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 론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0426 ~ 19510429)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고, 대표적으로 전기는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 후기는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에서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언어를 통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의 과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언어의 논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논고>에 따르면,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다. 명제는 세계의 그림이고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요소명제로 이루어진다. 세계는 원자적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을 그리지 않는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미한 명제로 그리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후기에 들어오면 <논고>의 의미그림이론을 비판하고 언어의 다양성, 언어와 행위와의 관계 등에 주목한다. 그리고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언어는 실재의 그림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극히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리고 언어가 이런 도구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은 삶의 형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언어는 그 언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형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Ⅱ. <탐구>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
1. 의미그림이론에서 언어놀이로
<탐구>에서 언어는 실재와 대응한다는 의미그림이론을 부정한다. 의미그림이론이 언어의 기초적인 일부 기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원초적 형식을 빌어 가르친다. 어떤 대상, 예를 들어 책을 지시하면서 책이라는 말을 발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어의 '예시적 교육'이다. 예시적 교육은 설명이 아니라,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반복교육, 즉 훈련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훈련방법은 단어와 사물의 대응관계를 확립시키고, 아이가 어떤 단어를 들으면 그 대상의 그림이 그 단어의 의미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언어관은 의사를 전달하는 체계 중 한 체계만을 기술하였을 뿐 모든 체계를 기술한 것이 아니다. 비록 문장들이 이름의 집합처럼 보이고, 이름이 어떤 대상을 지시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어의 의미가 대상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수'나, '그리고'나, '아니다'와 같은 말들은 어떤 직접적인 대상을 지시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은 예시적 정의로 이해시킬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의 이름만 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물을 수 있으려면 무언가를 이미 알고(혹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시적 교육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예시적 교육이 언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려면 단어의 전반적인 역할이 분명하게 밝혀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언어의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생소한 상황에서는 어떤 사물의 이름도 물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시적 교육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의미는 그 말에 대응하는 사물을 뜻한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A씨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죽었다'라고 말하거나 'A씨의 의미가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하는 중에 상대에게 "망치"라고 했다면 그는 망치라는 말의 표상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실제적인 목적, 그것을 건네 달라는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만일 이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의미그림이론으로서만 언어를 이해한다면 , 둘 사이에 진행되는 언어놀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놀이는 "언어와 그것에 얽혀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총체"다. 언어놀이를 하려면 언어가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언어놀이에서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2. 언어놀이의 다양성
언어의 의미는 인간 활동 속에서의 언어 사용에 달려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문장들이 있다. 문장중에는 대상을 기술하지 않으면서도 각기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 문장들이 수도없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하나의 본질적인 기능을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기능과 용도로 이해할 수 있다. 다양성도 한번 주어진 그대로 확정되거나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언어들이나 새로운 언어놀이들이 생겨나고 어떤 것은 없어지며 잊힌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고대도시로 볼 수 있다. 좁은 거리들과 광장들, 옛 집들과 새 집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증축된 집들, 또한 똑바르고 규칙적인 거리와 통일된 형태의 집들로 둘러쌓여 있다." 언어놀이에는 공통된 본질은 없고 중복되고 겹치는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언어놀이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그들간의 한계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들만큼 다양하다.
3. 가족 유사성
일반적으로 공통된 것이 있어야만 놀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살펴보면 어떤 공통적인 것은 볼 수 없고, 그것들 속에서 복잡하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얽혀있는 유사성만을 볼 수 있다. 장기놀이, 바둑놀이, 구기놀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 모두에 공통되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장기놀이의 여러 가지 관계들을 관찰하고 바둑놀이로 넘어가 보면 장기놀이와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지만 장기놀이가 가지고 있지 않는 많은 특징도 발견될 수 있다. 다시 구기놀이로 넘어가 보면 몇 개의 공통점은 남아 있지만 바둑놀이가 가지고 있는 더 많은 특징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놀이들을 계속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이것들의 공통점은 사라지고 "유사성이 부분적으로 겹치고 교차되는 그물의 조직, 즉 어떤 때는 전면적으로 유사하고 어떤 때는 상세한 점까지도 유사한 조직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한 가족의 구성원간의 닮음과 같다. 한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코의 모양, 눈빛, 머리색깔을 그대로 닮았다. 그러나 다른 아이는 코의 모양은 닮았으나 눈빛, 머리색깔은 완전히 다르다. 또 다른 아이는 이 모든 특성들은 닮지 않고 걸음걸이와 기질만 물려 받았다. 가족 구성원들에겐 어떤 공통된 특성은 발견할 수 없고 '겹치고' '교차되는' 유사성만 있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어떤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상이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관계 혹은 관계들 때문이다." 언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본질은 없으며, 단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있는 관계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관계를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 한다. 모든 놀이들에 공통된 본질은 없고 가족 유사성만 있다면 '놀이'라는 단어의 의미설명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어떻게 우리는 상대에게 놀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상대에게 놀이들을 기술하고 '이것과 또 이와 유사한 것들을 놀이라 부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놀이라 불리는 것에 어떤 공통된 것은 없다 할지라도 다양한 종류의 놀이들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놀이'란 단어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예들을 통한 설명에 의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 지를 알게 된다. 이처럼 예를 통한 의미설명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동일한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삶의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미설명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4. 언어의 규칙성
언어를 놀이와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어와 놀이가 모두 규칙에 지배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놀이들이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규칙이 없이 아무렇게나 진행할 순 없다. 언어도 장기 등과 다르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따르는 것'(folloeing a rule)이 무엇인지를 분석함으로써 언어의 특징을 밝힌다.
규칙은 그 무엇보다 공적인 것이다. 우리가 규칙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을 단지 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꼭 한 번만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어떤 기호에 특정한 방식으로 숙달되어 있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이 단 한 번만 규칙을 따른다고 해도 이미 규칙을 따르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언어놀이를 할 때 어떤 규칙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언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낯선 부족의 언어와 그들의 행위들 사이에 어떤 규칙성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해 보자. 만일 "그들이 말한 것, 즉 그들이 낸 음성들과 그들의 행위들 사이에 아무런 규칙적인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그들의 언어적 행동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규칙성이 없는 언어를 사적언어(Private language)라 한다. 사적언어는 규칙성이 없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자신도 언어놀이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적언어는 언어라 할 수 없다. 언어놀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규칙뿐만 아니라, 규칙에 따르는 행위가 전제된다. 언어와 삶의 형식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Ⅲ. 삶의 형식
언어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로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언어는 인간적, 사회적 맥락과 분리할 수 없다.
1.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려면, 정의의 일치뿐 아니라, 판단의 일치가 요구된다." 가령 '붉다'라의 의미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말의 정의를 알아야 하고 화자와 상대간에 그 정의가 일치해야한다. 또한 서로의 반응이 일치해야 한다. 이것을 판단의 일치라 한다. 판단의 일치는 단어적용방식의 일치, 어떤 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치를 말한다. 동일한 의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의와 판단이 일치하는 것은 언어사용방식이 일치하는 것이고, 언어사용방식이 일치하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2.삶의 형식의 두 가지 국면
<탐구>에서 삶의 형식은 19, 23, 241, 654, 174 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설명이 자세하지 않아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 연구자들은 삶의 형식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 문화적 특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Ⅳ.결 론
1. <논고>에서 세계와 언어, 이 두 가지 사이의 구조적 동일성을 의미그림이론을 통해서 주장했고 <탐구>에서는 언어란 삶의 형식에 의미가 달렸다고 말한다.
2. 언어놀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생성소멸이 자유롭다.
3.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선 화자와 상대 사이에 그 언어의 정의와 판단이 일치해야 한다.
4. 삶의 형식에는 원초적(생물학적) 삶의 형식과 문화적 삶의 형식의 두 국면이 있다. 삶의 형식은 언어의 궁극적인 근거지만 한계이기도 하다. 언어적 행위는 삶의 형식에 제약받기에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5 언어교육은 훈련을 통해 언어공동체의 행위를 습득하는 것이다.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면 하나 이상의 언어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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