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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ximenes(기585-525)/아낙시메네스

친애하는 아낙시메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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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아낙시메네스! - ‘공기’를 생각하며

 

 

철학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 가지 눈길을 끄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제관계의 뛰어난 거장들이 2대 3대 대를 이어서 함께 철학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이겠지요. 그리고 현대에서는 훗설-하이데거-가다머가 있고, 그밖에도 크세노파네스-파르메니데스-제논, 알베르투스 마그누스-토마스 아퀴나스, 러셀-비트겐슈타인, 등이 있습니다. 한편 셸링-헤겔 같은 친구관계도 있고, 제임스 밀-존 스튜어트 밀 같은 부자관계도 있습니다. 혼자서 거장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특별한 관계의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막상막하의 거장으로 역사에 남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대단한 일의 첫 번째 사례에서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이른바 밀레토스학파라고도 알려진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를 우리는 철학사의 맨 처음 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경우는 위의 두 분과 비교할 때 조금 가볍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웬만큼 열심히 공부한 철학도라도 예컨대 아르케, 공기, 농후화 - 희박화라는 단어들 외에 당신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을뿐더러, 그나마 이 단어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경우도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나도 학창시절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시험문제에 답하기 위해 위에 열거된 단어들을 열심히 외우는 게 고작이었고, 또 기껏해야 소박한 고대인의 어설픈 사유 정도로 위의 단어들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해 당신이 쓴 원문을 직접 접하면서 사정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당신은 “존재자의 원리가 공기”라고 말했고, “왜냐하면 이것으로부터 만물이 생기고 다시금 이것으로 해체되어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솔직히 무슨 소린지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공기이며, 우리를 통괄하고 있듯이, 숨 즉 공기가 세계 전체를 감싸 안고 있다” 그렇게 당신은 말했습니다. “공기는 신”이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아하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라고 하는 것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로구나, 저 허공을 채우고 있다는 이른바 물질적인 기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당신의 말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기사 2,500년 전의 당신이,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알 턱이 없는 당신이, 산소니 수소니 탄소니 하는 것들을 존재자의 원리로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겠지요. 당신이 말한 공기는 그런 공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말한 공기는 ‘영혼’ ‘숨’ 그런 것이었던 것을 제대로 몰랐던 것입니다. 공기라는 말이 같다가 보니 지레짐작으로 물질적 기체를 연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말한 ‘아에르’라는 그리스어와 오늘날 사용되는 ‘에어’라는 영어, ‘에에르’라는 불어는 철자와 발음 모두 유사하기 때문에 무리도 아닐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보면, 영혼 내지 숨으로서의 공기가 존재자의 원리이며 이것이 생성과 소멸의 근원이라는 것은 받아들여지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에 아직 불명료한 안개가 끼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해석의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생각해봅니다. 아낙시메네스는 왜 사물의 원리를,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근원을 영혼 또는 숨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당신이 고대인임을 감안해서 소박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장 우리 자신인 인간을 보더라도 숨이 곧 존재의 시작이고 끝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숨이 없이는 영혼도 없으니 숨이 곧 영혼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동물들 또한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확인하고 있듯이 식물들도 호흡을 합니다. 물론 당신이 그것을 알았을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움직임 내지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 움직임 내지 변화의 숨은 원리로서 영혼 내지 숨을 상정하여 확대해석하였다고 보는 것은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확대해석을 당신은 실제로 불, 바람, 구름, 물, 돌, 기타 자연 사물들에 대해서도 적용하였습니다. 그런 움직임 내지 변화를 당신은 ‘희박화’ ‘농후화’라고 표현하였고 그것을 사물의 생성원리로 설명했습니다.

 

요컨대 아낙시메네스 당신은 존재하는 것들의 생성 변화를 보았고 그 생성 변화의 근저에 그것을 움직이는 ‘그 무언가’(만유에 내재하는 氣나 에너지 같은 것)를 보았으며, 그것을 (어쩌면 궁여지책으로) 공기, 영혼, 숨, 신 등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표현의 애매함을 꼬투리 잡아 당신을 탓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당신은 역사의 최초창기에 있었으므로 그와 같은 ‘표현의 폭’은 불가피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동양세계의 노자만 하더라도 뭔가를 보기는 했는데 그것을 ‘道’라고 부를까 ‘大’라고 부를까 ‘一’이라고 부를까 고민하는 흔적이 도덕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도’가 정착되었으니 오늘날 도라는 말이 통하는 것이지 만일 도 대신에 대가 정착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도를 닦는다는 말 대신에 대를 닦는다고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나는 당신이 보았던 ‘그 무엇’이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60억 이상의 인간들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당신이 말한 그 ‘공기’의 신세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영혼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절대로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 당신은 공기를 신이라고까지 말했을 것입니다. 아낙사고라스, 나의 이런 해석이 당신의 철학과 사람들을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수정 - 편지로 쓰는 철학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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