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 <이름과 필연> 강의2
설의 다발 이론과 그에 대한 비판 – 설의 다발 이론이 갖는 6가지 논제: (1) 모든 이름이나 지시적 표현 ‘X’에 대하여 성질들의 한 덩어리, 즉 Φ라는 성질들의 다발이 대응한다. 그리하여 A는 ‘ΦX’라고 믿을 수 있다. (2) 그러한 성질 중의 하나 또는 몇 개를 합하여 A는 어떤 개별자를 독특하게 지적한다고 믿는다. (3) 만일 Φ의 대부분 또는 중요한 대부분의 성질이 하나의 독특한 대상 y에 의하여 만족된다면 y는 ‘X’의 지시체이다. (4) 만일 투표가 어떠한 독특한 대상도 산출하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그러면 X는 Φ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라는 명제는 화자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그러면 X는 Φ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라는 명제는 (화자의 언어에서) 필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만약 하나의 이름에 한 개의 기술구를 대응시키는 경우에는 필연적이지 않은 진리도 필연적 진리로 둔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철학자이다>와 같이 지시체를 집어내는 한 개의 특정기술구를 이름의 의미에 대응시킬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하였다>와 같은 필연적이지 않은 진리도 필연적인 것이 된다. 서얼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름의 의미는 단일 특정기술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기술구들의 다발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필연성에 대한 문제에서 정답이 아니다. 서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부여되는 모든 성질들의 선언적 논리구조 혹은 그 합을 갖고 있다>라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상 그에게 부여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은 결코 필연적이지 않다. 이는 이름이 고정지시체라는 점(1강에서 설명)을 상기한다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히틀러가 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던 악의 화신이 아니라 시골지방에서 조용히 인생을 보낸 가능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 가능세계에서도 우리는 그 사람을 ‘히틀러’라 부른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악의 화신이다>는 결코 분석적이지도 않으며 필연적이지도 않다. 만일 ‘히틀러’의 지시체를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인을 죽인 사람으로 고정하기로 가정한다(이를 히틀러의 가장 중요한 성질로 보기 때문이다; 질적인qualitative 통세계적 동인) <히틀러는 악의 화신이다>는 분석적이며 필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히틀러’라는 이름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이에는 한가지 범주 착오가 행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중요성’과 ‘본질(필연)’의 혼동이다. 어떤 대상의 중요한 성질이 그것의 본질이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여기서 고정적 지시어의 개념은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시’하는 것으로서의 개념이다. “2+2=4”라는 표현이 <일곱은 짝수이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을 반사실적 상황은 얼마든지 상상 가능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 세계를 기술할 때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지시체로 세계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위의 논의는 서얼의 이름 이론 중 논제 (6)이 거부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논제 (5)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름짓기는 화자가 지시체를 확정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헤스퍼러스’라는 이름의 지시체를 내가 저녁 거기에서 보았던 그 별로 확정한다면, <헤스퍼러스는 저녁에 보인 적이 있다>는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문장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논제 (5)가 (2), (3), (4)와 함께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2), (3)과 (4)가 성립한다면 그것은 이름에 의한 지시체의 결정이 경험적이고 우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네 논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경우는 앞의 예와 같은 명명식의 경우뿐일 것이다. 이제 각 명제를 하나하나 따져보자. 얼핏 보아 (2)는 참인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캐틸라인을 비난한 그 사람”과 같은 표현을 통해 키케로라는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캐틸라인을 비난한 그 사람”이라는 표현이 키케로만을 집어내는지는 따져볼 만한 문제다. 일반인들은 “파인만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물리학자이다”라 대답하겠지만 이것이 파인만만을 집어내어 준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보다 정확히 대상을 집어내기 위해,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그 사람”이라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해명을 먼저 요구하는, 선결문제의 오류에 빠져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는 순환성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2)를 만족시키는 경우를 찾아내기 어려우며, 따라서 (2)는 거짓으로 보인다. 비슷한 이유에서 (3)도 거짓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를 실제로 발견한 사람이 ‘슈미트’이고 우리가 아는 괴델은 이 정리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우리가 ‘괴델’이라는 이름을 통해 지칭하는 대상은 괴델인가 슈미트인가. 이 경우에도 우리는 ‘괴델’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는 괴델을 지칭할 것이다. 이는 어떤 대상이 Φ의 대부분 혹은 중요한 성질을 만족하지 않더라도 ‘X’의 지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름과 지시체를 연결하는 것은 이름이 표현하는 어떤 속성들을 대상이 만족시키는지의 여부와 무관하다. (4) 또한 거짓이다. (4)의 대우명제인 <이름이 지칭에 성공한다면 투표가 어떤 독특한 대상을 산출한다>의 반례는 키케로, 파인만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투표가 어떤 대상도 산출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름은 지칭에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구성했던 괴델의 예가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 불리는 정리가 실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으며 산수의 체계는 완전할 경우에도 ‘괴델’이라는 이름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발견한 자>를 그 의미로 삼지 않기에 괴델을 지칭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크립키의 이름 이론 – 한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이론은, 우리가 ‘괴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실제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괴델이 산수의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다른 가능세계를 상상하더라도 ‘괴델’이라는 이름은 괴델을 지칭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반례에 부딪힌다. 어떤 화자는 페아노가 자연수열을 기술할 수 있는 5가지 공리를 발견한 자라고 믿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발견이 데데킨트의 업적임을 알고 있을 수 있다. 즉 화자가 대상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다. 더 큰 문제점은 그것이 비순환성 조건을 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괴델이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하였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때 괴델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괴델’의 지시체를 “산수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이 통상적으로 귀속되는 그 사람”으로 확정할 것이며 따라서 위의 우리의 발언은 “산수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이 통상적으로 귀속되는 그 사람이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하였다”와 동일해질 것이다. 이는 지시체를 확정하는 과정이 순환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트로슨은 이에 대해 한 사람의 지칭은 다른 사람의 지칭으로부터 나올 수 있음을 들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즉 <나는 ‘괴델’이라는 이름을 통해 산수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조셉이 생각하는 자를 뜻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책임 전가 역시 순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책임전가의 고리가 불분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해결책은 다소 빈약하다. 위의 이론 대신 다른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 가령 하나의 아기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이 아이에게 이름을 붙일 것이고, 부모가 아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아이의 이름을 연쇄적으로 알게 된다. 이 연쇄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면 그 고리의 끝에 있는 한 화자는 아이에 대해 누구로부터 최초로 들었는지, 또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스트로슨의 이름 이론과 대비되는 점이다. 스트로슨의 이론은 다발 이론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름을 획득한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면 완전한 기술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연쇄 통로에 대한 지식을 화자가 갖고 있어야 함을 중요한 조건으로 삼는다. 하지만 크립키의 이론에서 중시되는 것은 실제 그 연쇄 통로가 어떻게 연결되어있느냐 뿐이다) 그 아이를 지칭할 수 있게 된다. 주목할만한 점은 그 화자는 아이를 유일하게 동인할 수 없더라도 아이를 지칭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아이가 만약 파인만이었을 때, 화자는 파인만 다이어그램 등에 대한 지식이 일체 없이도 그 아이를 지칭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즉 화자는 일체의 선언 의식 없이 이름과 지시체를 연결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볼 수 있겠다. 최초의 명명식이 수행되면 대상은 즉물적으로 이름이 붙여진다. 또는 그 이름의 지시체가 하나의 기술을 통해 확정될 수 있다. 그 이름이 연쇄고리를 통해 전해질 때, 이름을 전달받는 자는 전달자와 동일하게 지시체를 집어내기 위해 이름을 사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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