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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1844-1900)

니체의 예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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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관한 니체의 생각이 최초로 주제적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곳은 그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이다. 본래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또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가를 다룬 글이다. 나중에 니체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쓰인 젊은 시절의 이 저작에 대해 부분적인 자기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그의 예술론은, 비록 그것이 그리스 비극의 탄생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현대 예술론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비극의 탄생』에서의 니체의 예술론은 먼저 삶의 고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 신화 속의 현자 실레노스의 짤막한 이야기를 빗대어 그가 제시하는 인간의 삶은 우연과 모순으로 점철된 고통의 세계이다. 왜 젊은 니체에게 인간의 삶이 그처럼 어두운 모습으로 비쳐졌는지를 밝힐 자료는 그곳에는 없다. 『비극의 탄생』직후의 저작을 통해 살펴본다면, 니체는 이미 초기 저작을 저술한 시기에서부터 기존의 형이상학이 궁구해 왔던 삶의 필연성이나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 등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이 개념들은 형이상학적 사변성이 꾸며낸 가상이요, 삶에 덧씌워 놓은 굴레일 뿐이다. 젊은 니체는 삶의 구체적 모습을 직시하면서 삶의 탄생과 지속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으며, 오로지 우연이 난무하고 욕망의 끊임없는 모순이 진행되는 고통의 바다로 파악한다. 

 

삶이 그 진상에 있어서 고통과 모순이라는 이 견해에 입각해서 니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초기 예술론을 전개한다. 그 생각에 따르면 예술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뉘며, 그 두 예술충동의 대립과 화합이 예술의 역사를 형성한다. 우선 그가 주로 문학예술과 조형예술을 겨냥하여 말하는 아폴론적인 예술부터 살펴보자. 이미 삶이라는 것이 우연이 지배하고 결함이 많은 불완전하고 고통스런 것이라 할 때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나마 그것을 이겨낼 방도로써 어떤 완전성을 꿈꾸어 내는 일이다. 니체가 아폴론적인 예술충동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초입부터 꿈이라는 생리 현상을 비유적으로 끌어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가 바라본 꿈의 세계는 현실 세계보다 완전한 세계요, 그의 표현을 빌리면 보다 높은 진리의 세계다. 과연 모든 꿈의 세계가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은 의문으로 남지만 적어도 우리는 적지 않은 경우에 꿈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을 경험한다. 꿈의 세계가 지니는 이 같은 높은 진리성과 완전성 때문에 니체는 꿈 세계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상이야말로 모든 조형예술과 서사시가 전제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아폴론적 예술충동은 자신의 충동을 실현해 나감에 있어 그 나름의 방도를 갖추고 있다. 우선 아폴론적인 예술가의 눈은 우연이 난무하는 삶과 세상의 모습을 보되 그러면서도 그 복잡한 뒤얽힘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척도(Maß)를 지니고 있다. 아폴론적인 예술가는 고통의 한 바다에서 살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간단없이 생기는 광포한 격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올 줄 아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러한 격정을 통제고 자신만의 척도에 따라 한정(Begrenzung)을 가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그 점에서 아폴론적 예술가는 그 어떤 철학자 못지않게 세상을 깊게 또는 높게 볼 줄 안다. 그는 세상의 많은 조그마한 것들을 사상할 줄 알며 또한 한정의 지혜를 갖추기 위해 그 자신을 잘 인식한다. 이러한 자기인식(Selbsterkenntnis)은 척도와 규준을 엄수하는 아폴론적 예술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요구 이외에도 '너 자신을 인식하라' 또는 '지나치지 말라'는 요구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아폴론적 예술충동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상을 통해 삶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충동이라면, 니체가 주로 음악예술과 무용예술을 겨냥하여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세계와 삶을 긍정하고 거기에 몰입하려는 충동을 말한다. 니체가 보는 삶의 고통과 모순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만사의 근본이자 근원적 '일자'이다. 따라서 벗어날 수 없는 그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가능한 방식은 그 숙명적 굴레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은 아폴론적인 꿈꾸기를 처음부터 거부한다. 이상에의 꿈꾸기가 결국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오히려 현실에의 적극적인 침잠과 도취(Rausch)를 요구한다. 또한 꿈꾸기를 그친 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도취하려는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는 자기인식과 척도를 바탕으로 현실을 한정하고 제어하는 아폴론적 자아의 철옹성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디오니소스적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자기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자기망각(Selbstvergessenheit)이다. 흔히들 과학은 삶을 객관적으로보고, 철학은 삶을 반성적으로 보는 데 비해, 예술은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의 마력은 전반적인 자기망각과 도취적 몰입에 있다. 그 마력 아래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 다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적대적이고 억압받았던 자연이 그의 잃었던 아들인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축제를 벌인다. ……이제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며 창공으로 날아 오르려 한다." 이 순간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되는 순간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의 합일 속에서 삶의 일자, 즉 고통과 모순이 스스로 충족됨을 본다. 그리고 그 순간은 고통 자체가 환희로 바뀌는 순간이다. 

 

니체는 초기 예술론의 이러한 개진 이후에는 예술을 주제로 하거나 예술에 관해 중심적으로 다루는 단행본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후기 예술론은 삶에 관한 그의 사상의 개진과 함께 진행된다. 즉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그대로 예술에 관한 그의 견해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초기 저작 이후에 펼쳐진 니체의 삶의 고찰 속에는 '초인 사상', '삶에의 적극적인 긍정', '힘에의 의지'가 놓여 있다. 여기서는 이들 개념들을 간단히 해명하면서 그의 후기 예술론을 파악하는 근거로 삼고자 한다. 

 

먼저 니체가 말하는 초인(Ubermensch)이란 일상적인 인간을 초월해 있는 어떤 종국적 목표 지점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초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가는 인간(uber sich hinaus gehen)이다. 이때 넘어서야 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은 기존의 형이상학, 도덕, 종교 등으로 물든 인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를 규정해 왔던 삶의 관습화된 방식에 물든 인간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은 니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 자신에게 오직 구속이 될 뿐이며, 삶을 그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다. 그런 맥락에서 니체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단계 - 낙타, 사자, 어린아이 - 를 논하는 곳에서 올바른 인간의 모습을 어린아이 단계의 인간 모습으로 단정하면서, 그 특징을 "철저한 망각", "새로운 시작"으로 파악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멈추어 서서 그 자신을 썩게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 즉, 넘어서는 - 도중의 인간이다. 

 

초인의 삶은 삶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신의 삶을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앉으려는 적극적인 긍정적 자세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니체의 후기 저술들 곳곳에는 "삶에의 사랑", "삶에의 위대한 긍정"이 거듭 언급된다. 그리고 이 때의 삶은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소박하게 비칠 수 있는 파악이겠지만 "힘에의 의지" 그 자체이다. 단순히 말해 언제나 생존을 위해 보다 나은, 큰 힘을 찾아가려는 삶의 의지, 이것이 다름 아닌 바로 니체의 힘에의 의지이다. 삶의 적극적인 긍정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가는 이 같은 힘에의 의지는 삶을 그 왜곡으로부터 구원하고, 매순간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의지이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적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런 삶에는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 없다. 거기에는 오직 외부의 절대자에 대한 위대한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은 외부의 당위의 힘에 의해 언제나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삶에는 새로운 창조는 없다. 후기의 니체는 삶에 관한 이러한 입장에 서서 기존의 형이상학, 도덕, 종교, 과학 등과 단호하게 결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을 창조적 삶에의 위대한 사랑이자 구원으로 끌어들인다. "예술,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예술! 예술이야말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여신이며, 삶으로 유혹하는 위대한 인도자이며, 삶에의 위대한 자극제이다." 말하자면 니체에게 예술은 삶을 부정하는 모든 의지들 - 그것이 기독교적이든, 불교적이든, 염세주의적이든 - 에 저항하는 유일하게 신중하고 위대한 힘이다. 

 

미학대계 1 미학의 역사 / 염제철 / 서울대학교 출판부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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