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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하이데거

하이데거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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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를 생각한다

1. 걸은 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전개하는 사유思惟의 스타일과 스케일, 그리고 내용의 혁명성은 한마디로 전무후무하다는 말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는 텍스트와 삶을, 역사와 현실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그에게는 통시성과 공시성이, 이론과 실천이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고 서로 관통한다. 하이데거가 문제삼는 수많은 話頭와 고전들의 해석은 모두 존재라는 하나의 大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처럼 다작인 사상가가, 그리고 그처럼 광범위한 많은 화두를 거느린 사상가가, 거기에다 2,500년 서양 철학사 전체를 망라하는 엄청난 스케일의 사상가가 그렇게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일관성의 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법은 반복이다. 다작인 하이데거에 있어서도 반복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의 반복은 늘 새로운 면모를 함께 생성한다. 그가 사용하는 반복은 주제와 변주를 통해 짜여지는 大편성 교향곡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하이데거 사유의 혁명성은 통념에 대한 전복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철학사를 지배해온 대전제와 통념들을 근원에서부터 뒤집어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이 사유 혁명의 컨텐츠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된다.

하이데거는 1889년 독일의 메스키르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89년은 하이데거와 함께 현대철학계를 풍미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그리고 하이데거의 인생 역정에 뚜렷한 각인을 남긴 히틀러Adolf Hitler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세계사와 철학사를 뒤흔든 이들 동갑내기 삼총사의 관계는 (이들은 모두 독일어가 모국어이다) 그 자체로 흥미로운 화제 거리가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실업학교 동창이고, 하이데거는 한때 히틀러의 나치즘에 깊이 관여한 바 있다. 아울러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서로에 대해 짧지만 의미 있는 논평을 남겼다.

191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하이데거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후설Edmund Husserl의 조교로서 있으면서 그와 함께 연구하였다. 1927년 후설의 주선으로 출간한 《존재와 시간》으로 일약 세계적 철학자로 발돋움하였고, 이듬해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히틀러가 권좌權座에 오른 1933년에는 同대학의 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어서 바로 나치에 입당해 나치즘에 적극 가담하였다.

한편 그는 스승 후설에게 바쳤던 《존재와 시간》의 헌사를 삭제했고(유태인 후설은 당시 나치의 치하에서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후설의 장례에도 불참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는 그 자신의 구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2차 대전이 끝나면서 하이데거는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슈바르츠발트의 산장에서 사색과 집필에 전념하였다.
 

2. 후설을 넘어서

하이데거는 후설과 함께 철학을 연구했고 후설의 후원 하에 철학자로 자리매김 했지만, 후설의 철학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후설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의 하나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후설 철학에 있어서 지향성과 환원이 서로 화합할 수 있는지를 문제삼는다. 후설에 의하면 지향성은 의식 주체가 일정한 관점에서 대상을 지향함으로써 형성되는 관계 개념이다.

그러나 대상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 세계를 괄호치는 환원은 결국 지향적 관계를 의식 내적 사실로 귀속시키고 의미를 적용되는 대상과 쓰임의 문맥을 제거한 상태에서 이해하려 한다. 지향성이 만남과 관계를 함축한다면 환원은 단절과 분리를 함축한다. 환원은 의식을 인간으로부터, 절대 의식을 세계로부터 각각 단절시키며, 지향함을 지향되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의식의 지향성은 의식 바깥으로 향할 수 없다. 의식의 바깥에 해당하는 세계가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후설의 담론은 지향성을 객관화하는 함정은 피했지만 지향성을 주관화하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근대 의식철학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후설은 따라서 현대철학의 창시자이기보다는 근대철학의 계승자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후설의 환원을 통해 원래 안에서 바깥으로 향해 있던 지향성의 흐름은 안으로 역류된다. 이렇게 해서 도달하게 되는, 소위 순수 의식의 내적 본질과 보편의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거세된 추상과 인공의 세계이다. 그것은 살아 숨쉬는 인간마저 배제된, 세계 아닌 세계, 이론만을 위한 이론의 세계이다. 이러한 구도 하에서 지향성이 지니고 있는 초월성은 지향성의 주관화 방법이 미처 다 포섭하지 못한 주변적 잉여 현상으로 전락한다. 하이데거의 해체주의적 시각은 의식철학이 남긴 바로 이러한 잉여剩餘의 흔적에 주목한다.

지향성에 관한 후설의 분석이 초월성을 잉여로 남긴다는 것은 후설의 분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함축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지향성은 초월성을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밖으로 뻗어 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후설은 의식을 그것을 초월해 있는 대상의 존재에 대한 참조 없이 서술될 수 있는 내적 요소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의식에 의해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대상의 초월성의 문제를 환원에 의해 부각된 선험적 자아가 갖는 성격인 “내재 속의 초월성”의 문제로 바꿔 놓고 있다.

이에 의해 초월적인 것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는 선험적인 것에 대한 개념적, 인식론적 문제로 탈바꿈한다. 하이데거가 볼 때 이는 넘어섬으로서의 초월의 본래적 의미에 대한 왜곡이자 근대의 의식철학으로의 후퇴이다. 초월은 의식을 매개로 일어나는 의식 내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초월성은 인간과 타자 사이의 행동 관계Verhalten이며, 이 행동 관계는 의식 주체와 의식 바깥의 대상 사이의 인식론적 관계를 넘어선 존재론적 관계이다. 하이데거는 지향성이 초월성의 인식 근거이고 초월성은 지향성의 존재 근거라고 말한다. 초월성은 의식의 본질임을 넘어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신을 넘어서려 하는 탈자적ekstatisch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월성으로 이해된 지향성은 인간을 세계로부터 차단시키기보다는 인간이 세계 내에, 세계의 대상들과 함께 머무르는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인간은 탈자적 존재이자 세계-내-존재이다. 이는 세계가 없는 후설의 순수 의식과 분명하게 대비되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지향성과 초월성은 이 세계-내-존재에 근거해 있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의식철학에 의해 이루어진 주관과 객관, 의식과 세계의 분리를 극복하고 양자를 매개한다. 초월성으로 이해된 지향성이 바로 이 매개의 고리이다. 세계는 인간의 지향적 관계를 포섭하며 이 관계에 수반되는 의미의 문맥으로 작용한다. 의미는 후설의 철학에서처럼 노에마에 담겨 있는 초시간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행위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와 살아 숨쉬는 시간을 통해서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지향성에 관한 담론을, 인식하는 인간을 모델로 하는 인식론에서 행위하는 인간,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을 모델로 하는 존재론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지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혔다고 평가된다. 하이데거에 이르러 의식과 그 지향성은 탈자적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에서 비롯되는 파생적 개념으로 새로이 자리매김 된다. 의식의 지향성보다 초월성과 세계-내-존재가 인간을 규정하는 더 원초적인 개념으로 부각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환원에 의해 닫혀졌던 의식의 지평이 인간을 통해 세계를 향해 다시 열리게 되고, 보류되었던 세계가 복권되는 것이다.
 

3. 존재 망각

하이데거에 의하면 후설이 몸담고 있는 전통 철학은 구체적 현상 세계의 괄호침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현상계로부터의 탈출을 사명으로 삼으면서부터 세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현상”하지 않게 된다. 현상되어야 할 세계의 존재가 억압되고 망각된 역사가 곧 철학사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볼 때 이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본말의 전도이다. 그를 좇아 존재 망각忘却이 지닌 이 두 가지 측면을 각각 살펴보자.

호흡은 인간 행위의 생리적 원천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호흡 장애를 겪을 때에야 비로소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는 빛 때문에 세계의 사물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빛은 보이지 않는다. 빛의 중요성은 빛이 제거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나 흙 속에 사는 지렁이의 경우 물과 흙이 그러할 것이다.

존재는 우리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현상을 체험한다. 현상現象이란 상象과 현재現在라는 시간적 계기의 합성어이다. 즉 현상은 상이 시간성을 통해 드러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체험하는 사건이 바로 드러남의 사건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경우 우리는 그 드러남, 혹은 드러남을 가능케 하는 존재 사건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드러난 존재자만을, 혹은 그것과 우리 사이에 마련된 의미 연관성만을 인식할 뿐이다.

우리는 존재Being가 진행형(Be + ing)의 사건임을 망각할 뿐더러 존재를 존재자로 대상화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는 대상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곧 무無임을 주장함으로써 존재를 대상화하는 인식을 부정한다. 존재가 무Nothing라 함은 곧 존재가 대상이 아님(No + Thing)을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어에서 존재와 그 드러남의 사건에 해당하는 be를 별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흔할 뿐더러 또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be의 희랍 어원인 einai는 i) 계사繫辭로서의 “이다”(be), ii) 양화사量化詞로서의 “있다”(exist), iii) 동치同値로서의 “…와 같다”(is the same as), iv) 진리 서술로서의 “…는 참이다”(is true) 등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다의어이다. 요컨대 i) 서술, ii) 존재, iii) 동일성, iv) 진리의 이념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뿌리에서 연원淵源 한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드러남과 그 원천을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존재 망각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의 용어를 빌면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隱蔽한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의 숙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학사를 통해서 관철된 존재 망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재 망각은 이처럼 순진하고 무해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어떤 의도적 왜곡이 부가되어 있는데 그것은 5절에서 살펴볼 제반 억압들을 조장하는 위험스러운 것이다.
 

4. 용재성과 전재성

우리에게 드러난 이 현상 세계의 특징은 그것이 인간과의 복잡한 의미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 던져진 인간은 이 세계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또 자신의 목적과 관심을 세계에 적극적으로 투사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목적과 관심을 성취하기 위해 세계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실천적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실천적 배려와 도구로서 만나게 되는 세계의 양상을 세계의 용재성用在性, Zuhandenheit이라 부른다. 인간과 그의 세계는 이 용재성의 관점에서 하나로 얽혀 있다. 그는 또한 이러한 얽힘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현존재現存在, Dasein라 부른다.

일상적 생활 세계에서 세계와 우리 사이의 도구적 얽힘, 즉 용재성은 빛과 공기가 그러한 것처럼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목적과 관심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에 충실할 뿐이다.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용재성이 작동되지 않을 때에야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와 세계의 용재적 얽힘의 구조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용재성의 파괴가 철저한 방식으로 오래 지속될 경우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의미와 관심의 지평에서 분리시켜 파편적으로 대상화하기에 이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관찰과 대상으로서 만나게 되는 세계의 파편적 양상을 세계의 전재성前在性, Vorhandenheit이라 부른다.

용재성의 관점에서 본 세계가 창 있는 단자들의 집합이라면 전재성의 관점에서 본 세계는 창 없는 단자單子들의 집합이다. 용재성이 세계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도구적 총체성을 인간의 실천적 관심에 연관지어 테크네 로서 부각시키는데 비해 전재성은 세계의 구성 요소들을 그들이 위치한 문맥적 배경에서 유리시켜 테오리아 로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창 있는 단자들이 시간적 계기로서 시간의 상 하下에서 본 세계 안에서 서로 얽히는 반면, 창 없는 단자들은 시간을 초월한 추상적 대상으로서 영원의 상 하下에서 본 이론이 부과하는 사후적 논리에 의해서만 외연적으로 연관된다.

전통 철학은 우리의 의미와 관심의 지평에서 이탈된 전재성의 관점에서 본 세계를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로 간주하였다. 의미와 관심의 지평은 세계의 객관성을 훼손하는, 인간이 형성한 주관적인 것이므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의 본말本末을 전도한 경우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논증하고 있다.

우리가 전망대에서 도시의 정경을 보고 있다고 하자. 우리 앞에 펼쳐진 전망은 도시의 면모와 우리의 원근법적 관점이 함께 이루어낸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도시에 대한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에서 드러난 도시의 모습presentation이다. 우리의 원근법과 관점은 도시의 제 모습을 훼손하는 주관적 틀이 아니라 도시가 우리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창구이다. 따라서 우리의 원근법과 관점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도시 그 자체란 성립할 수 없다. 그 도시에 관한 사진이나 지도 역시 또 하나의 원근법, 또 하나의 관점일 뿐이지 우리의 원근법이나 관점에 비해 그 어떤 특권적 위치에 있지 못하다.

전통 철학은 세계의 용재성을 결핍과 주관으로, 세계의 전재성을 충만과 객관으로 묘사해 왔다. 용재성을 초월한 전재성에 이를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거꾸로 전재성이 용재성을 이루는 요소의 결핍에서 파생된다고 본다. 그 결핍은 전재성의 배경을 이루는, 인간과 간주관적 관계로 얽혀 있는 세계의 억압적 괄호침에서 비롯된다. 용재적 관계로 얽혀 있는 인간과 세계의 간주관적 의미 연관의 그물 망網에서 이탈해 나온 존재의 파편은 제諸 의미와 위치를 상실한 관조의 대상으로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언어에 짜여진 용재적 의미 연관의 그물 망에서 이탈해 나온 언어의 파편은 제 의미와 위치를 상실한 기호로 化한다. 이들 기호와 대상이 외연적 대응의 관계를 맺는다는 가정 하에 조립된 것이 이론이다. 형식 체계의 관점에서 언어와 이론의 의미와 위상은 해석이라는 인위적 관점과 시각에서 자의적으로 부가된다. 그러나 기호와 대상 사이의 외연적 대응 관계는 언어가 세계를 드러내어 주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세계와 용재성으로 얽혀 들어가는 사건에 대한 왜곡이다. 따라서 전재성이 생산하는 이론은 결핍된 이차적인 것일 뿐 결코 세계의 실재를 묘사하지 못한다. 삶의 구체적 문맥에서 벗어난 소위 초월적 실재 자체란 추상과 결핍의 상승 작용을 통해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 세계는 오직 역사와 시간을 통해서 인간에게 현상하기 때문이다.
 

5. 철학사

하이데거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다양한 드러냄이 어느 한 방식의 일방적 전횡에 의해 왜곡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이론이라는 언어적 가공물에 의한 세계 이해를 지칭한다. 이론적 관점은 존재의 풍성함에 가해진 프로이트적 억압의 산물이다. 8절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 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형식언어에 의한 자연언어의 식민화와 대체는 이론중심적 철학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론의 등장과 발전은 인간의 역사에서 불가피한 숙명이기도 하다. 그 숙명은 이미 2,000여 년 전 고대 희랍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대 희랍인들은 언어에 해당하는 낱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 있어서 언어는 곧 로고스였다. 로고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질서를 뜻한다. 즉 언어는 질서의 구현물이다. 그런데 희랍에 있어서 로고스는 언어의 질서이자 곧 세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또한 희랍인들에 있어서 세계kosmos와 질서kosmos는 같은 개념이다. 서양철학사의 시작이 되는 밀레토스 학파의 화두, 즉 만물의 원질原質, arche@에 대한 물음은 이미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어떤 근원적인 것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다.

일견 무상無常한 삶에서 항상恒常적인 어떤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은 종종 적대적인 자연 세계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발현이자 자신의 삶과 우주에 어떤 영속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지와 몸부림은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분법적 구도를 초래한다.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는 현상적 세계와 그에 대한 인간의 억견臆見, doxa은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는 우연적인 속성을 지니는 반면, 세계의 실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인식認識, episteme@은 시공을 넘어서는 필연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대별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의 제약을 넘어 세계의 실재를 이성적으로 직관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한다. 삶의 무상성無常性이 삶의 시간성과 그에 수반되는 생성, 소멸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인간의 삶은 시간성과 그 수반적 속성들을 초월함으로써 얻어지는 항상성에 의해 완성된다.
무상한 현상계로부터의 탈출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에서 체험되는 시간성과 역사성을 동결함으로써 그 계기가 마련된다. 하이데거가 볼 때 이것이 서양철학사에 등장한 첫 번째 억압이다. 이러한 억압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실재계를 이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이론”의 희랍 어원에 해당하는 은 원래 “본다”를 뜻한다.) 그러나 실재계를 바라보는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지닌 구체적 자아가 아니다. 현상계에도 실재계에도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세계-내-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현상계를 초월하였고 또한 우리는 실재계와 맞서 실재계 밖에서 그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실재계와 우리 사이엔 바라봄 이외의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바라봄 이외의 어떠한 구체적 행위도 허용되어 있지 않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기에 어떤 현실적 관심이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 아니 현상계를 탈출하는 순간 이 모든 관심과 목적은 제거되었다. 하이데거가 볼 때 인간 행위의 규제, 인간의 관심과 목적의 제거가 두 번째 억압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세계로부터 시간성과 역사성을 동결하고, 아울러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행위, 관심과 목적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를 앗아가는 것이다. 세계가 세계화할 시간과 장소, 그리고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볼 때 세 번째 억압은 바로 이 세계 자체에 대한 억압이다.

근대 철학은 흔히 인식론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볼 때 근대 철학의 공헌에는 존재론적 측면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존재에 대한 이성적 사유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고대 이래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랑하던 이성적 인식(생각)에 비록 애매하기는 하나마 모종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근대 인식론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관념적 표상이 저마다 상호 독립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이어서 그 어떠한 문맥적 배경의 뒷받침 없이도 개별적으로 이해되고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흄Hume에 의하면 마음이란 결국 이러한 파편적 표상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의 회의주의는 이러한 집합이 어떻게 사유 주체로서의 “나”라는 존재론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의식에서 싹텄다.

그러나 흄의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관한 존재론적 구성 작업은 현대에도 계속된다. 우리 시대의 인지과학과 언어철학에 의하면 마음은 이성이 세계를 직관하고 사유하는 소프트웨어이다. 그 소프트웨어가 육체라는 불완전한 하드웨어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이다. 혹은 법칙은 세계를 운용하는 소프트웨어이다. 그것이 물질이라는 가변적인 하드웨어에서 실현된 것이 현상적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세계를 재현再現, re-present하는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에 대한 표현이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의 소프트웨어라면 언어의 구체적 형태, 예컨대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는 그것을 담지하는 하드웨어이다. 고대 희랍철학의 계승인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 컴퓨터의 은유를 토대로 한 기능주의 류類의 심리철학, 언어의 심적 표상 이론 등은 이처럼 행위하는 구체적 인간, 생활 세계, 일상적 언어사용을 억압한 채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언어관을 구축한다.
 
이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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