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목적론과 헤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 있는 것(das Lebendige)에서 파악한 기본적인 규정은 살아 있는 것은 목적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입장은 근대에 들어서는 거의 상실되었는데 결정적으로 칸트는 내적인 합목적성의 개념, 즉 살아 있는 것은 자기 목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견해 속에서 자기 나름의 자연 개념을 다시 규정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목적론적인 논의와 개념들은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오면서 광범위하게 거부되었다. 이러한 논의와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의혹에 쌓여 있는 것으로 보였고, 게다가 유기체와 같은 특정한 영역들을 목적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주목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러한 목적론적인 논의와 개념들이 새로이 부각되어서, 목적론의 적용 영역들이 다양하게 언급되었고, 그 의미도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고려되고 있다. 분자생물학적인 연구와 학문 이론 안에서의 목적론의 반향은 그 자체, 즉 인식 이론적인 또는 존재론적인 정초 없이도 존립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들을 발생시켰다. 목적론을 위해선 네 개의 기본적으로 타당한 영역이 주어질 수 있다.
1) 존재자의 이론인 존재론 속에서 목적론은 지배적인 위치를 지닌다. 이런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마주칠 수 있으며 헤겔도 목적론적인 직관들을 그의 존재론 속에 근본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2) 목적론적인 표상들의 적용을 위한 문제 영역은 고대 이래로 자연, 특히 살아 있는 자연이다. 오늘날까지도 생물학적인 연구와 학문 이론 등은 분명히 그러한 표상들을 거부할 수 없다. 종의 진화에 대한 생각 속에도 감춰진 목적론적인 표상들이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감춰진 목적론적인 표상들은 거부할 수 없이 가정(Hypothese)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즉, 최고 상태의 원리를 근거로 하여 비유기적인 물질이 화학적 반응을 통해서 분자적 체계를 형성하고 이러한 체계에서 생명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엔 이미 라이프니츠, 칸트 그리고 헤겔에게서 보여지듯이, 더 단순한 자연과학적 조건들 아래서 드러나는 생각, 다시 말하면 비유기적 기계론적인 자연 속에서도 목적론적인 구조들이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이 원칙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3) 인간의 혼(Psyche)과 정신(Geist) 속에서 일반적으로 목적(Telos)의 구상은 근원적으로 정초된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행위를 위해 목적을 기획하는 의지가 그것이며, 이 의지는 모든 목적과 합목적성의 이해를 위한 본래적인 장소로 간주된다. 의지의 목적론은 동시에 인간 정신의 세계 속에서 확장되고 변형된 목적론의 모델들을 위한 개념적인 토대를 형성한다. 이러한 의지의 목적론은 정신적인 삶의 목적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호 활동적인 행위와 이 행위들에 의해서 정초된 조직들의 목적론에도 깊숙이 내재해 있다.
4) 결국 정신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하게 설정된 목적론의 고찰에 따라 목적론의 세계 전체로의 확장이라는 물음이 주어진다. 이러한 물음은 형이상학적으로 대답될 수 있다. 도덕 목적론과 전역사적 전개를 역사의 궁극 목적에서 구성하는 역사 목적론은 최후의 목적 또는 최고선의 형이상학적 구상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역시 목적론을 해명될 수 있는 세계의 이해 지평을 명시하는 설계 구조로 바라볼 비판적 현상학적인 가능성이 남아 있고, 결국 그렇게 이해된 세계 속에서 인간의 현존은 원칙적으로 의미 있고 가능하기도 하다. 이러한 물음 속에서 칸트는 비판적 목적론을 초고했으며, 이 비판적 목적론은 무엇보다도 그 정초에서 존재론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지는 않다.
칸트는 특히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목적론에서 도덕목적론으로의 ‘이행(Übergang)’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인상을 경험하게 한다. 즉, 우리의 이성이 유기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넘어 초감각적인 것의 인식에까지 다다르는 문제 지평을 열어보이고 있다. 그 이후의 사변 철학자들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의 대결에서 우선적으로 이 <판단력 비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청년기의 셸링은 <판단력 비판> 속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경이로워했고 이 <판단력 비판>을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결합 방식을 서술하는 그의 자연철학과 천재 미학(Genie-Ästhetik)을 위해 ‘빛을 발하는 배경(Folie)’으로 간주한다. 헤겔은 가장 분명하게 <판단력 비판>을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결합으로 인정하고 사변적 이념들의 ‘앞선 인상(Vorprägung)’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입장에 견주어 이 글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 안에서 자연목적론의 위치와 도덕목적론으로의 이해의 필연성과 그 귀결점들이 논구되고(I), 그런 다음 사변 철학자들, 특히 헤겔에 의한 칸트 목적론의 수용과 비판이 발전사적인 변화와 사변적인 단초들의 측면에서 논구된다(II).
1.칸트 목적론: 자연목적론에서 도덕목적론으로의 이행
칸트는 자연 연구를 위한 목적론적 평가의 정당성을 언급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자연을 관찰하는 데에 자연 속에서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이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에 관한 모든 관찰은 ‘물리적’이든지 ‘목적론적’이다(physiologisch oder teleologisch). 즉, 자연 인과성에 따르거나 이념에 따른다. 이념에 따른 자연은 목적론적으로 고찰된 자연으로 간주된다. 이념을 추구하고 이 이념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문제와 연관하여 우리의 지성에 인식될 수 있는 자연 질서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자연을 마치 통일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처럼 관찰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이 의도적으로 구축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바로 합목적성의 개념이다. 칸트는 통일적인 체계에 따른 인식을 욕구하는 인간 이성의 관심 속에는 합목적적인 표상을 이론적 영역에서 적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을 위해서 광범위하게 전제된 자연 적용의 형태 속에서도 사용하려는 근거가 놓여 있다고 보고 있다. 자연의 합목적적인 통일(zweckmäßige Einheit der Natur)은 오로지 순수 이성의 개념들에 기인하는 최고의 형식적 통일이며, 이러한 통일에 관련하여 이성은 자신의 사변적 사용에서 필연적으로 세계의 모든 질서를 마치 자연이 한 이념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처럼 파악하게 한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유한한 의식에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새로운 전망을 열어보이고, 그를 통해 자연의 가장 큰 체계적 통일에 다다를 수 있게 한다.
자연의 이러한 목적론적인 고찰은 자연 합목적성의 선험적 원리와 반성하는 판단력의 개념으로서 자연 목적을 전제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우선적으로 자연 합목적성의 선험적 원리를 규정한다. 이러한 원리는 ‘자립적이며 근원적인 원리(ein selbständiges, ursprüngliches Prinzip)’로 자연을 평가하기 위한 가능성에 근거지어져 있다. 자연이 특수한 잡다들의 질서 결합으로 표상될 경우, 이 자연은 주어진 특수성들을 보편적 개념에 연관시키는 판단력의 인식 성과를 통해 추론될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자연은 그 구조 속에서 판단력의 성과에 적용된 것으로 간주되고, 판단력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서 주어지지 않고, 그런 한에서 우리의 통찰을 위해선 우연적인 특수한 것의 합법칙성은 ‘우리의 파악력에 잘 적용된 자기 자신의 전개와 자기 제공의 한 특정한 자연 방식(eine bestimmte, unserer Auffassungskraft angemessene Art des Sich―selbst―Eröffnens und Sich―Darbietens der Natur)’, 즉 판단력을 위한 자연의 보편적인 합목적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특수한 법칙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 합목적성의 원리는 내용적으로 세계 표상의 비판적 잔여물이며, 경험적 인식과 세계 정위 일반의 가능성을 위해선 이러한 세계 표상에서 비롯된 보편적 자연목적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유일하게 확보된 경험적인 자연 인식으로부터 현상들의 기계론적 물리학적인 인식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으나, 목적론적인 원리들 속에서 생물학을 위한 고유한 인식 이론적 학문 이론적인 토대를 설정한다. 세계의 몇몇 사물들, 예를 들어 유기체는 단순히 기계론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따라서 반성하는 판단력은 그러한 유기체의 고유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 목적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관찰하는 데에 일반적인 자연 이론의 원칙 이외에도(아무것도 대략적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판단력 비판, 296), 또 다른 원칙이 성립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속에서 아무것도 헛된 것이 없다’(판단력 비판, 301). 이러한 후자의 원칙 없이 자연과학에서 자연을 관찰하는 데에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없다. 자연 목적의 개념은 자연 산물의 개념으로 자연 기계론에 관계하는 자연 필연성을 의미하고, 동시에 목적으로서 자연의 단순한 법칙에 연관된 대상 형식의 우연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 사물들의 방식을 목적론적으로 자연 목적의 개념 하에서 고찰한다면, 그를 통해 단순한 기계론과는 전혀 다른 사물 내지는 세계 질서를 설정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그러한 이념은 자연 산물의 가능성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한 자연 법칙의 선천적 규정 근거로서 표상들의 절대적 통일성이며, 자연 법칙의 한 형식의 인과성에 기여한다. 이에 따라 자연 목적은 자연 산물 속에 놓인 모든 것에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자연 목적의 개념은 이제 필연적으로 목적들의 규칙에 따른 한 체계로서 전체 자연의 이념을 이끌며, 자연의 모든 기계론은 이성의 원리들에 따라 이 이념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판단력 비판, 300).
그러나 칸트가 유기체에서 가장 잘 보이는 합목적성의 특별한 방식에서 시작하여 목적론적인 원리를 세계 전체에 확장시키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한 유기체에서 모든 것은 그 유기체 속에서 유기적인 것으로 관찰되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은 사물에 대한 어떤 연관 속에서 다시 “기관(Organ)”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 자연 목적은 현존하고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러한 자연 목적에 기관이고 수단인 다른 사물에 대한 연관 없이는 내적으로도 유기체화될 수 없다. 한 자연 목적이 살아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유기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유기체는 외적인 합목적성 없이 내적인 합목적성 속에서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칸트에 의해 윤곽적으로만 전개되었지만 유기체를 출발점으로 하는 점에서 비유기적 자연도 객관적 합목적성의 고려 속에 함께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따라서 칸트는 외적인 합목적성의 개념이 자연목적론에 속하는가 하는 물음을 원리적으로 조사하고자 한다.
이러한 숙고 속에는 자연 목적의 개념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다:“하나의 사물을 내적인 형식 때문에 자연 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러한 사물을 자연 목적을 위한 현존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판단력 비판? 299). 우리는 한편으로 한 사물을 유기체로 만드는 사물의 내적인 형식을 자연 목적으로 간주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사물의 현존을 초감각적인 원인의 목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목적의 논구에서 칸트는 원리적으로 형식에 따른 목적과 현존에 따른 목적을 구별한다. 자연 목적인 유기적 본질을 평가하는 데에 우리는 그러한 본질의 내적인 형식만을 그 가능성의 근거로서 목적 개념에 관련시킨다. 즉, 유기체에서 목적론적인 고찰은 그 형식에 따라서 목적 개념에 의해서 이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목적론적인 체계의 원리로서 필연적이고 무제약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유기적 본질들이 서로서로 또는 다른 사물들에 대해 존립하는 외적인 합목적성이 필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칸트는 내적인 형식에 따른 목적인 것의 평가에서 귀결적으로 현존의 목적에 대한 물음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보인다.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의 후반부에서 칸트는 이러한 현존의 목적에 대한 물음을 전개하고, 결국 궁극 목적의 개념과 이와 더불어 실천적으로 정초된 형이상학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첫 번째로 자연 최후의 목적이 문제로 등장한다.
유기적 본질에 그 형식과 내적인 가능성 때문에 한 오성적인 원인이 근거해 있어야 할 경우, 그러한 본질의 현존도 이러한 원인의 목적으로 보여야만 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이러한 오성적인 원인은 유기적 본질을 현실 속에 이끌어내기 때문에 이 오성적 원인은 스스로 유기적 본질의 형식뿐만 아니라 유기적 본질을 산출할 목적을 위해서 그의 현존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목적론을 고려하여 다시 물을 수 있다: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목적들이 어떻게 근원적 본질과 이 본질의 내적인 소질로부터 자연이라는 개념을 성립시킬 수 있게 하는가? 이런 점에서 자연 최후의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연 관찰은 우리에게 자연 최후의 목적을 제시할 수 없다. 모든 자연 사물은 수단이며 동시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연 사물들 서로가 영향을 주는 각각의 작용은 상호 작용이다. 그 때문에 자연 속의 모든 것은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각각의 사물은 존재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연 목적인 사물들을 고려하여 그 사물들 현존의 의도적인 근거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궁극 원인의 인과성과 이 궁극 원인에 근거지어진 이념은 자연 목적인 사물들의 가능성에 놓여 있다고 말할 때, 이러한 자연 사물의 현존을 또한 목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 사물들과 연관하여 그 사물 현존의 목적은 그런 사물들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물들 밖의 어떤 다른 자연 본질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그러한 자연 사물들은 합목적적으로 현존하기는 하나, 목적 그 자체(Zweck an sich)로 현존하지 않고,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칸트에 따르면 합목적적인 체계의 표상은 이성에 의해 부여된 것이며, 자연 사물들을 이 합목적적인 체계로 표상하기 위해선 결국 자연을 넘어서는 자연 최후의 목적이 설정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위해 최후의 목적일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며, 그러한 목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원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칸트에 따라 이제 우리는 이 자연의 최후의 목적을 인간이 아닌 그 어떤 다른 것에서 찾아낼 수 없다. 칸트는 인간을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간주할 훌륭한 근거를 생각한다. 인간은 오성을 지니고 목적 개념을 설정하고 그의 이성을 통해 합목적적으로 형성된 사물들의 응집(Aggregat)에서 목적들의 체계를 만들 수 있는 이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성은 인간을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자연 속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목적을 설정하고 자연 대상들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인간은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자연 최후의 목적에 비추어서만 다른 모든 자연 사물들은 목적들의 한 체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칸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betitelter Herr der Natur)”이라는 높은 신분으로 부르고 있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자연 최후의 목적인 인간을 두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즉, 목적은 자연을 통해서 그 자연의 유익함 속에서 충족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목적에 대한 유용함(Tauglichkeit)이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이러한 유용함에 자연은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 최후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 또는 문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칸트는 행복 자체는 자연 최후의 목적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지구상에서의 행복, 그런 행복 아래서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 밖과 안에서 가능한 모든 인간 목적들의 총체가 이해되며, 이러한 행복은 모든 목적들의 질료에 관계한다. 이러한 행복이 인간의 전체 목적으로 만들어진다면 인간의 고유한 현존에 궁극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일치할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칸트는 자연 최후의 목적을 궁극 목적과 필연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궁극 목적으로 설정될 수 없는 것은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행복은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설정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오직 인간의 문화만이 자연 최후의 목적일 수 있다. 칸트는 자연과 문화를 대립 개념으로 설정하지 않고, 특별한 인간적인 자연 상태를 특징짓기 위해서 문화 개념을 사용한다. 칸트는 그의 역사철학적인 저술들 속에서 상세하게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이끌어내고 있다. 여기서 역사적 전개는 바로 자연의 계획(Plan)에 따른다는 생각들이 보인다. 칸트에 따르면 문화는 “임의적인 목적들을 위한 한 이성적 본질의 유용성의 창출”을 의미하며, 따라서 자연 최후의 목적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문화, 즉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 목적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에 무관하게 그리고 자유로운 목적들의 준칙(Maxime)에 합당하게 그 자연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간의 유용성으로 제시될 수 있다. 문화는 정신과 의지의 형성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문화 속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는데, 이러한 연결점의 설정이 자연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자연 최후의 목적인 인간의 문화를 고려해서 하나의 제한이 주어지는데, 즉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문화는 인간을 한 지배자로 준비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 속에서는 오로지 이성만이 권위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문화가 실천적으로 정위된 목적론의 지평 속에서 다시 ‘준비(Vorbereitung)’로서 이해되는 한에서, 그 문화는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더 높은 목적들을 위한 유용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는 항상 인간은 의지를 지닌다는 조건 아래에 놓여 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지는 자연에 종속됨이 없이 스스로 충분한, 즉 궁극 목적일 수 있는 더구나 자연 속에선 결코 추구될 수 없는 목적 연관을 자연과 인간에게까지 부여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 최후의 목적인 문화는 필연적으로 궁극 목적을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반성하는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를 바로 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이 자연의 합목적성에서 자연을 목적들의 목적론적인 체계로 바라보고 이 자연을 인간의 문화 위에 설정된 것으로 관찰할 근거들을 추구한다. 그리고 인간 문화와 자연 연관성을 창조의 궁극 목적인 인간의 도덕성 위에 설정하려고 구상한다. 따라서 자연의 목적론적 고찰을 결국 목적 그 자체 내지 궁극 목적에 다다르게 한다:인간은 목적 그 자체다 또는 도덕적 법칙 아래 이성적 본질의 현존은 창조의 궁극 목적이다. 여기서 자연과 세계의 고찰은 그 끝을 맺는다. 따라서 세계 속의 모든 것은 궁극 목적으로서 인간에 종속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창조의 궁극 목적은 인간 이성 능력의 완전한 전개, 즉 도덕적 행위 속에서 최고점에 이르는 전개로 이해될 수 있다.
목적들의 질서 속에서 한 사물이 궁극 목적이기 위해선 그 어떠한 자연적 조건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단지 그 사물의 이념에만 의존해 있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궁극 목적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목적이며, 이러한 궁극 목적은 무제약적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 궁극 목적을 충분하게 야기시킬 수도 없으며 그러한 궁극 목적의 이념에 합당하게 만들어낼 수도 없다. 감각적 본질로서의 자연 속에서는 궁극 목적이 발견될 수 없는데, 자연 속에 드러나 있는 규정 근거가 그 어떤 것을 위해 항상 무제약적일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자연 속에서는 찾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성을 지니고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과 자연 조건들로부터 자립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 간주되었으나, 이러한 특성을 지닌 인간은 동시에 세계에서 궁극 목적으로도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본질이자 동시에 예지적 본질로도 간주되는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다. 예지적 본질로 고찰된 인간에게만 그의 고유한 속성이 보이는데, 이 고유한 인간의 속성은 칸트에 따르면 법칙, 실천 이성의 법칙이며, 이 법칙은 인간 자신에 의해 무제약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연 제약들에 무관하게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며, 이 법칙에 따라 인간은 목적들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예지적 본질로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인간은 법칙을 부여하면서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본질 속에서 세계의 사물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궁극적으로 해소된다. 결국 인간은 궁극 목적이며, 인간의 현존은 궁극 목적을 자기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세계 사물들 속에서 목적들에 따라서 행위하는 최고의 원인을 추구할 때 인간이 바로 창조의 궁극 목적인 것이다:“이러한 궁극 목적 없이 서로서로 종속되어 있는 목적들의 고리는 완전하게 성립될 수 없을 것이며, 도덕성의 주체로서 이러한 인간 속에서만 목적들을 고려해서 무제약적인 법칙 부여가 마주칠 수 있으며, 이러한 무제약적인 법칙 부여는 인간을 궁극 목적이게끔 하며, 이러한 궁극 목적에 전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판단력 비판? 398/9).
여기서 우리는 창조의 궁극 목적과 무제약적인 법칙으로서 도덕 법칙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실천 이성은 세계 본질에 하나의 궁극 목적을 지시한다. 따라서 궁극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실천 이성의 개념이지 자연의 이론적 평가를 위해 그 어떠한 경험적 사실에서 이끌려질 수 없고 자연의 인식에 연관될 수도 없다. 궁극 목적은 우리 이성의 본성을 통해서 우리의 이성 속에 놓여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목적이며, 우리의 이성은 단지 이 목적의 무제약적이며 필연적인 조건인 도덕 법칙에 종속되어 있고, 이 법칙에 따라 보편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궁극 목적의 현존을 위해선 자유 가능성의 조건인 도덕 법칙이 자연 속에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이제 우리는 도덕 법칙을 통해서 궁극 목적의 수행 가능성 또한 궁극 목적에 일치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받아들일 근거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계에서 우리를 창조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할 도덕적인 근거를 지닌다”(?판단력 비판? 432).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칸트는 특히 ?판단력 비판?에서 궁극 목적의 개념을 두 가지 의미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궁극 목적은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이성적 존재의 현존, 즉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인간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도덕적 행위의 목표(ein um seiner willen erstrebtes Ziel alles sittlichen Handelns)’, 즉 최고선(das höchste Gut)을 의미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최고선의 개념은 도덕적 행위의 궁극 목적으로 중심점에 나타난다. 여기서 칸트는 분명하게 자유 개념에 따른 작용으로서 궁극 목적과 함께 최고선을 생각하고 있고, 창조의 궁극 목적을 최고선, 즉 가장 최고 세계의 완성을 목표로 보고 있다. 세계의 모든 도덕적 행위는 최고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최고선은 도덕적 행위를 감각 세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이 감각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도덕적 목표를 고려하여 도덕적 행위, 즉 자유 개념의 감각 세계에의 영향이 중심점에 나타난다. 인간은 자연 과정 속에서 점차로 도덕적 상태에 다가간다는 표상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사실 감각 세계에 유용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자기 믿음(Selbstbeglaubigung)으로 도덕적 주체에 기여한다. 칸트는 이러한 도덕적 행위의 최고 목표를 최고선이라고 특징짓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도덕적 행위를 위해 하나의 궁극 목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궁극 목적은 “자유를 통해 가능한 세계 속의 최고선(das höchste durch Freiheit mögliche Gut in der Welt)”이다. 인간은 이러한 최고선을 야기해야만 하는 그의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표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엄밀한 도덕 법칙의 고찰이 최고선 수행의 원인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함께 우리는 도덕 법칙의 ‘확장(Erweiterung)’을 경험한다. ‘세계에 가능한 최고선을 너의 목적으로 만들라’는 문장은 범주적 명령의 귀결 명령(Folge-Gebot)으로 이해되고 이것은 곧 도덕 법칙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장이 도덕 법칙을 통해서 이끌려졌으나, 이 도덕 법칙에서 분석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모든 행위를 위해 법칙 밖에서 하나의 목적을 생각해야만 하는 인간의 본성적 특성에 연관해서만 확장은 가능하다. 이러한 인간적 이성 욕구와 도덕 법칙에서 궁극 목적의 확장적 의미가 성립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의지 규정을 의미한다.
위에 서술한 지금까지의 입장을 요약하고 종결하는 의미로 이행의 개념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최고의 본질을 추구할 때 우선적으로 자연의 합목적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연 합목적성의 원리는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목적론적인 법칙에 따라 자연 사물들을 결합하고 그를 통해 자연의 가장 큰 체계적 통일에 도달하려는 전혀 새로운 세계 정위를 부여한다. 따라서 칸트는 목적론적인 체계로서 세계의 고찰을 “인간 이성의 가장 커다란 사용 가능성의 기초(die Schule und selbst die Grundlage des größten Gebrauchs der Menschen- Vernunft)”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목적론을 고려하여 칸트는 유기적 자연 산물의 형식만을 목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이것을 넘어서 그의 현존의 목적을 묻고 결국에는 궁극 목적을 묻는 목적론적인 반성의 변화를 이끈다. 따라서 현존의 목적에 대한 물음은 이제부터 자연 관찰을 이끄는 관점이 된다. 즉, 유기적 본질은 통틀어서 자기 현존의 목적을 자신 밖에서 지닌다는 사실이 유기적 본질에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유기적 자연 산물에서는 측정할 수 없는 무수한 외적인 합목적적인 관계가 발견되나, 자연 최후의 목적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모든 유기적 자연 산물은 우리의 판단에 따르면 자기 자신 밖에서 현존의 목적을 지닌다. 결국 자연 최후의 목적으로서 인간의 문화는 우리 속에서 실천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초감각적인 것(자유)에 대응하는 우리 속에 초감각적인 기체(Substrat)를 지시하며, 이 초감각적인 기체는 자유, 즉 최고의 도덕적 목적을 위한 준비적 가능성(vorbereitende Möglichkeit zur Freiheit) 또는 아직 상세히 규정되지 않은 자발성(noch nicht näher bestimmte Spontaneität)으로 생각될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초감각적인 것은 도덕 법칙을 통해서 실천적 견지에서 인식되고 자유로 규정된다. 인간이 그의 고유한 자연 상태의 합목적적인 교양을 통해서 더 높은, 즉 도덕적인 목적에 민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이론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것이 이미 문화를 어떤 정신적인 자발성으로 생각하게 하고, 이러한 초감각적인 것이 자유 자체이거나 자유의 능력을 통해서 규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만 문화 속에서 인간의 자기 전개는 인간의 현존이 궁극 목적이 되는 그러한 것을 위한 준비로서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안과 밖에서 자연 최후의 목적인 문화와 인간 본성의 목적론적인 고찰은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의 초감각적인 기체로부터 자유의 초감각적인 기체로의 이행, 즉 자연의 보편적인 합법칙성으로부터 궁극 목적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이행이 자연 합목적성의 개념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사실은 우리를 위해 실천적인 견지에서 필연적이다. 궁극 목적 내지는 감각 세계에서 이 궁극 목적의 드러남이 현실적이 될 경우, 자연도 역시 그를 위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자연의 특수한 형식과 법칙은 이 궁극 목적에 잘 적용되고 합목적적으로 표상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칸트는 자연목적론은 바람직한 확신으로 도덕적 논의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자연목적론은 궁극 목적이 자연 질서에 근저해 있다는 도덕적으로 정초된 전제를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이론적 증명으로 파악될 수는 없지만, 실천 이성의 원리와 반성하는 목적론적인 판단력의 원리 사이의 일치에 대한 표상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자연 합목적성의 개념을 통한 이행은 자연에 근저해 있는 초감각적인 것과 자유의 초감각적인 것의 일치를 보증하고,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의 간격(Kluft)을 연결시킨다. 즉, 이러한 이행은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을 이어 맞춘다. 그러나 이 이행의 개념은 결코 대상들의 구성적 원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과 자유의 결합 가능성과 자연과 자유에 근저해 있는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러나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는 초감각적인 것의 통일을 생각한다.
자유와 자연의 최고의 결합, 즉 세계 완전성의 개념 속에는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행위와 작용들이 자연 합목적성의 개념 속에 생각된 자연 속에서 특수하게 주어진 것들과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세계 속에서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의 최고 목표인 이러한 표상은 비판적으로 정초된 자연목적론을 옹호한다. 결국 칸트에게서 자연목적론에서 도덕목적론으로의 이행은 불가피하다.
2.헤겔의 칸트 목적론의 수용과 비판:
사변적 목적론으로의 이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전통을 다시 파악하는 데에 목적론적인 논의를 새로이 타당하게 만든 근대 철학자는 당연히 칸트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내적인 합목적성의 관점에서 이러한 목적론적인 사상을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칸트가 목적론을 개념적인 견지에서 수행하고 체계적으로 타당하게 만들었던 방식이 그 이후의 시대, 즉 셸링 또는 헤겔의 사변 철학에서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사변 철학자들은 자연적이며 도덕적인 세계에 관한 당시의 지식을 토대로 하여 이성적 논의를 그들의 사변적 방식으로 가장 완전하게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당시 현실적으로 이해된 지식은 사물들을 위한 이름의 타당성을 반성하지도 않았고, 현상들에 단지 외적으로만 성립하는 수학적 관계들에만 연관되어 있었다는 통찰에 기인한다. 그에 따라 자연의 생성을 의미 있게 파악하고 자연의 내적인 합목적성에서 자기 스스로 유기체화된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개념들에 대한 사변적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우에 비로소 개념은 방식과 특성에서 그 개념이 묘사한 대상에 일치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변 철학이 이러한 칸트의 비판적 목적론을 수용하는 데에서 목적론적인 생각을 선험적인 지평에서 사변적인 지평으로 전환시킨 데 대한 근거는 우선적으로 칸트철학 전체에 놓여 있는 문제들이다:사변 철학자들의 근본 입장에 따르면, 자연적이며 도덕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인식은 오성에 따라 고착된 감각적 현상과 본질(Ding an sich)의 대립에 따르지 않는다. 현상과 본질의 인식 이론적으로 동기지어진 차이는 결국엔 자연적이며 정신적인 삶의 인식과 함께 동일성과 연관된 전제들 아래에서 지양(aufgehoben)되고 내적인 규정 근거와 그것의 외적인 일치라는 연관 구조를 위해서 육체와 영혼의 근원적인 대립 속에서 다시 받아들여진다. 칸트에 따른 규정하는 판단력과 반성하는 판단력의 구별 속에서 간접적으로 얻어진 이성의 입지점은 오성 판단 속에서 서로서로 나누어졌던 계기들을 자체 속에 구조화시켰고 내적으로 규정된 개념 속에서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사변적 이성의 입지점은 칸트의 경우처럼 ‘마치 그런 것 같은(als-ob)’ 가정적 특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오성적인 판단 속에서 서로서로 나누어졌던 유한성과 무한성과 같은 대립으로 고착되었던 규정들을 다시 완전하게 전개된 구체적인 이성 개념 속에서 하나로 모으며, 이러한 토대에서 비로소 그 자체 속에 분류되었던 모습 또는 그 자체 속에서 이해되는 과정이 내적 필연성에서 지각되고 또한 파악된다.
사변 철학자들은 단순히 반성하는 판단력의 입지점에 근거하여 칸트의 견해를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개진한다:
1)칸트적인 목적론적 판단력의 선험적 문제 설정은 자연의 필연적인 전개 속에서 분류되었고 자기 자신 속에서 활동했던 자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지각하고 사태적으로 서술할 가능성을 이론적 이성에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근거는 경험의 제한과 인식 이론적인 차이 그리고 결국엔 우리 앎의 유한성에서 보여졌다. 이러한 우리 앎의 유한성에 따라 인간의 오성, 즉 추론적인 오성은 예지적 현실성의 완전한 진리를 파악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
2)목적론적인 판단은 이해될 수 있고 대표될 수 있는 근거들에서 단순히 기계론적인 또는 유일한 자연 인과적인 세계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나, 이러한 목적론적인 판단이 학문적인 가정 설정의 본보기에 따른 어떠한 구성적인 의미도 주어질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는 철학적 사유를 위해 바로 근대의 계몽이 제거하려 했던 불분명한 상황이 드러난다.
3)계몽의 이러한 딜레마를 고려하여 결국 우리가 자연의 유기체화된 본질을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는 의도 또는 설명될 수 없는 전체 계획에 따라 표상하는 것이 이성에 허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해석 방식은 자연의 내적인 합목적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 은폐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변 철학자들의 칸트 목적론에 대한 입장을 헤겔의 경우를 한 예로 설정하여, 어떻게 헤겔이 칸트 목적론을 수용하고 비판했는가를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고 결국엔 비판적 선험적 물음에서 사변적 물음으로의 이행에서 헤겔의 사변 철학적인 단초들을 논구하고자 한다.
헤겔은 그의 청년 시기의 저술에서부터 후기의 저술에까지 집약적으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대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결에는 체계적으로 의미 있는 두 단계가 구별될 수 있다. 즉, 초기 예나 시절(1801/2), 특히 ?믿음과 앎(Glauben und Wissen)?의 저술 속에서 ?판단력 비판?의 비판과 제한적인 인정 단계와 ?미학 강의?와 ?백과전서? 등에서 사변적으로 변화된 전제 아래에서의 후기적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Bern’ 시기(1795)에 이미 헤겔은 ?판단력 비판?과의 대결 속에서 칸트의 완결된 ‘도덕적 신증명론(Ethikotheologie)’에 따라 자연목적론에 새로운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내세운다. 곧이어 그는 도덕적 궁극 목적과 신의 요청에 대한 칸트적인 이론의 테두리에서 목적론적인 자연 고찰에 부차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덕적 실천적 이성의 순수 근거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헤겔이 계획한 이러한 문제들은 완성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는 칸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헤겔도 목적론적인 자연 고찰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인 신의 믿음을 이끌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 이후 칸트적인 삶에 대한 규정이 그의 문제 지평 속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초기 예나 시기(1801/2)에 헤겔을 사변적 관념론, 즉 이성을 통한 절대적인 것의 완전한 인식 가능성의 논구로 이끈 그의 통찰은 ?판단력 비판?, 특히 여기서 전개된 목적론에 대한 평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차별성 저술(Differenz-Schrift)?(1801)과 더 자세히는 ?믿음과 앎(Glauben und Wissen)?(1802)에서 헤겔은 칸트의 유기체와 자연 목적의 개념 속에서 자연의 파악을 “주관 대상(Subjectobject)”또는 “이성 실재성의 의식 없는 직관(bewußtlose Anschaunung der Realität der Vernunft)”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통찰은 헤겔을 위해선 그 시발점에서부터 사변적인 것이다.
후기 저술에서 헤겔의 칸트 비판은 그의 절대적 주관성의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헤겔은 ?논리학?,?백과전서?,?미학? 그리고 ?역사철학 강의? 등에서 내적인 합목적성의 개념을 칸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였고, 이 내적인 합목적성의 개념과 직관적 오성의 이념 속에서 칸트철학의 타당한 사변적 내용들을 보았다. 헤겔의 설명에 따르면 내적인 합목적성은 대상적인 통일로서 개념과 실재성의 직접적인 통일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칸트의 자연 목적 또는 내적인 합목적성의 개념을 통해선 유기체의 특수한 존재론적인 규정의 인식은 성취되지 않는다. 헤겔은 이것을 파악하고 비판한다. 그는 유기체의 내적인 합목적성의 객관적 존재론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헤겔은 명백하게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향해 있다:움직여진 것(Bewegtes)으로 살아 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그의 목적을 자기 자신 속에 지니며, 그와 함께 이 살아 있는 것은 자기 목적이며, 전체로서 보편적인 것과 부분들로서 특수한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위의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서술된 칸트 목적론에 대한 수용과 비판에서 이미 헤겔 사변 철학의 단초들이 보여졌다. 헤겔은 자연목적론을 그 원리 위에서 고찰하고 자기 나름대로 사변적으로 해석된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 즉 자연과 자유의 결합이라는 전체 문제에 연결시킨다. 이러한 결합을 헤겔은 대립된 부류들을 자신 속에 지양하고 보존하며, 이성 자신의 내적인 규정성을 드러내는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ät)으로 이해한다. 결국 헤겔철학은 이성 이념의 내용,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과 직관과 개념을 결합하는 것에서 참된 실재적인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변적 전제에서 시작된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는 결합을 의미하는 이러한 동일성을 이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반성하는 판단력을 위해 시도했고, 그와 더불어 이성적 절대자의 본래적인 인식을 포기했다. 따라서 칸트는 의식된 직관으로서 이성의 실재성 속에서 주관적으로만 이성에 관해 반성하고 또한 유기체에 관해 반성한다. 그 때문에 헤겔은 결국 우리 속에 있는 초감각적인 것이 규정되어 있지 않고 인식될 수 없다는 칸트적 입장을 비판한다. 헤겔에게서 자연 개념과 자유 개념의 동일성은 초감각적인 것의 인식을 철저히 가능하게 하고 정당화한다. 목적론은 헤겔 고유의 서술 속에서 자연목적론에 제한되지 않고 사변적 논리학에서 보편적 범주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근본적으로 사변적 논리적인 의미 속에서 헤겔의 경우 목적은 ‘구체적 보편성(das konkrete Allgemeine)’이며, 목적론적인 과정 속에서 이러한 과정에 외적인 대상성으로 나아가고, 이러한 객관성 속에 보존되어 있는 ‘개념(Begriff)’이다:목 적은 한 객관에 내재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목적으로서 개념은 객관성을 완전하게 규정한다. 이러한 목적 개념과 이를 통한 객관성의 규정은 헤겔의 자연철학 속에서 자연목적론에 근거지어져 있다. 목적은 유기적 과정의 내재적인 개념이다. 내적인 개념으로서 목적은 물론 추론적인 보편성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보편성으로서 한 유기적 본질 속에 현존한다. 목적의 이러한 파악은 유기체와 살아 있는 것의 특수한 자연철학적 규정과 자연과학적 규정을 위한 주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한 유기적 본질의 내적인 목적 규정은 객관적으로 타당하고 그와 함께 참된 철학적 인식으로 간주된다.
헤겔의 경우 자연목적론은 직관하는 정신(anschauender Geist)과 살아 있는 자연(belebte Natur)의 실재성 속에서 이성 개념의 표현을 의미한다. 자연목적론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은 실재성에서 현존한다. 따라서 헤겔은 자연목적론을 현상과 실재성에서 이성의 무의식적인 직관(bewußtlose Anschauung der Vernunft)으로 해석했고, 이러한 자연목적론에서 자연의 형이상학적 근거로서 직관적 오성의 이념이 성립한다. 헤겔에게서 직관적 오성은 직관과 사유의 근원적이며 절대적인 통일을 의미하며 최고의 인식을 목표로 한다. 직관적 오성을 위해선 표상 내용으로 이해된 개념과 직관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그와 함께 직관적 오성은 보편적인 것을 특수한 것 내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나누어진 것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표상 내용으로서 상이한 인식 방식에 속하지 않는 이러한 개념 규정은 직관적 오성을 위해 그 자체 속에서 통일적이며 구조화된 전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통찰 속에서 헤겔은 구체적 보편적인 것의 사변적 인식이라는 그의 고유한 계획을 구상한다. 칸트와는 달리 헤겔에게서 직관적 오성이 서술하는 통일성은 대립된 규정들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이해되고, 대립된 규정들은 이러한 동일성에서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고 비자립적인 요소들로서 보존되어 있으며, 절대적 동일성이 현상 속으로 이행하는 데에서 분리된 규정들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한한 의식 속에서 인식 근원들의 분리, 직관과 개념 그리고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의 분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성에서 시작하여 헤겔은 직관과 개념의 방법론적인 이원성과 직관과 개념 상호간의 상이한 관계를 서술한 후에 이 둘의 절대적 통일성을 다시 획득하려고 한다. 이러한 통일성을 헤겔은 칸트의 경우처럼 이념(Idee)이라고 규정하나, 헤겔의 이념은 구체적인 보편성으로, 이러한 이념 속에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 하나로 있다. 셸링의 경우처럼 상이한 규정들이 단적으로 사라져버릴 만큼 저 통일성이 절대적으로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저 통일성에서 상이한 규정들은 지양되고 지양된 것으로 보존된다. 대립된 규정들의 절대적 동일성이라는 구조는 헤겔을 위해 본래적인 참된 존재자, 즉 한 실체의 본질을 특징지으며 유한한 의식에 부과된 모든 하나(All-Eine)며, 이 속에서 모든 특수한 것이 예지적으로 직관되고 파악된다.
종결적인 의미로서 이행의 문제, 즉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의 이행 또는 선험적 문제 지평에서 사변적 문제 지평으로의 이행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칸트에게서 반성하는 판단력은 자연 합목적성의 원리를 통해서 자연과 자유 그리고 그러한 원리들의 결속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속은 단지 상이한 원리들과 영역들을 자립적인 것으로 존립하게 하는 이행일 뿐이다. 그에 반해 헤겔에 따른 유기체의 파악으로서 자연목적론은 사변적 논리학의 범주들에 기초하여 철학적으로 객관적인 인식이고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처럼 헤겔을 위해서도 이러한 목적론은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살아 있는 자연적인 존재자는 헤겔이 내재적 구체적 보편성으로 구상했던 목적을 통해 규정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이행 개념은 더 이상 칸트의 경우처럼 도덕성의 준비가 아니라, 이념과 감성의 화해(Versöhnung)를 향유하는 유한한 의식의 상태며, 이러한 상태 속에서 저 유한한 의식은 직접적으로 실재 신적인 것(das reale Göttliche)을 직관하고 이러한 신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관한다. 그러나 의식의 이러한 향유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이러한 상태에서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다. 그 의식이 나아가는 더 높은 상태는 도덕성이 아니라, 헤겔에 의해서 사변적으로 해석된 기독교적 종교성 또는 거기에서 비롯된 철학적 사유의 상태다.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길, 이 길은 근대 시기의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영역에서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났고, 더욱이 이 길은 헤겔식의 해석 전망에만 열려져 있으며, 칸트적인 이론의 근본적인 선택을 은폐하는 사변적 관념론적인 구성으로 뚜렷해졌다. 결국 이행 상태의 의미 변화는 관념론적인 철학의 의미 변화를 반영한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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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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