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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현상학
2. 현상학의 초월 또는 폐기 : 자유와 행동
의식이 무이며 투기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임과 동시에 모든 것이 그의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다. 자신의 근거를 자유로운 자발성에서 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현상태 전부로부터 분리된다는 점에서 의식은 저 자신의 근거인 것이다.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다. 떨어져 나와야만 할 것밖에는. 그러므로 의식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자유, 그 고통스럽고 완전한 자유 - 그것이 존재론적 자유건 선험적 자유건 - 또한 출발점으로 주어진 경험적 소여가 결코 아닌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철저한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다. 출발의 상태는 오히려 '매몰된 자유', <구토 La Nausee> 속에서의 존재, 끈끈한 반죽에 묻힌, 또는 끈끈이에 붙은 존재인 것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투기, 다시 말해 노력,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계획인 것이다. 자유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며, 행동과 하나가 된다. 사르트르의 의식은 존재하는 대신 (본질을 갖지 않으므로), 스스로를만들어 가야 하며 스스로를 창조해야만 한다. 또한 그것은 순수한 자발성이므로 스스로를 선택하고 자기를 꾸며내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제 사르트르의 존재학은 즉자와 대자의 이분법 위에서만 기초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제 존재가 하나의 쐐기에 지나지 않으며 행함도 그의 존재학에선 적지도 그와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소유함, 행함, 그리고 존재함은 인간 현실의 근본적 카테고리다.' 처음으로 현상학은 행함과 창조, 행동의 철학으로, 넓은 의미에서 '실용주의 철학 쪽으로 전개된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행동이 존재함에 선행하느냐(operari sequitur esse), 존재함이 행동에 선행하느냐(esse sequitur operari) 하는 전통적인 논쟁들의 휴지기인 것이다. 이제부터 행동은 곧 존재이다(operari = esse).
그러나 스스로를 만든다는 것은 '스스로 다르게 만든다'는 뜻이요, 변화한다는 것이다. 무화하는 의식의 후퇴는 명상적 태도 혹은 후설적 '무사무욕한 방관자' 태도로서의 피신이 아니다. 그것은 수정과 변화로의 투기다. 후설에게서 환원은 지향성의 방향 전환이었다. 사르트르에게 무화는 세계를 변모시키려는 지향 (또는 자신을 변모시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Je)는 세계의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이다. 결국 현상학적 환원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자아까지도 환원시켜 선험적인 의식인 무에 도달하기만 하면, 옛 현상학인 직관적 명상적 폭로적 철학은 행동의 철학, '활동의 철학(Philosophie du travail)', '혁명적 철학'으로 탈바꿈 하는 것이다. 또 역으로보자면 사르트르에게선 - 이것이 그의 행동 철학의 독창성인데 - 폭로가 아닌 행동이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로지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알도록 하는 행동만이 있을 따름이다. 무화하는 후퇴(거리두기)는 어떤 상황을 보고 이해하고 바꾸기 위해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이다. 이해와 행동은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목적론을, 현상학상 그렇게도 중요한 궁극 목적만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의식은 투기이다. 그것은 스스로 앞 미래 속으로 자신을 던진다. 우리는 그것이 앞으로 될 것을 통해서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사르트르에게 현상학적 환원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또한 결정론으로부터 벗어나 그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의식을 잡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살펴보자. 그러면 당신은 그것이 비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당신은 미래밖엔 발견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투기란 현재(목적 요인)를 향한 미래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인간은 미래로부터 그 자신으로 오는 존재'이며 '자기의 목표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과한, 또는 내가 계획한 목적들이 거꾸로 내 현재 상황으로 되돌아와 그 상황을 밝혀 주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또 현재에 대한 의식이 가능한 것은 미래를 향한 계획이라는 차원 속에서 내가 취하는 거리 때문이다. 이렇게 행하여진 현상학적 환원은 결국 바로 자유이다. 과거의 결정론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미래에 입각한 수정. 우리는 두 가지 보충적인 현상학적 활동, 즉 과거를 괄호 속에 넣는 것과 지향, 그리고 이 이중 작용에 의해 현재 의식을 정의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동 철학의 이 관점 속에서, 결국 모든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은 현재(하이데거에서 처럼 미래가 아닌)다. 이 목적론은 후설의 그것과는 또 다른 양상을 띤다. 원래의 현상학은 폭로라는 방법을 통해 감추어진 의미를 의미화와 목적이라는 이중적 방향에서 드러나게 하려고 했다. 목표는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잠재적인 형태로 말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부단한 과제는 아직 주어지지는 않았으나 어떤 점에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현상학은 '이미 거기에 있음'을 가치 있게 하는 것으로서, 현실을 존중하는 것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겐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은 없다(이 점에서 그는 목적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을 이용한 듯하다). 왜냐하면 무에 이르기까지 환원하였기 때문이다. 지향은 아직을, 지금은 없는 것을 겨냥한다. 잠재적으로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 미래인 것 말이다. 이것이 의식의 투기가 오로지 가치들을 창조함으로써만 가치들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이다. 주어진 가치 또는 잠재된 가치란 없다. 왜냐하면 가치는 결코 존재하고 있지 않으니까. 인간은 지금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그 것이 될 뿐이다. 그는 가치의 창조자이자 현실의 변혁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유화의 계획인 까닭에 그것은 저항에 부딪친다. 그것을 매몰시키려 위협하는 사실 상황의 한계들(사실성 facticite) 뿐만아니라 우리를 결정의 책임과 고독 앞에서 피하도록 교사하는 '자기 기만(mauvaise foi)'의 유혹들이라는 저항 말이다. 모든 행동이 변혁이고 노력이고 투쟁인 까닭에, 그것은 시련에 부딪치며 궁지에 몰린다. 궁지라는 이 주제는 사르트르에게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자유 의식은 끊임없이 자기가 빠져 나온 끈끈이에 되잡히는 것이다. 그의 성공조차도 그의 궁지다. '성공은 숨겨진 함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을 함으로써, 나는 자신에게 하나의 본성을 부여했다. 죄 이전에 나는 나의 죄를 통해 내가 어떠한 본질이라 하더라도 그것에서 벗어나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죄 이후 나의 본질은 바로 나의 죄이다. 그것은 강철 같은 완력으로 내 목을 죄고 있다.' 간단히 말해, 추상적으로 기술되던 현상학적 환원이 실제 행위로서 수행 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와 사회 속에서의 자유로운 행위 또는 해방으로서 해석된 그 행위는 완벽하게 실현됨이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적어도 영원히 되풀이 되어야만 할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의 도덕, <존재와 무>의 끝에 선언한 바 있는 도덕이 뿌리박고 있다. '이처럼 오늘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분명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모든 도덕은 인간들의 기만과 소외를 거든다. 도덕의 문제는, 도덕이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이면서 또 동시에 불가능 하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행동은 이 뛰어넘을 수 없는 불가능의 풍토 속에서 스스로 윤리적 규준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후설에서 출발한 원은 닫혔다.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도덕에는 새삼 후설의 방법이 얼굴을 내미는 듯 여겨진다. 끊임없는 수정, 영원하고 결코 완성되지 않는 노력. 그러나 영원한노력이 실패를 뜻해야만 한다면, 그것이 이 도덕의 마지막 한 마디가 되어야 한다면, 저 지평에선 레른의 히드라나 시지프스의 바위가 모습을 나타낼 것이며 후설은 더 이상 그 먼 후손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Pierre Thevenaz(1913-1955)가 1952년 <신학과 철학 Revue de theologie et de philosophie> 지에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세 편의 논문을 묶어 발표된 책 <(De) Husserl a Merleau-Ponty; Qu'est-ce gue la phenomenologie. 1966>을 전 덕성여대 교수이자 불문학자인 심민화가 번역했음. 이 글이 실린 한국어판 제목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이며 1982년 문학과 지성사에 나옴. 이 글은 그 중 사르트르 부분만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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