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성기호설
장승희 평설위원 / 독서평설
정약용(1662-1836)은 조선 시대의 학자로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 그때까지 전해 오던 성리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실학이 나타나게 되고 정약용은 합리적이고 독창적인 생각으로 이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정다산전서』가 있는데,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와 4서 6경에 대한 해석서들이 있다.
이 글에서는 실학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때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성리학(性理學)의 성(性)을 정약용은 실학에서 어떻게 보았는지, 또 그의 생각들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정약용은 인간의 성(性)이란 어떤 구체적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내면적 도덕성보다는, 행위자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율적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실천 의지나 그 행위 과정을 중요시하였다.”
-「국민윤리」교과서 P.89에서
1. 시작하는 말
흔히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말할 때, ‘동도서기(東道西紀, 동양의 도, 서양의 물질을 합쳐서 부르는 말)’라는 말을 쓴다. 서양은 과학 문명이 발달했고, 동양은 정신문명이 발달했기 때문에, 이 둘을 조화시키면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데서 온 말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동양에서는 물질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였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는, 유교 철학의 일파인 성리학이 학문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어 정신적․이론적인 면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곤란함을 느낄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실학이다. 실학은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여러 실학자들은 이론과 실천, 정신과 실용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데, 그 삶의 과정이나 학문적 업적으로 볼 때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긴 위대한 학자였다.
흔히,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말자고 주장하는데, 이런 자세는 바로 정약용의 사상을 이해함으로서 가다듬을 수 있으리라 본다.
2. 시대적 상황과 다산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살았던 시대는 당파 싸움과 사화(士禍), 그리고 세도 정치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당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당파 싸움이었다. 당파 싸움은 성리학이 명분을 너무 중시한 결과 나타난 일정의 파벌 싸움이었다. 영조, 정조 때에는 탕평책(蕩平策)으로 이러한 파벌 싸움이 조금은 안정되는 듯하였지만, 안으로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의 4대 사화가 남긴 혼란상을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산이 살았던 때는 서양문물이 도입되어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시기였다. 당시 서양문물은 청나라를 통하여 도입되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실학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다산은 16세부터 성호 이익의 사상을 혼자서 공부하였다 한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이벽으로부터 처음 듣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며, 신유사옥(1802(순조1) 조선 정부가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신유교난’이라고도 함. 1791년(정조 15)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교난이 일어난 뒤 조정은 천주교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천주교도에 대해 관대하여 크게 확대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상황은 천주교도들에게 불리해졌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전파에 앞장섰던 중요 간부가 모두 참수(斬首) 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당하였다. 그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탄로되어 천주교도는 더욱 탄압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1년 동안에 학살당한 천주교도는 300명이 넘었다.) 때 천주교에서 발을 떼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사상에는 천주교 신앙적인 내용이 더러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와 가까운 친척 가운데에는 열렬한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천주교 박해 때 많이 희생되었으며, 그 역시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런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그 원인은 결국 당파 싸움이었던 것이다.
한편, 다산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는 40세를 전후로 해서 그 이전에는 정치가로, 그 이후에는 귀양 가서 학문 활동을 하면서 책을 썼다. 유배 시절 전남 강진에서 쓴 「여유당전서」를 보면 왜 그가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여유당전서」에 나타난 다산의 사상은 철학은 물론 정치학, 경제학, 법학, 음악, 문화 분야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
3. 다산의 학문 체계와 실학
조선이 그 기반을 잡게 되자, 통치 이념으로 제시되었던 성리학은 확고한 지배 이념이 되었고, 이에 따라 유학은 거의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성리학은 백성들이 직면했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경직되고 융통성이 없는 학문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다산은 당신의 성리학이 유교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하면서 유교 본래의 이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일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수양(修養)을 강조하여, 6경(역경, 서경, 시경, 춘추, 예기, 악기)과 4서(중용, 대학, 논어, 맹자)에 대한 해석서를 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수양을 바탕으로 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썼다. 앞의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내용의 학문을 경학(經學)이라고 부르고, 뒤의 정치와 경제 등 세상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내용을 경세학(經世學)이라고 부른다.
다산은 유교에 대해, 본래는 성리학처럼 이론을 따지고 논했던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인간의 선함과 이성의 능력을 믿고 있었고, 초월적인 것보다는 현세에 중점을 두고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에 관해서 말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산은 성리학이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을 비판하고 유학 본래의 현실적 측면을 이어받으려 노력했다.
다산이 당시 성리학을 비판한 글을 보자.
“지금 성리학은 이와 기, 성과 정, 체와 용, 본연기질, 理發氣發이라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털 한 오라기를 나누고, 실오라기 쪼개듯이 세밀히 분석하면서 서로 꾸짖고 야단치며, 눈을 감고 묵묵히 연구하다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핏대를 올려 목에 핏줄을 붉히면서 스스로 천하의 높고 신비한 이치를 다 터득했다고 떠들어댄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치켜세워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난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근거 없이 지극히 바르다 생각하니 어찌 공허하지 않은가?”(「여유당전서」 오학론)
이 당시는 조선 시대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서양의 문물이 전해지기 시작한 때이다. 이에 실학은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했다. 따라서 성리학과 비교해서 실용과 실질을 중시하며, 유학의 이상인 수기치인 중에 치인을 강조한다. 명분, 명칭, 형식 보다 실리, 실효, 실질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학문의 내용도 구체적이고, 또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주체적인 면이 강하다.
실학사상의 근원을 보면, 성리학의 理氣論 중에서도 氣를 강조했던 율곡의 주기론적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퇴계 이황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氣)와 원리(理)는 따로 존재한다고 보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반면에 율곡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경험적 세계에 理와 氣가 같이 존재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따라서 율곡의 입장에서는 경험적 세계로 드러나는 기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 세계를 보는데, 실학이 이어받은 것은 바로 실천적, 실용적 기의 세계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실학에서 본 인간관은 이전의 왕권을 천명(天命)으로 생각했던 복종적 인간관에서 벗어나 하늘의 이치보다는 욕구를 가진 인간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의식이 싹터 근대 의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학자들은 이전의 어느 유학자들보다도 백성을 위한 개혁을 주장했다. 토지 개혁설, 노비 제도 폐지 등 모두 백성을 위한 사상들이었다. 박지원의 「양반전」 등은 이런 백성의 권리에 대한 사고가 높아지면서 나타난 작품이다.
4. 다산의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
다산이 천주교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천(天)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동양 윤리 사상에서 천(天)이란 고대 농경 사회에서 자연을 받들고 모시던 형태 중 하나였다. 이것이 나중에 종교적으로 더 발전하여 하늘을 최고의 신으로 보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하늘이 세상 만물을 만들고 관리한다고 보아서 ‘천제(天帝)’라는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천제는 인간과 같이 의지를 갖고, 옳고 그름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여 선악을 징벌한다고 생각하여, 절대자로 숭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천신앙(天神仰)이다.
논어에 보면, 공자도 “하늘에서 죄를 얻으면 빌 데가 없다.”(「논어」팔일편), “죽고 사는 것도 명(命)에 있고, 부귀는 하늘(天)에 있다.”(「논어」안연편)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자가 하늘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옳고 그름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한다고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성리학에서는 ‘천은 곧 이치’라고 하여 하늘을 섭리나 이치로 보았다. 따라서 하늘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이거나 도덕적 가치 판단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치이기 때문에 그것을 나타내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이치로서의 하늘을 거부하고 천을 상제(上帝)라고 보았다. 그가 하늘에 대해 생각한 것은 하늘의 명령(天命)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작용한다는 윤리적(倫理的) 상제(上帝)였다.
“상제의 영명함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 그리하여 인간이 숨기려 해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없고, 아무리 표시 없이 해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없다.”(「여유당전서」 중용자잠)
다산은 天이 유일한 신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영명한 신이며, 인격을 갖추어 이 세상 만물을 만들고 관리하며, 다른 것들과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런 상제의 명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보았다.
성리학에서 보는 인간의 본성은 이치이다. 인간이 생기면 이치가 하늘에서 주어져 여기에 부착되는데,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여기서 본성이 곧 이치가 된다는 것이다.
다산은 성리학에서의 철학적 개념의 성(性)과는 다른 인간 본성을 주장하였다. 다산이 보았던 인성의 근거는 天理가 아니라 감성적인 기호(嗜好,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 성리학의 성은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자격이 없게 된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다산은 본성이란 기호라고 주장한다.
“성(性)자의 본래의 뜻에 의거하여 말하면, 성이란 마음이 좋아하고 즐기는 바이다.”(「여유당전서」 중용자잠)
“성이란 본심이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여유당전서」 논어고금주)
이것이 다산의 ‘성기호설’이다. 다산은 성(性)이 본래 선하다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다산에게 있어서 인성은 본심 그 자체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으로 날 때부터 타고나는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성이 선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대로 따를 수 있겠는가?
“배태(태아가 형성됨) 되자마자 하늘은 거기에 영명하되 형체가 없는 본체를 부여하니, 그것의 됨됨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되 덕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니, 그러기에 이를 성이라 하며, 그러기에 이를 성선이라 말한다. 성리란 이와 같으므로 거스르지 않아야 하며, 모름지기, 그대로 따라 성이 하자는 대로 들어 주어야 한다. 나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 따라야 하므로 이를 도(道)라 말한다.”(「여유당전서」 중용자잠)
그런데 선을 좋아하고 즐기는 경향성을 가진 인간이 왜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일까? 다산은 그 이유를 마음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거기에 대한 원인을 찾고 있다. 마음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몸 속에 있는 심장을 가리키는 ‘오장(五臟)이라는 마음’,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영명지심(靈明之心)’, 그리고 감정으로 드러나는 ‘소발지심(所發(之心)’이다. 마음은 생리적, 철학적, 윤리적 형태를 모두 갖고 있다. 이 세 마음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뿐 인간 마음의 형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다산은 이 마음이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마음은 인간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며,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의 작용은 천명을 따르는 ‘道心’과, 물질적 육체를 따라 나타나는 ‘人心’ 두 형태로 나타난다.
천명은 인간의 마음속에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이 바로 도심이다. 이 도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주권을 갖게 된다. 도심은 인간 고유의 도덕적 가치 판단의 작용을 하고 인간의 자주 의지가 바로 도심이기 때문에 선을 행해도 자신의 공이고, 악한 행동을 해도 자신이 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5. 실천을 중시하는 도덕, 윤리
이런 도심의 작용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수양론인데, 다산에 있어서 실천은 1차적 실천과 2차적 실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차적 실천은 개인적 범위의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것인데, 여기서 이상적 인간상은 신독군자(愼獨君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언동을 삼가는 군자)이며, 수양 방법은 신독이다. 2차적 실천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상적 인간상은 목자(牧者)이다. 목자란 군자로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다.
다산에 있어 윤리적으로 최고의 경지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천인합일이란 천명을 알고 이를 인륜에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하늘을 섬기고, 군자의 최고의 경지인 성인(聖人)도 성(誠)으로 하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군자가 되고자 노력하며, 군자는 배우고 실천하며 천명을 알아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다산이 수양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신독(愼獨)과 성(誠)이다. 이를 받쳐주는 원리가 중용(中庸)이다. 다산은 신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신독이라 이르는 것은 내가 홀로 알고 있는 일에 대하여 극진히 삼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나만이 홀로 처해 있는 곳에서 극진히 삼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매양 제 방에 고요히 앉아서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묵묵히 생각해 볼 때, 구름이 피어오르듯이 피어나는 양심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방안 으슥한 곳을 바라보면서 부끄러움과 뉘우침이 저절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신독이란 두 글자의 의미를 똑똑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두운 방안에 있을 적에는 옷깃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꿇어 앉아 있을 수 있으면서도, 매양 사람들과 서로 접촉할 적에는 그들을 속이거나 험상궂은 말투를 쓰지만 남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고 이르기도 하고 혹은 하늘까지는 들리지 않는다고도 하니 신독이 어찌 이 같은 뜻이겠는가.(「여유당전서」대학강의)
성이란 하늘의 도, 선을 향한 노력, 반성적 태도, 하늘의 뜻을 아는 것, 신독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공자 같은 성인(聖人)은 그 자체로 성이지만, 우리 보통 인간들은 신독을 통하여 군자가 될 수 있고, 군자는 성을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신독과 성을 ‘알맞게 꾸준히 함(中庸)’으로써 덕(德)이 얻어진다. 다산에게 있어 덕은 마음속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한 결과 얻어지는 것이다.
“덕이란 나의 곧은 마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실행하지 않으면 덕이란 있을 수 없다. 효제충신(孝悌忠信),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덕이라 할 수 있는데, 미처 몸소 실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덕이라 할 수 있겠는가?”(「여유당전서」중용자잠)
6. 백성을 위한 정치, 경제
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개혁적 사회 사상가로, 또 정치가로 다산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 가치는 놀랄 만하다. 요즘에는 현실 비판적인 시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다산의 시를 보면,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은 물론 백성에 대한 사랑과 토속적인 어휘와 낱말들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시냇가 헌 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 드네.
집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 팔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져 앉은 선반은 새끼줄로 얽었도다.”
이 시는 「적성촌에서」라는 시로 당시 백성들의 어렵고 처참한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다산은 치인(治人)을 위한 대표적인 저서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썼다. 『경세유표』는 중국의 『주례』를 본 뜬 국가 제도론이다. 나라의 제도를 논하고 개혁하고 정비하자는 의도가 담긴 것인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보아서 이런 책을 쓴 것이다. 『목민심서』는 관리의 올바른 길을 쓰고 있고, 『흠흠신서』도 국가의 어려움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 쓴 것이다.
7. 맺는 말
다산의 실학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기호(嗜好)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욕구로 선을 행해도 자신의 공이고, 악을 행해도 자신이 한 행위가 된다. 다산은 그 이전까지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고, 인간의 본성을 보다 활력적으로 봄으로써 자신의 실학에 토대를 마련하였다. 경학(철학)과 이를 바탕으로 한 경세학(정치학, 경제학)으로 이루어진 학문 체계는 유배 생활 때문에 실천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한 차원 끌어올리게 되었다.
다산의 학문은 수기(修己)의 경학과 치인(治人)의 경세학으로 뚜렷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경학에서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해석으로, 경세학에서는 백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마음으로 훌륭한 저술을 남김으로써 대학자로서 다산은 손색이 없는 훌륭한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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