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제철업자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에게서 풍부한 예술적, 지적 능력을 물려받았다. 부모는 음악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가정에서 음악은 중요한 것이었다. 14세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은 뒤 수학, 과학 중심의 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고 베를린에서 2년간 기계 공학을 공부했다. 1908년 UK 항공학 연구소에서 대기권 상층부 연의 비행을 실험했다. 맨체스터대학 공학 실험소의 연구생으로 일하면서 프로펠러의 날개 끝에 역추진 제트를 다는 연구, 실험용 엔진 고안 및 제작 지휘 등을 하며 시험 비행에 성공한다. 프로펠러의 고안과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수학에 관심을 가졌고 수학의 기초를 이해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러셀의 저서 <수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1093)>는 결정적 도움을 주었고 1911년 러셀이 있는 케임브리지에 합류한다. 논리학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며토론의 날들을 보낸 뒤 노르웨이의 스홀덴으로 가 논리학 연구에 매진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고 곡사포 연대 포대관측병으로 용맹을 떨친다.장교훈련을 받고 포병장교가 되었고 1918년 이탈리아 전선의 한 야전포대로 전속되기까지 동부전선에서 근무했다. 전쟁 기간에도 논리학과 철학의 문제들을 계속 연구하며 공부한 것들을 공책에 적어 군장 속에 넣고 다녔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책을 완성하여 러셀에게 보냈다.
이 글은 1921년 <논리철학 논고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이하 논고>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75페이지에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간결한 명제들을 배열하고 소수점을 사용해서 번호를 매겼다. 언어의 본성,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 논리학, 윤리학, 철학, 인과성과 귀납, 자아와 의지, 죽음과 신비, 선과 악 등의 주제를 다루며 어떻게 언어가 가능한가, 어떻게 일련의 단어를 입밖에 냄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상대가 화자를 이해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핵심 질문을 끌어낸다. 우리는 그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그건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명제)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림처럼 이 세계의 어떤 것을 그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 그림이론이라 한다. 그림이론은 종이 위에 씌어진 기호들과 외부세계의 어떤 상황을 설명한다. 명제는 실재의 단순요소들과 상호 관련되는 것들의 단순 기호들을 배열한 것이다. 그림이 실재에 닿는다. <논고>의 특징 중 하나는 언어의 한계다. 명제적 그림은 그것이 표상 하는 상황과 정확하게 똑같은 수의 요소를 포함한다. 둘은 똑같은 논리적 형식을 가진다. 논리적 형식은 표상의 형식인 동시에 실재의 형식이다. 명제는 모든 것을 실재의 모든 것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명제와 실재 사이에 그런 형식이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 즉 논리적 형식을 표상하지는 못한다. 형식과 더불어, 실재의 단순 요소들의 필연적 존재, 사고하고 의지하는 자아의 존재, 절대적 가치의 존재 등도 말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각할 수 없다. 말할 수 없것들은 실재로 있다. 이 주장 역시도 말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다. 어떤 통찰을 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무의미하다. 암튼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끝으로 철학의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1919년 일상으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포기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돈 때문에 접근하는 친구들이 생길까 염려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검소한 사람이라 돈이 없어도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것같다. 초등교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여러 작은 도시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불행했고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실험하던 중 다른 교사들, 마을 사람들과 마찰이 생겨 1925년 선생을 그만두고 빈 근처의 수도원에서 정원사 보조원으로 일했다. 그 뒤 빈에 저택을 건축해달라는 누나의 부탁을 받고 2년에 걸쳐 특유의 집중력과 독창성을 발휘한다.
1920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즉흥적인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와 학생들의 강의 노트를 통해 점차 논리철학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 그와 함께 하는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지성, 열정적 진지함, 사고방식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노트. 논고, 원고 등에 글을 쓰며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글들은 사후에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gen, 1953, 이하 탐구>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온다. 10년 정도 지나자 <논고>와는 다른 관점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논고>의 견해들을 거부한다. 가령, 한 명제는 하나의 그리고 단 하나의 완전한 분석을 갖는다. 그래서 모든 명제는 하나의 확정적 의미를 갖는다. 언어와 실재는 각각 단순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언어, 명제, 사고 등의 본질이 존재한다. 세계엔 선험적인 질서가 있다. 등등. 또한 모든 표상이 공통의 논리적 형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가정을 거부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도 버린다.
<논고>에서 언어사용에 무한히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이 다양성 밑에는 통일적 본질이 있을 수밖에 없고 철학자는 이것을 꿰뚫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 탐구>에서는 이러한 믿음은 환상이고, 다양성 속에 숨어있는 통일성이란 없다고 주장했다. 철학자는 기억, 사유, 낱말이해, 규칙준수 등의 성질에 관해 '지식이란 무엇인가?', '의도란 무엇인가?', '주장이란 무엇인가?' 등 경계에 대한 질문을 고집스럽게 한다. 이것은 일상적인 담화나 의사소통에서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거나 언어로 작업할 때 그런 말을 적용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기술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이 편견을 깨뜨리고 인식, 의도, 주장 등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파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를 예로 들어 언어놀이에 공통성이 있다는 가정을 버리게 하려고 애썼다. 즉 어떤 놀이는 재미있지만 모든 놀이가 그런 것은 아니고 어떤 놀이는 경쟁하거나 이기고 지는 것이지만 모든 놀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놀이에 특징이란 없다. 놀이들 사이에는 '겹치고 엇갈리는' 유사성의 그물만이 있다. 이를 가족유사성이라 한다. 놀이라는 단어가 가족유사성만을 갖는 여러 경우에 적용되는 것처럼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단어들, 인식, 명제, 기억, 의도, 사고, 규칙, 믿음 등도 가족유사성만을 갖는 여러 경우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믿음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에 믿음이라고 불린 것들 중 어떤 것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용어의 적용이 과거의 경우로부터 새로운 경우로 확장된다는 것은 마치 물레에서 실을 뽑을 때 가닥과 가닥을 서로 꼬는 것과 같다. 그 실의 힘은 어떤 하나의 가닥이 이 실 전체 길이만큼 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많은 가닥들이 서로 겹쳐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탐구>의 2번째 특징은 개념이 어떻게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과 연결되는가, 인간의 삶에서 개념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이다. 인간이 제공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사에 관한 소견들이다. 어떤 경우에, 어떤 목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말하는가? 어떤 종류의 행위가 이 낱말에 수반되는가? 어떤 장면에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런 낱말을 사용했는가?' 개념들의 기능과 유의미성은 만질 수 없는 정신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개념들이 끼여들어 있는 삶의 형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1939년 비트겐슈타인은 무어가 맡고 있던 케임브리지의 철학교수직을 승계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바로 런던의 가이스 병원에서, 이어 로열 빅토리아 병원에서 실험실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1차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철학의 문제들에 대한 사고와 저술을 계속했다. 1944년 가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강의와 토론을 계속 했다. 1947년 <탐구>의 완성을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일랜드 서부 해안 가의 한 오두막에서 살았다. 1949년 가을 암에 걸렸으나 더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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