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 타르의 영화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유명한 일화로 시작한다. 1889년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하지 않는 말에게 달려가 목에 팔을 감고 흐느낀다.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 그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였고 이후 10년간 식물인간으로 침묵하다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알지만 ‘모르던’ 니체라는 인간이 ‘알고’ 싶어졌고, 그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즈음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놀랍도록 우아하고 격조 높은 <바그너의 경우>였다.
“바그너가 도대체 인간이란 말입니까? 그는 오히려 질병이 아닐까요? 그는 음악을 병들게 했습니다.” <바그너의 경우>는 자신이 그토록 숭배했던 바그너를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고 경멸할 수밖에 없게 된 한 철학자의 고백이다. 회복기에 든 환자가 세상에 보내온, 바그너라는 “질병”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일종의 투병기인 것이다.
기독교 신에 귀의하고 반유대주의자로 활동한 바그너는 니체에게 환멸과 극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할 만큼 “반복되는 도덕적 종교적 불합리”에 질려 했을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를 경멸하고 비판했다. “음악이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요? 사유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을? 사람들이 음악가가 되면 될수록 더욱 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을.” 하지만 바그너의 음악에서 그는 “전체적인 질병”을 본다. “원기가 고갈된 자의 세 가지 커다란 자극제, 즉 잔인성, 순진성을” “한 종족의 교활함”을. 니체는 바그너에게 열광하는 독일 관객들의 어리석음을 우려할 뿐 아니라, 그들이 어느 날 바그너에게서 돌아서게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니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의 운명”이었다.
“무대는 예술의 지배자가 되지 말 것. 배우는 진정한 예술가의 오도자(誤導者)가 되지 말 것. 음악은 어떤 예술에도 기만당하지 말 것.” <바그너의 경우>는 우매한 내가 니체라는 초인의 집을 슬그머니 살피는데, 작지만 훌륭한 창(窓)이 되어주었다.
김숨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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