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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미학사상
최근 방송가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이다. 그중에서 대중음악계에서는 이미 한 사람의 예술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기성가수들이 서바이벌 형식의 가요경연을 벌이는‘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세인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다. 로큰롤 대디로 불리는 임재범은 티베트 고승들이나 냄 직한 소리와 분위기로 무장하여 남진의 <빈 잔>을 부른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혼(Geist/정신)이 담긴 작품으로 각인되었고, 그 독창성과 천재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청중평가단의 평가는 정확히 중간인 4위였다.
예술은 자연처럼 보일 때, 진정한 미적 예술
칸트에의하면,‘ 미’란목적없는합목적성을드러내는것이어야한다. 반면에 인간의 목적 활동(예술 작품을 포함하여)에는 내적이든 외적이든 일정한 목적이나 의도가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술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깃들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은 항상 예술가의 의도(목적)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직 자연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예술미는‘(작가의 의도나) 목적이 있는 합목적성’을 표상하는 반면에, 자연미는‘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드러내므로 자연미만이 진정한 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일체의 예술미는 불가능하다고 칸트는 주장하는 셈이며, 이런 주장은 오늘날이나 칸트 당대나 사람들이 승인하기를 꺼리는 결론이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예술미와 자연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다시 정의한다“. 자연은 그것이 예술인 것 처럼 보였을때,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것이 예술임을 의식할 때조차 우리에게 자연인 것처럼 보일 때에만 아름답다고 불릴 수 있다.”예술은 자연처럼 보일 때, 진정한 미적 예술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그것이 인공적임을 알고 있을 때조차, 자연처럼 보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천재(genius)이다.
어떤 대상이나 작품의 미적 탁월성을 감상(평가)하기 위해서는 취미(Geschmack)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취미는 항상 무관심성을 유지한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발견해야만 만인에게 자신 평가의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미적으로 탁월한 작품을 만들어내려면 천재가 필요하다. 천재는 규칙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예술에 새로운 규칙을 부여하는 재능이다. 이러한 천재의 역량은 제자들에게는 모방해야 할 전형으로 여겨지지만, 또 다른 천재에게는 계승의 실례가 되고 새로운 유파 창출의 동인이 된다. 그러므로 천재에게 가장 돋보이는 역량이 있다면, 그것은 독창성이다. 그리고 독창성은 때로 파격을 낳는다. 천재가 이념을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능히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형과 파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까지 제자가 모두 본뜬다면, 이런 모방은 모작이 된다. 기형과 파격은 오직 천재에게서만 공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에서 어떤 대담성과 도대체가 보통의 규칙으로부터 일탈한다고 하는 것은 천재에게는 어울리지만, 범인들에게는 결코 모방할 것이 못 되고 오히려 그 자체로서는 항상 제거하고자 해야만 하는 모자람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자람마저도 천재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소심한 조심성 때문에 천재가 가진 정신의 약둥이 방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만약 어떤 작품에서 있어서 취미(감상과 비평)와 천재가 서로 상충하여 어떤 것이 희생되어야만 한다면, 희생은 언제나 천재 쪽에서 일어나야만 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취미는 천재의 훈육하는 역할을 하며, 천재를 교화하고 연마시켜서 그 천재성을 어디까지 발휘해야 하는지를 지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미는 언제나 천재의 날개를 자른다.
어쩌면 임재범의 <빈 잔>은 그래서 4위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대중음악과 대중음악가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격찬일까?
미의 요건: 무관심한 관심
칸트는 미(美)에 대한 문제를 판단의 문제, 그것도 취미 판단의 본성을 해명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철학적인 작업이란 메타 활동이고 메타 활동이란 일종의 반성 활동이다. 그리고 메타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상적 태도는‘무반 성적’ 이라고 규정된다. 즉, 일상어의 취미가‘무반 성적 취미’라면, 철학적·미학적 의미의 취미는 그 말로써 어떤 의미가 포함되든지 항상‘반성의 취미’인 것이다. 따라서 전자에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들이 모두 포함된다면, 후자에는 특정한 조건과 원리에 근거하는 취미만이 포함될 것이고, 칸트는 그 자격을 오직 ‘미’만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취미’라는 말을 ‘미를 판정하는 능력’이라는 엄격한 의미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칸트는 진정한 취미판단은 일체의 관심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가 관심으로 언명한 것은 감각적 욕구와 도덕적 욕구이다. 그래서 취미는 쾌락과 선(윤리)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만족을 추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며, 미는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관심 없는 관심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나 미에서 합목적성은 조화나 비례에서 성립한다. 공간적(시각적) 조화나 비례관계를 심메트리아(symmetria)라 하고, 시간적(청각적) 조화를 하르모니아(Harmonia)라고 한다. 피타고라스 이래 서양 철학은 미의 기준을 조화나 비례의 성립에서 찾았기에 취미의 한 계기로서 합목적성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어떤 대상이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려면, 합목적성을 가지되, 의도나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한다. 칸트는 합목적성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목적 있는 합목적성’으로 구분하고, 오직 전자만을 취미의 계기로 인정하였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취미의 이율배반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취미판단의 이율 배반에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미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지 아닌지’,‘ 자연미와 예술미 중 어느것이 우월한지’ 그리고 ‘어떤 개념에 합당한 것이 더 아름다운지 아니면 개념과 무관한 것이 더 아름다운지’등이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칸트는 미는 주관적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답을 내놓는다. 즉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주관적이지만 -합목적성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천재에 대한 설명에서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자연미가 진정한 미이며, 만약 예술미가 진정한 미로 성립하려면, 그것은 오직 천재에 의한 예술에서만 가능하다고 칸트는 본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특성은 자유 미와 의존 미를 구별하게 해줌으로써 일상적 취미의 이율배반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 한클래식 애호가가 비발디의 <사계>가 사계절의 풍광을 너무도 잘 재현한 명곡 중의 명곡이라고 칭송할 때 다른 이가 그것보다는 쇼팽의 <야상곡>이 더 명곡이라고 주장한다면, 누가 옳은 주장을 하는 것일까? 칸트는 묘사할 대상이나 개념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훌륭하게 구현한 아름다움을 '의좋은미’라 하고 그런 대상이나 개념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을‘자유미’라고 지칭한다. 자유미나 의존 미는 모두 미이므로 위의 두 애호가의 주장은 모두 타당하다. 그렇지만, 만약 취미를‘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엄격한 의미에서 정의한다면, 후자 애호가의 취미만이 정당한 취미가 된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도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숭고를 느끼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 판단을 인식능력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상력과 이성의 위계(이성의 우월성과 상상력의 열 등성)를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에서 성립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가 대상의 적절한 형식에서 성립하는 반면, 숭고는 대상의 몰 형식성(비형 식성)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그러나 숭고에 대한 칸트 정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크기에 있다. 그는‘그것과 비교한다면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것’, 즉 절대적으로 큰 것을 숭고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은 이러한‘절대적인 크기’를 느낄 수 없고, 다만 유한한 크기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숭고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각기관의 모든 척도를 능가하는 어떤 마음 능력(즉, 이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칸트는 말한다.
물론 객관적·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자연 사물 중에서는 절대적 크기 또는 무한한 크기를 가진 것은 없다. 하지만, 주관적·감성적으로 느끼는 크기에는 그런 크기가 가능하다. 감성적 크기를 칸트는 다시 수학적인 것과 역학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천정이 높은 성당 입구에서 느끼는 무한한 경외감과 같이 외적 모양새의 압도적 크기라고 이해해도 좋다. 반면에 후자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치솟은 절벽의 꼭대기나 해일을 동반할 듯한 폭풍우와 같이 우리의 신체적 능력을 완전히 압도하는자연의 힘과 같은 것을 말한다. 양적인 크기와 힘의 크기에서 무한성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칸트는 어떤 대상을 역학적으로 숭고하다고 판정하려면 공포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공포를 주는 대상 앞에서 그 공포를 극복하고 있을 때, 숭고에 대한 판단이 성립한다고 본다. 따라서 공포만을 느끼는 사람은 숭고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항이나 그 공포의 극복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나 미개인은 대상을 숭고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포를 느낄 수 없는 존재 역시 숭고를 판단할 수 없다. 완전히 갓난아기나 혹은 신(천사도) 등은 공포를 모르기 때문에 숭고를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숭고란 오직 인간만이 그것도 이념을 자신 안에 가지는 인간만이 판단할 수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는 이렇듯 아직도 곱씹고 되새김질할 만한 그리고 해야 할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모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진)’에 대한 답변이고,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선)’에 대한 답변이며 마지막 비판서인 <판단력 비판>은‘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미)’에 대한답변이다. <판단력 비판>은 크게 두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미학 문제를 다루는 [감성적(미적) 판단력의 비판]과 자연철학의 문제를 다루는 [목적론적 판단력의 비판]이 그것이며, 이 두 부문을 다 같이 관통하는 공통 원리로‘합목적성’을 칸트를 제시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칸트의 미학은 ‘우리는 인간과 자연에 대해 합목적성(질서와 조화)을 희망해도 좋다.’라고 결론 내릴 만한 철학적 근거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20110602 / 연세대학원신문/기획서평-인문학을 말하다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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