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저먼 바덴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마르부르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이후에는 총장까지 올랐다. 총장 취임식에서 나치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으나 10개월 뒤에 실수였음을 밝히고 사임하였다.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는 나치즘에서 모종의 참신함을 보긴했으나 대학의 자율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작으로 <존재와 시간>이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실존보다는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현상학(직접적 경험의 자료들을 추상화나 개념화 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방법)으로 인간존재를 분석하고 그렇게 분석한 인간의 존재방식을 특징 짓기 위해 현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해 부른다. 세계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며 관계하는 조건이다. 우리는 세계내적 존재이며 인간 실재, 혹은 현존재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다양한 방법들이다. 우리는 무엇인가와 관계 맺고, 생산하고, 무언가에 주목하고 추구하며, 무엇인가를 이용하고, 포기하거나 내버려두기도 하고 떠맡고, 성취하고 증명하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결단한다. 우리는 세계 내 자신의 지평 안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이용한다. 이것은 우리의 불가피한 현실이다. 세계와의 이러한 관계맺음은 자아실현과 세계 내의 다중들의 무비판적 교섭사이에 긴장을 유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부하고 평범한 일로 탈인간화되어 이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소외되어 진지함이 결여된 인간을 익명인이라 부른다.
현존재의 특징 중 하나는 걱정, 불안, 공포와 같은 개념이다. 인간은 현존하는 세계로 던져진 존재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세계와 관계 맺고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생겨나는 것이 걱정이다. 공포란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지만 불안은 위협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세계는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로서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현재라는 시간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이로인해 세계는 우리가 실존을 명확히 깨닫도록 하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숙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 미래, 사물과 타인들과 관계맺는 방식 등을 걱정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외면하고 무반성적인 일상의 익명성 속으로 도망치고 싶어한다. 우리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뿐 아니라 고립된 타인으로도 존재한다. 세계 내에 인간의 존재방식은 이렇게 두 개의 존재 양식이 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진지함의 열쇠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하고 모든 가능성을 종식시킨다. 우리는 직면하던가 회피할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각의 맥락에서 세게 내적 행위를 보는 것이며 앞서는 것도 없고, 뒤 서는 것도 없는 인생에 직면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는 우리자신에 의해 부여될 수 있다. 이런 인간 존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일시성이다. 인간은 존재를 구성하기 위해 상호작용과 재창조를 하는 존재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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