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개념의 허구성으로 인한 교회 권위의 추락, 르네상스의 전개로 인해 중세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 스코투스와 오컴이 과학적 탐구와 논리학을 구별하고 신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신학과 철학은 분리되었다. 이런 기존 철학의 중심이 붕괴되자 회의론(모든 명제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의 경향이 이어진다. 르네상스로 인한 인간 이성의 믿음이 다시 시작된 것과 달리 신의 이성을 추구하던 신학자들은 신의 의지 앞에 인간의 이성이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콜라철학자들은 과학적 탐구는 포기하고 논리학에 치중했다.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는 <수상록>을 통해 기존의 교리나 학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극단을 넘어서는 탐구정신을 발휘했다. 철학하는 자세로 회의주의를 활용한 것이다. 이와달리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철학적 방법으로 회의주의를 활용했다.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의심한 것이다. 감각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심지어 이 모든 것이 꿈일 수도, 수학이라는 학문도 악마의 놀음일 수도 있다고 가정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방법적 회의를 통해 결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봐도 지금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고 있는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하고 있는 자신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출발점을 찾는다.
데카르트는 종종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경험적 인식과 반대되는 것이 직관이라 말한다. 직관은 맑은 정신을 통해 명석판명한 지식이 제공될 때의 상황을 일컫는다. 명석판명이란 너무나도 분명해서 부정할 수 없고 다른 지식들과도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런 직관적 지식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기에 증명이 필요없는 공리와 같다. 이런 공리들을 가지고 연역의 과정을 거쳐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공리를 통해 나온 결론 또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은 과연 명확하고 신뢰뢰할 만한 것일까?
의심하고 있는 자신으로부터 불완전성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성에 대한 인식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은 완전한 신이 부여한 것이므로 명석판명하며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신은 선하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인간 지성의 명석판명함을 위해 신을 이용했으나 신이 왜 선한지에 대한 답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한다. 물질은 정신에서 나올 수 없고 정신 또한 물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은 사유를 특징하는 것이기에 공감을 점유하는 개념인 연장을 가질 수 없고 물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공간을 차지한다. 이 둘은 각각 다르기에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전혀 다른 실체가 붙어 있는 것이다. 이 둘이 붙어 있는 이유는 둘을 연결하는 기관인 송과선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목적인, 작용인 등을 논할 필요없이 오직 수학과 기하학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기계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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