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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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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이제 우리 연구의 본래 목표에 가까이 가고 있다. 우리 연구는 디오니소스-아폴론적 정신과 그것의 예술작품을 인식하고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저 통일성의 신비를 적어도 어렴풋하게라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나중에 비극과 극 형식의 주신찬가로 발전하는 저 새로운 맹아는 그리스 세계의 어디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가? 이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자신이 우리들에게 형상을 통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학의 시조이자 봉화 전달자로서 호메로스와 아르킬로코스를 조각품과 보석 등에 나란히 새겨 넣었던 바, 이는 그들이 후대의 그리스 세계 전체에 흘러 들어가는 불의 강의 원천인 이 두 사람만을 우열을 가릴 수 없을정도로 진정으로 독창적인 인물로서 간주해야만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에 침잠하는 백발의 몽상가이자 아폴론적 소박 예술가의 전형인 호메로스는 이제 난폭하게 인생 속을 떠돌아다니는 뮤즈의 전투적인 시종인 아르킬로코스의 정열적인 정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근대 미학은 아르킬로코스와 함께 '객관적' 예술가에 대립해서 최초의 '주관적' 예술가가 등장했다는 해석을 덧붙일 줄밖에 몰랐다. 우리에게 이런 해석은 거의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관적 예술가를 열등한 예술가로 생각하고 있으며, 예술의 모든 장르 및 수준에서 무엇보다도 우선 주관적인 것의 극복과 '자아'로부터의 구제, 그리고 모든 개인적 의지와 욕망의 침묵을 요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객관성 없이는, 즉 사심 없는 순수한 관조 없이는 최소한도의 진정한 예술적 창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미학은 어떻게 해서 '서정시인'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이는 서정시인은 어떤 시대에서도 항상 '나'를 말하며 자신의 정열과 욕망의 반음계 전부를 우리 앞에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곁에서 바로 이 아르킬로코스는 증오와 조소의 절규를 쏟아내고 도취상태에서 자신의 욕망을 분출함으로써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주관적이라고 불렸던 최초의 예술가인 그는 따라서 본래 비예술가가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면 '객관적' 예술의 발원지인 델포이 신탁마저도 시인 아르킬로코스에게 극히 주목할만한 말로 경의를 표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실러는 그 자신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무난하게 생각되는 심리학적 고찰에 의해서 자신의 시작(詩作)과정을 우리들에게 밝혀 주었다. 즉 그는 자신이 시작활동에 앞서서 준비상태로 자신 앞에 그리고 자신 안에 지니고 있던 것은 사고의 질서 정연한 인과율에 따라서 배열된 일련의 영상들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음악적인 기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느낌은 나에게는 처음에는 특정하고 분명한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대상은 나중에야 비로소 형성된다. 일종의 음악적 기분이 선행하며 이것에 이어 비로소 시상이 떠오른다."

 

이제 고대 서정시 전체에 걸쳐서 가장 중요한 현상, 즉 서정시인과 음악가의 결합 아니 동일성 - 이것은 고대에서는 어디서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것과 비교하면 근대의 서정시는 머리 없는 신상처럼 생각된다 - 을 함께 고려할 경우 우리는 앞서 서술된 미학적 형이상학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서정시인을 설명할 수 있다. 서정시인은 우선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 근원적 일자와 근원적 일자의 고통 및 모순과 완전히 일체가 된 것이며 이 근원적 일자의 모상을 음악으로 만들어 낸다. 이 점에서 음악이 세계의 반복, 세계의 두 번째 주조라고 불린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제 음악은 서정시인에게 마치 '비유적인 꿈의 영상'처럼 아폴론적인 꿈의 작용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 근원적인 고통은 처음에는 형상도 개념도 없이 음악 속에 반영되었지만 이제는 가상 속에서 구원을 받음으로써 개개의 비유, 실례로서의 두 번째 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술가는 이미 자신의 주관성을 디오니소스적 과정에서 포기해 버렸다. 그에게 이제 자기가 세계의 심장과 일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형상은 저 근원적 모순과 근원적 고통을 가상의 근원적 쾌감과 함께 형상화하는 꿈의 장면이다. 따라서 서정시인의 '자아'는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것이다. 근대의 미학자가 말하는 의미의 서정시인의 '주관성'이란 하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 최초의 서정시인인 아르킬로코스가 뤼캄베스의 딸에게 자신의 미칠 듯한 사랑을 고백하는 동시에 경멸의 말을 던지고 도취의 황홀경에 빠져 우리 앞에서 춤출 경우 이는 그의 개인적인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와 그의 여자 시종들인 마이나데스들을 보고 있는 것이며, 도취한 열광자인 아르킬로코스가 쓰러져 잠들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 에우리피데스가 『바쿠스의 시녀들』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고산의 목초지에서 정오의 태양 아래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이제 아폴론이 다가와 월계수로 그를 만진다. 잠들어 있는 자를 사로잡고 있는 디오니소스적 - 음악적 마력이 자신의 주위에 형상의 불꽃들을 발산한다. 이것이 바로 최고로 발전했을 때 비극과 주신찬가로 불리게 되는 서정시인 것이다. 

 

조각가 및 그와 친척관계에 있는 서사시인은 형상들에 대한 순수한 관조 속으로 침잠한다. 디오니소스적 음악가는 어떠한 형상도 갖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근원적 고통이며 이것의 근원적인 반향일 뿐이다. 서정적 영혼은 신비한 자기포기 상태와 합일상태로부터 하나의 형상세계, 하나의 비유적 세계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이 세계는 조각가와 서사시인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색채와 인과성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 조각가와 서사시인은 이 형상들 속에서 그리고 오직 그것들 속에서만 즐거움을 누리고, 그러한 형상들의 극히 세세한 특징들까지 애정을 갖고 관조하는 데 지칠 줄 모른다. 격노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 자체는 그들에게는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며, 그들은 그의 격노하는 표정을 꿈 속에서 가상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감상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상이라는 이 거울을 통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형상들과 일체가 되고 융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서정시인의 형상들은 바로 그 자신이며 자신의 다양한 객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는 저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으로서 '나'라고 말해도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나는 깨어 있을 때의 경험적-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 그리고 사물의 근저에 자리 잡은 영원한 자아이다. 이 자아의 모상들을 통해서 서정적 천재는 사물의 저 근거까지도 꿰뚫어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같은 문제, 즉 서정적 천재가 이러한 모상들 중에서 비천재로서의 자기 자신, 즉 하나의 '주체', 다시 말해서 그에게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사물을 향한 주관적 열정과 동요하는 주관적 의지가 뒤섞여 있는 전체를 어떻게 통찰하는지를 생각해보자. (어뜻 보기에는) 서정적 예술가와 그와 결합된 비예술가가 마치 동일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전자가 (자신을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추구하는 개체로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정시인을 주관적인 시인으로 지칭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외관에 속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속지 않을 것이다. 정열에 불타 올라 사랑하고 증오하는 인간 아르킬로코스는 실제로는 이미 더 이상 아르킬로코스가 아니라 세계영혼으로 존재하는 영혼이 만들어 낸 하나의 환상일 뿐이며, 이러한 세계 영혼은 자신의 근원적 고통을 인간 아르킬로코스라는 비유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에 반해 주관적으로 의욕하고 열망하는 인간 아르킬로코스는 절대로 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서정시인이 자신 앞의 인간 아르킬로코스라는 현상만을 영원한 존재의 반영으로 볼 필요는 전혀 없다. 비극은 서정시인의 환상세계가 자신에게는 물론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저 현상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추구하는 개체로서의 서정시인)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서정시인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곤란한 문제라는 사실을 쇼펜하우어는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탈출구를 발견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나는 결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서정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곤란한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은 이제까지 오직 쇼펜하우어의 손에만, 즉 음악에 대한 그의 심원한 형이상학에만 존재했다. 이상의 설명에서 나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그에게 명예가 되는 방식으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의 설명과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서정적인) 노래(Lied)의 독특한 본질로서 지적하고 있다. 

 

"노래하는 사람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의지의 주체, 즉 자신의 욕구이다. 이것은 때로는 속박에서 벗어나 충족된 욕구(기쁨)로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훨씬 자주 억압된 욕구(슬픔)로서 나타난다. 즉 그것은 항상 정념, 걱정, 감동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밖에 주위의 자연을 관조함으로써 노래하는 자는 그 자신을 순수하고 욕구 없는 인식의 주체로서 의식하게 된다. 이 인식의 흔들리지 않는 행복한 고요는 늘 제약받고 언제나 결핍을 느끼는 욕구의 절박한 충동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의 느낌, 이러한 상호교착의 느낌이 본래 노래 전체에서 표현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서정적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서정적 상태에서는 순수한 인식이 우리를 욕구와 충동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것에 따르지만 잠시뿐이다. 항상 거듭해서 욕구와 우리의 개인적 목적에 대한 상기가 우리를 고요한 관조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러나 또 다시 주위의 아름다운 환경이 우리를 욕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순수하고 욕구 없는 인식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노래나 서정적 기분 속에서는 욕구(목적에 대한 개인적 관심)와 자신을 드러내는 환경에 대한 순수한 인식이 기묘하게 혼합되어 나타난다. 즉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추구되고 상상되는 것이다. 주관적인 기분, 즉 의지의 흥분상태는 관조된 환경에 자신의 색깔을 부여하고 그 환경은 또한 주관적인 기분에 자신의 색깔을 반영한다. 이처럼 혼합되고 분열된 심정상태의 묘사가 진정한 노래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 295p

 

이러한 묘사를 읽고 나서 이 묘사 속에서는 서정시가 하나의 불완전하게 달성된, 마치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좀처럼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같은 하나의 예술로서, 즉 욕구와 순수 관조, 비미학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기이한 혼합을 본질로 갖는 절반의 예술로 특징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로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을 분류하면서 쇼펜하우어도 여전히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대립을 하나의 가치척도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주체, 즉 욕구하고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추구하는 개체라는 것은 예술의 적일 뿐이지 결코 예술의 근원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예술가인 한 그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 의지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진실로 존재하는 주체(세계 영혼)가 가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자축하는 것을 돕는 매체가 된다. 예술이라는 희극 전체는 우리를 위해서, 즉 우리들의 향상이나 교양을 위해서 상연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우리가 저 예술세계의 진정한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굴욕이 되면서도 우리를 우쭐하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세계의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미 형상이고 예술적인 투영이며 예술작품이 갖는 의의 속에서 우리의 최고의 품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물론 우리가 갖는 이러한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화폭 위에 그려진 군인이 그림 속의 전투에 대해서 갖는 의식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예술에 관한 우리의 지식 모두는 근본적으로는 완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자로서의 우리는 저 예술이라는 희극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관객으로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저 존재(세계영혼)와 일체도 아니고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천재가 예술적 창조행위를 통해서 세계의 저 근원적 예술가와 융합되는 한에서만 그는 예술의 영원한 본질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아는 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융합된 상태에서 천재는 기묘한 방식으로, 즉 옛날 이야기 속의 섬뜩한 인물과 유사하게 눈알을 돌려서 자신을 관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고, 또 동시에 시인이자 배우이며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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