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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Hegel(1770-1831)/Phannomenologie des Geistes

불행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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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본 논문은 헤겔의 저서 『정신현상학』1)의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 장에 등장하는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 bewußtsein)에 대한 해설을 우선 그 목적으로 한다. 자기의식은 의식의 분열이 스스로의 내적 관념 속에서 일어나는 분열임을 아는 의식이기에 반성적(재귀적)이지만 그 분열을 단순히 직접적으로 떠안는 이상 그 불행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자기의식은 부단한 행위를 경유하며 스스로를 지양(aufheben)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행한 의식은 그 지양까지의 과정에서 의식이 겪는 불행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불행한 의식에 대한 해설을 통해, 즉 그 불행(그러나 동시에 그 불행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기록을 통해,  ―설령 그것이 세속적 판본일지언정―자의식과 세계가 만드는 불행을 겪고 있을 우리 스스로를 비춰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또 다른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정신현상학』이라는 여정과 변증법

 

 『정신현상학』은 무엇보다 우선 하나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 즉 이 책은 사유의 여정이 담긴 하나의 역사서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 여정을 담은 또 하나의 책으로 데카르트의 『성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역사서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성찰』을 통해 데카르트가 전개하는 의심과 회의가 어떻게 상식에 반하는지를 목격할 수 있다. 『성찰』의 2 단계(성찰)까지의 사유 전개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우선 근대적 주체를 도출하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식론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과, 연장성 같은 양적 성질들, 수학적 공리 등은 우선 그것이 명증하지 않기 때문에2) 부정된다. 이러한 부정은 인식작용(cogitatio)으로서의 코기토 내에 등급을 설정하고 그 등급에 따라 실재성을 부여하는 2성찰의 마지막 단계, 즉 표상적 실재성(realitas objectiva)에 이르러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다.

 

 반면 헤겔의 작업은 존재론적이다. 비록 의식(bewusstsein) 장의 논의 상당이,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각 장의 많은 내용들이, 근대의 인식론적 구도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선 그것은 존재론적 작업의 지평 위에서만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발생론적 여정은, 데카르트와는 다른 의미에서,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의심할 수 없는 감각적 확신(sinnliche gewißheit)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확실함의 한계와 궁지를 노출함으로써 그것의 다음 단계로 향하는 것이다.

 

 변증법(dialektik)은 실재의 논리, 운동의 논리학이다.3) 소크라테스의 변증술4)에서 우리는 변증술의 과정을 거치며 나와 타자의 ‘관계’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을 목격한다. ‘나와 타자’라는 것은 나라는 확실한 내부(다른 말로는 외부가 아닌 내부, 곧 부정의 부정)와 그 내부가 아닌 외부, 즉 타자를 설정하지만 이 설정을 가능하게 하는 경계는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이 경계를 기준으로 설정된 나와 타자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형식논리학 역시 나와 타자의 관계가 갖는 논리를 다루지만(어떤 논리학이건 그것은 하나의 항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 경계가 고정되어 있기에 변화하는 실재를 설명하지 못한 채 추상적 형식에만 머물게 된다.5)

 

 이렇게 이동하는 경계는 언제나 그렇게 이동한 경계에 따라 새롭게 펼쳐지는 내-외부를 드러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에 도달해 이 분열이 멈추기 전까지는 중단되지 않는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매 순간마다 드러나는 경계와 그 경계를 통해 형성되는 구도가 결코 거짓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그것은 한계를 가지며 불완전할 뿐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순수한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고 언제나 복귀를 예정하고 있다고 비판한 변증법의 폭력성이겠지만 다른 면에선 서로 모순되며 충돌하는 진실‘들’을 해명할 수 있는 변증법의 힘이기도 하다.6)

 

2. 감각적 확신에서 회의주의까지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시작되는 정신현상학의 여정은 그러나 모든 의식의 노력이 실상 그 자신의 내적 분화의 과정이었음을 깨닫고 자기의식의 단계로 넘어 간다. 정신현상학의 ‘현상학’이라는 표현을 후설적 전통의 현상학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그러할 것이다.7) 감각적 확신 자체에서 지각으로, 지각에서 오성으로 넘어가는 의식의 과정은 일련의 분열과 복귀가 스스로의 운동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의식이란 관점에서 세계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대상세계의 중심을 나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 더욱 두드러진 대상세계에 대한 노동은 우선 이 자기의식의 즉자적 자기-증명 과정과 다르지 않다.8) 그러나 이러한 욕구(begierde)의 충족 과정은 끝나지 않는 연쇄와 같으며 오히려 대상(타자)에 전적으로 의존돼 있는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결국 욕구의 무한 연쇄를 중단시킬 수 있는 타자는 나와 같은 타자, 부정(negation)이 부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생성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그러한 타자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자기의식은 욕구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된다.

 

 “보편적(allgemeine) 자기의식은 타자 안에서만 있는 자아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개별 자아는 절대적인 독립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로부터 그 자신을 구별해내지 않는 직접성(Unmittelbarkeit)과 욕구에 대한 부정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각자는 보편적 자기의식임과 동시에 객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각자는 다른 자유인에게 그 자체로 인정되는 한에서만, 상호성(Gegenseitigkeit)의 구도 속에서 실재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또한 각자는 타자를 인정하고 동시에 그 타자가 자신을 자유롭다고 인정해주는 한에서만 그것을 인지한다.”9)

 

 이러한 상호인정(wechcsl anerkennung)은 그러나 평화로운 과정만은 아닌데 우선 내가 타자의 인정에 의존하더라도 타자는 여전히 욕구 차원의 대상적인 존재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生)을 건 상호 인정의 투쟁은 결국 인간을 주인(herrschaft)과 노예(knechtschaft)로 분열시킨다. 하지만 노예의 입장에서 직면하는 죽음의 존재와 노동의 짐10)은 오히려 이 주인-노예 관계를 전도(umkehrung)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단계에서 자기의식은 더 이상 주인-노예 구도에 머물지 않으며 양자의 대립을 하나로 종합한 자기의식이다.

 

 이 종합의 자기의식은 우선 개념의 형태를 띠며 나타난다. 헤겔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개념을 추구하는 나의 운동은 나 자신 안에서의 운동(eine Bewegung in mir selbst)인 것이다.”(236쪽)

 

 “이렇듯 자기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규정하는 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유하는’ 의식 일반이며, 그의 대상이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직접적인 통일체(unmittelbare Einheit des Ansichseins und des Fürsichseins)라는 데 있다.” (236쪽, 번역수정)

 

 이를 헤겔은 스토아주의(stoizismus)11)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선 세계를 개념으로 펼치는 의식의 측면에서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를 취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미 밝힌 것처럼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을 추구하는 나의 운동”이며 “나 자신 안에서의 운동”이기에 순수한 사유에 자신을 가두며 구체적 생의 활동에 자신을 실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한다.

 

 이러한 까닭에 스토아주의는 생의 장(場)을 통해 자신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는데 이는 대상을 부정하고 그렇게 부정한 대상을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이것은 앞서 인정투쟁의 단계에서 나타난 노예 노동의 그것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헤겔은 이를 회의주의(skeptizismus)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고대 로마 시대, 세네카 같은 몇몇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칸트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형이상의 세계와 이하의 세계, 양자에 발을 걸친 인간이 형이상의 실현을 언제나 형이하에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마 그 개입의 이유였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12)

 

 “스토아주의에서의 욕망과 노동이 부정을 관철시키면서 자기의식을 성취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데 반하여 사물의 다양한 자립성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는 이미 자체 내에 완전한 자유를 지니는 자기의식으로서 타자존재에 부정의 화살을 겨눈다는 점에서 지대한 효과가 기대된다.” (240쪽)

 

 스토아주의적 의식은 유한한 세계를 정신의 자유보다 한 단계 낮은 것으로 파악한다. 세계는 정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대상일 뿐 그 자체의 긍정적 의미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유한한 세계에 정신의 자유를 실현하려고 하는가? 자유로운 의식이 이 유한한 세계의 실현에 자신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폴리트의 지적처럼 “스토아주의적 자기의식과 회의주의적 자기의식 사이에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가 성립”13)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의 의식은 자기동일적인 자기의식이라는 한쪽의 극과, 혼란을 만드는 의식이라는 다른 쪽 극을 왕복하는 무망한 방황이다.” (243쪽, 번역수정)

 

 회의주의의 의식은 “무망한 방황”을 인식한다.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와 자신의 노동이 모순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기동일적인 자기의식”은 무한한 것이지만 아직 ‘세계를 개념으로 펼치는 의식의 측면에서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를 취하는 상태’에서만 그러하다. 결국 나는 “혼란을 만드는 의식이라는 다른 쪽 극”에 있다. 나는 유한한 자이다. 무한한 자유라는 유토피아가 유한성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따라 부정당하게 되는데 이 역시 변증법적으로(양자의 분열, 분열의 경계를 인식함으로써 경계가 이동되는 바로 그 변증법) 결국 의식 안에서 분열된 두 계기라는 것이 밝혀진다. 스스로의 분열을 의식하는 의식, 이러한 의식은 아직 극복되지 않은 그 분열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의식은 “분열에 대한 모든 반성이 지닌 불행에 대한 의식”14)이다.

 

3. 불행한 의식

 

 3-1. 매개와 연계를 통해 보기

 

 이 의식의 불행은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의 단계를 거치며 나타난 본질과 비본질의 간극을 떠안게 되는데 이 간극은 서로에 대해 절대적으로 대립해 있다. 그리고 반복하지만, 이 절대적 대립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의식이 양자에게 부여하는 위치는 서로가 전혀 무관한 이질적인 관계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또한 의식이 불변의 존재에 대해 무관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의식은 양자 모두를 직접 자기 슬하에 둠으로써 양자의 관계를 어디까지나 본질과 비본질의 관계로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비본질적인 것은 파기되어야만 하지만 의식에게는 양자가 다 같이 본질적이면서 모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야말로 의식은 모순을 떠안고 있는 운동(die widersprechende Bewegung)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여기서는 상호대립하는 한 쪽 극이 다른 쪽 극으로 이행한다고 하여 안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연이어 새로운 대립물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46쪽)

 

 본질과 비본질의 분열은 실재적으로는 보편자와 개별자의 분열로서 제시된다(차이는 본질/비본질이 의식 주관의 차원에서 설정되는 것임에 비해 그러한 의식 차원이 실재성을 얻으며 드러나는 것이 보편자/개별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생각보다 강고하다. 이럴 때 가능한 시도는 양자의 매개(vermittlung) 또는 연계(zusammenhang)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매개와 연계의 개념은 사회이론의 논쟁15)에서 빌려온 것인데 매개(intermediation)가 구조와 행위, 거시와 미시, 보편과 특수 등의 측면을 한 실재의 다른 두 층위로 살피는 것임에 비해 연계(connection)는 각 측면이 독립된 차원으로서 서로 관계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헤겔이 불행한 의식의 최초 단계(본질과 비본질의 절대적 대립)를 넘어설 때 전개하는 사유는 매개와 연계 중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우선 파악해야 한다.

 

 “의식 속에 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불변자는 개별 존재와 접촉하며 오직 개별자와의 연계 속에서만 생명 있는 것이 된다. 이렇듯 불변자를 의식하는 가운데 개별자가 말소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별자는 개별자로서 불변자의 세계에 군림하는 것이다.” (246~247쪽)

 

 본질 또는 보편자는 변화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이분법은 “상호대립하는 한 쪽 극이 다른 쪽 극으로 이행한다고 하여 안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연이어 새로운 대립물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지만 우선 우리는 본질-보편자를 지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자각해야만 하는 것은 “불변자는 개별 존재와 접촉하며 오직 개별자와의 연계 속에서만 생명 있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분법은 극복되었는가? 극복되지 않았다. 비록 불변하는 본질-보편자가 개별자와의 연계를 통해서만 드러나더라도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둘 사이의 분열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연계를 가능케 하는 ‘고리’는 신학적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찰스 테일러의 지적처럼 “불행한 의식 파트는 우리에게 헤겔 종교 철학의 근본적인 아이디어 약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초월적 실재(transcendent reality)16)와의 관계로서” 우리는 “그것에 무관심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불행한 의식은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종교와 철학의 관계만큼이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전개를 반영하는 것이다.”17)

 

 아직까지 불변자와 개별자는 진정한 하나로 파악되고 있지 못하다. 그 둘은 각자 나름의 공간을 가지며 보편자가 개별자로 소외(Entfremdung)되는 “연계 속에서만” “불변자의 세계에 군림”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계의 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자가 개별자로 화(化)하는 어느 지점의 역사적 사건 또는 인물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다. 보편자가 바로 거기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이 바로 이 소외의 구심점으로서 바로 ‘그’ 개별자다.

 

 “최초에 의식이 단지 양분되어 있는 단계에서는 개별 의식을 지양하여 불변의 의식으로 나아가는 데 주안점이 두어졌지만, 신의 육화라는 이 단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는 형태를 지니지 않은 순수한 불변자와의 관계를 지양하고 오직 형태화한 불변자인 신과의 관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249쪽)

 

 ‘신의 형태화(gestalt des unwandelbaren)’가 바로 이 연계의 지점일 것이다. 헤겔은 ‘개별자와 불변자의 대립’, ‘개별자로 드러나는 불변자’, ‘개별자와 불변자의 합치’라는 세 가지 결합양식을 언급하는데 이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헤겔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로 드러난 이 “형태화한 불변자”는 땅으로 내려온 예수로 대표되고 있다.

 

 여기서는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 잠시 헤겔우파식 해석은 제쳐두자. 우리에게 이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과거의 역사이거나 현재화한 인격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개별자가 단순한 개별자를 넘어선 보편자의 화신(化身)이라는 점이다. 양 극단을 해매는 불행한 의식은 이러한 화신과의 조우를 통해 자신을 투사한다.18)

 

 그러나 이러한 투사는 한계를 갖는다. 사건이건 인물이건 그것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하나의 점일 뿐이며 데리다의 지적처럼 그것이 다시금 돌아오더라도 그 돌아옴은 철저히 계속되는 지금-여기의 투쟁에 의해 굴절될 뿐이다. 그런 굴절‘들’ 속에서 느끼는 피곤함은 이분법의 극복이 아니라 강고함을 재확인하게 만들고 있다.

 

 “개별자와 불변적인 것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유대교적 의식은 양자의 ‘직접적’ 통일인 ‘수육(受肉, incarnation)’에 의해 기독교적인 불행한 의식이 된다. 이때 불변적인 것은 존재자로 나타난 하나의 형태(gestalt)로 체현된다 − 불변적인 것의 자기부정, 이 형태에서 보편자와 개별자의 직접적인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불변적인 것이 감각적 형태로 나타남으로써 불변적인 것은 존재의 피안에 있는 일자가 아니라 존재와 결합된 일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직접적인 통일은 필연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19)

 

 “직접적인 통일은 필연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의 형태화가 개별자를 통한 보편자의 실현이더라도 아직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불변자와 일체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은 어디까지나 희망에 그칠 뿐, 현재 속에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희망이 충족되느냐의 여부는 희망의 근거가 신의 인격화에 있는 이상, 신체가 처해 있는 일회성과 강고한 물질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이 현실에 존재하는 유적 일자, 예수로 현현했다는 사태에 따르면, 동시에 그가 바로 이 현실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공간적으로 머나먼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249쪽, 번역수정)

 

 헤겔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삼중의 운동”으로서 다시 제시한다.

 

 “첫째가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운동이고 다음은 욕망이나 노동을 통하여 현실에 대처하는 개별 존재의 운동이며 셋째는 자기의 독자성을 의식하는 운동이다.” (250쪽)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개별자에 연계된 보편이 아니라 양자가 내재적으로 일치되는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단계에 어떤 당혹이 있는 것 같다.

 

 “의식의 사유 그 자체가 하염없이 울려퍼지는 종소리이거나 따사로이 느껴지는 짙은 안개와도 같은 음악적인 사유에 그침으로써, 대상 파악을 위한 유일한 내재적 방법인 개념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51~252쪽)

 

 헤겔은 첫 번째 단계를 “하염없이 울려퍼지는 종소리”, “따사로이 느껴지는 짙은 안개”, “음악적인 사유” 등으로 표현하며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 한계란 단적으로 “개념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 개념이란 “대상 파악을 위한 유일한 내재적 방법”이다.

 

 문제는 일체화된 세계를 우선 어떻게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느껴지냐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후 더 해명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여하간 영성에 가까운 현 단계에서 이 흐릿한 일체화를 우리는 경배(andacht)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이 일체화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자를 나와 떨어진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에서다. 이는 아직 형태화된 신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신의 형태화라는 구도를 설정하는 경계를 바꿔 다른 계기와 단계로 넘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형태화한 신의 부재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다시 한 번 노동20)의 형태로 출현한다. 막스 베버의 분석21)이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칼뱅주의의 교리는 이미 예정된 세계를 상정하며 그 세계에서는 구원 받았다는 직접적인 표식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의 구원을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신의 소명(calling)에 따른 행위로서 스스로의 구원을 증명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소명에 따른 행위는 바로 현세에 대한, 현세적 전통에 대한, 현세적 가치에 대한, 완벽한 참여와 다르지 않다.

 

 완벽한 참여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어떤 순환이 있다. 신의 구원은 노동으로 증명되지만 그러한 증명이 가능한 것은 신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에게(실은 칼뱅주의에 있어서) 신의 구원을 증명하는 노동의 과정이 세속적 성공이었다면 헤겔에게는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때로는 스스로를 포기해야만 하는 그러한 노동 전반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이 노동 전반이 그렇게 포기에만 국한되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앞서 살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인과 노예 관계의 전도가 일어나는 큰 계기 중 하나는 노동을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세계에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노예이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지금의 노동은 바로 그 신과 신의 은총을 현현시키는 유일한 창구가 아닌가? 지금 단계에서 신이 바로 이 세계라면 그 세계의 정립자인 자신 역시도 신성의 담지자로 고양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로 욕망과 노동과 향유의 의식이란 이러한 것으로서, 그의 의지와 행위와 향유도 모두가 의식으로부터 발단된다. 의식이 반대 극에 있는 자연적 신의 본질을 인정하여 자기를 방기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감사도 어디까지나 의식 자신의 행위로서, 이것의 반대 극의 그것만큼의 자기희생적인 선행에 대등한 행위로서 응답하는 것이다. (중략) 이렇듯 복귀하는 가운데 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자기감정을 지니고 더 이상 자기단념이라는 외양에 현혹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 단념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참뜻은 자기방기를 하지 않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257쪽, 번역수정)

 

 그러나 이 노동이 신의 은총22)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도 엄밀한 사실이다. 우리가 앞서 매개와 연계를 구별했지만, 사실 철저하게 사회이론적인 이 용어를 그대로 쓰기가 무리가 있겠으나, 현 단계에서 양자는 결코 제 3자를 통해 단순히 연계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하단 의미에서 매개의 단계에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분열이 완전히 통일적으로(혹은 총체적으로) 사유되지는 않음에도 최소한 신의 은총이란 것이 내 밖에 완전히 초월해 스스로의 육화로만 다가오는 존재이진 않다는 뜻이다.    3-2. 교단

 

 그렇다고 매개의 지점이 완전히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엄밀한 사실이 있는 이상 분열된 양자는 여전히 차이를 가지고 있다. 동일성과 차이를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헤겔의 전략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 없이 무조건적인 일체화만을 주장하는 것은 무차별적 동일자를 내세우는 신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 또한 헤겔의 생각이다.

 

 이 생각을 따를 때 지금 매개의 지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헤겔은 “제 3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합일”을 이루는 매개 항, 즉 교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물론 그것 자체의 발전적 긍정성이 있지만− 그것이 결과하는 “결단의 고유성과 자유(die eigenheit und freiheit des entschlusses)”, “행위에 대한 죄책(die schuld seines tuns)”의 떠넘김에 대해 또한 지적하고 있다.(259~260쪽, 번역수정)23)

 

 여기서 그것 자체의 발전적 긍정성이란 떠넘김 자체가 무책임한 행위가 아닌 보편적 이성(vernunft)으로의 상승일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식 장은 이성 장으로 이행하며 이성은 이제 자신의 실재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찰 과학, 논리학, 관상과 골상학, 도덕학 등의 당대 학문들을 포괄하려고 시도한다.

 

 4. 나가며

 

 이상으로 우리는 불행한 의식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 사실 불행한 의식 자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예컨대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코제브의 경우 오히려 불행한 의식을 주인 노예 변증법 논의에서의 후퇴로 보며 강하게 비판한다.24) 이에 반해 푀겔러는 자기의식을 중시하는 코제브에 공감하면서도 『정신현상학』을 사유전개 과정이란 측면에서 봐야하며 그렇기 때문에 코제브의 해석보다는 훨씬 이론적인 의미가 많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불행한 의식을 후퇴가 아닌 발전으로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25)

 

 이렇게 복잡다기한 해석들은 『정신현상학』이란 텍스트 자체가 들뢰즈가 말한 개념 생산의 모범적 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불행한 의식을 통해, 아니면 『정신현상학』을 통해, 더 넓게는 헤겔을 통해 무언가를 읽을 수 있다면 리쾨르의 말처럼 텍스트는 제 생을 잘 살아 내거나 혹은 자신을 완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보편자와 분열된 의식이 어떻게 이성적 탐구로, 정신의 현현으로 자신을 몰아가는지를 읽거나, 시민운동이나 법국가론의 사상적 단초를 읽거나, 유물론적으로 세계를 전도시킬 방법을 찾거나(체계가 아니다. 그러니 이건 헤겔이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결국 헤겔을 만나는 우리의 자세에 좌우될 것이다.

 

 우리는 글의 도입부에서 본 논문의 두 가지 목적을 접했다. 1) 불행한 의식의 해설과 2) 불행한 의식을 통해 스스로의 불행을 반추해보는 기회의 마련이 바로 그것이었다. 1)번의 목적은 철저히 기계적으로 평가될 것임에 반해(그렇다면 예수와 교단의 문제에서 필자는 매개-연계 개념 쌍보다는 사변철학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이렇게 생기게 된 구멍은 스스로가 떠안아야할 몫이 아닌가 한다) 2)번의 목적은 다분히 ‘열린’ 것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정상의 이유가 있었지만 여전히 논문의 어느 한 부분을 이렇게 불명료하게 놔두는 것(즉 두 번째 구멍을 남기는 것)에는 많은 분들의 양해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러한 양해가 허락된다면 이후 논의에서의 성실성을 통해 본 논문의 구멍들을 함께 메워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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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본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1, (한길사, 2005)을 기준으로 하고 경우에 따라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in zwanzig Bänden Band 3 (Suhrkamp, 1986)을 가지고 수정했다. 이후 모든 인용은 본문 옆에 국역본의 쪽수만 병기하고 수정한 경우엔 수정여부를 함께 쓰기로 한다. 전집은 wizb로 약칭한다.

2) ‘명증하지 않다.’ 혹은 ‘지식의 확실한 근거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거짓이다.’라는 주장이 아니다. 데카르트적 의심에 의해 제거되는 지식들은 그것이 탈-은폐(aleteia)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확실한 근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 여기에 대해선 헤겔 논리학을 다룬 윤병태의 저술들을 참고하라. 변증법과 관련해선 미하엘 볼프(1997), 하워드 P. 케인즈(1998), J.E. 맥타가르트(1993), 디트 반트슈나이더(2002)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4) 모든 철학 개념이 그러하겠지만 ‘변증법’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특히 하나로 귀결되기가 어렵다. 안드레아스 아른트의 지적처럼 “‘변증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하나의 정식으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는 그 개념의 역사를 살피게 된다.” 이 개념사 속에서 “변증법 개념들은 그것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그 개념을 여러 경우에 사용함으로써, 어떤 유사성을 인식하고, 하나의 계보학에 이를 수 있는 ‘가족개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여기서 지금 헤겔 변증법의 개략적 이해를 위해(이런 개략적 이해를 시도하는 이유는 『정신현상학』의 존재론적 여정이 언급한 “궁지와 한계”를 어떤 식으로 극복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도입하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헤겔의 그것과 그대로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이 변증법을 임의의 가상이 아닌 이성의 필연적인 행위로 제시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볼 때에 비록 칸트의 변증론이 부정적인(소극적인) 결과에 머물더라도 ‘총체성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의 단초에 거기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안드레아스 아른트, 임건태 옮김,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칸트,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에 대한 논의-」,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연구』35,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8) 266, 269~272쪽)  반면 소크라테스는 어떤가? 헤겔은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만들어졌고(fällt) 소크라테스적 방법도 생겨났는데, 이것은 자연스레 변증법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은 이 대화를 통해 아이러니(ironie) 개념을 제기하는데 이것은 “변증법의 주관적 형태(subjektive Gestalt der Dialektik)”으로서 대화자들 사이에 행해지는 실천적 방법이다. 변증법이 사태의 근거(Gründe der sache)를 다룬다면 아이러니는 개인 사이의 특수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의에서 다루는 변증법과 변증술 사이의 예시에서는 필자가 강조하는 타자와의 관계, 관계의 이동 등에만 일단 주목해야할 것이다. 헤겔의 소크라테스 해석에 대해서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Ⅰ, wizb 18. pp. 456~458 헤겔의 철학사 이해에 대한 체계적 해설로는 켄틴 로어, 윤소영 옮김, 「헤겔의 『철학사 강의』」, 윤소영, 『헤겔과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공감, 2007)

5) 해서 영미권 논리학 서적의 상당수는 형식논리학이나 기호논리학의 이러한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들의 논의를 시작한다. 예컨대 프레드 R. 버거, 김영배 옮김,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2005)를 참고하라.

6) 이런 의미에서 사실 헤겔에게 거짓된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헤겔을 벗어나려는 많은 논의들이 만나는 한계이다. 이런 궁지를 주디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헤겔과 단절(break)하려는 논의들은 거의 대부분 불가능한데, 헤겔이 “~와 단절(breaking with)”이라는 관념을 그의 변증법에 중심적 주의(tenet)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 Judith Butler, Subjects of Desire : Hegelian Reflections in Twentieth-Century Franc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7) pp. 183~184

7) 연대기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그렇고 물론 후설 현상학과 정신현상학이 말하는 현상학은 당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두 현상학이 완전히 갈라지는 것 역시도 아니다.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돌아가려는 후설의 시도는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noesis-noema korrelation)라는 사태 자체의 구조로, 은폐된 현상들을 근본적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에서 노에시스에 비중을 둠으로써 후설에게 남아있는 데카르트적 유아론의 잔재를 찾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막스 셸러는 이런 점에서 후설을 비판하고 있다(Max Scheler, Die Wissensformen und die Gesellschaft, Gesammelte Werke Band 8, (Franke, 1980)). 물론 이런 비판이 후설 사상 전반(특히 발생론적 현상학)에 모두 적용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반면 정신현상학의 현상학이란 정신이 스스로를 ‘현상해나가는’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현상학이기에 후설의 그것과는 다르다. 다만 헤겔의 현상해나가는 역사가 의식 자아의 변화에 따라 변모하는 세계를 살피며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 두 현상학의 동형성을 살피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 것이다. 추가적으로 장 이뽈리뜨, 이종철김상환 옮김, 『헤겔의 精神現象學』 Ⅰ, (文藝出版社, 1986) 27~36쪽도 참고하라.

8) 레비나스가 그저-있음(il y a)을 우선 벗어나려는 노력으로서 인간의 향유와 노동을 강조하는 것이 헤겔의 즉물적 자기의식에 조응할 것이다. 이에 대해선 엠마누엘 레비나스, 서동욱 옮김,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 2003)를 참고하라.

9)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Enzy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II : Philosophie des Geistes, wizb 10, §436.

10) 여기서 노동의 ‘짐’이라는 표현은 분명 부정적 뉘앙스를 갖는 것이지만 여전히 헤겔에게 노동은 이중적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즉자/대자, 의식/자기의식, 주인/노예 등의 대립적 운동, 인용자)은 모두가 인간 대 자연 또는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중첩된 지속적이고도 통일적인 관계에 기초한 소외와 노동의 각기 이중적인, 즉 긍정적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요소를 통해서만 파악되고 또한 사회역사적 실천성과도 합치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임석진, 「노동변증법으로 본 소외로부터의 자유의 탄생」, 한국헤겔학회 편, 『헤겔연구』2, (중원문화, 1991) 18쪽) 이렇게 이중적인 가치를 갖는 노동 개념이기 때문에 이후 다시금 등장하는 노동개념이 현재 주인 노예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노동개념과 그 의미와 역할이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란 점을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11) 경우에 따라 스토아주의를 ‘금욕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 역어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나 스토아주의가 삶의 복잡다단함을 의식적 사유의 본질성이란 관점에서 부동심(apatheia)으로 전환하는 것이기에 의지적 억제의 뉘앙스를 갖는 금욕주의보다는 조금 더 적합한 선택이 아닐까 한다.

12) 칸트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본체계(noumena)와 현상계(phanomena)로 이분된다. 합리론과 경험론이라고 총칭되는 근대 인식론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이유에는 근대 철학 자체가 주체의 역할을 강조했음에도 주/객의 일치를 인식론적 진리로 설정하며 결과적으로 객체에 진리의 결정을 넘겼다는 사실이 한편에 자리한다. 이런 인식론의 궁지에서 칸트의 기여는 현상계를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의 물자체(ding an sich)를 사유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초월적 자아(tranzendentale ich)는 또한 현상계 내에 한 발을 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통찰이다.

13) 장 이뽈리뜨, 같은 책. 230쪽 금욕주의는 스토아주의로 수정.

14) 같은 책. 238쪽

15) 여기서 사회이론의 논쟁이란 구조/행위(거시/미시, 보편/특수) 이분법에 대한 논쟁이다. 양자를 ‘매개’하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분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설령 어떤 ‘매개 점’이 등장하더라도 그 점은 구조와 행위가 같은 사회구성체 안에서 유동하는 와중에 고정되는 임시적 점이지 구조와 행위가 전혀 다른 차원은 아닌 것이다. 반면 ‘연계’는 구조와 행위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인정하고 분리된 둘의 상호관계 혹은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우리가 본 논문을 통해 헤겔의 철학 전반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헤겔철학을 사회이론의 이분법 논쟁에 적용할 때 그 해답은 연계보다는 매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사회과학 방법론에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을 대표하는 이론가인 로이 바스카가 동시에 유명한 헤겔 전문가란 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자세한 논의는 Roy Bhaskar, The Possibility of Naturalism : A Philosophical Critique of the Contemporary Human Science - Third Edition, (Routledge, 1998)을 참고하라. 이와는 다르게 일상 언어철학과 민속방법론(ethnomethodology)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기든스도 유사한 주장을 한다. 바스카보다는 훨씬 직접적으로 이 논쟁을 다루고 있는 저작으로는 앤서니 기든스, 황명주정희태권진현 옮김, 『사회구성론』, (자작아카데미, 1998)

16) 여기서 테일러가 말하는 ‘초월적 실재’가 정확하게 무엇을 지목하는지 필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앞서 주석에서 언급한 비판적 실재론이 언급하는 초월적 실재(특히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은 동시에 초월적 실재론이다)이거나 회슬레가 논증하려는 객관적 관념이리라는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17) Charles Taylor, Heg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160P

18) 그러나 이 화신은 어디까지나 신체로 화한 자이기에 다시금 시간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데리다는 이 운명을 거슬러 다시금 돌아오는 메시아를 ‘유령’으로 지칭한다. 이러한 논의는 아마도 전체성과 무한(Totalit et infini)의 레비나스에게 빚지고 있을 것이다. 자세한 논의는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2007)을 참고하라.

19) 양운덕,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장에서의 승인운동(承認運動)과 그 구조」, 한국헤겔학회 편, 『헤겔연구』4, (지식산업사, 1988) 88쪽. 원문의 낫표는 논문 기준에 따라 따옴표로 수정했음.

20) 여기까지 등장한 주요한 세 가지 노동을 정리해보자. 1) 주인-노예 관계에서의 노동 2) 회의주의의 노동(참여) 3) 불행한 의식에서의 노동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노예 관계에서의 노동은 우선 인정투쟁에서 패배한 노예에게 부과되는 짐이라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지만 이후 이 관계를 전도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회의주의의 노동은 스토아주의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세계가 스토아주의의 지평 내에서 어떤 신성도 담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신성이 부재하는 세계에서의 노동도 긍정적 의미를 획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 불행한 의식의 노동만이 신성의 실현이란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를 온전하게 획득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같은 노동 개념이라도 이렇듯 사유 전개에 따라 가변적이기 때문에 세심한 독해가 요구된다.

21) 막스 베버, 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96)

22) 엄밀하게는 신적 세계(보편자)가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크게 구별하여 사용하지 않겠다.

23) 여기서 문제는 이 교단을 앞서 언급한 연계 고리로서의 육화한 신과 어떻게 변별하느냐하는 점이다. 물론 현 단계에서 우리는 신을 세계 밖에서 찾지 않고 철저하게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 변모한 지평’에서 등장하는 교단이 이전에 살핀 연계 고리와 유사하더라도 변모한 지평에 기대어 교단의 매개적 성격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됐을 때, 연계로서의 예수와 매개로서의 교단을 구별하게 해주는 기준이 『정신현상학』에 적절하게 적용된 매개/연계 ‘개념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 내용의 전개’라는 점일 것이다. 이는 앞으로 더 해명될 문제이고 본 논문 자체가 만난 궁지이기도 하다.

24) 알렉상드르 코제브, 설헌영 옮김, 『역사와 현실 변증법 : 헤겔 철학의 현대적 접근』, (한벗, 1981) ; 물론 코제브의 해석은 냉전시대에 소련과는 다른 맑스를 읽기 위해 도입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운 점이 있다. 예컨대 코제브는 주인과 노예의 인정 투쟁을 단순히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계급투쟁의 역사’를 증거 하는 것 수준으로 해석한다. 버틀러처럼 “헤겔의 현상학은 코제브에 의해 보편적 인정을 의도하는 행위와 그 행위를 향하는 욕망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인류학”이 되었고 그것은 “모든 역사적 행위자의 현저한 특징”(Judith Butler, Ibib 64P)이라고 이해하더라도 그걸 헤겔 자체에 대한 온전한 독해라고 이해하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25) Otto Pöggeler, Zur Deutung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pp.273~274 ;출처불명.

 

 

 참고문헌

 

 헤겔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1, (한길사, 2005)  −Phä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in zwanzig Bänden Band 3 (Suhrkamp, 1986)  −Enzy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II : Philosophie des Geistes, Werke in zwanzig Bänden Band 10 (Suhrkamp, 1986)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Ⅰ, Werke in zwanzig Bänden Band 18 (Suhrkamp, 1986) 

 기타

 

 안드레아스 아른트, 임건태 옮김,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칸트,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에 대한 논의-」,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연구』35,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8)  알렉상드르 코제브, 설헌영 옮김, 『역사와 현실 변증법 : 헤겔 철학의 현대적 접근』, (한벗, 1981)  양운덕,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장에서의 승인운동(承認運動)과 그 구조」, 한국헤겔학회 편, 『헤겔연구』4, (지식산업사, 1988)  임석진, 「노동변증법으로 본 소외로부터의 자유의 탄생」, 한국헤겔학회 편, 『헤겔연구』2, (중원문화, 1991)  장 이뽈리뜨, 이종철김상환 옮김, 『헤겔의 精神現象學』 Ⅰ, (文藝出版社, 1986)  켄틴 로어, 윤소영 옮김, 「헤겔의 『철학사 강의』」, 윤소영, 『헤겔과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공감, 2007)  Charles Taylor, Heg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Judith Butler, Subjects of Desire : Hegelian Reflections in Twentieth-Century Franc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7)  Max Scheler, Die Wissensformen und die Gesellschaft, Gesammelte Werke Band 8, (Franke, 1980)

 Otto Pöggeler, Zur Deutung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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