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는 범죄를 징벌하는 사회구조에 대해 분석한다. 중세까지 범죄에 대한 처벌은 공개적으로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체벌이 많았다. 이는 범죄 자체에 대한 징계 못지않게 국민들에게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강화시키는 기능도 했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 공개 체벌은 줄고, 대신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수용하는 감옥의 역할이 크게 강화된다. 그래서 <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이 때의 감옥은 과거의 감옥과는 많이 다른 구조로 구빈원 등 수용소의 모델을 따른 것이다. 외형적 모습만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개념도 일탈, 비행, 광기 등은 일종의 정신병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푸코는 감옥의 역사에서 정상과 비정상, 사회의 일반적 구성원과 격리시켜야할 비행자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사회의 기득권층이라 말한다. 그 기준에 따라 비정상은 정상에게 보이지 않도록 격리수용되고, 감시와 통제 속에 정상으로 교화되어야만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감시와 처벌>은 근대적 감옥의 출현과 함께 도입된 규율, 훈련, 교정, 관찰 등의 방법이 감옥 밖의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의 기술로 작용해 왔는지를 규명한다. 푸코는 광기에 대한 이성 중심 사회의 탄압(광기의 역사), 에피스테메 혹은 인식구조의 시대적 변화(말과 사물), 병원과 의학의 사회사(진료소의 탄생) 등을 주제로 한 것에 이어 <감시와 처벌>에서는 권력의 정체와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인간 착취의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푸코는 권력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일방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권력자가 독점할 수 있는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도 않는다. 권력은 한 사회에서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작동하는 인간 지배의 기술과 전략이고, 권력의 전략적 목표는 인간의 신체다. 가령 왕권시대의 권력이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권력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근대의 권력은 감옥의 제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면서 신체를 부드럽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처벌 방식의 변화는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말에 개혁자들이 죄수에게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는 것보다 감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죄수를 처벌하고 교화시키는 방법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푸코는 처벌의 이러한 개선이 죄수에 대한 인간적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이 근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권력의 부드러운 지배의 방법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산출하는 경제적 통제 방법이기도 하다. 프랑스대혁명 직후인 18세기 말에 감금이라는 형벌제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감옥이 탄생한 것은 그런 논리에서다. 근대적 감옥의 대표적 형태는 UK 법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공리주의 제창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설계한 판옵티콘(일망 감시 장치로 만들어진 원형감옥)이다. '모두'(all)의 그리스어 '판'(pan)과 '눈에 보이는'(seen, visible)의 그리스어 '옵티코스'(optikos)의 조합어로 '모두 다 본다'는 뜻이다. 중앙에 원형감시탑이 있고, 둘레로 반지처럼 감옥시설이 들어선 것을 구상했기 때문에 원형감시시설 또는 원형감옥으로 부른다. 중앙에 설치된 감시탑의 감독관은 판옵티콘에 수용된 죄수들의 행동을 낱낱이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독관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죄수들은 감독관의 시선 때문에 어떠한 돌발적인 행동과 일탈도 감행할 수 없으며 점차 규율에 익숙해지면서 규율의 내면화에 의해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고 그 감시에 복종한다. 감독관 시선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중앙의 감시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감옥 안에서 이러한 감시자와 죄수들 사이의 관계는 감옥 밖의 사회에서 권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가령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작과 활동이 온갖 시험의 장치 속에서 세밀히 규제되고 기록되는 과정을 통해 학생은 규율에 길들여지고 순응한다. 군대나 공장의 엄격한 규율과 통제의 장치 속에서 군인과 노동자들이 예속화되는 현상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규율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푸코는 신체가 규율과 훈련에 길들여져 있을 뿐 아니라 미세한 정보의 그물 속에서 일상의 모든 것이 낱낱이 기록되는 삶을 살아가는 시대를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을 묻는다.
바로크 시대의 잔인한 공개처형이 금고형으로 바뀌어가는 휴머니즘의 이면엔, 인간을 길들여 사회질서에 순응시키려는 권력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거다. 가령 ‘보복에서 치료로’. 이 휴머니즘화 과정에서 형벌은 점차 그 잔인성을 벗어버리나, 이 과정의 이면에서 우린 범죄자를 둘러싼 지식권력의 교체를 본다. 가령 봉건적 보복론의 바탕을 이루는 지식은 신학(윤리학), 예방론을 가능케 해준 지식은 쾌와 불쾌에 관한 심리학, 재사회화론의 이론적 토대는 사회학, 정신의학, 정신분석학 등이다. 이 이론들이 교체되면서 이어져온 법철학의 역사. 어쩌면 이는 범죄자를 놓고 벌이는 지식권력들의 경쟁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범죄자라는 노획물을 둘러싼 권력들의 싸움. 어느 사회든 범죄자를 배제시키는 나름의 논리에 따라 자기 질서를 확립한다. 한 사회의 형벌제도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양상을 반영한다. 지금까지 형벌이 더 인간적인 것으로 변해온 것은 권력의 필요에 따른 것일 뿐, 알고 보면 권력은 더 강하고 세련된 형태로 우리를 체제 순응적 존재로 길들이고 있다. 이 무정부주의적 논리는 범죄를 해괴한 짓으로 간주하여 별도로 취급하는 단조로운 언설을 뒤엎고 범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미학적 반역이다. 원래 예술과 범죄의 경계는 모호한 법이다. 예술이 낡은 관습을 깨고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여주는 해방적 구실을 하듯, 권력을 부정하는 범죄 역시 사회 해방을 위해 귀중한 정치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흑인 해방이 범죄 없이 성취됐을까? 이렇게 무정부주의는 예술, 해방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다.
현대인은 하루 평균 30회 이상 감시 카메라에 노출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할 때마다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보여 지고 있다는 얘기다. 보는 자는 누구이며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나 국가가 어떤 의미에서 구성원들에 대한 감시 시스템의 네트워크 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면, 그 사회나 국가의 노림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푸코의 대답은 근대 국가 이후의 권력 구조와 사회 구성원들의 개인화 과정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설명이 될 것이다. 더구나 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감시 시스템의 기술적 역량이 한층 강화된 오늘날 무엇이든 보여 질 수밖에 없는 노출의 심각성과 보는 자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명쾌한 일별은 푸코 이전과 이후에는 없다. 푸코는 무의식적인 심적구조, 사회구조, 그리고 언어구조가 일체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주체로서의 인간과 자아라고 하는 관념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았다. 푸코의 사상은 크게 정상·비정상, 동일자·타자, 내부·외부, 이성·비이성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밝히고, 이를 허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이러한 경계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지식-권력(savoir-pouvoir)의 존재를 추적하고 그것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 분석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말과 사물' '앎(지식)의 고고학' '광기의 역사' '담론의 질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이 있다. 2. 감시와 처벌: 이 책은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처벌의 기구(가정, 학교, 병원, 공장 등)를 분석하고 있다. 감옥, 죄수복, 쇠사슬, 처형장 등의 물질적인 형태뿐 아니라 범죄, 형벌, 재판, 법률 등의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푸코는 단순하게 감옥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감옥과 감시의 체제를 통한 권력의 정체와 전략을 파헤쳤다. 즉, 권력이 인간과 신체를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또한 근대사회를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로 이해하고 있다.
벤담의 감시시설 판옵티콘, 주위는 원형의 건물이 에워싸여 있고, 그 중심에는 탑이 하나 있다. 탑에는 원형건물의 안쪽으로 향해 있는 여러 개의 큰 창문들이 뚫려 있다. 주위의 건물은 독방들로 나뉘어져 있고, 독방 하나하나는 건물의 앞면에서부터 뒷면까지 내부의 공간을 모두 차지한다. 독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하나는 안쪽을 향하여 탑의 창문에 대응하는 위치에 나 있고, 다른 하나는 바깥쪽에 면해 있어서 이를 통하여 빛이 독방을 구석구석 스며들어 갈 수 있다. 따라서 중앙의 탑 속에는 감시인을 한 명 배치하고, 각 독방 안에는 광인이나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누구든지 한 사람씩 감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역광선의 효과를 이용하여 주위 건물의 독방 안에 감금된 사람의 윤곽이 정확하게 빛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탑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완전히 개체화되고, 항상 밖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한 사람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무대들이자 수많은 감방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감시인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독방 안에 감금된 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양쪽의 벽은 그가 동료들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시킨다. 그는 보여 지긴 해도 볼 수는 없다. 그는 정보의 대상이 되긴 해도, 정보 소통의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중앙 탑과 마주하도록 방을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축을 형성하는 가시성이 강요되는 반면, 원형건물의 분할된 부분들과 완전히 분리된 독방들은 측면에서의 불가시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불가시성은 질서를 보장해준다. 판옵티콘은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 감시의 1차적 목적은 감시당하는 자의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데 있다. 그 결과 감시하는 자의 목적은 감시당하는 자의 행동으로 표현된다. CCTV는 노동자의 노동 행위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로 인해 노동자는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채 스스로 행위에 제약을 가하며 노동에 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는 발가벗겨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 느낌은 6개월 정도만 지속된다. 6개월이 지나면 노동자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감시의 최종 목적이 달성된다. 노동자는 감시를 인지하지 않고서도 자신을 스스로 훌륭하게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가 보고 있느냐 보고 있지 않느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는 자의 시선이 이미 노동자의 시공간적 행위 전반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이 지니는 특성인 불가시성이 질서를 보장해 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서는 곧 감시의 목적이 훌륭하게 수행되는 사태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감시당하는 자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일방적 시선에 노출시킴으로써 감시 집단의 규율 권력을 내면화한 채 '질서정연한 개인들'로 탄생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의 국가나 사회는 감옥의 감시 체계가 확장된 형태로 정의될 수 있다. 그 속에서 구성원들은 감시하는 권력을 내면화함으로써 주체적 자율성을 박탈당한 개인이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관계 내부로 침투하는 국가 권력을 경계하고 자율적 개인들의 연대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바로 인간의 존엄성 회복으로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감옥 안에서 정부는 인신의 자유와 수감자의 시간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교육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하루뿐만 아니라 연속적인 나날과 심지어는 여러 해에 걸쳐 사람에 대해 일어나고 잠자는 시간, 활동과 휴식의 시간, 식사의 횟수와 소요시간, 음식의 질과 배급량, 노동의 성격과 생산물, 기도의 시간, 이야기하는 방법, 그리고 말하자면 사유의 방식까지 규제할 수 있는 교육, 식당에서 작업장으로나, 작업장에서 감방으로의 단순하고 짧은 도정에서 육체의 움직임을 규제하고 휴식시간조차 시간의 사용방법을 결정하는 교육, 한 마디로 사람이 지닌 모든 육체적·정신적 능력과, 사람이 본래의 모습으로 놓여있는 시간을 지배하여 사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교육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감옥 안에서 교육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는 푸코의 언술은, 그 이질적 용어들이 가지는 낙차의 폭으로 인해 충분히 역설적이다. 그 역설 안에서 감옥은 이미 죄를 벌하는 단순 수용소라는 정의로부터 이탈하여 교정과 교도와 교육의 도장으로 변한다. 감옥 안에서 행사되는 정부(국가)의 규율 권력은 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전면적으로 내면화되고, 그 내면화의 결과는 지속적으로 사회화된 하나의 개인들을 생산해 내는 데에까지 이른다. 감옥이 아닌 교도소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통제와 규제가 습관화된 개인의 생산. 근현대 사회의 감시 체제로부터 주체성을 박탈당한 개인. 이제 개인은 국가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통제한다. 그 방식이 국가가 원하는 방식이라는 인식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석방될 것이다. 수많은 석방된 개인들이 형성하는 국가. 감옥을 학교나 공장이나 군대로 바꿔 푸코의 글을 다시 읽어 보라. 모든 개인들은 석방되었거나 혹은 석방되자마자 더 큰 교도소에 재수감되었다는 사실을 몸서리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을 밝힌다. 인간이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다.국가의 인구조사는 근대적 인간관리 기술이다. 인간을 계산 가능한 존재로 계량화하는 것, 저마다의 차이를 다양한 기준으로 수량화하고 서열화함으로써 개개인을 통계의 자료로 격하시키는 것 등이 그렇다. 국가와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 직업이나 수입이나 성향을 계산할 수 없는 보헤미안적 존재들이다. 학교와 군대, 감옥과 병원은 개개인의 계산 가능성을 보편화시킨다. 학교는 성적으로, 군대는 병력으로, 감옥은 처벌로, 병원은 질병에 대한 지식으로 인간을 통제한다. '당신은 누구다’라고 규정하는 모든 행위는 이런 계산 가능성의 오류를 예비한다. 누군가를 왕따라고 규정함으로써, 누군가를 우울증 환자로 판단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대충 이럴 것이다라고 예단한다. 공항 검색대에서 몸수색을 당하는 순간 누구나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오인 받는 것처럼, 누군가를 환자나 범죄자로 만드는 모든 권력은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달려 있다. 푸코는 이 시선의 권력을 판옵티콘으로 설명했다. 보는 자의 시선은 철저히 가려진 채 보이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이 판옵티콘의 감시 장치로 투시되는 것. 소통을 위한 시선은 주고받음을 전제로 하지만 감시와 처벌의 시선은 오직 일방적인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다. 판옵티콘으로 감시당하는 죄수는 간수가 딴청을 피울 때조차도 감시당하고 있을 지 모를 가능성 때문에 24시간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모든 권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끈질긴 습속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싸워야 할까.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나다. 나는 누구라고 설명하는 순간,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기에 그 설명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광인, 범인을 격리시키는 권력 또한 의문에 부쳐져야 한다.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우리를 감시하는 갖가지 판옵티콘의 사각지대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푸코는<지식의 고고학>에서 자아의 유일한 진리는 오직 자아가 변신한다는 사실뿐이라고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규정하고 구속하려는 권력이므로.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끊임없는 변신의 권리를 실천하는 것이 인간 해방의 비책이다. 계산 불가능한 존재는 결코 정의할 수 없다.
감옥과 군대와 학교의 공통점은 통일된 머리, 동일한 유니폼과 운동장이 있다는 것이다. 규율을 어기거나 저항하는 사람은 그 순간 결격자로 지적돼 처벌되고 교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다. 매일 반복되는 교정, 훈련, 감화 그리고 치료를 통해서 권력자나 사회가 원하는 인간형으로 길들인다. 그래서 한반도엔 아직도 서슬 퍼런 군홧발 시대를 그리워하는 노예형인간들, 짓밟혀서 사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식민지형 인간들, 일제의 36년의 노예생활을 근대화시혜라고 주장하는, 자존심, 자긍심 없는 일본의 시다바리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인은 표면적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온갖 통제와 규율에 조련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시선에 따른 권력의 작동방식을 탐구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사회에 살고 있다.
눈에비친햇빛
'푸코(M. Foucault, 1926-1984) > 감시와처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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