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이하 A)는 그리스 북부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18살에 플라톤(이하 P)의 아카데미아에 들어갔고 P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남았다. 소아시아의 앗소스로 가서 철학과 생물학을 연구하며 5년을 보냈고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 355년 리케이온을 설립하고 12년을 강의했다. 알렉산더 사후에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자 역적으로 몰려 고발당해 칼시스로 도망갔고 떠나며 소크라테스의 예를 들며 "다시 한 번 철학에 대해 죄를 짓는 짓을 막기 위해"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1년 후 칼시스에서 사망했다. A의 사후 제자 테오프라스투스가 리케이온의 지도자가 되었고 3세기 경, 플로티노스는 A의 철학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뽑아 신플라톤 주의를 만들었다. 아랍에서 A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13세기에 이르러 유럽으로 그 연구들이 유입되었다. 그 선봉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많은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이나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1060103 ~기원전 431207)가 "황금의 언변"이라 칭송했던 일반인을 위한 글들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제자들을 위한 강의안과 논문 등이 전해진다. 저작의 범위는 천제, 물고기, 바람, 바다, 날씨, 비극, 도덕, 정치, 기하학, 형이상학 등 광대하다.
P의 제자지만 그의 무비판적인 추종자는 아니다. A는 객관적인 지식 전반을 학문적 범위로 삼았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구성과 설명을 시도했다. 이를 개별과학, 제1철학이라 불렀다. P에게 지식이란 의견이 믿음과는 달리 실재적이고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한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 형상의 세계에 대해서만 지식이란 말을 쓸 수 있고 항상 변하는 감각으로 얻은 세계는 알 수 없으므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는 P의 형상론을 비판하며 지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완전한 형상이나 이데아로 이루어진 세계가 따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 오직 개별적인 물질적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사물의 존재가 형상의 존재로 설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어떤 대상의 본질을 그 대상과 별개인 어떤 것으로 허용한다면 그 본질도 다시 그것과 별개의 그것만의 본질을 갖고 있어야 하며 이런 상황이 끝없이 되풀이 될 거라 말했다. 이에 대해 A는 과학의 직접적인 최초의 전제에 대해 반복적인 경험이 마음안에 보편자로 나타나고 그걸 통해 지성이 보편자를 인식한다고 말한다. A는 보편자와 개별자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위의 설명은 보편자가 일정부분 P의 형상론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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