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과 허무주의 이후의 철학은 니체 자신이 명명하듯 '생성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실제(Wirklichkeit)를 전통 형이상학에서와는 다르게 경험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실제란 항상 생성과 변화를 겪는 실제이다. '모든 것은 되어간다. 영원한 사실이란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듯이'라는 말이 표명하듯이, 모든 것은 생성의 과정 중에 있다. 인간 삶도 예외는 아니다. 왜 생성이며, 생성 아닌 것은 없고, 어떻게 그리고 왜 생성이 유일한 실제성인지를 밝혀내는 것. 그래서 생성이 잃어버렸던 의미를 다시 찾는 것. 영원하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성이라는 것. 이것을 니체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도식을 탈피하면서도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정당화시키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노력을 '생성의 무죄를 입증(Unschuld des Werdens zu beweisen) 하려는 프로그램으로 제시한다. 물론 '생성의 무죄'라는 명칭을 니체는 1883년에야 비로소 도입하지만, 그는 '예술가-형이상학(Artisten-Metaphsik)'이라는 그의 초기 사유 역시 이미 위 프로그램의 한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그의 철학적 노력이 어디로 정향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니체 자신의 고백이라고 하겠다. 사실 니체가 예술가-형이상학까지도 이 프로그램에 편입시킨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모든 것이 '지속적인 생성'이라는 통찰은 『비극의 탄생』에서 이미 나타나며, 니체는 이미 이때부터 생성의 규제 수단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제를 그는 그의 사유의 진행에 따라 현존재와 세계에 대한 예술적 정당화의 방식, 의식 유아론적으로 고찰된 의지를 원인으로 상정하는 죄 개념을 제거하는 방식, 더 나아가 은폐된 목적론으로서의 인과율에 대한 거부를 통해 수행하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니체는 이 방법들을 '기묘한 길들'이라고 부르면서, 생성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그의 철학적 프로그램이 위의 방법들로는 수행되지 못함을 암시한다. 이 프로그램은 생성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생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 가능한 상황을 도출시키면서 비로소 완수된다. 즉 위의 세번째 방법을 수용, 발전시키고, 여기에 1881년 이후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는 사유를 종합시켜 설명해 내면서 완수된다. 이 설명을 통해 니체는 생성의 진정한 구제 수단, 즉 '실제에 대한 긍정'을 '디오니소스적 지혜'에서 얻는다. 바로 여기에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자인 니체의 철학적 실존이 놓여 있는 것이다.
생성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의 중요성에 대해 니체는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 글이다. '나는 생성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항상 노력했다.' '생성의 완전한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노력했는지! 그러면서 어떤 기묘한 길을 걸었던가!'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니체는 생성의 무죄를 말하는가? 생성의 죄 없음에 대한 선언은 니체가 전통 형이상학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존재와 생성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도전이다. 이분법적 사유는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을 구분해 세계를 이중화하고, 양자의 대립 관계를 말하며, 존재에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한다. 생성은 한갓 가상(Schein)으로 평가 절하된다. 이런 이분법의 발생 원인으로 니체가 제시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들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발생 원인을 가지며, 그 발생 원인은 '불변하는 것, 숨겨져 있는 신들, 물자체'로 표현되는 존재에 있다는 '형이상학자의 근본 믿음'이 그 원인이다. 예를 들어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우리의 순수한 사유만이 접근 가능한 존재자를 ousia, 즉 초감각적이고 자존하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를 'aute he ousia' 혹은 'auto kat hauto'라는 감각적인 것에 대립하는 사태 자체로 표현한다. 반면에 감각적인 것은 토대를 갖지 않는 것, 생성, 현상 등으로 표현되며, 이는 존재가 드러나는 모습 Anschein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렇듯이 플라톤에게서 존재와 생성은 원칙적으로 배타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존재에는 최고의 가치가 귀속되고, 진리로 설정된다. 반면에 생성은 가치없는 것으로, 진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생겨나고, 존재와 생성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가치상으로도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 이분법적 구도에서 변화를 경험하는 실제 세계는 한갓 가상일 뿐이다. 둘째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서 연유한다. 인간의 행복 추구라는 것 자체는 곧 삶의 추구로 이어지는 것이지만, 니체는 행복 추구가 '심적인 엉터리 발상'을 촉발시켰다는 점을 들어 문제시한다. 심적인 엉터리 발상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우선 인간은 변화하는 실제의 세계를 자신에게 불행과 고통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간주하여 '행복과 변화는 서로 배타한다(Gluck und Wechsel schliessen sich aus)'라고 상정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고통을 필연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참된 존재의 세계를 구상해 내어, 왜 인간이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으로 상정한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형이상학자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사유의 발생 원인으로 제시되는 논변이다. 이렇듯 니체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만들어내는 이유를 명백히 생성에 대한 인간의 불신과 평가 절하 속에서 찾고 있다. 생성의 세계는 변화하고, 모순적이며, 인간을 속이는 그런 것이기에,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경험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인간은 행복을 생성과는 반대되는 존재의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 존재와의 일치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수행하는 담지자를 바로 이성이라고 여긴다. 니체는 이를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기묘(하고도 우스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방법의 귀결이 바로 존재의 세계에 대한 요청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 방법은 니체에 의하면 고통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과, 고통을 가장 피하고 싶어한다. 더구나 고통을 당하는 인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고통은 감내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만일 고통이 인간 외적인 어떤 것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나, 혹은 시험의 과정으로, 혹은 인간의 더 나은 상태를 위한 사육이 수단 등으로 설명될 경우에 인간은 이 고통을 받아들인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왜 인간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및 그 고통의 의미를 필요로 한다. 형이상학적 전제인 '존재'라는 것은 고통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답을 준다. 따라서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는, 또 그 고통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이 형이상학적 '존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만연해 있던 저주이다'라고 말할 때, 그가 의도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해, 있어야만 하는 것(Sein-sollen)으로 절대화시킨다. 즉 인간의 생존 조건으로서의 존재는 이제 존재해야만 하는 것으로 요청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가치와 진리의 원천이어야 하며, 그런 한에서 실제로도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참인 것으로 믿어진 세계는 도덕적으로 파악되어, 이제 생성의 세계와 만들어진 세계 중에서 어떤 세계가 존재해야 하고 어떤 세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지가 결정된다. 니체의 다음 말은 이 점을 잘 드러낸다. "요약하자면, 본래 그러해야만 하는 세계는 존재한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단지 오류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세계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참된, 절대적인, 모순 없는,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믿어지는 존재의 있음은 이처럼 도덕적 당위에 그 근거를 둔다. 반면에 생성의 세계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실제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자의 원한 감정이 창조적으로 발휘되어, 형이상학자는 '무엇을 위해 고통이'라는 질문에 '이것을 위해 고통이'라는 답으로써 존재와 존재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가진 형이상학이 행하는 최대의 오류를 '과도한 순진함(hyperbolische Naivitat)'에서 찾는다. 과도한 순진함은 니체가 이성의 소박한 오류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성이 자신과 자신의 인식 범주들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해 그것들을 실재에 대한 '규준'으로 믿어버리는 독단적 태도이다. 니체는 이러한 이성의 독단성에 의해 서구 형이상학의 전 역사가 규정되고 있다고 이해하며, 이것을 형이상학 비판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점으로부터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과 이성 비판의 불가분성, 그리고 니체 자신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이성의 자기 한계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형이상학의 시작을 니체는 플라톤을 넘어서서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찾는다. 그 이유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말하는 데에 있다. 사유는 항상 존재에 대한 사유이다. 존재하는 것만이 사유된다. 비존재는 사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사유는 참이고 실재를 적중시키는 것으로서, 사유된 존재는 실재로 있는 것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니체 역시 사유를 항상 존재에 대한 사유라고 여기지만, 그는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 이미 형이상학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니체와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이 차이점은 비단 파르메니데스뿐 아니라, 감각을 배제한 순수 사유 작용을 통해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플라톤,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이성적 파악이 가능하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표상하고 생각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근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제시하는 데카르트 이후의 형이상학과 니체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구분짓는다. 이 차이점에서 우리는 니체가 존재를 망각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끝점을 이룬다는 하이데거의 견해가 정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점의 근거는 이성의 능력과 권한 자체에 대한 니체의 한계 설정에 놓여 있다. 간단히 말하면, 표상하고 생각하는 주체(vorstellend-denkendes Subjekt)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고 해석하는 주체(wertschaffend-interpretierendes Subjekt)인 인간의 이성 인식은 인간의 다른 행위와 마찬가지로 해석 주체의 능동적 평가 행위이며, 이 행위는 해석 주체의 힘과 생을 위한 전략 하에서 수행된다. 이런 면에서 이성 인식은 가치 각인적(wertimpragniert)해석이다. 따라서 해석 작용은 인식 주체의 삶의 유지를 위한 것이며, 해석 작용의 결과는 오류일 뿐이다. 따라서 이성 작용을 촉발시키고 끌어가는 것은 실용적 관점이지, 어떤 이론적인 욕구나 절대 불변하는 진리에의 추구가 아니다. 이성의 이러한 해석 행위로 인해 이제 인간은 주관성을 배제한 채 절대적 위치에서 인식들이 객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결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더 이상 갖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실제 자체에 대한 직접적 파악 능력이 없다. 이러한 이성의 한계 설정에서 니체와 파르메니데스는 반대 지점에 놓이게 된다. 또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성과 이성 범주 및 그것들을 통한 인식 결과인 해석이 파르메니데스처럼 '존재와 비존재, 객관적 실제성과 그 역에 대한 규준으로' 절대시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니체는 존재 개념을 창작해 낸 이성의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유감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의 해석 행위로서, 인간의 부인할 수 없는 생존 조건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이성의 과도한 순진함이 나타날 때이다. 과도한 순진함이라고 표명되는 니체의 비판의 화살은 이렇듯 이성의 자기 과대 평가로 향한다. 인간 이성은 자신이 해석 행위의 주체일 뿐임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해석일 뿐인 인식 내용을 마치 실재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했다. 즉 도구를 마치 규준인 것으로 혼동했다. 이 혼동은 형이상학의 관점적 진리성을 절대적 진리성으로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도한 순진함으로 인한 도구와 규준의 혼동, 바로 이것이 니체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로서의 전철학의 역사에서 행해졌던 오류들 중에서 최악의 오류이자 가장 바보스러운 일이었다. 니체는 철학의 혼란이 여기서 야기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성의 자기 과대 평가를 강도 높게 비난한다.
인간들이 논리학과 이성 범주에서, 세계를 유용성-목적에 맞게 정돈하기 위한(따라서 원칙적으로 유용한 위조를 위한) 수단을 찾는 대신에, 그 안에서 진리의 규준과 실재성의 규준을 가진다고 믿었던 데에서 철학의 혼란이 비롯되었다. 순진함은 (수단을) 사물의 척도로, 실재와 비실재를 판단하는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중심적 병이다. 짧게 말해, 조건성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영리한 방식으로 실재를 오해하기 위해, 실재에 대해 주인이 되기 위해 이성 형식을 갖지만, 그는 실재의 규준을 이성 형식에서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도식은 인간의 도덕적 요청일 뿐이다. 즉 이분법의 한 면인 생성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유지를 위해 요청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서술어는 인간의 생존 조건이 투사된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에서의 존재라는 것, 즉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와 그런 존재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모태는 바로 인간의 이성이다. 존재는 유용성 때문에 사유되고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처음부터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도덕적 존재론(moralische Ontologie)'이다. 도덕적 존재론이라는 개념에서 도덕은 인간의 삶의 조건들이 건드려지고 반영되는 가치 평가(Wertschatzen)의 총체이다. 이러한 가치 평가 행위의 귀결로서의 형이상학은 관점적 평가 행위인 해석이요, 그런 한에서 그것은 인간의 생존 조건이었다. 이렇듯 인간의 삶의 유지라는 목적 하에서 이성이 만들어낸 것이 형이상학적 이분법임에도 불구하고,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식과 탐구, 학문과 삶의 기초 역할을 해왔으며, 이 미이라화된 존재가 바로 생성 및 생성 세계를 부정하는 근거로 되어 버린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니체에게, 실제 세계를 가상으로 폄하하는 가상 아닌 세계, 즉 그 자체의 세계 또는 존재의 세계란 한갓 허구일 뿐이다. 니체의 생성의 철학은 '그 자체' 일반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상'이란 개념의 시민권을 거부하는, (생성에 대한 진정한) 철학'이다. 그렇지만 이 철학의 목적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 있지는 않다. 단지 이분법적 도식 하에서의 존재 개념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는 이제 다른 식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그것도 생성이라는 성격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여러 방식을 통해 진행되고, 마침내 힘에의 의지, 영원 회귀 등의 개념의 힘을 빌려 1880년대 이후에 그 답을 얻는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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