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 ~ 19000825)는 급진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다. 예언자, 시인이고 또 자신이 구축한 철학의 근본적인 비판자였다. 대부분은 인간의 이해력과는 독립된 객관적 세계 구조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대한 일관된 비판이다. 서유럽의 모든 지적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라이프치히 근처에 있는 뢰켄에 사는 루터교 신자들에게서 태어났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 초기 시토수도원 안에 설립되어 후에 그 교육적 질로 인해 유명해진 학교 슐프포르타에서 교육을 받았다. 모범생이었으며 1864년 본 대학으로 진학했고 이어서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25살의 나이로 바젤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72년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라이프치히 시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작곡가 바그너(W. R. Wagner), 그의 부인 코지마(Cosima Wagner)와 친구로 지냈다. 수년 동안 바그너의 음악극을 초기 그리스 비극이 이루었던 것과 비견할 만한 영광을 독일문화에 가져왔다며 바그너야말로 창조적 천재라 주장했다. 그러나 점차로 바그너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바그너의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 그리고 거들먹거리는 오만에 대한 혐오감을 최종적으로 1888년 <니체 대 바그너(Nietzsche contra Wagner)>를 출판하는 것으로 드러냈다.
건강이 항상 좋지 못한 편이어서 1878년 병 때문에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10년 동안 만성적인 질병과 싸웠다. 1889년 정신병 진단이 내려졌고 누이 엘리자베스(Elisabeth Nietzsche)의 간호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원고를 마음대로 삭제, 변형 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의미를 왜곡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덕분에 니체는 무자비한 권력의 추구를 옹호하는 인물로 비추어졌고 나치즘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만년에 니체가 예찬했던 초인(ubermensch)의 실현이 히틀러(A Hitler)라 생각했다.
니체는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서 근본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믿음 대신에 감각과 상식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그렇지만 상식이 어떻게 사물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며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선 '참된 세계’란 거짓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상식은 진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다루는 방법이기 때문에 옹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변의 실재가 없고 상식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틀릴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이 세계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니체는 모든 경험의 개념화와 언어적 조직을 옳지 못한 것으로 선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을 구성하기 위해, 모든 양식의 지적 식별로부터 해방되기만 하면 사실상 식별할 수 있는 참된 사태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그 언어를 사용한다.
실재 또는 실체로서의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자다. 그는 우리가 인과율과 행위라는 보편적 개념을 통해서, 행위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의지를 수행하는 행위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잘못 추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의 사유는 내가 의지할 때가 아니라 그것이 의지할 때 나타난다. 여기서 의지 또한 분명한 개념이 아니다. 인과율과 필연성 같은 법칙에 대한 믿음은 서로의 의사소통을 위한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다. 실재로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니체와 실존주의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 니체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보단 창조해야 하며 이런 창조는 이성으로 정당화되거나 근거하지도 않고 그로 인해 정당화될 수도 없다. 이것은 다만 행동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관습과 진리라 여겨지는 것들을 거부함으로써 보다 풍부한 경험(수단으로 고통까지 기꺼이 포용하며)을 만들 수 있고 마음의 동경을 충족시키는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를 발휘해 새로운 이상과 가치를 창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니체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의 창조적 수단으로 생각했다. 완고한 가치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가령 기독교에서 어떤 이유로 금식과 금욕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권력에의 의지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가치전도가 일어난다. 이들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기에 다수로부터 저주와 오해를 받아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실존이 주는 긍정과 고통 모두를 긍정하며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니체는 실존의 긍정과 관련해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를 제시한다.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든 지금 발생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미 여러 차례 발생해왔으며 앞으로도 무한히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실재에 관한 법칙적 설명을 거부한 것과 관련해 영원회귀는 법칙, 혹은 실재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둘째 발생하는 것이 이미 무한히 발생했던 것의 정확한 반복에 불과하다면 초인의 의지의 발휘를 어떻게 옹호할 것인가 하는 점 등이다.
니체의 초인은 삶의 모든 공포와 비참함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것을 기꺼이 긍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순종적인 평범함 같은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엄격한 자기훈련과 고통에의 자발적 노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삶은 높은 밀도를 가질 수 있다. 각 개인은 최고의 이상을 추구하며 매 순간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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