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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현상학
3. 휴머니즘과 무신론
결국 사르트르는 세계에 대한 의식의 새로운 관계, 또는 세계로부터의 분리와 세계 속에 뛰어들어 그것을 변화시키는 참여인 투기라는 이중작용 위에 인간에 대한 인식을 세우려 한다.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의식은 사물들과 세계만을 자기 밖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명목으로든 자기에게 대상일 수 밖에 없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본질, 모든 본성을 내던진다. 현상학적 환원이 가장 철저하게 반자연주의적(또한 반물질주의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일 수 없다. 이성적 동물조차 아니다. 인간은 세계 또는 다른 어떤 '생물계'에 입각해 설명될 수 없다. 세계를 비워낸(차라리 '무'라고 말하자. '비워낸'이란 표현은 의식을 일종의 그릇처럼 생각케 하여 여전히 그것의 어떤 내재물을 가정하게 만들 우려가 있으니까) 본질을 갖지 않는 순수한 존재이며, 순수한 주관성인 의식은 오로지 그 혼자서 우리의 인간성을 지탱하고 있다. 데카르트에서 그러했듯이 오로지 의식에 의해서만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이 의식은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떨어져 나온 세계에 대한 전적인 지향인 것이다. 그것이 무라는 것 자체가 그것을 온통 세계에 바친다. 그리고 이 지향성이야말로 무나 자유와 똑같이 각별하게 의식의 특질을 잘 설명해 준다. 의식은 결코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인 계획이다. 이 말은 인간이 타고난 성격이나 성질에 의해서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세계 속에서 그가 도모하는 바에 의해 그리고 그의 행동에 의해서만 정의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에 따라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神)에 입각하여 설명되지도 않는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떼어 놓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신의 품 안으로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연주의에 대한 그리고 내재성에 대한 거부는 무신론을 함께 포함한다. 사실 모든 것이 정말 의식 밖에 있고 의식은 여하한 내면도 갖지 않는다 할 때, 의식의 어떤 알 수 없는 깊숙한 주름 속에서(의식은 완전한 투과성이라는데!) 인간을 넘어서는 무엇 위에, 다시 말해 어떤 초월성 위에 놓여 있는 근거를 어찌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신 없이 정의된다. 사르트르는 에고와 세계 전체를 환원시켰다. 그런데 그는 말하자면 신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까지 시작한다. 인간의 인간성(humanite)을 찾아내려면, 의식은 자기의 에고와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왔듯이 신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와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환원에 의해 괄호 안에 들어간 것을 의식은 간직하거나 혹은 지향성으로서 그것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신은 이제 인간의 근거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표적으로서 존속하게 된다.
이 무신론은 19세기말의 무신론과 천리나 떨어져 있다. 현상학에 있어서 외부 세계의 실재성(realite)의 문제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고 제기되지도 않듯이, 이제 신 존재의 문제 역시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온 힘을 기울여 신이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하는 의미의 그런 무신론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오히려 이렇게 선언한다.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이 무신론의 중심이 되는 두 개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 자유, 휴머니즘을 정의하려 할 때 제기되는 신의 부재라는 문제. 신은 괄호 속에 묶여질 것이고 사르트르는 '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 니체를 반박하고, 이 죽음을 인간에 의해 행해진 암살의 의미로서가 아닌, 부재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말이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을 가지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말자. 신은 죽었다. 예전에 그는 우리에게 말하였으나 이제는 침묵한다. 우리는그의 시체만을 만질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죽은 자의 영혼처럼 세계 밖 어디론가 미끌어져 가 버렸는지 모른다. 또는 아마 그는 하나의 꿈이었는지도... 신은 죽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무신론자가 되진 않았다.'
2. 지향성 또는 인간의 계획들을 규정하거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을 하려 할 때 제기되는 이 부재하는 신의 마력적 현존이라는 문제.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이고자 하는 욕망이다.' 신은 의인화된 시선 그것이고, '타인의 정수'이며 '망각과 휴식'이다. '신이 탄생하기 위해 인간이 저 자신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무모한 정열이다.'
사르트르의 현상학은 우리를 무의 실재라는 개념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와 실재에 동시에 사로잡혀 있는 이 무신론이 일종의 부정적 신학으로 통하며 무지의 밤, 모순들의 조화, 초본질의 무 등 신비주의의 몇 몇 테마들과 합류하는 데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악마와 선신>은 각별히 의미 심장하다. 이 작품은 신의 부재와 현존, 선과 악, 악을 위한 악과 선을 위한 선, 성실과 '자기 기만', 독신과 간증, 한마디로 악마와 선신의 소름끼치는 조화를 향해 우리를 인도한다. '밤이 된다. 어스름 속에서 선신과 악마를 구별하기 위해선 밝은 눈이 필요하다.' 모든 초월적 가치들이 무효화되고, 괴쯔는 가치들을 창조하는 고독한 결단 앞에 선다. '존재들 이전의 거대한 밤' 속으로 도피하길 열망하기도 하다가 신을 향해 '말하라 밤이여, 이것이 너인가? 밤, 가슴을 에는 모든 것의 부재여! 왜냐하면 너는 우주적 부재 안에 존재하는 자이니 말이다'라고 외친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걸머쥐고 새롭게 명철해진다.'침묵, 그것이 신이다. 부재, 그것이 신이다. 신, 그것은 인간의 고독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고, 인간들을 재발견한다.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 '나는 인간들 속의 한 인간이 되고 싶다.'
가치들의 이중 무효화, 이중의 환원이 자기 의식의 고독을 드러나게 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의 인간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신은 단순히 부정되기만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그는 또 다시 무화되는 것이다. 그는 순전히 지향적 대상인 신, 의식에 대한 세계의 선험성, 자아의 선험성을 이야기할 때의 그 현상학적 의미에서 '선험적'인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을 환원시킴으로써 인간을 위한 신이, 신(의식의 표적이 된)에 대한 의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무관심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 무신론은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테마를 풍요롭게 하고 있긴 하나, 한편으로 빈약해지는 때도 있다. 갑작스럽게 통속적인 무신론의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단순한 독신, 또는 신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반교권주의의 낡아빠진 논리들이 엿보이는'장난'에까지 빠짐으로써 말이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후설의 지평과는 매우 판이한 해변을 향해 왔으나, 하이데거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와 같이, 사르트르에서도 여전히 현상학적 방법은 완전하게 기운을 잃지는 않은 듯 하다. 사르트르는 아직 자기의 마지막말을 하기엔 먼 것 같다. 그의 사색은 메를로 퐁티의 그것처럼, 참여, 행동, 역사의 분석으로 나아가고 있다. 졸지에 역사 속에 던져져 막시스트들 앞에 진을 치게 된 '레지스탕스' 철학자들인 프랑스 현상학자들은 그런 문제들을 피해 지나가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이 의식은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떨어져 나온 세계에 대한 전적인 지향인 것이다. 그것이 무라는 것 자체가 그것을 온통 세계에 바친다. 그리고 이 지향성이야말로 무나 자유와 똑같이 각별하게 의식의 특질을 잘 설명해 준다. 의식은 결코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인 계획이다. 이 말은 인간이 타고난 성격이나 성질에 의해서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세계 속에서 그가 도모하는 바에 의해 그리고 그의 행동에 의해서만 정의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에 따라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神)에 입각하여 설명되지도 않는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떼어 놓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신의 품 안으로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연주의에 대한 그리고 내재성에 대한 거부는 무신론을 함께 포함한다. 사실 모든 것이 정말 의식 밖에 있고 의식은 여하한 내면도 갖지 않는다 할 때, 의식의 어떤 알 수 없는 깊숙한 주름 속에서(의식은 완전한 투과성이라는데!) 인간을 넘어서는 무엇 위에, 다시 말해 어떤 초월성 위에 놓여 있는 근거를 어찌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신 없이 정의된다. 사르트르는 에고와 세계 전체를 환원시켰다. 그런데 그는 말하자면 신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까지 시작한다. 인간의 인간성(humanite)을 찾아내려면, 의식은 자기의 에고와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왔듯이 신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와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환원에 의해 괄호 안에 들어간 것을 의식은 간직하거나 혹은 지향성으로서 그것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신은 이제 인간의 근거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표적으로서 존속하게 된다.
이 무신론은 19세기말의 무신론과 천리나 떨어져 있다. 현상학에 있어서 외부 세계의 실재성(realite)의 문제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고 제기되지도 않듯이, 이제 신 존재의 문제 역시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온 힘을 기울여 신이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하는 의미의 그런 무신론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오히려 이렇게 선언한다.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이 무신론의 중심이 되는 두 개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 자유, 휴머니즘을 정의하려 할 때 제기되는 신의 부재라는 문제. 신은 괄호 속에 묶여질 것이고 사르트르는 '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 니체를 반박하고, 이 죽음을 인간에 의해 행해진 암살의 의미로서가 아닌, 부재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말이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을 가지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말자. 신은 죽었다. 예전에 그는 우리에게 말하였으나 이제는 침묵한다. 우리는그의 시체만을 만질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죽은 자의 영혼처럼 세계 밖 어디론가 미끌어져 가 버렸는지 모른다. 또는 아마 그는 하나의 꿈이었는지도... 신은 죽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무신론자가 되진 않았다.'
2. 지향성 또는 인간의 계획들을 규정하거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을 하려 할 때 제기되는 이 부재하는 신의 마력적 현존이라는 문제.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이고자 하는 욕망이다.' 신은 의인화된 시선 그것이고, '타인의 정수'이며 '망각과 휴식'이다. '신이 탄생하기 위해 인간이 저 자신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무모한 정열이다.'
사르트르의 현상학은 우리를 무의 실재라는 개념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와 실재에 동시에 사로잡혀 있는 이 무신론이 일종의 부정적 신학으로 통하며 무지의 밤, 모순들의 조화, 초본질의 무 등 신비주의의 몇 몇 테마들과 합류하는 데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악마와 선신>은 각별히 의미 심장하다. 이 작품은 신의 부재와 현존, 선과 악, 악을 위한 악과 선을 위한 선, 성실과 '자기 기만', 독신과 간증, 한마디로 악마와 선신의 소름끼치는 조화를 향해 우리를 인도한다. '밤이 된다. 어스름 속에서 선신과 악마를 구별하기 위해선 밝은 눈이 필요하다.' 모든 초월적 가치들이 무효화되고, 괴쯔는 가치들을 창조하는 고독한 결단 앞에 선다. '존재들 이전의 거대한 밤' 속으로 도피하길 열망하기도 하다가 신을 향해 '말하라 밤이여, 이것이 너인가? 밤, 가슴을 에는 모든 것의 부재여! 왜냐하면 너는 우주적 부재 안에 존재하는 자이니 말이다'라고 외친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걸머쥐고 새롭게 명철해진다.'침묵, 그것이 신이다. 부재, 그것이 신이다. 신, 그것은 인간의 고독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고, 인간들을 재발견한다.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 '나는 인간들 속의 한 인간이 되고 싶다.'
가치들의 이중 무효화, 이중의 환원이 자기 의식의 고독을 드러나게 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의 인간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신은 단순히 부정되기만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그는 또 다시 무화되는 것이다. 그는 순전히 지향적 대상인 신, 의식에 대한 세계의 선험성, 자아의 선험성을 이야기할 때의 그 현상학적 의미에서 '선험적'인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을 환원시킴으로써 인간을 위한 신이, 신(의식의 표적이 된)에 대한 의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무관심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 무신론은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테마를 풍요롭게 하고 있긴 하나, 한편으로 빈약해지는 때도 있다. 갑작스럽게 통속적인 무신론의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단순한 독신, 또는 신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반교권주의의 낡아빠진 논리들이 엿보이는'장난'에까지 빠짐으로써 말이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후설의 지평과는 매우 판이한 해변을 향해 왔으나, 하이데거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와 같이, 사르트르에서도 여전히 현상학적 방법은 완전하게 기운을 잃지는 않은 듯 하다. 사르트르는 아직 자기의 마지막말을 하기엔 먼 것 같다. 그의 사색은 메를로 퐁티의 그것처럼, 참여, 행동, 역사의 분석으로 나아가고 있다. 졸지에 역사 속에 던져져 막시스트들 앞에 진을 치게 된 '레지스탕스' 철학자들인 프랑스 현상학자들은 그런 문제들을 피해 지나가긴 힘들 것이다.
Pierre Thevenaz(1913-1955)가 1952년 <신학과 철학 Revue de theologie et de philosophie> 지에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세 편의 논문을 묶어 발표된 책 <(De) Husserl a Merleau-Ponty; Qu'est-ce gue la phenomenologie. 1966>을 덕성여대 교수이자 불문학자인 심민화가 번역했음. 이 글이 실린 한국어판 제목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이며 1982년 문학과 지성사에 나옴. 이 글은 그 중 사르트르 부분만 옮긴 것임.
심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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