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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추상화로 가는 길 Abstrac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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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Pablo Picasso)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입체주주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다. 원근법과 명암이 사라졌고 그림 속 여체는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몸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초기에 외면을 받았으나 동료 브라크(Georges Braue)와 판매상 칸바일러(Danel-Henry Kahnweller)의 노력으로 서서히 명성을 얻어갔다. 

 

피카소는 처음에 세잔의 방식을 따라 기하학적 형태들을 이용해 그렸다. 그러다 점차 섬세한 면 분할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다각도로 표현했다. 그리고 브라크가 파피에 콜레(신문지나 벽지 등 실제 물건들을 화면에 붙이는 몽타주 기법)를 시도하면서 구체적 형태를 회복시켜 나갔다. 이를 종합적 입체주의라 부른다. 

 

당대 피카소의 라이벌로는 마티스(Heri Matisse)가 있다. "정확함이 진실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눈에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을 부정하고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대상과 다른 색채를 사용한 고갱이나 고흐의 노선을 더 세게 밀고 나간 것이다. 마티스와 동료들은 더 이상 자연과 대상의 재현을 위한 색을 사용하지 않았다. 색체 그 자체의 자율성을 가지고 형태와 양감, 공간을 대체했다. 명암이나 원근은 물론이고 형태와 색채와 색, 면과 선들도 기존의 전통에서 탈출했다. 이들을 야수파라고 부른다. 마음과 영혼의 표현력을 더욱 세운 것이기도 하다. 이후 마티스피카소의 영향으로 입체파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색채 예술을 확립한 존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들외에 표현주의가 있다. 고흐, 뭉크(Edvard Munch), 클림트(Gustav Klimt)에서 시작된 이 조류는 이후 실레(Egon Schiele),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빈분리파를 낳는다.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려 했기에 이들을 표현주의라 부른다. 뭉크는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통해 공포, 고독, 고뇌와 같은 내면의 감정을 담았다. 클림트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담아내려 했다.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 등으로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요소를 강조했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z)는 세계여행 그리고 잘못 놓인 자신의 그림을 보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낀 경험을 통해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실 재현을 버리고 점, 선, 면으로 구성된 그림 세계를 전개한다. 음악이 현실을 재현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사랑받듯이 그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연에서 직접받은 인상, 무의식적이고 우발적인 즉흥,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잡는 구도 등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청기사파를 결성 추상화를 알리는 한편,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등과 같은 책을 발표해 이론적 토대를 밝혔다. 

 

칸딘스키가 표현주의를 이어받은 마음이나 심리를 담은 뜨거운 추상이라면, 몬드리안(Piet Mondrian)은 입체파의 의지를 받아 조형원리를 담은 차가운 추상을 전개한다. 기울어진 사선은 우연성과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보아 불순물로 여기고 수직선은 생기, 수평선은 평온을 나타내기에 순수의 선으로 여겼다. 후자의 두선을 적절히 교차시키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색에서도 순수성을 고집해 초기에는 빨강, 파랑, 노랑과 흰색, 검은색만을 사용했다. 이는 사물의 형태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형태의 불변적인 기본 요소를 나타내려 한 것이다. 이런 그의 스타일을 신조형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는 위 둘과 달리 아무 것도 담으려 하지 않았다. 미술이 아무 것과도 연관 맺지 않고 스스로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아마도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Black Square)을 보면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하얀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 하나 그려 넣은 그림이다. 말레비치는 이후에도 색도 없고 구상도 포기한 채 사각형, 원형, 십자가 등을 무채색으로 그려넣은 비가시적 대상을 향한 세계로 나아갔다. 이를 절대주의라 부르기도한다. 

 

현대 미술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작품을 고르라면 아마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Fountain)일 것이다. 뉴욕 앙데팡당전에 전시한 이 작품은 시중에 파는 남성용 변기를 사다가 놓은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은 소변기라는 소재, 창작품이 아닌 기성품이라는 점, 창작행위가 아닌 선택 행위도 예술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 등으로 기존의 예술계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유도한다. 이런 반예술적인 표현은 누보레알리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아트, 개념미술 등으로 이어나간다. 

 

세계 1차대전으로 인간의 문명과 문화에 회의를 느낀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인 차라(Tristan Tzara)의 선언을 시작으로 무계획, 무변명, 무설명 등을 내세워 반문화, 반예술을 외친다.이를 다다라 한다. 이들의 전략은 유럽사회를 비판하고 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성과 제도 속에 억압되어 있는 상상력을 일깨우려 했다. 이후 앙드레 브레통(Andre Breton) 초현실주의를 선언하고 이성, 논리, 과학을 거부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택한다. 프로이트의 자동기술법에 힌트를 얻어 종이를 오려붙이는 꼴라주, 종이를 문질러대는 프로타주 등의 기법을 사용했다. 달리(Salvador Dali)는 꿈의 세계를,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모순, 대립되는 요소를 동일한 화면에 결합하거나 엉뚱한 환경에 배치하는 기법을 통해 낯선 세계를 탐색했다.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은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묘사하는 걸 포기한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적인 방법을 이어받아 기존의 이젤, 팔레트, 붓 등을 내팽개치고 "새로운 요구는 새로운 기법을 필요로 한다"고 외쳤다. 대신에 딱딱한 붓, 삽 등을 들고 캔버스 주변과 위를 걸어다니며 에나멜이나 유화 물감등을 흘리고 다녔다. 그가 훑고간 자리엔느 한 사람의 정해진 시간동안 펼쳐진 무의식 행위만이 발자취처럼 남아 있었다. 이런 행위를 드리핑이라 한다. 이때부터 액션 페인팅은 추상표현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지만 무의식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전위예술로 이어진다.

 

세계 2차 대전으로 세계 1위의 나라가 된 US의 소비사회는 만화의 형식, 주제, 기법 등을 사용한 그림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추상화의 시대가 가고 대상은 있으나 중립성과 냉정함을 담은 그림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은 이것을 대량생산해 기계문명 시대의 무한 복제성을 상품으로 팔았다.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대신에 사회적 메시지나 미적 가치도 추구하지 않았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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