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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1 현상학에서 실존주의로
우리는 하이데거의 경우에서 현상학에서 존재학으로의 진화를 밝혀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현상학에서 실존주의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에 이르는 길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 Transcendance de l'Ego>으로부터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에 이르는 프랑스 현상학의 모든 움직임을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원래 본질에 대한 철학이였다. 실존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본질주의(essentialisme)'이였던 것이다. 실존의 입장과 주어진 사실들 모두를 괄호 속에 넣음으로써, 현상학은 관념적인 본질들을 추출해낸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후설이 결국 체험 세계를 신성시하다 세계 속에 의식의 침입이 갈수록 파괴키 힘든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선험적 현상학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내 준 사실은 바로 사태가 우리의 체험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태 자체로 들어감'이란 구호는 후설이 구체적인 것, 실존, 간단히 말해서 반관념주의에 충실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상학적 환원이 의식의 지향성을 드러나게 하고 지향성 그 자체가 의식을 사물과 세상에 비끄러매고 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의 '세계-내-존재 l'etre-au-monde'는 이미 현상학적 방법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매우 막연한 이 지적은 하이데거를 거쳐 후설에서 사르트르로 나가는 통로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사르트르가 어떤 점에서 선배들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현상학을 전혀 새로운 길로 휘어지게 하고 있는지, 그 정확한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존재와 무 l'Etre de le Neant>가 나왔을 때, 어떤 독자들은 거기에 하이데거 사상의 중심 테마들이 나와 있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아, 사르트르가 <존재와 시간>을 번역 또는 풀어쓰기에 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조금만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적이기보다는 후설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메를로 퐁티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후설을 사상의 동향(늘 보다 철저한 근거를 찾기 위한 지칠질 모르는 탐구)을 너무도 완벽하게 따름으로써,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무엇보다도 후설의 작업을 극단화 하기에 이른다. 하이데거는 존재학으로 나가면서 그렇게 했다. 그 또한 너무 관념적이라고 생각되는 선험적 의식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그것을 보다 더 존재학적인 구조인, 존재의 앞마당과도 같은 현존재로 대치시킴으로써 말이다. 사르트르 역시 먼저 이 선험적 자아를 공격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것을 극단화한다. 즉, 그는 선험적 자아가 지닌 의식의 성격을 더욱 강조하여, 그를 통해 존재가 아닌 실존을 튀어 나오게 하려고 했다. 하이데거와 달리 사르트르는 현상학적 환원의 중심 위에 바로 자리를 잡는다. 후설에서 현상학적 환원은, 세상의 테두리 밖에서 그 세상을 지향하고 세계를 의미화함으로써 그 의미화 속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나 Je'를 찾아내려 했다. 이 자아는 일종의 선험적 마당으로, 통합과 구성과 의미화의 선험적 근원인 개인적인 '나'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선험적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의 충격을 받아 나자빠졌던 것은 오로지 심리적 자아였을 뿐, 선험적 자아는 환원이 거듭될수록 의미의 근원이요 세계를 향한 의식의 지향성의 근원으로서 점점 더 잘 드러났던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정반대로 본다. 현상학에서의 의식은 지향성으로 정의되므로, '선험적 나'라는 대역은 불필요한 잉여적 존재이며, '나'를 통합하고 개인화하는 역할을 완전히 불필요하고 해롭게까지 한다는 것이다. '선험적인 나' 그것은 '의식의 죽음'이다. 의식을 밝히기 위해선 세계뿐만 아니라 자아 그 자체 역시 근본적인 환원에 붙여야만 한다. 즉, '나'를 세계쪽으로 되던져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다른 모든 대상이나 마찬가지로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의식 밖으로 던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지향성에 대한 유명한 문구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는 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의미를 얻게 된다. 의식에는 극소량의 내용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극소량의 내재성도 없다. 그것이 자아라는 내재성이건, 선험적이라는 내저성이건 말이다. 모든 것이 의식의 밖에 있다. 의식은 '나'까지 포함하며 존재란 존재는 모두 밖으로 몰아낸다. 혹은 철저한 환원 속에서 의식은 모든 존재에 대해 거리를 둔다. '코키토는 지나치게 보증한다.' 그것은 '불순'하다. 사실 '나'는 세계 안에 있고, 그러므로 '의식이 있다'는 것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 사르트르는 '자아 le moi'라는 것을 깨부숴버린다.
순전히 후설적 영감의 소산이면서, 사르트르 사상의 열쇠가 되는 이 철저한 환원은, 하이데거뿐 아니라 후설에 대해서도 사르트르의 독창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매우 근본적인 일련의 결과들을 가져온다. 개략적으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위해 후설의 선험적 에고 의식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린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후설의 에고를 내몰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이데거를 거부하고 후설적 의식을 보다 잘 되살리기 위함이며, 후설의 의도 그 자체에 보다 더 깊이 열중하면서 현상학적 의식의 순수한 개념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사르트르의 의식을 보다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모든 것이 의식의 밖에 있다면, 의식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無 neant)이다. 그것은 백지보다 더 헐벗었다." 이제 현상학적 환원은 '무화(無化) neantisation'라고 불리워 마땅하다. 게다가 무화에 의해 의식은 단번에 세계와 분리된다. 후설의 작업을 특징짓는, 끊임없는 재취급과 한 없는 접근들이 이제 전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한편에는 존재가, 완전유(完全有)인 '즉자(卽自) l'etre-en-soi'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존재에 의존하는, 부착하는 무(無) 또는 '대자(對自) l'etre-pour-soi'인 의식이 있다. 물론 이 무(無)는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적 비존재도 아니고 절대적인 무(無)도 아니다. 그것은 현상학적 또는 선험적 무(無)다. 다시 말해 의식 자체에서 규정된 무(無)가 아니라 의식과 존재와의 관계 의식을 존재와 분리시키는 환원과 존재를 자기 안에 비늘 모양으로 접착시키는 의식의 지향성(거리를 둠과 지향성은 무화(無化)의 양면이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 무(無)라는 말이다.
이렇듯 후설이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존재학은 현상학적 태도가 늘 목표가 되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표적이 아니다. 사르트르에게서는 철저한 무화(無化)의 결과 즉자와 대자(또는 무)의 이분법은 즉각적이다. <존재와 무>의 현상학적 존재학은 존재로의 점진적 접근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학으로서의 존재학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숨에 목표에 도달함으로써, 사르트르에게서 현상학적 방법은 그 방법으로서의 역할이 죽어 버린다. 이 때문에 사르트르의 존재학이 독단적이고 스콜라적이기까지 한 면모를 띠게 되는 것이다. 무화(無化)에서 환원이 너무 철저했기 때문에 현상학이 더불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이 무화(無化)에 힘입어 즉자를 대자로, 존재를 의식으로 '압착 해체' 시키는 데 성공한 순간, 그 자신은 그 반작용으로 인해 둔중한 존재학으로 굳어져 버린 것과 같다.
의식은 자기의식(conscience de soi)이다. 후설에게서 모든 의식은 지향적이었으며 반성 또는 지향성의 방향 전환에 의하여 심리적 자아에서 근원인 에고로 돌아감으로써 선험적 의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르트르에게서는 환원이 반성이 아니라 무화(無化)이며 그것은 반성 이전의 의식으로 돌아간다. 의식을 그 자체로서만 볼 때, 그것은 순수하게 저 자신의 의식, 그러나 '비위상적(非位相的) non positionelle'이며, 둘로 나눠지지 않는 의식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기의식 또는 의식 자체(Conscience-soi)는 자신에 대한 내재적인 앎인 것이다. 의식의 존재 방식은 자기의식으로 존재하기인 것이다. 지향성 이외에 의식의 또 다른 차원을 말한다는 점에서 사르트르는 후설과 결별한다. 전통적 철학과 심리학은 이 다른 차원이 반성적 계열에 속하며, 하나의 내재성이라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후설적 의식의 지향성의 1차원성에도 프랑스 전통 특유의 반성적 철학자들(데카르트, 맨 드 비랑, 베르그송, 라벨 등)의 내재성에도 대립된다. 그에게 반성이란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절대 의식을 찾아내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환원의 방법으로 얻어진 반성 이전의 의식, 혹은 비위상적 의식에서부터 출발하며 반성 작용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로부터 반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나오게 된다. 사르트르는 '순수 반성'과 '비순수 반성'을 구별함으로써 그 이론을 암시한 바 있다.
의식은 본질 없는 실재다. 무화(無化)라는 전존재의 환원에 의해 의식은 어떤 내용도, 최소한의 내재성도 갖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이제 본질을 갖지 않으며, 어떤 명목으로도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순수한 출현이며 순후한 외현인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가벼움, 완전한 투과성'이며 '도처에 대한 의식'이며 '너무 존재하지 않느 나머지 절대적인 존재물'이다. '의식을 지닌 실존은 존재함에 대한 의식으로서 존재한다.' '의식은 실존으로 가득찬 것이며', '존재의 절대(absolu d'existence)이다. 달리 말하면 의식의 본질은 그것의 지향성이 표적하는 것이다. 의식은 이제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투기(投企)'다. 의식은 저 자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식에는 본질이 없다. 의식은 저 자신이 아닌 무엇이다. 이 점에서 의식은 투기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식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사르트르의 슬로건을 이해할 수 있다. 본질은 언제나 우리 앞에 초월적으로 있지 결코 우리 존재의 기초가 아닌 것이다. 본질과 실존과의 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실존은 이제 본질의 '보충물(complementum possibilitatis)'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본질의 선험적 가능성의 조건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인식에 대한 실존(existence)의 우위 또한 이해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인식의 모든 기도가 순수 실존인 이 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실존은 한 존재의 실현, 한 존재의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과 대립되는 그 존재의 현실, 존재한다는 사실 등의 고전적 의미가 아니며 (그 반대로 여기서 실존은 '무'인 것이다), 경험된 삶이라는 '실존적(existentiel)' 의미도, 초월성과의 관계,분리, 또는 내재성이라는 키에르케고르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현상학적 의미만을 갖는다. 실존은 무화하는 환원 속에서 튀어오르는 의식의 출현인 것이다. 실존은 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역설적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현상학적 철학에서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실존주의적'인 어떤 것도 전혀 지니지 않은 실존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자아의 초월성>에서부터 <존재와 무>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철학적인 어떤 책, 어떤 논문에서도 실존주의라는 어휘는 결코 눈에 띄지 않으며, 실존에 대한 철학이 강조된 일도 없다. 1944년에서 1946년에 걸친 저널의 논쟁 이후에야, 비로소 그 단어가 사르트르의 펜대 아래 나타난다. 만일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규정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의 문학 작품들에 도움을 요청해야만 할 것이며 '실존적'이며 체험상의 존재인 가짜이며 부조리하고 끈적이며 구역질나는실존과 자유인의 실존(예를 들어 <파리떼>의 오레스트의), 근본을 따지자면 현상학적 의미의 실존, 즉 의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실존, 단단하고 남성적이며 진정한, '건조한 의식'의 실존을 마땅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의식은 자유이다. 존재를 투기로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실존에서 출발해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을 향해 몸 전체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본질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의식은 자신이 그 자신의 목표의 근원임을 드러낸다. 이 '떨어져 나옴'은 의식을 다른 많은 사물 중의 한 사물, 한 존재, 하나의 즉자로 만드는 모든 한정된 것들과의 결별이다. 투기는 이 순수한 실존을 출발점으로 하여 기도되는 것이다. 의식이 투기의 고유한 기초라는 바로 그 점에서, 투기는 순수한 자발성인 것이다. 세계와 존재 전체가 환원되었다 함은 그것들 전체가 의식에게 지향 대상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계나 즉자에 의해 생기는 의식의 한계 등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의식이 출현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출현하여 세계를 겨냥한다는 것이다. 이 때 세계의 의미화 모두가 의식 속에서 그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
이 자유 역시 무(無)인 까닭에 전적으로 투기이며 세계에 대한 겨냥이다. 의식의 자율성은 탈우주적, 독존적 자유가 아니다. 환원은 세계를 무화하지만 체계를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니다. 환원은 즉자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취급함을 가능케 한다. 환원은 의식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의식, 상황에 대한 의식이게 함으로써 그것을 구속한다. 사르트르의 현상학은 세계를,그리고 자아마저도 철저하게 환원함으로써 '인간의 파편 하나라도 세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금한다. 예를 들어 자유로운 자아라는 파편이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세계 안에 있는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무와 마찬가지로 선험적인)는 의식으로 인한 세계와의 관계이지, 자아로 인한 세계와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자유는 의식의 새로운 본질이거나 새로운 자격이 아니다. 자유는 전적으로 한 세계에 대한 투기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의식 또는 인간에게서 본질적인 자유, 천상의 자유, 나중에서야 세계 속의 행동 속에 참여시킬 그런 자유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처음부터 오로지 참여된 자유, 상황지어진 자유 밖엔 없다. 이것이야말로 '사실성(facticite)'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다시 사르트르의 문학적, 철학적 작품들의 가장 유명한 명제들과 만나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은 이미 그 명제들에 대한 찬란한 책들이 나온 마당에 또 하나의 요약을 제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도는 사르트르 작업의 현상학적 면모만을 대략 설명하는데 그칠지라도 하이데거에 대한 검토에서와 같이 그것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Pierre Thevenaz(1913-1955)가 1952년 <신학과 철학 Revue de theologie et de philosophie> 지에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세 편의 논문을 묶어 발표된 책 <(De) Husserl a Merleau-Ponty; Qu'est-ce gue la phenomenologie. 1966>을 덕성여대 교수이자 불문학자인 심민화가 번역했음. 이 글이 실린 한국어판 제목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이며 1982년 문학과 지성사에 나옴. 이 글은 그 중 사르트르 부분만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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