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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Bochenski(1902-1995)/Wege Zum Philosophischen Denken

법칙(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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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Law)


나는 오늘 제군과 함께 法則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법칙이라 함은 의회가 제정하고 법원이 적용하는 법률이 아니라 과학적 의미에서의 법칙, 예를 들어 물리, 화학, 생물학의 법칙들, 특히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의 법칙들과 같이 순수하고 추상적인 여러 과학의 법칙들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법칙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것들이 인간의 생활 전반에 있어 극히 중요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칙은 과학에 의해 확정되고 나아가 우리의 기술을 가능케 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법칙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 그리고 모든 합리적 행위의 궁극적 기초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연 법칙이나 수학의 법칙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그야말로 미개인, 곧 자연의 온갖 위력 앞에 시달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우리에게 법칙만큼 중요한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그다지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법칙들 가운데서도 특히 순수한 수학적 법칙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떤 機器를 이용하려고 하면서도 그 구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마이크가 리본형인지 축전기형인지조차도 모르는 라디오 보도기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 차에 시동장치가 붙어 있는 곳만을 간신히 알고 있는 운전기사들도 있다. 사실 내가 보기에 이처럼 온갖 것들을 이용하면서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동기계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라디오 청취자들 중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기술의 놀라운 성과인 이 수신기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계장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할지라도, 법칙과 관련해서는 그럴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칙이란 한갓 하나의 기기에 불과한 것 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칙은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필요조건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觀望하는 데 있어서의 明瞭性과 合理性의 要諦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우리로서는 일단 “법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提起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곧 바로 법칙이 극히 놀랍고도 특이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다수의 다양한 事物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모든 사물들 - 철학자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存在者들 - 은 어떤 공통된 성질들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물 내지 존재자란 사람, 동물, 산, 돌 등과 같이 세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물들의 공통된 성질들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이러한 사물들은 어떤 장소에 놓여있다. 예를 들어 나는 프리부르크(Fribourg)에 있으며 지금 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둘째, 사물들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 존재한다. 이를 나에게 적용하자면, 오늘, 즉 월요일 열두시이다. 셋째로, 우리가 아는 모든 사물들은 어떤 時點에서 생겨난 것들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것들은 모두 一時的으로 존재할 뿐이다. 언제인가 그것들은 소멸하게 될 것이다. 넷째로, 그것들은 줄곧 변화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한 때 건강하다가도 병이 들게 된다든가, 한 때 조그맣던 나무가 후일 점차 성장하게 되는 것 등이 그런 사례이다. 다섯째, 이들 사물 하나하나는 모두 個別的인 것, 즉 個體的인 것들이다. 나는 나일뿐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며, 이 산은 바로 이 산일뿐 다른 산 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개별적인 것, 독특한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거나,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必然的인 것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다고 이것이 전체에 커다란 손실로 작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이 세계 속의 모든 사물들의 특성이다. 모든 사물들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생겨나고, 소멸하며, 변화한다. 그리고 또한 그것들은 개별적이며 偶然的인 것들이다. 이러한 것이 세계이며, 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시공간적이고 일시적인 세계, 다수의 개별적인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아득한 세계 속에 법칙이 나타난다. 그러나 법칙은 위에서 말한 사물의 어느 특성도 갖고 있지 않다. 단 하나의 특성도.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어떤 수학적 법칙이 어떤 일정 장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든지 똑같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나는 머릿속으로 이 법칙을 상상해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心象에 불과하다. 법칙은 이러한 심상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머리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 전체를 超越해 있는 것이다.

 

둘째로, 법칙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 어떤 법칙이 어제 생겨났다가 오늘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실상 그것은 어떤 시점에서 認知된 것이며, 어쩌면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시점에 가서 그것이 허위라는 것, 그래서 그것은 법칙이 아니었다는 것이 判明되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법칙 그 자체는 무시간적인 것이다.

 

셋째로, 법칙은 변화하지 않으며, 변화할 수도 없다.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은 어떠한 변화도 없이 영원히 存續될 것이다. 그것을 변경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특성이겠는데, 법칙은 개별적이지 않다. 그것은 單稱的이지 않고 普遍的이다. 그것은 여기저기서 발견될 뿐 아니라 그 밖의 곳에서 무한히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지구상에서 뿐 아니라 달에서도 발견하며, 그 밖의 무수한 경우에서도 줄곧 동일한 법칙 - 강조하건대 - 정확하게 바로 그 동일한 법칙을 발견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법칙의 가장 중요한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법칙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表明된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무엇인가가 이러저러한 確率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蓋然法則의 경우에서조차도, 그 무엇인가가 바로 이 확률로 일어나며 다른 확률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법칙 특유의 것으로서, 법칙 이외의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했듯이, 이 세계 내의 모든 사물은 단지 사실상 그럴 뿐이며, 그와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실들,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왜냐하면 법칙들은 존재하며 그것들은 우리가 고찰해온 바로 그러한 특성의 것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강조했듯이, 이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세계, 우리의 일상생활의 터전인 이 세계는 이들 법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세계는 다채로우며, 이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對象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이며 일시적이고 개별적이며 우연적이라고 하는 낯익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비공간적이고 무시간적이며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영원한 법칙들은 어떠한 자기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무슨 유령같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법칙들을 어떤 방식이로든지 완벽하게 설명하여 세계로부터 축출하고, 궁극적 분석을 통해 그것들이 세계의 여느 사물과도 기본적으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문제가 훨씬 간단해지지 않겠는가? 이것은 법칙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 떠오르는 최초의 생각이다. 그리고 바로 이로부터 철학적문제가 생겨난다.

 

왜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다른 모든 과학들이 법칙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前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과학들은 법칙을 세우고 탐구하고 추적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법칙은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는 意味深長하고도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법칙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세계 속으로 또 다른 하나의 세계와 같은 것이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 다른 세계는 어쩌면 유령과도 같이 다소 기분 나쁜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을 적절히 설명함으로써 제거할 수만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試圖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법칙이란 思考의 産物이라는 의견을 내 놓을 수 있다. 이 경우 세계는 오직 사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따라서 법칙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법칙들은 우리 사고 작용의 構成物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법칙은 과학자, 이를테면 수학자나 물리학자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법칙은 과학자의 意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러한 해결은 실제로 빈번하게 제기되어 왔고, 특히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에 의해 創案되었다. 그는 자연법칙은 사람들이 그것에 익숙하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연성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물이 가열될 때 비등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그렇다는 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되어, 급기야는 우리가 익숙해진 것과 다르게는 사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흄과 그의 학도들은 법칙의 또 다른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설명한다. 그들이 분석한 결과로는 법칙의 그와 같은 특징들은 모두 사라진다. 즉 법칙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이며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우리의 친근한 이 세계 속에 아주 잘 들어맞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이 첫 번째의 해석에 대한 논의는 이쯤 해두고, 이제 이 해석 자체를 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어쨌든 이 해석이 유령처럼 기분 나쁜 성질들을 가지고 있는 법칙들을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의 기초는 실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쉽사리 여러 가지 것들에 익숙해지며,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마치 어떤 불가피한 힘에 눌리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느끼는 충동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결에 대해 여러 가지 중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우선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이 이 해결에 의해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러 법칙들이 이 세계에 있어서 실제로 有效하다는 사실이다. 다음의 예를 고찰해 보자. 한 토목기사가 다리를 설계할 때에, 그는 다수의 물리학적 법칙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흄이 했듯이, 이 모든 법칙들이 오직 인간의 습관,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 토목기사의 습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이때에 다음과 같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즉 어떻게 해서 적절한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설계되어 건축된 다리는 견고히 서 있는 데 반해, 설계 과정에서 기사가 잘못 계산하여 건축한 다리는 무너지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어떻게 인간의 습관이 콘크리트와 쇳덩이에 대하여 그처럼 결정적인 것일 수 있는 것인가? 법칙들은 그 기사의 머릿속에 2차적으로만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차적으로 법칙들은, 누군가가 이것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이와 전혀 상관없이, 세계에 대해, 철과 콘크리트에 대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법칙이 단지 사고의 구조에 불과한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이와 같은 효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이러한 반론은 세계 자체가 우리의 사고의 산물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법칙을 세계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회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흄의 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 實證主義者들 - 과 그 밖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기는 해결이다. 우리는 認識論을 문제 삼게 될 때 다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해결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는 더 이상 이를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

 

저 위의 것이 첫째 의문이라면 이제 두 번째의 의문이 있다. 우리가 법칙들을 사고 속으로 옮겨 놓는다 해도 이로써 법칙들이 제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때 법칙들은 더 이상 바깥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만, 우리의 정신 안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인간의 사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은 또한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세계에 속한 모든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物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특이한 被造物인 우리들 자신, 곧 인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여기는 인간에 관해 깊이 생각할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지적해 두어야 하겠고, 그것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말해 두고 싶다. 왜냐하면 그와 결부된 무수한 편견들이 지금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해 나가는 길 가운데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인간에게서 그 밖의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특이하고 독특한 것, 그 밖의 자연과 구별되는 이것을 보통 우리는 정신적인 것 또는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신은 철학함에 있어 분명코 흥미로운 現象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신이 세계에 있는 그 밖의 모든 것과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 - 그리고 그것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 - 은 적어도 이 둘이나 나의 창문 앞에 서 있는 나무나 나의 打字機와 꼭 마찬가지로, 시간적이고, 공간적이며, 可變的이고, 偶然的일 뿐 아니라, 개별적이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세계, 즉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무시간적인 정신이란 터무니없는 것이다. 어쩌면 정신은 영원히 持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정신은 지금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서, 시간적인 존재인 것이다. 정신이 광대한 영역의 공간을 槪觀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신은 육체에 매여 있으며, 따라서 공간적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신은 자신 속에 필연적인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또한 무방할 그런 것이다 - 그러므로 보편적인 정신 云云하는 것은 헛소리다. 정신은 언제나 특정한 한 사람의 정신이다. 한 조각의 나무가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신이 두 사람 속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단지 미루어졌던 데에 불과한 것이다. 법칙들이 우리의 정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이냐 하는 것은 여전히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분명히 우리 정신의 일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법칙들이 정신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정신을 통해 認識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신 밖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법칙을 정신 속으로 옮겨 놓는다 해도 사태의 해명에 별로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하나의 커다란 難點이 惹起될 뿐이다. 곧 어째서 단지 정신에만 속하는 법칙이 그처럼 엄격하게 외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또 하나의 다른 길을 택해왔다. 기본적으로 이 길은 법칙이란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사고나 정신과는 독립해 있는 것이라고 斷言하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 법칙들은 우리의 외부에 現存하고, 존재하며, 어떤 방식으로 근거를 갖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이때 그것들은 단지 인간에 의해 - 때로는 보다 분명하게 또 때로는 보다 불분명하게 - 인지될 뿐이지, 우리가 우리의 사고에 의해 돌이나 나무나 동물 등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 된다. 이들 철학자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에서는 법칙들이 완전히 다른 존재자, 즉 제2의 존재자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다를 때, 實在 - 우리가 이것을 이렇게 부르고자 한다면 - 에는 사물, 즉 現實的인 것들 외에 그 밖의 어떤 것, 곧 법칙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법칙들의 존재 유형 내지 존재 방식을 觀念的인 것이라 부른다. 법칙들은 관념적 존재에 속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존재 형식, 곧 현실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법칙에 대하여 지금까지 검토해 온 두 가지 해석 - 실증주의적 해석과 (그 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소위 관념론적 해석 - 이 거대한 世界觀들 간의 논쟁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기독교인이 그의 신앙의 특성에 의해 이러한 유형의 관념론에 얽매여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는 신이 존재하며 불멸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관념적인 것들의 존재를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物質的 - 그들은 이 말을 實在的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사고 속에 뿐만 아니라 세계 그 자체 안에도 영원하고도 필연적인 법칙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관념론적인 것이다. 따라서 법칙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은 세계관 사이의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로 돌아올 때, 추가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법칙의 초월성 - 즉 관념적 존재 - 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이 관념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이해 방식에 따라 여러 학파로 각기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관념적인 것의 현존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느냐고 물어볼 때 분명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중요한 답변이 있다.

 

첫째 답변은 관념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과는 독립적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物的 세계에 앞서, 그리고 이것을 초월하여 하나의 특수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 관념적 세계에는 물론 공간이나 시간, 변화 그리고 단순한 事實性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영원하고, 순수하고, 불변하며,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보통 유럽 철학의 창시자인 플라톤(Platon)의 것으로 간주된다. 최초로 법칙의 문제를 제기했던 그는 이를 지금 막 언급한 방식으로 해결했던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답변에 따르면, 관념적인 것은 존재하지만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떨어져있지는 않다고 한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것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에는 사물들의 어떤 구조, 本質이라 불리는 어떤 되풀이되는 形態가 있으며, 인간 정신은 이들의 조직으로부터 법칙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定式化된 법칙들은 오직 우리의 사고 속에서 발견될 뿐이지만, 그것들은 사물들 자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세계에 대하여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로서 대다수의 과학 분야를 창안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해결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실증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했던 세 번째 답변이 있다. 이것은 법칙들이 관념적이라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념적인 것은 오직 사고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법칙들이 세계에 대하여 유효한 까닭은 사물들의 구조가 사고의 법칙의 投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는 데 있다고 한다. 이것은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학설이다.

 

여기 유럽에 있어 중요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 세 가지 해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채택해 왔다고 하거나, 우리의 철학이 상당 부분 이 세 가지 해결에 대한 반성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3년 전에 나는 시카고 근교에 있는 유명한 미국의 노트르담 대학에서 열린 한 토론에 참석한 적이 있는 데, 여기에는 150여 명의 철학자와 논리학자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강연자는 모두 數理論理學者들이었고, 강연 내용은 온통 하나같이 수리 논리적 형식으로 전달되었다.

 

이 토론은 이틀 낮과 사흘 밤에 걸쳐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루어진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였다.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수리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린스턴 대학의 알로조 쳐어치(Alozo Church) 교수는, 저 옛날의 大家가 아테네의 광장에서 한 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플라톤적인 학설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것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철학의 영원한 문제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그 어느 시대에 있어서 보다도, 그렇게도 많은 법칙들을 알고 있고, 또 그것들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우리 현대인들에게 있어 그 만큼 더 훨씬 절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Wege Zum Philosophischen Denken/ J.M. Bochenski /1959

철학에로의 초대 / 문창옥 번역/종로서적/199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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