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1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매번 상이한 방식으로 철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식 그 자체가 바라는 목표며 그 어떤 실천적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이론 철학a) 운동하지 않을 수 없는 물질적 대상을 다루는 자연학 또는 자연철학b) 운동하지 않지만 질료로부터 분리되지는 않은 대상을 다루는 수학c) 질료로부터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 운동도 하지 않는 대상을 다루는 형이상학 2) 실천철학은 주로 정치학을 다루는 것이지만 군사학과 경제학 및 수사학을 하위 학문으로 거느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문들이 품고 있는 목적이 정치학에 종속적이고 또 그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3) 제작철학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또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인륜적 행위를 포함하는) 실천 철학의 경우에서처럼, 행위의 산물을 다루지 행위 그 자체를 다루지는 않으며 그 모든 관심과 목적에 있어서 기술론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흔히 “형식” 논리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사고의 형식들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따라서 분석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적절한 성격 규정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논리학이 외부 실재와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사유 형식에만 관계한다고 상정한다면 그것은 매우 커다란 오류다. 그는 주로 증명의 형식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적 증명의 결론이 실재에 관한 어떤 지식을 제공한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에서, 그 결론은 단순히 논리의 형식적 법칙에 따라서 올바르게 연역된 것만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결론이 실재 세계에서 검증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실재론적 인식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 논리란 사고의 형식에 대한 분석이긴 하되, 실재를 사유하고 사고 안에서 실재를 개념적으로 재생산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이며, 참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외부 세계에서 검증되는, 실재에 관한 진술을 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이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들이 언제나 그것들이 마음에 의하여 파악된 것과 똑같이, 마음 밖의 실재 속, 예를 들어 보편자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 논리는 실재에 관해 사유하는 인간의 사고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범주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논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범주들은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의미하지만 - 예를 들어 실체들의 성질을 단정하는 것 - 동시에 범주들은 사물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물이란 실체이나 현실적으로는 우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도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칸트의 선험적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논리는 지식을 이루어내는 능동적 과정에서 오직 마음에 의해서만 부여되는 사유의 선험적 형식을 격리시키는 일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의 실재론자의 인식론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사고의 범주가 동시에 마음 밖의 실재에 대한 객관적 범주이기도 하다고 상정한다.
3
『범주론』과 『변증론』에는 범주 또는 술어의 수가 10가지로 주어진다. 실체 - 인간, 말 따위양 - 3야드의 길이질 - 흰색관계 - 두 배장소 - 시장에서시간 - 작년에자세 - 눕다, 앉다상태 - 무장한, 신발을 신은능동 - 자르다수동 - 잘리다 하지만 『분석론 후서』에는 자세와 상태가 다른 범주 속에 포섭되어 9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들의 연역을 명확하다고 여겼을 리 없다. 그러나 범주 목록은 질서정연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개념들의 분류며, 우리의 학적 지식을 지배하는 개념들의 근본 유형들을 구성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론』에서 범주들을 술어들에 대한 분류, 즉 존재가 실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식으로 간주한다. 이를 테면 우리는 대상을 실체나 실체에 대한 확장으로 간주한다. 즉 우리는 대상을 9개의 범주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들을 최상의 종으로부터 개체들에 이르기까지의 유, 종 및 개별자들에 대한 분류로 간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기체, 동물(유기체 아래의 유), 양(동물의 종) 등 개념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기체-동물-양 모두는 실체라는 범주에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색 일반, 파랑색 일반, 연파랑색 등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색깔-파랑-연파랑 모두는 성질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범주는 단순히 정신적 표상의 양태, 즉 개념의 틀만은 아니다. 이 범주들은 마음 밖의 세계에 있는 존재의 현실적 양태를 나타내며 논리와 형이상학 사이의 가교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논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측면도 지니는 것이다. 이들의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배열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이들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실체는 말하자면 출발점이다. 단지 개별자들만이 우리의 마음 밖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개별자가 독립적으로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체여야만 한다. 그러나 개별자는 단순히 실체로만 존재할 수 없다. 개별자는 우연적 형상들도 지녀야만 한다. 예를 들어 색깔 없는 백조는 있을 수 없으며, 반면에 수량과 연장이 없이는 색깔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대상의 내적 결정 요소인 첫 세 가지 범주들, 실체와 성질, 그리고 양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백조는 다른 백조들과 종적 본질은 같지만 그 크기는 다른 실체들과 같거나 다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백조는 다른 백조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적 실체로서의 백조는 어떤 장소와 어떤 기간에 존재해야 하며,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실체들은 우주적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서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범주들 가운데 어떤 것은 대상의 내적 결정 요소로서 그 자체로서 고찰된 대상에 속하며, 반면에 다른 범주들은 대상을 다른 물질적 대상들과 일정한 관계에 있도록 하는 외적 결정 요소로서 대상에 속한다. 그러므로 비록 어떤 범주들이 다른 범주들에 포섭됨으로써 범주들의 수가 줄어들 수 있다 하더라도, 범주들이 도출되는 원리는 우연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정의와 관련된 『분석론 후서』와 『변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빈사(賓辭)들에 대해, 또는 보편적 용어들이 자신들이 그 속성으로 단정되는 주어와 맺는 다양한 관계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것들은 유, 종, 종차, 본질적 특성, 우연자다. 『변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빈사들에 대한 자신의 분류를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 위에 정초한다. 그래서 만약 술어가 주어와 동연적일 경우, 그 술어는 주어의 본질이나 본질적 특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반면에 술어가 주어와 동연적이 아니라면 그 술어는 주어의 정의에 포함되어 있는 속성들의 부분을 이루거나(술어가 유나 종차가 될 경우), 아니면 그 부분을 이루지 않는다(이 경우, 그 술어는 우연자가 될 것이다). 본질적 정의란 유와 종차에 의한 엄밀한 정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최하위의 종들까지 이르는 구분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본질적 정의를 진정으로 정의라고 이름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 유형으로 간주하면서 명목적 정의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항상 본질적 정의나 실재적 정의를 용인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는 자연학이 연구하는 자연적 대상들에 관해서는 그것들을 구별하거나 특징짓는 정의들에 만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의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명목적 또는 기술적 정의보다 좀 더 가깝게 본질적 정의의 이상에 접근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그것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몇몇 작가들은 언어가 철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해왔다. 예를 들어 장미는 빨갛다고 말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미 속에 내재하는 “빨강”이라는 성질 또는 우유자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체와 우유라는 철학적 범주는 말이나 언어의 영향에 의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란 사유를 따른다는 점, 사유의 표현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철학적 용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음이 사물에 관하여 사유하는 방식을 설정할 때, 그가 사유의 매개자로서의 언어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어는 사유를 따르고 사유는 사물을 따른다. 언어는 선험적인 구조물이 아닌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탁월한 학적 지식이란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끌어내거나 원인으로부터 조건 지워진 것을 끌어냄으로써 사실이 의존해 있는 원인뿐만 아니라 사실과 그 원인 사이의 필연적 관계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이 의존해 있는 원인을 다른 어떤 것의 원인이 아니라 그 사실의 원인으로서 알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사실은 그렇게 외에는 다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학적 지식이 된다. 그러나 비록 논리적인 관점에서는 전제가 결론에 선행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선행성이나 그 자체로서의 선행성과 ‘우리에게’의 인식론적 선행성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선행적’과 ‘더 잘 알려진’은 모호한 용어들인데, 왜냐하면 존재의 질서에서 선행적이고 잘 알려진 것과 인간에게 선행적이고 잘 알려진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감각에 가까운 대상들은 인간에게 선행적이고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아무런 제한이 없이 선행적이고 잘 알려져 있는 대상들은 감각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일반적인 것 또는 보편적인 것으로 올라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요한 전제들을 귀납에 의해 알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심지어 감관 지각조차 보편적인 것을 마음에 주입시키는 방법은 귀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법뿐만 아니라 귀납법까지도 다루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삼단 논법에서 대전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감관 지각에 근거해 있으며 여기에는 감관 지각과 기억이 모두 관련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 모두를 정당화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 그 자체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갖는다. 참 또는 거짓으로 가려지는 것은 오직 판단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섬망증 환자가 분홍색 쥐를 “본다”고 해도, 그 감각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류는 그 환자가 분홍색 쥐를 “저기에” 있는 것으로, 즉 마음 밖에 실재하는 대상으로 판단할 때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태양은 지구보다 작게 보이지만, 이것은 감관쪽에서의 오류가 아니다. 정말로 태양이 지구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감관이 망가진 것일 것이다. 오류는 어떤 사람이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태양이 지구보다 객관적으로 작다고 판단할 때 발생한다.
5
그러므로 『분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적 입증이나 증명 또는 연역법뿐만 아니라 귀납법도 다루고 있다. 그에게 있어 학적 귀납법이란 완전한 귀납법을 의미한다. 그는 “귀납법은 모든 경우를 열거함으로써 진행된다”고 명백하게 진술한다. 불완전한 귀납법은 특히 웅변가들에게 소용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험을 사용했지만 학적방법론으로서의 귀납법과 가설의 사용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귀납을 통한 삼단논법이 우리에게 더 명증하다”고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의 이상은 여전히 연역적 방법, 즉 삼단논법적 증명의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적 과정에 대한 분석을 매우 높은 수준까지 완전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귀납법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학이 자연학보다 그토록 훨씬 더 고도로 발달해 있었던 고대 세계에서 이것은 단지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관 지각 자체만으로 보편자를 획득할 수는 없다고 말한 다음, 우리는 개별자들의 집단을 관찰하거나 사건들의 반복적인 발생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추상하는 이성을 사용하여 보편적 본질이나 원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6
『분석론 전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론의 형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삼단논법을 “어떤 것들이 진술되고 있는데, 그것들이 그렇게 진술되는 것으로부터 진술되어 있는 것과 다른 그 무엇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게 되는 담론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삼단논법의 세 가지 격 등을 논하고 있다. 1) 매 개념이 어느 한 전제에서는 주어이고 다른 전제에서는 술어인 경우.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식이 된다. M은 P다. S는 M이다. 그러므로 S는 P다. 모든 동물은 실체다,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실체이다. 2) 매개념이 두 전제 모두에서 술어인 경우. 따라서 P는 M이다. S는 M이 아니다. 그러므로 S는 P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웃을 수 있다. 어떤 말도 웃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말도 인간이 아니다. 3) 매개념이 두 전제 모두에서 주어인 경우. 따라서 M은 P다. M은 S다. 그러므로 S는 P다. 모든 인간은 웃을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어떤 동물은 웃을 수 있다. 『변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적 추론(추론이 시작되는 전제들이 참이고 근본적인 경우 또는 그 전제들이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본래 근본적이고 참인 전제들을 통하여 나온 그런 전제들인 경우)과 변증법적 추론(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들로부터 모든 사람 또는 대다수 또는 그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고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는 견해들로부터의 추론)을 구별한다. 그는 여기에 세 번째 추론 종류인 논쟁적 추론(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견해들에서 출발하는 추론)을 추가한다. 이 세 번째 종류의 추론은 『소피스트 논박』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는데,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유형의 오류들을 검토하고 분류하며 해결한다.
7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에서의 전제들 자체가 증명될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모든 원리들이 증명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무한소급에 빠지게 될 것이며, 아무 것도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증명 없이 직관적이고 즉각적으로 알려지는 원리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원리들 가운데 최고의 것은 모순율이다. 이러한 원리들에 대해서는 어떤 증명도 주어질 수 없다. 예를 들어, 모순율의 논리적 형식 - 어떤 것을 긍정하는 명제와 바로 그것을 부정하는 명제의 두 명제들 가운데, 그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라야 한다. - 은 그 원리의 형이상학적 형식 - 예를 들어 “동일한 것이 하나의 동일한 기체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속성이 아닐 수는 없다.” - 에 대한 증명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떠한 사상가도 모든 사유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자 모든 사유에 전제되는 원리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제1원리들과 제1원리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 학적 인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 그리고 견해의 주제로 우연적이어서 달리 될 수 있는 것을 가진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같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제1원리들로부터 직접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귀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자에 대한 실제론적 이론을 포함하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법은 보편자를 명백하게 알려져 있는 특수자 안에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낸다고 선언한다.
8
논리적 분석과 분류가 아카데메이아에서 형상론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로 논리학을 독립된 학으로 성립시킨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으며 추론의 기본적 형식, 즉 삼단 논법을 발견하고 이를 분리해내어 분석한 사람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것은 길이 남을 그의 업적 가운데 하나다. 설사 이것만이 그의 유일한 긍정적 업적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것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하게 하기에 충분한 업적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연역 과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고전적 삼단논법은 각각 주어와 술어의 형식으로 된 세 개의 명제와 각 명제들이 주어와 술어로 취하는 세 개의 항을 상정하며 이러한 상황이 주어지면 명제들 가운데 두 개가 제3의 명제를 오로지 논리적 형식에 의해서만 야기하는 경우나 또는 다랍티(Darapti)의 경우와 같이 연결된 존재 언명에 의해서 야기하는 경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뉴먼 추기경이 자신의 저작 『동의의 문법』에서 논하고 있는 다른 추론 형식, 즉 마음이 결론을 명제들로부터가 아니라 구체적 사실들로부터 이끌어낼 때의 추론 형식을 고려하지 않았다. 마음은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며, 그것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 후에 결론을 추론해내는데, 이것은 (온전한 귀납법에서와 같은) 일반적 명제가 아니라 이를테면 “그 죄수는 결백하다”와 같은 특수한 결론이다. (이 결론에) 일반적인 명제들이 함의되어 있음은 확실히 사실이다(가령 어떤 유형의 증거는 피고인의 결백과 부합하거나 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 마음은 전제된 명제들 안에 함축된 의미를 끌어내는 데 종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유형의 추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인지력 - 또는 특수이성이라고도 불림 - 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한 추론의 형식에 관해서도 추론들의 출발점인 이 일반적 원리들이 단순히 형식적인 원리들인가 아니면 존재론적인 함축을 지닌 것들인가 하는 문제를 실제로 고찰하지 않았다.
눈에비친햇빛
'Aristotle(기384-322) > 아리스토텔레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 (0) | 2024.02.18 |
---|---|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철학 (0) | 2023.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