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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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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기원이란 문제를 우리는 미로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예술원리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전승되어 온 고대의 단편적인 문헌들이 이미 자주 서로 조합되거나 다시금 분해된 적이 많았음에도 그리스 비극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제기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불합리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전승은 극히 단호하게 비극은 합창단으로부터 발생했으며,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이고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비극 합창단은 이상적 관객이라든가 혹은 무대장면이라는 왕족의 영역에 대해서 민중을 대표한다든가 하는 예술상의 상투적인 문구들에 만족하지 않고 본래의 원시 연극으로서의 비극 합창단의 핵심을 통찰해야 하는 의무는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비극 합창단이 민중을 대표한다는 위의 두 번째 해석은 마치 민중의 합창단 속에 민주주의적 아테네 시민들의 불변적인 도덕법칙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 민중의 합창단이 왕족의 격정적인 탈선과 방종을 넘어서 항상 정당성을 갖는 것처럼, 많은 정치가들에게는 숭고하게 들리는 견해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마디에 의해 아무리 강력하게 시사된 해석일지라도 비극이 나타나게 된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민중과 왕족의 대립이라든가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사회적 영역은 저 순수하게 종교적인 기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에서 보는 바와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극 합창단의 고적적 형태와 관련해서 그것에서 '입헌적 민주대표제도'가 예상된다고 말하는 것도 우리는 역시 모독행위라고 보고싶다. 그러한 모독을 거리낌 없이 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고대의 국가제도가 입헌적 민주 대표제도라는 것을 실제로 알지 못했으며, 내가 바라는 일이지만 그것을 비극 속에서 절대로 '감지'도 못했을 것이다. 

 

합창단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설명보다도 훨씬 유명한 것은 A.W. 슐레겔의 사상이다. 그는 우리에게 합창단을, 말하자면 관중들의 정화이며 진수, 즉 '이상적 관객'으로 볼 것을 권한다. 비극은 근원적으로는 단지 합창단이었을 뿐이라는  고대의 역사적 전승 속에 나타나는 견해와 비교해 보면 슐레겔의 견해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슐레겔의 견해는 조야하고 비학문적이지만 상당히 인기 있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기는 그 표현의 압축적 형식에 의해서 ,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한 저 진정으로 게르만적인 선입견과 우리들의 순간적인 경이에 의해서 얻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에게 친숙한 연극 관객과 저 합창단을 비교하여 이 관객으로부터 비극합창단과 유사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어 이상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를 자문한다면 우리는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조용히 부정하게 되고, 이제 슐레겔의 주장이 갖는 대담성과 그리스 관객의 전적으로 상이한 성격에 대해서 놀라게 된다. 즉 우리는 항상 진정한 관객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자신 앞에 높은 것이 경험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임을 늘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반면에 그리스인의 비극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들을 살아 있는 실제 인물로 생각해야만 했다. 오케아노스 딸들의 합창단은 거인 프로메테우스를 눈앞에 실제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자기 자신을 무대 위의 신과 마찬가지로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최고의 가장 순수한 부류의 관객은 오케아노스의 딸들처럼 프로메테우스를 육체를 지니고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무대 위로 뛰어올라 신을 그의 고난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이상적 관객의 특징인가? 우리는 이상적인 관객을 미학적 관객으로 생각해 왔으며 관객 각자가 예술작품을 예술로서, 즉 미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이 클수록 그를 그만큼 유능한 관객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제 슐레겔의 발언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관객이란 무대 위의 세계로부터 미적으로가 아니라 육체적, 경험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시사하고 있다. 오, 이 그리스인들이란!하면서 우리는 탄식한다. 그들은 우리의 미학을 전복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것에 익숙해져서, 합창단이 화제가 될 때마다 우리는 슐레겔의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고대의 저 실로 명확한 전승이 여기서 슐레겔을 반박하고 있다. 비극의 원시적 형태인 무대 없는 합창단과 이상적 관객으로서의 합창단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관객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끌어져 나오는 예술 장르, 즉 '관객 자체'를 자신의 본래적인 형태로 간주해야만 하는 예술 장르는 어떤 것일까? 무대상연 없는 관객이란 모순된 개념이다. 우리는 비극의 탄생은 합창단에 나타나 있는 민중의 도덕적 지성에 대한 존중으로부터도, 무대상연 없는 관객이라는 개념으로부터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너무나 심오해서 그러한 피상적인 고찰방법은 수박 겉핥기식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실러는 합창단의 의미에 대한 훨씬 더 가치 있는 통찰을 『메시나의 신부』의 유명한 서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합창단을 비극이 자신을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하고 자신의 이상적 지반과 자신의 시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자기 주변에 쳐놓은 살아 있는 성벽으로 간주했다. 실러는 이러한 통찰을 무기로하여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저속한 개념에 대항하여, 즉 극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착각에 대해서 투쟁했다. 실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무대 위에서는 대낮 자체라 하더라도 인공적인 대낮일 뿐이며, 건축물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다. 운율적 언어도 현실 언어를 이상화시킨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착각(슐레겔의)이 만연되어 있다. 그것(무대 위에서 모든 것이 이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단지 하나의 시적인 자유라고 묵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모든 시의 본질인 것이다. 실러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이 『메시나의 신부』에서 합창단을 도입한 것은 예술상의 모든 자연주의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그리고 명예롭게 선전을 포고하기 위해서 취한 단호한 조치라고. 그러한 고찰방식은 자신의 우월을 망신하고 있는 현대가 '사이비 이상주의'라는 경멸적인 명칭을 붙여준 고찰방식인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자연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찬양하면서 도달하게 된 것이 모든 이상주의의 정반대의 것, 즉 밀랍세공의 진열장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대의 어떤 인기 소설에서처럼 밀랍세공에도 예술은 있다. 다만 이러한 예술에 의해서 실러와 괴테의 '사이비 이상주의'가 극복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를 뿐이다. 

 

물론 실러의 올바른 통찰에 따르면 그리스의 사티로스 합창단, 즉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이루는 합창단이 소요했던 곳은 '더 이상적인' 땅이며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 인간들이 걸어다니는 땅보다 훨씬 더 드높이 솟아 있는 땅이다. 그리스인은 이 합창단을 위해서 가공의 자연상태를 나타내는 공중의 가설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공의 자연존재(사티로스 합창단)을 세워 놓았다. 비극은 이러한 기초 위에서 성장했고 이 때문에 물론 이미 현실에 대한 꼼꼼한 묘사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상상력을 통해 삽입된 자의적인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올림포스 산과 그 위의 신들이 신앙심 깊은 그리스인에게 가졌던 현실성과 신빙성을 지닌 세계인 것이다. 사티로스는 디오니소스적인 무용수로서 신화와 제의에 의해서 성화된 종교적인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그와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 그로부터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선포된다는 것은 합창단으로부터 비극이 탄생되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는 기이한 현상이다. 가공의 자연존재인 사티로스와 문화인과의 관계는 디오니소스적 음악과 문명과의 관계와 같다고 내가 주장할 경우, 이러한 주장이 아마도 우리 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문화인과 문명에 대해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등잔의 빛이 대낮의 빛에 의해서 사라지듯이 그것들도 음악에 의해서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똑같이 그리스 문화인들도 사티로스 합창단 앞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국가과 사회 그리고 개인들 간의 간격이 강력한 통일감정에 의해서 사라져 버리고 자연의 심장으로 되돌려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인 것이다. 내가 이미 여기서 암시한 바와 같이 모든 진정한 비극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수단인 형이상학적 위안, 즉 사물의 근저에 놓여 있는 삶은 현상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에서도 불멸의 힘을 지닌 채 환희에 넘쳐 있다는 위안은 사티로스 합창단으로서, 자연존재의 합창단으로서 생생한 육체를 지닌 명료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자연존재는 말하자면 모든 문명의 배후에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으며, 세대가 바뀌고 민족의 역사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극히 섬세하고 극히 강렬하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인 심원한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합창단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이른바 세계사라는 것의 무시무시한 파괴 충동과 자연의 잔혹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의지에 대한 불교적 부정을 동경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그를 예술이 구원한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생이다. 

 

삶의 일상적 구속과 한계를 파괴하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황홀경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일종의 망각의 강과 같은(lethargisch)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그가 과거에 개인적으로 체험한 모든 것이 망각되어 버린다. 이러한 망각의 심연에 의해서 일상적 현실의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현실의 세계가 나눠진다. 그러나 저 일상적인 현실이 다시 의식 속에 되살아나자마자 그것은 심한 구토증을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금욕적이고 의지를 부정하는 기분이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햄릿과 유사하다. 양자는 우선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 보았다. 그들은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고나면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토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뒤죽박죽인 세계를 다시 정돈하라고 요구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고 치욕적인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인식은 행동을 죽인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환각의 베일에 싸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햄릿의 가르침이며, 몽상가 한스의 값싼 지혜가 아니다. 한스는 반성만을 뒤풀이할 뿐이며, 말하자면 가능성의 과잉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반성이 아니라 참된 인식이, 무서운 진리에 대한 통찰이 햄릿은 물론이고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도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동기를 말살해 버린다. 이제 위로는 쓸모가 없다. 갈망은 세계를 넘고 신들 자체까지도 넘어서 죽음을 향해서 달린다. 삶은 그것을 눈부시게 반영하는 신들이나 불멸의 피안과 함께 부정된다. 인간은 한 번 보게 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한, 도처에서 삶의 공포 혹은 삶의 부조리를 보게 된다. 이제 그는 오필리아의 운명이 상징하는 것을 이해한다. 이제 그는 숲의 신 실레노스의 지혜를 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구역질을 나게 한다.

 

의지의 이러한 최고의 위험상태 속에서 이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예술만이 삶의 공포나 부조리에 대한 저 구토를 일으키는 생각을 인간에게 사는 보람을 주는 여러 가지 표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표상은 우리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을 예술적으로 제어할 경우 숭고한 것이 되고, 부조리의 구역질로부터 예술적으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경우에는 희극적인 것이 된다. 주신찬가의 사티로스 합창단은 예술로 (그리스인들을) 구원하고 있다. 이 디오니소스의 시종들이 만드는 중간 세계(비극과 희극)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공포나 구역질의 발작은 모두 진정되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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