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과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1807)
고전 문학과 철학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한 사상가의 위대함은 그의 사상이 당대에 끼친 영향은 물론이고 후대에 끼친 영향으로 평가한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 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 말은 바로 헤겔 철학이 서양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 한다. 헤겔은 베토벤과 횔더를린이 태어난 해인 1770년 8월 27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공국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고등학교(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788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다. 지극히 모범생이던 헤겔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지켜 보면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라는 인류의 고귀한 가치를 전파했고, 당시 유럽의 학생들은 그 영향으로 자유와 혁명을 찬양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헤겔도 다른 학생들과 더불어 '자유의 나무' 둘레에서 춤을 추면서 혁명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다. 헤겔이 매년 기념일마다 프랑스 혁명을 자축하며 포도주를 마셨다는 일화는 혁명이 그에게 얼마나 깊고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학창 시절 횔더를린, 셸링 같은 친구들과 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유를 표항
하는 '학생 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스의 비극 문학, 계몽주의 문학, 루소의 작품 등을 섭렵했고, 이 때 이미 철학에 관심을 가져 플라톤, 야코비, 스피노자 등을 공부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와 혁명의 이념을 통해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는 한편, 지적 열망을 채워주는 문학과 철학의 공부를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전공이던 신학 공부는 등한시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1804년에 가서야 부모님의 소원대로 신학 공부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고전 문학과 철학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헤겔은 1801년 (행성의 궤도에 관한 철학적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획득하여 예나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주로 자연법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을 강의했다. 이 예나 시절에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괴테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실러, 셸링 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 셸링은 1798년 부터 피히테, 슐라이어마하, 슐레겔 등과 (철학비평지)를 공동으로 발간하고 있었는데, 셸링과 피히테의 사이가 멀어지자 피히테 대신 헤겔이 1802년 공동발간인으로 참여하게 되고, 여기서 헤겔은 "독일 헌법론" "철학적 비판 일반의 본질"과 같은 현실적이고 예리한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셸링이 친구인 슐레겔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고 덕분에 슐레겔과 극도로 사이가 나빠져 예나를 떠나자 (철학비평지)의 발간도 1803년 중단되었다. 그 뒤 헤겔은 대학 강의에 전념했고 1805년에는 괴테의 추천으로 원외 교수가 되어 철학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헤겔은 강의를 하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다듬어 갔다. 드디어 1807년 헤겔 철학 체계의 제1부라 할수 있는 (정신현상학)이 나왔다. 헤겔은 그토록 바라던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밤베르크 신문의 편집장을 거쳐 1808년 친구 니트하머의 소개로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었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에 관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813년 변증법을 체계화한 (논리학) 제1권을 간행했다. 이미 1811년에 뉘른베르크 명문 집안의 딸인 마리아 폰 투허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헤겔은 결혼하기 전 1807년 초에 어느 공작집 하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루트비히를 낳았는데, 루트비히는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1826년 네덜란드의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1831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전사했다. 헤겔의 두 아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첫째는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었고, 둘째는 신교의 종교국장을 지냈다. 헤겔은 결혼 생활을 만족스러워 했는데,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세속적인 목적을 완전히 이룬 셈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직장과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다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줄곧 정식 대학 교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소망하던 대학 교수의 꿈은 1816년에야 풀렸다. 1816년 뉘른베르크에서 (논리학) 제2권을 출판하고, 그 해 가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수가 되자마자 자연철학, 정신철학과 같은 철학의 개별 분과를 집대성한 (엔치클로페디)를 출간했다. 1817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1821년 법, 권리, 도덕, 인륜을 다룬 (법철학)을 내놓았다. 헤겔은 서자 루트비히가 인도네시아에서 죽은 해인 1831년 11월 14일 급성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애도했다. "뛰어난 천부의 재능을 지닌 탁월한 향도요, 확고한 기초 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친구를 잃고 말았다."
숱한 대립과 모순의 과정을 겪는 의식의 역사
"헤겔 철학은 그 비밀이 묻혀 있는 (정신현상학)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의 말이다. 철저히 현실의 철학을 추구하고 실천을 중요시한 마르크스가 관념론의 전형이면서 난해하기로 이름 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어떤 비밀이 묻혀 있을까? 학창 시절에서 보이듯이 헤겔은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 속에서 철학을 연구했다. "날마다 아침 신문을 보는 것이 곧 아침 기도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정신현상학)을 쓰는 동안 헤겔은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심한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더구나 나폴레옹과 프로이센 사이의 전투가 있은 뒤 헤겔이 강사로 있던 예나 대학은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기 때문에, 헤겔은 원고를 들고 예나의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우편으로 발송한 원고가 출판사에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매우 불안해 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헤겔은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심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1806년 10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예나 시내를 지나가는 나폴레옹을 보고 니트하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찰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세계 정신을 보았다." 헤겔은 나폴레옹이 자유와 민족주의를 전파한다고 보고 높이 평가했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에로이카(황제))를 작곡한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예나 전투의 포성 속에서 헤겔이 쓴 (정신현상학)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이 들어 있다. 하나는 철학에서 중요한 인식론의 문제로서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변증법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인간 노동의 중요성을 밝힌 것이다. 첫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 단계를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김포공항에서 눈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이것은 비행기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것이 감각적 확신 단계의 인식이다. 그 뒤 고개를 돌
려 옆에 있는 비행기를 보니까 조금 전 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한 말이 또 나온다. 분명히 처음에 "이것은 비행기다"라고 한 것은 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한 말인데 옆에 있는 비행기에도 맞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에 있는 비행기와 옆 비행기가 공통의 속성들, 즉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행기는 모두 몸체, 날개, 바퀴, 엔진 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가 몸체, 날개, 바퀴, 엔진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지각 단계의 인식이다. 그런데 몸체, 날개, 바퀴, 엔진을 을 아무렇게나 조합해 놓으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된 비행기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비행기는 그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구조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 져야 한다. 우리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저 비행기가 구조적 원리에 맞도록 잘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인식은 과학의 법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가령 만유인력 법칙의 경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법칙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돌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 행성의 운동,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 등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만유인력 법칙이 구현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운동을 보고 이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오성 단계의 인식이다. 돌이 떨어지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현상'을 통해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인간 의식이 파악한 사고의 내용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할때 얻을 수 있다. 이런 진리를 얻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이 단계에서는 개별 현상과 보편 본질 사이의 구별이 없고 일치한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으로 전개되는 인식 능력의 각 단계는 이전의 상태를 언제나 잊어버리고 발전하는데, 이전의 단계를 모조리 포함하고 각 단계를 자신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 이전의 모든 단계는 정신의 낮은 형태의 인식 능력이다. 정신은 이성이 인간
사고의 내용과 객관적 사물의 본질을 일치시키고 종합함으로써 생겨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 최고의 절대 지식을 얻는 이른바 절대 정신이다.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은 언제나 낮은 단계의 지식을 매개로 발전하면서도 낮은 단계의 지식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이다. 이런 뜻에서 헤겔의 인식론은 변증법적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은 다른 낮은 형태의 배역들을 무대에 적절히 등장시키면서도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연출자와 같다. 그리고 그 연출자는 배역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빌려 온다.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이성과 같은 의식의 형태들은 그렇게 해서 정해진 배역들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이가 고향 아티카에 도달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처럼, 인간 의식 역시 절대 지식에 도달할 때까지 숱한 대립과 모순의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의식의 이런 운명을 인위적으로 꾸며내어 자신의 예술
적 입맛에 맞게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겪어 온 과정을 의식의 형태들을 통해 철학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헤겔 철학은 자기 시대가 던진 현실 문제를 철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노동의 중요성을 끌어
낸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자의식과 노동을 설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계급 사회인 고대 노예제가 형성되는 과정에 해당한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이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욕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언뜻 자기 스스로 만족을 얻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무시한 명예, 돈, 권력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명예, 돈, 권력은 사회에서 인정하는 명예, 사회에서 유용한 돈, 사회적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자기 스스로의 만족도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얻는 만족이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서로 인정받으려 하는 욕망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래서 주인 (지배 계급)과 노예(피지배 계급)가 생겼다. 인정을 받기 위해 두 자의식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승리한 쪽은 주인이 되고 패배한 쪽은 노예가 되었다. 이 '인정 투쟁'에서 패배한 노예는 자신을 살려 준 대가로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하면서 주인은 노예의 노동 산물을 향유한다. 노예는 끊임없이 주인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게으름은 곧 죽음을 뜻한다. 노동의 노예가 생존하는 방식이다.고대 노예에게 집어 넣은 죽음 공포는 채찍과 같은 직접적인 물리력이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에
게 불어넣은 죽음의 공포는 해고라는 딱지다. 그러나 헤겔은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야말로 자립적인 자의식을 확립하는 계기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노예는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동 대상의 객관적 법칙을 인식하고 그 대상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자신의 잠재 능력에 대한 확인이다. 이에 반해 주인은 물질 생활 전체를 노예에게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자립성을 잃는다. 노예가 없으면 주인은 물질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나아가 생존마저 위협을 받게 된다. 반면 노예는 주인이 없더라도 자신의 창조적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산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인 셈이다.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실질적 관계가 역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자의식을 확립하는 노예의 노동이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이 참으로 현실의 생활을 영위하고 역사를 형성해 가는 원천이다. 헤겔의 이런 노동관은 마르크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동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역사적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헤겔의 철학 체계는 프랑스의 정치 혁명과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해 뒤처진 독일이 철학적으로 응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독일의 시민 계급은 산업 혁명을 수행하거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정신 원리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헤겔에게 정점에 오른 독일 관념론으로 나타났다. 헤겔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정신의 발전을 구체적인 현실의 발전과 통일하려 했다. 이런 헤겔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뒤 크게 두 입장,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누어진다.
헤겔 우파 또는 노년 헤겔 학파는 딜타이, 빈델반트, 크로체등이 대표한다. 이들은 헤겔 철학을 궁극의 완성태로 보고 그것에 대한 해석, 연구, 보충 설명을 과제로 삼았다. 헤겔 좌파 또는 청년 헤겔 학파는 브루노, 슈트라우스, 포이에르바흐 등을 거쳐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발전한다. 이들은 헤겔 철학을 새로운 정치와 사회 현실에 맞도록 변형하는 급진적 입장을 취했다. 먼저(정신현상학)에서 나타나 인식론은 헤겔이 칸트, 피히테, 셀링으로 이어진 독일 관념론의 유산, 즉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란 과제를 수행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출발점이었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주관과 객관을 떼어놓고 보면 철학적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보고 어떻게 하든 둘을 통일하려 했다. 헤겔은 주객 통일의 계기를 이성에서 찾았다. 헤겔이 볼 때 절대주의의 폐지, 자유 경쟁의 확립, 법 앞의 평등 등을 실현한 프랑스 혁명은 "이성이 궁극적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때 이성은 개인의 합리적 사고가 아니라 '보편
타당한 신적 원리'다.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인 자유, 주체, 정신 등은 이 이성 개념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예컨대 정신 개념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이성을 의미한다. 역사가 몇 단계로 구분되는 것은 이성이 실현되는 수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주객 통일은 헤겔 역사철학의 근거가 되었으며, 비록 관념론적 이지만 인류의 역사 현실을 설명하는 원리로 등장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노동관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명확하게 구별했다. 헤겔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대상을 변형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스스로 역사을 창출한다고 했다. 마르크스도 동의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노동의 부정적 측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헤겔은 근대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 노동을 무한한 부의 원천으로만 간주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 리카도 같은 근대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이윤을 산출하는 자본은 인간의 노동이 축척된 것이다. 말하자면 부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그래서 노동은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다. 헤겔은 이런 견해를 수용하여 노동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역사의 특정 단계,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 측면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한 핵심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의 부정적 측면은 노동 소외로 나타난다. 노동은 분명히 인간의 역사를 만드는 기본 동력이다. 그러나 특정 조건 아래서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 까닭을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이전 시대보다 훨씬 풍요로운 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생산은 발달한 생산기술을 이용하여 대규모 공장에서 철저한 분업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아래서는 대규모 생산에 동원할 수 있는 대규모 노동력이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런 노동력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자유 임금 노동자에 의해 공급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상품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대가만을 바라보고 기계처럼 일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밍크 코트를 살 수도 없고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서 살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소외 현상이고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노
동 소외의 궁극 원인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다.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노동의 산물은 노동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몫이 된다. 이처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생산에서 노동은 본래 의미와 달리 소외라는 극도로 부정적 측면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다. 생산뿐 아니라 인류 문화 전체도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노동 소외는 경제적 형태 외에 온갖 종류의 사회 문화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돈만 있으면 상품을 살 수 있으므로 돈을 벌기 위하여 노동한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품과 상품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신주의, 돈이 삶의 전부가 되는 배금주의, 무절제한 과소비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향락주의 같은 것이 팽배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인간 노동이 소외됨으로써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신이 되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 소외는 결국 삶의 가치를 인간 자신에 두지 않고 상품에 두는 가치 전도 현상까지 일으키고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노동의 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밝힌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역사 현실 속에서 노동의 의미와 역할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노동 소외라는 부정적 측면을 폭로한 마르크스의 견해도 새겨 볼 만하다. 노동 소외를 극복하는 길은 어떤 면에서 헤겔이 제시한 노동의 긍정적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읽을 거리
G.W.F.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88.
황태연 편역,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 이삭, 1983.
W.마르크스, (정신현상학), 장춘익 옮김, 서광사, 1984.
J.이폴리트, (헤겔의 정신현상학), 이종철 외 옮김, 문예, 1986. (앞의 3권은 정신현상학 해설서)
G.루카치, (청년 헤겔), 김재기 외 옮김, 동녘, 1986. (헤겔의 초기 사상을 해설한책)
한국헤겔학회, (헤겔 연구), 지식산업사. (국내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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