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이데거와 함께 니체를 읽는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기존 형이상학의 파괴자인 동시에 오히려 그것의 완성자라고 평가하였다. 하이데거는 현실과 유리될 뻔한 형이상학을 구출한 영웅으로 니체를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철학이 아닌, 비논리적인 시 철학으로 몰려 사장될 뻔했던 니체를 형이상학의 완성자로 살려냈다는 점에서 여전히 참고할 만한 중요한 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2. 데카당스란 무엇인지 안다.
데카당스(décadence)란, 불어로 ‘쇠락’, ‘쇠퇴’, ‘퇴폐’를 의미한다. 어원은 라틴어의 decadentia로, 이 단어는 원래 로마 제국 말기의 문화적인 쇠퇴와 향락성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어휘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로마 전성기에 쌓아올린 문화적 성취가 이민족의 침입과 로마 제국의 내분으로 인해 빛이 바랬다는 당대인들의 자조적인 인식과 그것이 가리키는 탐미주의적, 혹은 세기말적 분위기의 그로테스크적 예술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데카당스란 원래 프랑스에서 보들레르, 랭보 등이 이끈 문학의 한 유파를 나타내는 말로, 처음에는 비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곧 데카당스는 기존의 가치와는 맥을 달리하는 새로운 최고 가치를 모색하는 흐름이고, 기존 가치의 패망과 새로운 가치의 도래를 촉진하는 문화적 흐름이라고 인정받았다. 데카당스는 곧 19세기 사회 전체(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등)에 큰 영향을 미쳤고, 철학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한 데카당스 철학자 중 가장 뛰어난 철학자는 바로 마르크스와 니체이다.
유럽 역사에서 데카당스는 크게 세 번 있었다. 고대-중세 전환기, 중세-근대 전환기, 근대-현대 전환기이다. 고대-중세 전환기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면, 역시 로마 제국의 멸망일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절대 가치였던 로마 제국의 쇠락은 그들의 불안감을 조성하며 탐미주의, 혹은 그로테스크 예술에 심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중세-근대 전환기의 가장 큰 이슈는 교황 권력의 쇠망이다. 사코 디 로마, 30년 전쟁 이후 말 그대로 허수아비로 전락한 로마 교황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절대 가치의 몰락으로 봐도 손색이 없겠다. 그렇다면, 근대-현대 전환기의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영토형 제국(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의 쇠퇴이다. 해상 제국과는 달리 영토형 제국은 민족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제국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의 황혼을 불러왔다.
데카당스의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주로 몰락과 쇠퇴, 그것을 배경으로 한 부도덕, 애수, 음란성 혹은 지나친 세련미 등 감성의 과장을 주된 테마로 하지만, 데카당스의 본질이 기본적으로 기존 절대 가치의 붕괴와 새로운 최고 가치의 등장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앞으로 니체와 데카당스를 연결시켜 논의를 전개할 것인데, 데카당스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개념인지 기억해준다면 니체의 사상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니체에게서 데카당스를 읽는다.
‘힘으로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는 니체의 유고 이름이자 그 사상의 핵심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힘으로의 의지는 곧 모든 존재자의 근본적인 성격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힘으로의 의지이다.
니체에게 데카당스는, 힘으로의 의지가 약화되고 둔화되는 것이다. 데카당스가 이러한 ’힘에의 의지‘의 감퇴 현상인 이유는, 데카당스가 심리적, 도덕적, 미적 자기 기만(즉, 존재를 부정)을 통해 니힐리즘에 빠져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데카당스‘라는 용어를 기독교 도덕이나 플라토니즘 철학을 비판할 때 사용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 도덕을 ’약자의 도덕‘, ’노예 도덕‘, ’데카당스‘라고 비판하였는데, 이 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를 언급할 때에나, [바그너의 경우]에서처럼 바그너를 언급할 때에도 데카당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니체가 플라토니즘이나 기독교 도덕을 데카당스라고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실재하는 존재를 부정하며 실존 세계보다 피안의 세계에 있는 ‘참된 존재’(천국, 혹은 이데아 같은)에 더욱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니체는 존재가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존재 너머에 ‘참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존재 자체가 ‘참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존재 너머에 ‘참된 존재’란 허구일 뿐이고, 그 ‘참된 존재’에 중점을 둔다는 것은 곧 힘으로의 의지를 부정하거나 감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데카당스라고 한 것이다.
니체는 데카당스라는 말을 단순히 부정적인 어감으로만 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상승하는 삶의 원형과, 몰락, 붕괴, 연약함이라는 다른 원형을 구분한다. 그 둘의 등급 문제는 따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의 형이상학적 예술가 유형을 데카당스 미술의 유형으로 포함시킨다. 나아가, 니체는 오히려 자신이 바그너만큼이나 이 시대의 아들이며, 자신 또한 한 사람의 데카당이라고 실토한다.
니체가 자신을 데카당이라고 고백한 이유는, 자신이야말로 앞서 말한 데카당스의 본질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어 기존 가치를 데카당스를 통해 몰락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철학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가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통해 기존 가치의 데카당스를 촉진하려 했다. 니체가 파괴하려 했던 기존의 가치란, 바로 기독교 도덕, 플라토니즘 철학, 그리고 종교 그 자체였다. 이것들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힘으로의 의지에 반하는 현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가치는 그 자체로 데카당스이다. 니체는 기존 가치의 데카당스를 촉진함으로써, 결론적으로 ‘데카당스(기존 가치)의 데카당스(몰락)’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 존재의 몰락’을 몰락시킴으로써 이중 부정을 통해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 또한 한 사람의 데카당이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여느 데카당과는 다르다. 그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데카당스로서의 기존의 가치를 맹렬히 규탄한 것이다.
니체가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리면 새로운 가치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존재 그 자체가 이미 ‘힘으로의 의지’이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리면 그 힘으로의 의지가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즉, 존재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이다. 존재가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있는 새로운 절대 가치 아래에서는 당위가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당위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기존 가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자, ‘창조자’는 과연 무엇인가?
4. 예술을 통해 데카당스를 극복한다.
이 단락의 주제는 니체 자신이 언급한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우리들의 종교, 도덕, 철학은 인간의 데카당스적 형식들이다 – 그 반대운동이 예술이다.”
니체는 최고 가치의 데카당스를 통해 기존 가치를 몰락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예술이라고 보았다. 니체가 보기에, 예술은 가장 투명하고 가장 잘 알려진 ‘힘으로의 의지’의 한 형태이다. 예술은 예술가, 즉 창조하는 사람들로부터 파악되어야 하는데, 예술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술가는 산출을 담당하는 존재이며, 산출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로 정립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출행위 속에서 존재자의 생성과 공존하며 따라서 존재자의 본질을 깨끗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이 니힐리즘에 대한 반대 운동인 것은 바로 존재의 본질이 곧 힘으로의 의지이기 때문에 앞서 고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활동이다. 따라서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새롭게 가치를 정립할 수 있는 ‘창조자’는 오로지 예술인 것이다.
예술은 그 무대가 감성의 영역에 속한다. 한데, 니체에 따르면 현실을 뛰어넘은 진실이란 없으며, 현상 세계야말로 진정한 세계, 감성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이다. 예술은 가상의 ‘피안 세계’가 부정한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예술은 데카당스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은 오히려 소위 기존 도덕, 철학, 종교의 ‘진리(즉, ’참된 존재‘)’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 기존 도덕, 철학, 종교에서 예술을 경원시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소위 ‘가치의 역전’이라는 것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진리’보다 예술로 표상되는 ‘존재’가 더 가치 있기 때문에, 그동안 오류(‘참된 존재’에 대한 오류)라고 여겨지던 것이 곧 진리가 되고, 진리라고 여겨지던 것은 곧 오류가 된다(니체의 표현에 따르자면, ‘진리가 곧 오류이고 오류가 곧 진리이다’). 이런 식으로 가치가 역전됨으로써, 그동안 기존 가치의 쇠퇴라고 생각되던 데카당스는 다시 새로운 가치의 생성을 위한 준비 단계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 참고문헌
원전
니체, [힘으로의 의지]
니체, [즐거운 지식]
(이상 청하판 니체 전집)
주 텍스트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철학 강의 I -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 김정현 역, 민음사, 1991
참고 텍스트
백승영, [니체 -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
정동호 외,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책세상, 2006
오양진, [데카당스],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8
http://blog.naver.com/ksk880831/159207917 /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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