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동경으로 철학의 길로 들어선 이래 어느새 몇십년 세월이 내 뒤로 지나갔습니다. 학생으로 또는 선생으로 지낸 그 세월 속에서 철학은 이제 내게 너무나도 가까운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언제나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기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학생으로서 철학을 배웠을 때나 선생으로서 철학을 가르칠 때나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 당신의 이름을 맨 처음으로 듣게 됩니다. 왜 하필 탈레스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친애하는 탈레스! 우리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는 권위 때문입니다. 그가 저 유명한 [형이상학]에서 ‘최초의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그 첫 부분에 당신을 올려놓은 것이 이른바 철학사의 전형이 되었을 거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해봅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영광이 함께 합니다. 더군다나 철학이라는 것은 (오늘날 비록 세계 구석구석에서 찬밥신세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2500년 이상의 그야말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것이고, 게다가 실상이야 어떻든 겉으로나마 만학의 으뜸이니 학문중의 학문이니 하는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공맹노장까지도 자신의 이름아래 접수하여 바야흐로 사상의 천하통일을 이룬 듯한 형국이기도 합니다. 그런 대단한 철학의 ‘처음’을 바로 당신이 장식하고,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아무리 전통의 권위를 배제하라고 철학이 가르친다지만 그의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가 당신을 맨처음에 올려놓고 있는 것은 당신에게 분명히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그 무엇이 바로 무엇인지를 이미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아르케’에 대한 관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르케란 내가 배운 바로는 ‘처음’이란 뜻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는 성서의 저 유명한 구절도 그리스 말로는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르케란 그렇게 처음이며 태초이며 원초이며 시원이며 그래서 원리라고도 근원이라고도 번역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처음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나타냈기l 때문에 당신은 철학의 처음을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탈레스. 처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모든 존재자가 그것으로부터 되어 있는 것, 즉 그것을 최초의 것으로서 그것으로부터 생겨나오고, 또 그것을 최후의 것으로서 그것으로 소멸해 가는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을 존재자의 원소(스토이케이온)라고도 부릅니다. 그것은 또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본성이 언제나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가 거짓이 아니라면 당신은 바로 그런 의미의 아르케가 무엇인지를 생각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자세한 글이 전해지지 않으니 우리는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해석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애하는 탈레스! 어쨌거나 나는 아르케라는 말이 당신의 이름과 결부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르케에 대한 당신의 철학적 관심이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아르케가 무엇인지를, 무엇이 아르케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은 동시에 당신이 만물의 다양성과 그것의 신비로움 앞에 정면으로 서 있다는 것을 함께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케에 대한 물음은 그저 아무렇게나 우연히 나올 수 있는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느낀 자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막힌 자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자만이 진정으로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물음은 공허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하기를 ‘...신은 분명히 말하지도 않고, 또한 감추지도 않고, 오로지 표시만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아마 그러한 표시를 보았을 터이지요. 분명히 말하지 않으니까 막혔을 것이고 감추지 않으니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긴장의 틈사이에서 당신의 그 최초의 물음이 나왔을 것입니다. 아르케에 대한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대로 경이로움(타우마제인)을 동반합니다. 만물의 존재와 그것들의 다양한 전개, 그 근저에 가로놓여 그것을 꿰뚫고 있는 어떤 단초, 그것들은 당신에게 경이의 대상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의 ‘물음’에서 나는 그것을 읽어냅니다. 당신은 아마도 밀레토스의 해안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겠지요. 밤에는 아득히 펼쳐진 우주공간에 점점이 박힌 수많은 별들도 바라보았겠지요. 또 당신은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광대한 대지와 다양한 인간군상도 목격했겠지요. 천체의 움직임과 그에 따라 올리브가 익어가는 것도 관찰했겠지요. 그 모든 것을 증거하는 기록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여기서 내가 보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것들이 나 자신에게 경이로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의 경우를 유추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더군다나 당신의 경우에는 그 모든 것들이 나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가까이 있었을 것입니다. 훨씬 더 커다란 바다, 훨씬 더 드넓은 대지, 훨씬 더 광활한 천체 앞에서 사물들의 오묘한 질서를 목도하면서 당신이 경이로움을 느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르케’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나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런데 탈레스! 생각해보면 그러한 놀라움을 느낀 자는 비단 당신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최초’가 되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아마도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에--즉 사고를 언어화했다는 점에--있을 거라고 나는 해석합니다. 당신의 대답이 곧 물음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당신은 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인지. 그러한 물음에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지에 대한 사랑이 함께 합니다. 그러한 갈망과 사랑을 우리는 지금 퓌타고라스이래의 전통에 따라 ‘철학’ 즉 지에 대한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탈레스! ‘물’이 곧 아르케라는 당신의 대답은 다소간 우리를 황당하게 만듭니다. ‘대지가 물위에 가로놓여 있다’는 당신의 말이 현대과학에 의해 용도폐기될 수 있는 것처럼 물이 곧 아르케라는 것도 무지한 고대인의 순진한 직관이나 어설픈 관찰 쯤으로 치부되어도 좋은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이를 간단한 방법으로 쟀다는 것이나 기후의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 올리브기계를 사들여 떼돈을 벌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신은 이른바 7현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렵다’ 같은 금언들을 남기기도 했고, BC 585년 5월 28일의 일식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했고, 테오스에 중앙정부를 설치하자는 정치적 식견도 있었고, 할리스강의 물줄기를 돌려 크로이소스의 군대가 쉽게 도강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군사적 예지도 갖춘 인물입니다. 그런 당신이 ‘물이 곧 아르케’라고 한 것은 결코 단순한 착상에 의한 것이 아닐 거라고 짐작됩니다. 대답해 주십시오, 탈레스. 왜 하필 물이었습니까.
친절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만물의 영양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열 그 자체가 물기있는 것에서 생겨나고 또 그것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한 데서 이런 대답이 나왔을 거라고 해석해 줍니다. “또한 만물의 종자가 물기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라고 덧붙입니다. “그래서 물은 물기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본성의 원리”라고 그는 정리합니다. 그의 이런 해석이 당신의 실제 경우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당신의 기록에 의한 것인지, 그의 자의적인 짐작에 의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간에 그가 구체적인 실제 현상의 관찰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지나쳐볼 일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당신이 현상자체를 관찰함으로써 그것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면 그 답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그러한 방법 또는 태도 내지 자세가 이미 이전의 경우와는 달랐다는 것을, 즉 당신이 철학적(학문적)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상 자체에 의거해서 말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입니다.
물론 물이라고 하는 대답은 어딘가 석연치 않습니다. 한 방울의 물로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고 파스칼이 말하듯 물의 위력과 중요성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살았던 밀레토스가 바닷가였으니 대지를 띄울 정도의 엄청난 물이 당신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거기서 ‘물’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왜 하필 물뿐이겠느냐고 누군가가 대든다면 당신이나 나나 답변이 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교과서처럼 답변의 철학적 성격에 만족하면서 적당히 당신의 한계를 수용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친애하는 탈레스. 이것은 하나의 추측입니다만, 나는 당신이 그렇게 어설픈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당신 자신이 남긴 정확한 문맥이 전해지지 않는 데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물을 모든 것의 아르케로서 제시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모든 것’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대답이 어떤 한정된 범위내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심코 남긴 말, ‘따라서 물은 물기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본성의 아르케이다’에서 발견합니다. 내가 짐작하듯이 만일 당신의 ‘물’이 물기있는 것에 대해서만 제시된 아르케라면 그것은 한치도 빗나감이 없는 책임있는 발언이 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문맥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해는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문맥이 있더라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당신이 바보같은 고대인이 아니었음을 변호하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당신은 인류에게 철학의 길을 처음으로 열어준 철학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탈레스! 당신은 존경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소박한 바램입니다.
편지로 쓰는 철학사 -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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