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Knowledge)
기원전 5세기 말 경에 레온티노이(Leontinoi) 출신의 고르기아스(Gorgias)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세 개의 기본 명제를 정식화시키고는 교묘하게 변호했다고 한다. 첫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비록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또 그것이 인식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에 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르기아스 자신이 이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 이것은 그에게 하나의 농담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 어찌되었든 그의 이 세 명제는 후세에 전승되었고, 그로부터 2,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것들에 관해 반성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이들 세 명제가 아무리 이상스럽고 기묘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요구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일생에 있어 적어도 한번 정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껏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앞으로 그럴 기회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르기아스의 명제들은 확실히 중요한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회의적인 의문이 진지하게 고려될 만한 것이 못되며, 삶에 있어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명제들을 받아들일 경우, 삶에 있어 모든 진지함이 사라져버릴 것이며 온갖 것들이 기만이나 환상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의 모든 의미나, 참과 거짓, 옳은 것과 그른 것, 선과 악 등의 온갖 구별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고르기아스 편에 서서, 세계에는 여러 사물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인식할 수 있는 사물들도 있다고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확신에 도전하는 많은 논거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명제에 관한 물음을 명확히 정식화시키고 여기에 대한 답변을 마련해 보는 것이 보다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제군과 함께 그것들에 관해 반성해보려고 한다.
고르기아스로부터 2천여 년 후,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바로 이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하였다. 적어도 懷疑의 근거를 제시함에 있어서는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는 것이 아마 가장 좋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논의를 따라갈 때,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아주 빈번하게 우리를 기만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각형의 탑도 멀리서 보면 둥글게 보인다. 때때로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무엇인가를 듣거나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환자에게는 단 음식도 이따금 쓰게 느껴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꿈을 꾸게 되는데,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꿈이 현실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이 책상과 마이크 그리고 밝은 전등이 내 주위에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우리는 우리 각자가 손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러리라 여겨지는 것만큼 그렇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 쪽 손이나 발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절단된 후 한동안 이미 없어진 손이나 발에 심한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현대과학은 이러한 종류의 많은 논거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심리학을 통해, 환자의 눈에 충격을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실제로 있지도 않은 빛을 보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자신의 육체마저도 하나의 가상이거나 꿈일지 모른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어도 수학적 진리만큼은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말에 다르면 감각은 우리를 현혹시킬 수 있으나, 오성은 확실하게 그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것 또한 쉽사리 論駁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에서도 誤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계산을 잘못하는 수가 있으며, 이런 일은 실로 위대한 수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꿈속에서 계산하다가 틀리고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오성도 감각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를 기만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自我에서 그와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내가 만일 기만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때 나는 역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고하기 위해서는 - 의심한다거나 기만당하는 것도 분명히 사고행위이다 - 내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로부터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를 이끌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어서 그는 다소 까다로운 知的 기교를 통하여 ‘나는 존재 한다’라는 것으로부터 다른 사물들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 하려고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고 과정을 검토해 온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그의 체계에 있어 이러한 측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전혀 다른 두 개의 事象, 즉 사고의 내용과 사고하는 주체를 혼동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당한 지적인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고행위가 있으려면 사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심지어 수학적 진리까지도 의심한다고 할 때 이러한 사실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것을 주장할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한다.’(Cogito)는 것은 다만 사고행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있다’는 말은 단지 어떤 정신적 내용을 우리가 인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으로부터 사고하는 주체의 존재를 추론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후일 어떤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우리로서는 어떤 것을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고르기아스의 주장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은 단지 가상일뿐이요, 도스토예프스키(Dostojewski)의 표현을 빌자면, 白痴가 지껄이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대다수가 이러한 백치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감이나 반감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시인의 기질을 지닌 일부 철학자들이 무어라 말해 왔든, 아무리 큰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대상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지 하는 것은 소망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오성을 가지고 그 문제에 도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리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우리는 모두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전제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수 과학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한 경우 가운데 하나, 즉 철학의 역할과 중요성이 곧바로 드러나는 하나의 사례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즉 우리는 여기서 이미 인식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어떤 것을 演繹해내는 논증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르기아스와 같은 회의론자는 모든 것을, 그래서 우리의 전제마저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가 연역할 때 따르는 규칙까지 의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세 가지 길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첫째로, 우리는 회의론자가 自己矛盾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고 하면, 그는 사실상 조리 있는,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과연 그리고 어떻게 그의 가정들이 확증되는가 하는 것을, 즉 마치 물리학자들이 假說을 檢證하려고 할 때 하는 것처럼, 그의 가정들이 우리의 경험과 일치 하는가 어떤가 하는 것을 살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르기아스가 부정하는 온갖 것들이 明證하지 않은가 하는 것, 즉 그것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분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의 길은 이미 고대에 있어서 답사되었다. 회의론자가 우리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그 자신은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반문해 볼 수 있다. 그의 명제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확실한 어떤 것,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다는 명제는 거짓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인식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고 현존해야 하는 것이다. 크라테스(Krates)라고 하는 그리스의 회의론자는 이 점을 깨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손가락만 움직여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 사상의 巨匠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에게는 그럴 권리조차 없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의견을 표시하기 위한 것인데, 회의론자는 어떠한 의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회의론자란 식물과 같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식물과는 논쟁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러한 논증이 여러분에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수리논리학이 이에 대하여 심각한 반론을 제기했다는 사실이다. 이 반론은 소위 類型理論이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나는 다소 복잡한 이 이론에 관해 논의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방금 개괄한 논증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 것을 제군에게 경고해 두고 싶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길은 보다 믿을만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실제로 사물들이 있으며,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이러한 가정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現實’이라 부르는 것과 假象과의 차이는 주로, 현실에는 질서가 있으며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데 반해 허상에는 그러한 질서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이와 같은 하나의 질서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 잠들기 전에 자명종 시계가 놓여 있는 침실용 탁자를 본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 탁자는 그대로 거기에 있으며 시계도 사라지지 않고 거기에 있다. 물론 지난밤보다 더 많은 먼지가 탁자 위에 앉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침식용 탁자, 자명종 시계 그리고 방과 같은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이것들을 인식한다고 가정할 때에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내가 왼쪽에서 나타나서 내 등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나타나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본다 해보자. 이것 역시 내 등 뒤로 걸어가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고 할 때에 가장 잘 설명되는 것이다. 물론 회의론자는 이것이 전적으로 가상, 하지만 질서 있는 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바에는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확실히 더 간단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 그리고 이것이 내가 보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 우리는 고르기아스의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이 단적으로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그 가운데 일부를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해왔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것이 모두 꿈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답변할 것이다.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것도 많은 경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어떠한 합리적인 회의도 불가능한 여러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내가 앉아 있으며 서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나, 전등이 지금 내 앞에 켜져 있다는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나는 5×18이 90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내가 이따금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고르기아스의 반대편에 서서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명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첫째로, 아주 확실히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둘째로 우리는 그 일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셋째로 우리는 인식된 것 가운데 얼마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내가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살펴 본 것보다 더 나은 논거를 보여 주지 못하는 한, 나로서는 나의 견해를 변경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처음에 우리가 기대했을 법한 만큼 많은 것을 얻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직껏 우리의 의식 밖에 현실이 있다는 것을 전혀 증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음 소론에서 다루게 될 또 하나의 전혀 다르면서도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물들과 현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들은 오직 우리의 사고 가운데에만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겠다.
이 외에도 또한, 우리가 제시한 논거로부터는,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세계 속의 사물들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회의론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도, 예를 들어, 세계 속에는 색채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지금 우리의 논점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제시한 논거에 의거해 해결된 것도 결코 아니다.
세 번째의 명제는 아주 명백한 것이라 하겠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물들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정도만 말해두기로 하자.
이제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두 가지 철학적 견해에 관해 논의해 보려고 한다. 그 하나는 自我의 優位에 주목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인식문제에 있어 정서적인 경험에 호소해야 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사상가들이, 그들에게 있어 그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확실하다거나 유일하게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회의론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 이것이 세계에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명제가 ‘내가 존재 한다’는 명제보다 어떤 優先權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말하자면 주변에 대한 인식을 통해 비로소 인식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대상을 향해 있으면서 세계 속에 있는 무엇인가, 어쩌면 틀릴 수도 있고 어쩌면 피상적일 수도 있지만, 최대한 확실하게 파악한다. 그래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 더욱이 내 앞에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철학자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非我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비교적 최근의 다른 몇몇 철학자들은 - 내가 보기에는 스콜라 철학자인 요안네스 둔스 스코트스(Joannes Duns Scotus)의 사상 노선을 따르고 있는데 - 세계와 세계 속의 사물들의 존재에 관한 완전한 확실성은 한갓된 인식을 통해서는 얻어질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불안이나 두려움 또는 사랑이나 미움과 같은, 이른바 정서적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지진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오직 이와 같은 경험만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인류에게 확신시켜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학설은 오늘날에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독일의 사상가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에 의해 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회의론에 대한 통속적인 論駁은 다소간 이런 성격의 것이다. 예컨대, 회의론자가 머리를 때린다면, 그때 그는 자기 자신 밖에 어떤 것, 즉 너의 주먹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식이다. 이것은 의미 있는 반론이다. 어느 누가 자기를 때리는 주먹의 존재를 의심하겠는가? 나 역시 이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리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으며, 지진이나 사랑, 미움 등과 같은 것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내 머리를 때릴 때 나는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가? 먼저 나는 촉각에 의해 그 손을 느낄 것이며, 이어서 나는 통증이나 분노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이 생각하듯이, 감각이 늘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최초의 그 느낌은 주먹의 존재에 관한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통증이나 분노는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성을 통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든가, 아니면 이것을 그와 같은 경험으로는 결코 발견하지 못하게 되든가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들은 이미 인식 작용의 타당성을 전제로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그 경험들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회의론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일단 양보하고 나면 일시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인가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에게서나, 우리의 인식의 확실성을 의심하고는 공포나 불안 또는 분노 등과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써 그러한 확실성을 확보해 보려는 사람에게서나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회의론자는 자기에게 내민 손가락을 움켜쥐고는 철학자를 그의 수렁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수렁이 있다거나, 일찍이 저 세 개의 명제를 제기했던 고르기아스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냉철하게 사고하는 철학자에게 있어 중요하고도 유익한 것이다. 물론 회의론자가 주장하는 것은 고도로 과장되어 있으며, 따라서 전적으로 거짓이다. 그러나 그의 과장 가운데는 진리의 어떤 核이 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 가능성이 지극히 미소하다는 것이다. - 나는 이를 비극적으로 작은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극히 적은 것을 알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그것들은 대개의 경우 피상적이고 불확실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지식은 단지 蓋然的인 것에 머문다. 실제로 절대적이고 無制約的이 확실성이 있긴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마치 장님처럼 암중모색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운데 어쩌다 이따금 분명한 통찰이나 확실한 성과를 얻게 되곤 할 뿐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인식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런 사람도 회의론자와 꼭 마찬가지로 과장해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단순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 이것은 우리가 중요한 문제에 대해 반성할 때면 언제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해결이란 것은 모두 거짓된 해결이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탐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고된 탐구의 과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회의론과 마찬가지로, 나태한 해결이다. 그러나 현실은 엄청나게 복잡하며, 그래서 그것에 관한 진리 또한 엄청나게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오직 길고도 험한 작업을 통해서만 현실로부터 얼마간의 것을, 많은 것은 아니라 해도 그래도 얼마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Wege Zum Philosophischen Denken/ J.M. Bochenski /1959
철학에로의 초대 / 문창옥 번역/종로서적/199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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