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 Hegel(1770-1831)/헤겔

사회계약론 비판과 자유실현으로서 인륜적 국가

반응형

 

사회계약론 비판과 자유실현으로서 인륜적 국가

 

헤겔은 칸트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지만 자연의 계획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신론과 이성적 주체 사이에서 동요하지도 않으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한다. 사회와 역사의 모델을 신의 계획으로 설명하는데서 그친다면 여기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주체성이 사라지고 개인의 의지는 알 수 없는 낯선 외적 장치의 영향을 받게 된다. 칸트가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의 계획을 상정하고 이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충동과 투쟁을 부각시키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성적 주체성 그리고 도덕 및 선의 실현이 퇴색해버릴 여지가 있다. 그래서 헤겔은 종교적 차원을 견지하면서도 이것이 각 개인의 이성과 어떻게 조화롭게 통일될 수 있는지를 고심한다. 헤겔은 초기부터 기독교의 예수를 인격적 주체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이라고 보고, 이 개인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한다. 예수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면서도 공동체의 통일성과 필연성을 확립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헤겔은 개인과 사회 간에는 통일된 지평이 있으며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공동체적 존재로 태어난다고 본다

. 헤겔의 이런 차원을 드러내는 개념이 바로 인륜성이다.
 

헤겔은 인륜성을 분명하게 부각시키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칸트를 포함하여 자연법론자와 사회계약론자를 일관되게 비판한다. 그는 원자적 개인에 대해서도, 자연상태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회상태로의 발생론적 이행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으며, 이전 철학자들의 이론 안에는 사회계약을 통해 형성된 국가 자체가 임의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에 인륜성이 결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헤겔은 사회계약론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권리로 간주하는 자연권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권리의 의미와 가치까지도 논증해낸다. 헤겔은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다’와 같은 주장을 사회계약론자처럼 당연하게 전제하지 않는다. 헤겔에게 자유와 인격의 의미는 인륜적 공동체의 삶 속에서 법적ㆍ도덕적 장치가 형성되고 작동하는 가운데서 분명해지고, 외적 장치를 통해 실천적으로 드러날 때 자유와 인격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유권과 인격권도 확립된다. 그런 과정이 바로 사회계약론자에게서 당연하게 전제되는 권리인 자유와 인격 자체의 정당성이 증명되는 과정이다.

헤겔에 따르면 권리도 계약도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현된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의 총체적 지평으로서 공동체적 기반인 인륜성이다. 이때 인륜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륜성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이전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보여주는 헤겔의 독특한 지평이다. 헤겔은 <법철학 Grunt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1>에서 법(권리)의 이념을 다루면서 국가를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는데, 법의 이념은 자유이며 자유가 이성적으로 실현되는 국가는 인륜적 공동체이다. 인륜성은 국가의 주요지반이 되는 추상법과 도덕성의 통일이며, 법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헤겔은 추상법에서는 자연법론자와 사회계약론자를 포괄하는 법의 의미와 한계를 다루고, 도덕성에서는 칸트의 도덕과 한계를 다룬다. 그러므로 인륜성은 사회계약론의 법 내용을 견지하면서도 비판을 통해 고양된 법과, 칸트의 도덕을 견지하면서도 비판을 통해 고양된 도덕을 통일시켜서, 이성이 새롭게 인식한 선의 지평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특수의지와 공동체의 보편의지가 법과 선을 매개로 통일된다. 헤겔은 이런 의미의 인륜성을 가족ㆍ시민사회ㆍ국가의 논리적 전개를 통해 정립하고 궁극적으로 인륜성을 국가법과 제도에 담겨 있는 국가의 정신이라고 본다. 그래서 헤겔에게 훌륭한 개인, 훌륭한 시민은 ‘좋은 법률을 가진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때 법의 출발점은 각 개인의 자유롭고 특수한 의지이며 그 정점은 개인의 특수의지와 공동체의 보편의지가 통일된 지점이다. 법의 체계는 보편의지로 실현되는 자유이념에 대한 모든 규정들의 체계이다. 그래서 자유는 법의 실체와 규정이며, 국가는 자유가 실현된 왕국이다. 국가 안에서 자유의 전개와 실현을 통해 정립되는 자유이념의 진리가 인륜성이다.

법철학은 이러한 인륜성이 한 국가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논증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인륜성은 세계사의 전개를 통해 현실화되기 때문에, 인륜성의 실현은 법철학과 역사철학을 관통하는 철학의 목적이며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사적 정신으로 전개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참다운 제도와 헌법은 선험적 원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에 걸친 역사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ㆍ인격ㆍ권리ㆍ도덕은 공동체의 법률과 제도로 실현될 때 의미가 있으며, 법률과 제도를 가능케 하려면 일단 정치적인 것의 영역, 즉 국가가 있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자유로워지고 싶고 나의 권리를 실현하는 인격체로 인정받고 싶어도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는 정치적 국가와 법제도가 없다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헤겔은 <법철학>의 「인륜성」장에서 가족ㆍ시민사회ㆍ국가의 전개를 논하면서 국가의 법제도의 필연성을 정립한다. 사회계약론자가 최초의 인간이 가족을 형성하고 그리고 국가로 이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듯이, 헤겔도 ‘혼인에 의한 가족’을 최초의 단계로 규정하고 그러고 나서 가족의 확대와 해체를 통해 가족구성원이 시민사회의 시민으로, 시민이 다시 국가의 공민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발생론적 설명이 아니라 논리적 서술이다. 가족이 먼저 등장한다고 해도, 가족과 시민사회는 이미 국가 속에 있다. 가족과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권리 또한 국가에서만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물론 가족과 시민사회 없는 국가 또한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족과 시민사회는 국가의 본질적인 두 계기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논리적 서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가족과 시민사회가 이미 국가 속에 있지만 국가는 단순히 전제된 것이라기보다는 가족과 시민사회의 한계를 지양하면서 그 계기들의 논증을 통해서 도출되고 증명된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국가는 전제이면서 결과이므로, 국가와 국가체제를 임의적으로 만드는 사회계약론자와 달리, 헤겔의 국가는 전제와 증명을 통해서 필연성과 보편성이 정립된 이성적인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국가와 국가정체를 ‘신적인 것’ 내지 ‘항구적인 것’이라 일컫기도 한다.

국가의 법률 및 제도는 개인들의 특수의지를 지양하고 보편의지를 실현한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이기적이고 충동적인 특수의지를 지니는 개인이 도대체 어떻게 의지의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어떻게 개인들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헤겔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비근하게 개인의 보편적 행동양식으로 간주되는 관습의 인륜성에 대해 논한다. 개인의 삶의 지평이면서 보편적인 행동양식은 관습이다. 개인은 관습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관습과 보편성은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이미 개인에게 지시되고 알려져 있는 것이며 개인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인륜성이 개인에게 의무로만 간주된다면, 인륜성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지의 발현이기보다는 구속이나 억압으로 비칠 수 있고, 오히려 자유와 인격의 포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헤겔은 의무와 권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개인은 의무를 통해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충동과 자기중심적 이기성(利己性)으로부터 해방되며 자신의 권리를 실현한다.

권리와 의무가 분리되지 않는 헤겔의 국가도 사회계약론자처럼 삼권분립에 기초한다. 헤겔은 삼권을 입법권(헌법), 통치권(중간계층으로서 공직자), 군주권으로 분할하며, 군주권은 입헌군주제를 의미한다. 분명한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자신의 국가를 공화제나 민주제로 간주하지 않는다. 헤겔이 볼 때 국가를 민주제ㆍ귀족제ㆍ군주제로 구분하는 방식은 국가의 정신이 실체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 자체의 이성적 파악에 도달하지 못한 낡은 방식이다. 헤겔이 볼 때 국가는 세 가지 정체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군주권이 한 사람, 소수 또는 다수의 공민에 있느냐에 따른 양적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헤겔의 입헌군주제도 루쏘나 칸트가 공화국에 적용하는 요소, 즉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이다. 물론 헤겔의 입헌군주제는 마끼아벨리의 군주국과도, 루쏘가 공화국에 적용한 군주정과도, 군주제를 공화정의 최대치로 보는 칸트의 시민 사회적 정치체제와도 다르다. 국가가 삼권분립에 기초하면서도 권력분할의 여러 계기들의 개별적 통일을 이루려면 하나의 인격, 즉 단일하고 통일적인 인격의 성격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헤겔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군주가 필요하다고 보며, 군주를 최정점에 놓는다고 해도, 이것이 군주국으로의 후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군주는 이름만 군주이지 실제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최고정치가로서 일종의 대통령과 다르지 않다. 군주는 입법권이 확정한 헌법에 대해 단지 ‘나는 의지한다’ ‘나는 동의한다’라는 서명을 하는 자로 정상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이전 철학자와 비교할 때 용어상의 차이를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칸트는 시민사회를 공화국 또는 국가라고 하는 데 반해 헤겔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분한다. 헤겔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와 국가는 서로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도시국가를 시민사회(사회 전체)라 불렀으며 그 전통이 칸트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같은 급변을 통해서 시민의 권리요구가 생겨나고, 이른바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형성되자 헤겔은 국가로부터 시민사호를 , 시민사회로부터 국가를 분리하여 양자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고 그 성과를 <법철학>에서 보여준다.

시민사회는 헤겔에게는 국가가 아니지만, 칸트에게는 국가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로 확장되며 역사철학의 문맥에서 보면 개인과 세계사의 관계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위해서는 정치적 국가와 법제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 때 정치적인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이다. 국가 건설을 위한 사회계약을 주장할 때도, 정치와 역사에 헤겔적 이성을 개입시킬 때도 ‘만든다’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만든다’를 강조하면 국가의 임의성과 자의성이 부각될 수 있고, 국가와 역사를 절대적 필연성으로 전개하면서 그 속에서 신의 개입을 배제하고 섭리를 이성적으로 재구성하는 헤겔의 주장 또한 비판받게 된다. 이것은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이 헤겔의 국가관과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상대주의적 입장을 전개시키는 요인이 된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다면’ 그 결과물에 대한 합리적 파악도 가능하며, 그것을 다시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이론을 비판하는 맑스의 견해도, 헤겔의 국가공동체의 필연성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적 국가관고 역사관도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 / 개인과 사회 / 김성호ㆍ이정은 / 창비 / 200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