소설의 부분들의 배치 문제와 관련된 절단하는 기계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자가 있다기보다는 기계가 있다. 또한 주인공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사용 혹은 어떤 생산을 위해서 어떤 구성 혹은 어떤 분절 방식을 따라 기계가 작동하게끔 해주는 기계의 배치agencements가 있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p. 276∼77).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소설에서 화자와 주인공은 소설의 부분들을 전체화하는 통일적인 원리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부분들을 연결시켜주는 화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화하지 않는 부분들의 배치라는 기계가 있을 뿐이다. 과거, 철학에서 주체는 이런저런 경험을 통일시켜주는 인식과 세계의 최종 지반이었다. 마찬가지로 전통 소설에서 화자나 주인공은 각각 언표 행위 nonciation와 언표 nonc 를 통일시켜 소설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자였다. 그러나 배치라는 기계를 통해, 이제 소설의 화자는 소설 각각의 부분들 안에 '칸막이로 격리된 듯' 조각나 있게 된다. 이제 전체화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로 통일될 수 없는 조각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문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때로 배치·탈영토성·탈주선을 동의어로 사용하는데(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 153),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어떻게 프루스트와 카프카가 소설의 전체화되지 않는 조각들의 배치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 질서로부터 탈주선을 이끌어내는가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물론 들뢰즈의 논의에는 한 가지 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소설에서 그가 '블록'이라고 부르는, 전체화되지 않는 부분의 실제 단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가가 구별해놓은 소설의 장[章]인지, 혹은 들뢰즈가 저 나름대로 단위 구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주체와 화자를 통일성이 없는 부분들로 절단하는 기계 혹은 배치하는 기계는 그 주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다른 자리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자리에선 생략하기로 한다(필자의 글, 「철학과 경쟁하는 소설: 들뢰즈, 칸트, 프루스트」, 『이다』 창간호, pp. 384∼87;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44)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3.
45) 같은 곳.
46) 같은 곳.
47) 같은 곳.
48) 같은 책, p. 242.
49) 같은 책, p. 241. 이런 절단하는 기계는 비단 경제 체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가타리는 다른 두 가지를 예로 드는데, 과학의 영역과 언어의 영역이다. "과학의 역사는, 과학의 각 분과에 있어서 각각의 과학 이론이, 구조가 아니라 기계로 파악될 수 있는 장소에서, 이데올로기의 질서로 환원되려는 것을 현재와 평행을 이루도록 만든다"(같은 곳). 요컨대 새롭게 출현한 과학 이론은 과학의 구조를 재단해 새로운 과학의 구조를 수립하는 기계이다. 이 점은 언어의 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소리는 파롤parole 기계로서, 랑그langue의 구조적 질서를 재단하고 수립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같은 책, p. 243).
50) 같은 책, p. 248.
51)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28.
52) 「다니엘」, 5장 25∼28절.
53)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158.
54) 같은 곳.
55) 같은 책, p. 159.
56) G. Deleuze, "Trois probl mes de groupe," in F. Guattari, 위의 책, p. vii.
57) 같은 책, p. 247.
58) 같은 책, pp. 247∼48.
59) 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p. 105∼06.
60) G. Deleuze & C. Parnet, Dialogues, Paris: Flammarion, 1996(증보판), p. 125.
61)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p. 155∼56.
62) 같은 책, p. 136.
63) 같은 책, p. 132.
64) 같은 책, p. 23.
65) 같은 책, p. 237.
66) 같은 책, p. 238.
67) G. Deleuze, Diff rence et r p tition, Paris: PUF, 1968, p. 159.
68)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1.
69) 부수적인 얘기지만, 우리는 들뢰즈와 동시대인인 푸코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기획도 결국은 이와 동일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푸코는 들뢰즈와 유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친숙해져 있는 구분들d coupages과 분류들groupements을 의심해보아야 한다"(M. Foucault, L'arch ologie du savoir, Paris: Gallimard, 1969, p. 32).
70)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이라는 이 기계가 일으키는 공명의 효과를 또 다른 측면에서 기술하기도 한다. "공명들의 생산을 보좌해주고 메워주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생산이"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9). 즉 공명 기계의 일은 다름아니라, 공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를 두 개의 상이한 부분적인 조각들로서 생산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를 전체화하지 않는 조각들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공명을 만들어내는 이 기계의 일은 바로 '생산'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용 및 절단 외에 생산이라는 기계 개념의 또 다른 함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생산 기계의 테마는 별도의 다른 지면을 요구할 만큼 장황하고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생산 기계에 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구조'도 일종의 기계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절단'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구조가 기계와 상반되는 개념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sens의 발생과 그 의미의 비물질적incorporel 본성을 규명하는 자리에서, 구조는 의미를 '생산'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진정 구조는 비물질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G.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Minuit, 1969, p. 88).
71) J. Lacan, Le s minaire II, p. 94.
72) 같은 책, pp. 94∼95.
73) 물론 그 반대의 시도도 있었다. 라캉,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은-그 또한 근세 과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기계 제작자였으니, 기상천외한 새로운 기계, 바로 계산기의 발명자다-매우 겸손하게도 기계가 인간의 '근본적인 상징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즉 파스칼은 이미 있어왔던 의자·책상 등의 도구와 근세에 새로 출현한 기계들을 본질적으로 구별짓고자 하지 않았다(같은 책, p.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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