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스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인 밀레토스에서 기원전 624년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레토스는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 건설한 12개의 식민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였다. 다른 11개의 식민 도시는 리디아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밀레토스만은 독립해 있었다. 밀레토스에서 활약한 철학자로는 탈레스 외에도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3』에서 탈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 일곱 현인, 곧 소포스들 가운데, 좁은 의미의 필로 소포스(철학자)라고 불린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탈레스다.” 탈레스는 각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집트에서는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탈레스는 만물의 생성 과정의 근원을 탐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를 배제하고,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만물을 이성적으로 고찰하여 세계의 모든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탈레스는 리디아가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킨 메디아와 싸우고 있을 때, 기원전 585년 5월 28일의 개기일식을 예언했다. 그의 예측을 듣고, 이 개기일식에 두려움을 느낀 리디아와 메디아 양국은 여러 해의 전쟁을 그만 두고 강화조약을 서둘러 체결했다.
탈레스가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군대에 가담하고 있을 때였다. 왕의 대군이 할류스강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 때 그는 강변에 주둔한 리디아 군의 배후에 호를 파게 한 후 그리고 강물줄기를 돌려 대군이 무사히 강을 건너게 도와주었다.
메디아 왕국이 페르시아 국왕인 카로스 2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리디아 국왕인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와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크로이소스는 그에게 예속된 식민 도시들로부터 원군을 보내도록 명령했고 밀레토스에도 동맹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탈레스는 이러한 크로이소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전쟁 결과, 리디아의 크로이소는 패배하여, 그의 도읍지 사르데이스가 함락하고 말았다. 결국 다른 모든 그리스 식민 도시들도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어야 했으나, 밀레토스만은 제외되었다. 이 도시만이 유일하게 관대한 취급을 받아, 그대로 자유를 구가하는 도시로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리디아의 수도 사르데이스가 페르시아 군에게 함락된 직후, 밀레토스 이외의 이오니아 11개 도시 대표들이 미카제의 파니오니옹에서 회합을 개최하여, 대책을 협의했다. 이 때 탈레스는 회합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이오니아의 각 도시들이 공동의 정부를 하나 만들어 이오니아의 중심에 있는 테오스에 그 본부를 두고, 각 도시는 지금까지와 같이 각자 자기 땅에 살면서도 마치 큰 도시의 한 구에 살고 있는 것처럼 합시다. 악폐인 할거주의(割據主義)를 타파하고 대동단결합시다.”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인 바이스도 탈레스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얼마 후, 뿔뿔이 흩어져 저항하던 이오니아의 11개 도시들은 페르시아에 예속되어, 비참한 처지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밀레토스까지도 독립을 잃고 속국의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별이 총총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어서, 탈레스는 하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가까운 산에 올라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그만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 때 위트가 풍부한 트라케 출신의 하인이 그에게 한 마디 했다. “어르신은 열심히 하늘의 일을 알고자 하십니다만, 바로 자신의 눈앞의 일이나 발 앞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군요.”
어느 해 겨울이었다. 한 사나이가 탈레스를 이렇게 비난했다. “철학 따위를 해서 뭣에 쓰려나? 한 푼의 도움도 안 되는 것을 말일세. 무엇보다도 자네의 가난이 그 증거야. 암 그렇고말고.” 이에 화가 난 탈레스는 속으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좋아! 내가 네 놈의 그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지.’ 탈레스는 그의 전공인 천문학에 근거해 탐구한 결과, 다음 해에는 올리브가 풍년이 드는 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돈을 마련하여, 그것을 착수금으로 주고 밀레토스와 키오스 섬의 올리브유 공장을 전부 세를 냈다. 다행히 겨울철이라 임차 가격이 매우 쌌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던 여름이 마침내 왔다. 그의 선견지명은 정확히 적중하여, 그 해 올리브는 대풍작이었다. 공장의 일거리가 갑자기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 때 탈레스는 마음껏 값을 올려 받았다. 그리하여 일시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 때, 그는 전에 자기에게 모욕을 준 사나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철학자에게 돈벌이쯤은 식은 죽 먹기지. 다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을 따름이라네.”
아테네의 솔론이 어느 날 밀레토스로 탈레스를 찾아왔다. 그는 탈레스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미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탈레스는 그 물음에 입을 딱 다물고 좀처럼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솔론이 다시 탈레스를 찾아왔다. 그러자 탈레스는 솔론에게 한 손님을 소개했다. 10일 전쯤 아테네를 떠나서 지금 막 밀레토스에 도착했다는 사람이었다. 인사를 서로 나눈 후 솔론이 먼저 물었다. “그래, 아테네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습니까?” 그러자 손님은 말하길,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한 청년의 장례식이 있었고, 온 시민들이 그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해외여행 중이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등의 얘기를 해 주었다. “그것 참 안 됐구려, 그래 그 분 이름이 뭐라고 합디까?” 다소 불안해진 솔론이 물었다. “이름은 잘 생각 안 나는군요. 뭐라더라? 아주 똑똑하고 정직한 현자라는 소문만 들어서.....” 점점 초조해진 솔론이 다그쳐 물었다. “혹시 그 사람 이름이 솔론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 죽은 청년의 부친이름이 말입니다.” “아, 맞아요! 그랬어요!” 마침내 아들이 죽은 것을 알게 된 솔론은 그만 머리를 치며 몸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뒹굴며 슬퍼했다. 그러자, 탈레스가 천천히 솔론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솔론! 바로 이겁니다. 내가 두려워서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도 갖지 않는 것이.... 가족의 일이라면 당신같이 강한 자라도 이처럼 땅에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지금 손님이 한 말은 개의치 마십시오. 모두가 제가 시켜 한 거짓말이었으니까요.”
탈레스를 만날 때마다 그의 모친은 그에게 제발 장가를 좀 가라고 독촉을 해댔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곤 할뿐이었다. “어머니, 저는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닙니다.” 자포자기 심정이 된 그의 어머니, 결혼 적령기가 훨씬 지난 어느 날, 어렵사리 말을 꺼내어 다시 다그쳤다. “사랑스런 아들아! 결혼 적령기가 지났으니, 제발 장가를 들어라.”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여전했다. “어머니,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 예요.”
그 후, 나이가 지긋이 들어 장가를 간 탈레스에게는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왜 아기를 낳지 않는가?” 그가 말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일세.”
하루는 어떤 사람이 탈레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요?” 탈레스가 짧게 대답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지.” “그러면 가장 쉬운 일은요?” “그건 말일세.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야.”
자연 산천을 둘러보며 탈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신으로 충만하여 있다.” 그는 또 이렇게 강론했다. “지구는 물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물의 운동에 의해 지진이 생긴다.”
탈레스는 입법, 치수(治水), 통상, 무역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는 만물의 아르케를 신화적인 신이 아니라, 자연적, 물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설이 그의 제자들에게 발전되어 사물을 자연 그대로 자연적, 객관적으로 보는 과학적인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피지카』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존재의 ‘아르케’를 추구한, 최초의 ‘지혜의 탐구자’로서 우리는 탈레스와 그의 제자들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르데이스의 함락 후 얼마 안 되어 고령이 된 탈레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때가 기원전 545년, 그의 나이 80세였다. 이 해에 아낙시만드로스도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생명을 부여하는 나일강의 풍요로움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달아, 신화적 사고의 쇠사슬을 끊고, 세계 최초로 존재 근거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던 현인의 삶은 문을 닫았다. 탈레스가 쓴 저술은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다. 그의 이론들은 구전되어 전수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로소 기록, 발전되었다.
쉽고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 - 박덕은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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