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istotle(기384-322)/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반응형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이 시간엔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플라톤은 회화와 시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회화는 테크네 - 인간적 제작활동 - 의 일환으로 간주했지만, 시는 신적 영감의 소산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도 일종의 테크네 라고 하면서, 시 역시 인간적 제작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시가 하나의 테크네로 간주된다고 할 때, 회화를 비롯한 테크네 일반과 마찬가지로 시를 짓는데도 일련의 규칙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의 제작술에 대해 기술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적 테크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색채와 드로잉을 통해 사물의 시각적 외양을 모방하는 테크네, 즉 회화와 조각과 (2) 운문(verse), 노래, 춤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테크네, 즉 시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와 회화는 모두 모방적 테크네로 간주될 수 있겠는데, 이 두 활동의 차이라면 그 매체입니다. 말하자면, 회화는 색채와 드로잉을, 시는 운문을 그 매체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운문으로 쓰여진 모든 것이 시는 아닙니다. 고대에는 시 이외의 다른 저술들도 운문으로 쓰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는 그 대상의 측면에서 역사나 철학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을, 시는 인간의 행위를, 철학은 진리를 다룹니다. 또한 시 예술이라고 불리는 운문 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인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은 극(희극, 비극)과 서사시인데, 비극과 서사시는 그 행위의 진지함과 엄숙함에 있어서 희극과 구별되며, 다시 비극과 서사시는 그 양식에 있어서 극적이냐 아니면 서술적이냐에 따라 서로 구별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제작하기 위한 일련의 규칙을 제시하는 것을 <시학>의 주요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학>의 초반에서 시의 장르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한 후, 나머지 대부분의 내용은 비극(tragedy)에 대한 이론으로 메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학>은 곧 "비극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여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정의는 "진지하고 엄숙한 인간의 행위를 극적인(dramatic) 혹은 공연의(performative) 양태로 운문을 매체로 하여 모방한 것"이 됩니다.

 

왜 사람들은 비극, 곧 진지한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할까? 당시의 이런 현상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주는 즐거움을 <시학>에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우선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방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우며, 모방의 인지는 즐겁다."

 

이러한 설명에서 보여 지는 모방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그것과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플라톤이 모방적 테크네, 회화와 조각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했는지에 대해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플라톤이 회화와 조각을 "환영(illusion)의 창조다, 기만적인 눈속임이다" 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적이며, 모방을 알아보는 것은 - 즉, 인지하는 것은 - 상당히 즐거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컨대 개의 그림을 보고 그것이 '개'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이라는 것입니다. 곧 모방은 일종의 학습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학습과 경탄은 즐거운 것이므로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 또한 즐거운 것임에 틀림없다. 예컨대 회화, 조각, 시와 같은 모방작품은, 그것의 모방 대상이 즐거운 것이 아닐지라도 즐거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방 대상이 아니라 모방과 모방된 대상이 일치한다는 추론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우리는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방이 즐거운 것은 그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특별히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최상의 즐거움은 학습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에 대한 견해 차이는 그들의 형이상학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진정한 지식은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집 강아지, "진돌이"를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을 때, "야! 진돌이다"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보다는 "아! 개는 이렇게 생겼구나"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지식을 얻고 있는 거라는 얘깁니다. 즉, 하나의 개별자로서 "진돌이"에 대한 인식보다는 보편자 "개"의 인식이 보다 가치 있는 지식의 습득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가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초월적 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보편자는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내에서 발견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할 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개체(the particular)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개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형상(form)은 보편적인 속성, 혹은 본질적인 것을 의미하고, 질료(material)는 감각적인 물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돌이"를 우리가 한 마리의 "개"로 인지하는 것은 하얗고 복스러운 털, 쫑긋한 귀, 씩씩한 네 다리를 가진 진돌이가 개의 보편적 속성, 즉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초월적인 세계나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그가 질료와 형상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형상 없는 질료, 혹은 질료 없는 형상을 내세운 적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이며, 형상과 질료의 조화이기 때문입니다.

 

  

눈에비친햇빛

 

반응형

'Aristotle(기384-322) >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타르시스  (0) 2012.09.24
비극  (0) 2012.09.24
아리스토텔레스 - 순수 예술 일반  (0) 2012.09.24
아름다움  (0) 2012.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