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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Bochenski(1902-1995)/Wege Zum Philosophischen Denken

철학(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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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Philosophy)

 

철학은 단지 전문가에게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마도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 모두는 누구나 그 생애에 있어 철학자가 되는 순간들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특히 우리의 자연과학자나 역사가, 또는 예술가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누구나 조만간 철학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나는 여기서 이런 사실이 인류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하는 門外漢들 - 비록 그들이 유명한 물리학자이거나 시인 또는 정치가라 할지라도 - 의 글은 대개 서투른 것들이다. 아주 흔히 그것들은 미숙하고 소박하며 대부분 그릇된 철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여기서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가 철학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가장 난해한 철학적 문제 가운데 하나다. 나는 철학이라는 말처럼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을 별로 알지 못한다. 바로 요 몇 주일 전에 나는 유럽과 미국의 지도적 사상가들이 프랑스에서 가진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그들은 모두 철학에 관해 한 마디씩 했으나, 각기 그 말에 의해 전혀 상이한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철학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고, 이어서 실로 이처럼 뒤섞여 있는 철학에 대한 정의와 견해 가운데서 참된 이해의 길을 찾아보기로 한다.

 

여기서 첫째로, 철학이란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集合的 槪念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이것을 예를 들어, 버트랜드 러셀 卿(Lord Bertrand Russell)과 실증주의 철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과 과학은 동일한 것을 의미했었는데 후일 個別 과학들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나오게 되었던 바, 처음으로 의학이, 이어서 물리학, 그 다음으로 심리학,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날 수학의 한 분야로서 가르쳐지고 있는 形式論理學까지 철학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꿔 말하자면 그 고유한 대상을 가지고 있는, 예를 들어, 수학이 존재한다고 하는 의미로는,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에는 그와 같은 대상이 없으며, 단지 그것은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밝히거나 설명하려는 일련의 어떤 시도를 일컫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흥미로운 관점이며, 얼핏 보기에, 제시된 論據들이 아주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들 철학자들이 옳다면, 우리는 오늘날 1천여 전보다 더 빈약한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사실과 다르다. 철학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풍부해졌다. 사상가들의 수 - 오늘날 그 수는 대략 1만 명 정도이다 - 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논의되어지는 문제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고대 그리스 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여러 분야들이 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특징적인 사실은 그와 같은 특수 과학이 독립해 나갈 때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에 대행하는 철학적 분야가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에 형식논리학이 철학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論理哲學이 생겨나서 널리 보급되고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다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이 나라가 논리학의 분야에서 선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논리학적 문제에 관해서보다도 논리철학에 관해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사실들은 철학이 여러 과학이 발달해 감에 따라 소멸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활기를 띠면서 풍부해져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分科學, 어떤 학문의 입장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느냐 하는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철학을 하거나 철학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만일 우리가 철학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어떤 철학의 입장에서 가능할 뿐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을 하지 않기 위해서도 또한 철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참이다.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거대한 철학적 논증들을 끌어들이는, 철학의 적대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견해보다 더 웃기는 것은 없다.

 

결국 철학에 대한 첫 번째 견해를 정당화시키는 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 하겠다. 철학은 미숙한 상태에 있는 문제들을 위한 저장소와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 물론 때때로 철학은 그러한 기능을 수행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철학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 의견은, 가능한 모든 개별과학이 철학에서 덜어져 나간다 해도 철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에 있어, 철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超理性的인 것, 槪念化 시킬 수 없는 것, 悟性을 초월하여, 또는 적어도 그 한계에 놓여 있는 것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과학이나 오성과는 공통되는 것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철학의 영역은 合理的인 것 밖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한다는 것은 이성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즉 다소간 不合理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널리, 특히 유럽 대륙에 유행하고 있는 견해로서, 유럽의 사상가들 가운데서도 소위 實存哲學者들(Existenz Philosophers)이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아주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아마도 파리의 지도적인 철학자 쟝 바알(Jean Wahl) 교수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철학과 詩 사이에는 어떠한 본질적인 차이도 없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유명한 실존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견해도 쟝 바알의 생각과 유사하다. 제네바 출신의 철학자 잔느 에르쉬(Jeanne Hersch)의 해석에 따르면 철학은 과학과 음악의 경계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이다. 또 한 사람의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오늘날 몇몇 철학자들이 곧잘 쓰곤 하는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저술한 철학書 한 곳에다 자신의 음악 한 곡을 끼워 넣고 있다.

 

이러한 의견 또한 하나의 주목할 만한 철학적 論題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많은 논거가 동원될 수 있다. 첫째로, 限界線上의 문제들 -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가 이런 것들인데 - 인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詩人과 마찬가지로 情緖나 意志, 상상력과 같은 우리 자신의 온갖 능력을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오성을 통해서는 철학의 근본 요소에 전혀 접근해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다른 수단들을 통해 그것을 파악하려고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로, 오성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이미 그 어떤 과학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성의 한계선상에 있는, 또는 오성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와 같은 詩的 사고가 철학에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논거를 더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러한 생각에 반대한다. 그 가운데서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루드비히 비트겐쉬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격률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비트겐쉬타인에게 있어 여기서 ‘말하다’는 것은 합리적인 언명, 곧 합리적인 사고를 의미한다. 시적인 철학을 반대하는 이들 사상가에 따르면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의 인식 수단, 즉 오성을 가지고 어떤 것을 파악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인식하는 데에 두 가지 방법을 갖고 있을 뿐이다. 즉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 감각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 직접 보는 것과 推論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인식의 작용이며, 본질적으로 오성의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 혹은 불안이나 메스꺼움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이 따라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것도 그로부터 귀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들 철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을 정면에서 비웃으면서 몽상가나 시인 또는 진지하지 못한 사람들로 간주해 버린다.

 

나는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나중에 그럴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점만은 지적해 두고 싶다. 우리가 철학사 - 고대의 탈레스(Thales)로부터 현대의 메를로 뽕띠(Merleau Ponty)와 야스퍼스에 이르는 - 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철학자가 언제나 實在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거듭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설명하다는 것은 설명할 대상을 오성의 도움을 받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 오성의 사용을 가장 완강하게 거부했던 사람들 - 예컨대 베르그송(H. Bergson) 같은 사람 - 도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철학자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세계와 인간의 삶 속으로 명료성 - 이것은 질서이며 또한 오성인 것이다 - 을 끌어 들이려고 하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즉 철학자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행한 일에서 볼 때, 철학은 대체로 합리적, 과학적 활동이자 學說이었으며 詩作은 아니었다. 때때로 철학자들이 시인의 재능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플라톤도 그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그랬다. 그리고 실로 위대한 이 사상가들과 현대의 작가 한 사람을 비교해 보아도 괜찮다고 한다면, 두 편의 우수한 각본을 쓴 적이 있는 쟝 뽈 싸르트르(Jean Paul Sartre)가 또한 그렇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것들은 모두 주로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앞서 지적했듯이, 철학은 그 본질에 있어 언제나 하나의 학설, 하나의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무엇에 대한 과학이냐?’하는 물음이 다시 생겨난다. 물리적 세계는 물리학에 의해, 생명의 세계는 생물학에 의해, 의식의 세계는 심리학에 의해, 그리고 사회는 사회학에 의해 제각기 탐구된다. 그렇다면 과학으로서의 철학은 무엇을 탐구하는가? 철학의 영역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철학의 여러 학파들은 다양한 답변을 제시한다. 나는 이들 가운데서 보다 중요한 몇 가지만을 열거해 보겠다.

 

첫째의 답변은 認識論이다. 다른 과학들은 인식하지만 철학은 인식 그 자체의 가능성, 가능한 인식의 여러 전제와 그 한계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임마누엘 칸트와 다수의 그 후계자들이 이런 답을 제시한다.

 

둘째 답변은 價値이다. 다른 모든 과학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는 데 반해 철학은 존재해야 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답변은 예를 들어 소위 南독일학파의 학자들과 다수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셋째 답변은, 그 밖의 모든 것의 필요조건인 동시에 기초가 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현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모두에 의해 간과되고 있다. 철학이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따라서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실존철학자들의 것이다.

 

넷째 답변은 言語이다. 비트겐쉬타인의 표현으로 하자면, ‘철학적 命題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명제의 해명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다른 여러 과학들의 언어 구조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트겐쉬타인과 대다수의 현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이것들은 이와 유사한 다수의 견해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각각은 그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으며, 비교적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옹호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그와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철학자도 아니라고 매도해 버린다. 우리로서는 얼마나 깊은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판단을 하고 있는지를 유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철학자들을 보통 形而上學者로 낙인찍어 버리곤 한다. 그런데 그들에 따르면, 형이상학이란 그 가장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무의미한 것이다. 형이상학자는 소리를 낼 뿐, 어떠한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칸트주의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있어 칸트의 학설을 배척하는 모든 사람들은 형이상학자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자가 무의미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형이상학자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비철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존철학자들이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보여주는 경멸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제 나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철학의 어느 한 개념에 대한 이와 같은 굳은 신념에 직면하게 될 때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이 인식, 가치, 인간, 그리고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것들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겠는가? 철학의 다른 대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철학자가 증명했다는 것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나는 괴테(Goethe)의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처럼, 논리학 강의를 듣도록 권하고, 증명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한번 배우도록 하고 싶다. 이러한 것은 지금까지 증명되어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우리의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면, 이 세계는 이미 언급한 모든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어느 특수 과학에서도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또 다루어질 수도 없는 그런 미해결의 중요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여겨지리라 생각된다. 법칙의 문제가 그 한 예이겠다. 그것은 분명코 수학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수학자는 이러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법칙을 정식화시켜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언어학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세계에 있어서의, 또는 적어도 사고에 있어서의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수학의 법칙은 또한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價値論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일 철학을 어떤 특수 과학이나 내가 열거했던 분야 가운데 어느 하나로 제한하려 한다면 이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들어갈 적절한 자리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칙의 문제는 참되고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특수 과학과 동일시되어서도 안 되고 어떤 특정 분야에 제한되어서도 안 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은 普遍科學이며, 그 영역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제한되어 있거나 특수화된 어떤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철학은 다른 여러 과학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에 똑같이 관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철학은 이러한 과학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철학이 그 방법과 觀點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철학이 그 방법에서 구별되는 까닭은 철학자들이 수많은 인식 방법 가운데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철학자는 물리학자처럼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現象으로 환원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그는 경험-還元的 방법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어진 것에 대한 통찰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 밖의 다른 많은 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철학은 그 관점에 의해 다른 여러 과학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고찰할 때, 철학은 오로지 한계라 할 수 있는 것, 즉 근본적인 측면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基礎科學이다. 다른 여러 과학들이 멈춰 서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전제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곳에서 철학은 묻기 시작한다. 여러 과학은 인식하지만 철학자는 인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여러 과학들은 법칙을 세우지만 철학자는 법칙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일상인이나 정치가들은 의미나 목적에 관해 운운하지만, 철학자는 의미나 목적이라는 말이 실제를 가리키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따라서 철학은 다른 어느 과학보다도 더 문제의 근원에 접근해 간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과학들이 자족해버리는 지점에서 문제를 던지고 더욱 탐구해 가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根本科學인 것이다.

 

철학과 특수과학 간의 사실상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가를 지적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닌 경우가 흔히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들어 그처럼 눈부시게 발달한 수학의 기초에 대한 연구는 확실히 철학적인 연구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수학적 탐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경계가 뚜렷한 영역들이 있다. 예를 들어, 存在論, 즉 이런 저런 특정의 事象이 아니라 사물, 現存, 성질 등과 같이 보편적인 사상을 다루는 분야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연구, 즉 사회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서의 가치에 대한 연구가 또한 여기에 속한다. 이들 두 분야에서 철학은 다른 어떤 과학과도 이웃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대상에 관여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과학은 철학밖에 없다. 그리고 존재론은 다른 여러 분야에 있어서의 연구에 전제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이때 이 다른 분야의 탐구는 존재론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존재론과 구별되는 것이다.

 

철학은 모든 시대의 대다수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이렇게 이해되어왔다. 즉 철학은 과학이며, 따라서 시나 음악이 아니라 진지하고 냉정히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영역도 배제하지 않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보편과학인 것이다. 그것은 한계선상의 문제 및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과학이며, 따라서 다른 여러 분야의 전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사태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하는 근본과학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철학은 실로 어려운 과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을 문제 삼으며, 전통적인 가정이나 방법의 타당성을 거부할 뿐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존재론의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할 때, 철학은 결코 쉬운 것일 수 없다. 철학에 있어서의 의견들이 지극히 다양하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가로서, 懷疑論者가 결코 아니었던 - 이와 반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體系家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일찍이,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도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고 이때에도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서, 철학의 근본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끝으로 나는 한 가지만 더 지적해 두고 싶다. 철학한다는 것은, 이에 수반되는 엄청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도 경이로운 일 중의 하나이다. 단 한 번이라도 진정한 철학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때의 기억에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언제나 느낄 것이다.

 

 

Wege Zum Philosophischen Denken/ J.M. Bochenski /1959

철학에로의 초대 / 문창옥 번역/종로서적/199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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