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티 Richard Rorty
목차 1. 생애2. 프래그머티즘 전통과 로티 2-1. 프래그머티즘이란? 2-2. 프래그머티즘과 네오프래그머티즘3.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 - 반표상주의 3-1. 인식론적 기초주의 비판 3-2. 인식론적 행동주의4. 전체론적 언어관5. 자문화중심주의와 연대성 5-1 자문화중심주의 5-2 대화, 연대성,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
1. 생애로티는 1931년 미국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티는 분석철학이 강한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다가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발표한 이후, 1982년부터 버지니아대학, 1998년 이후 스탠포드 대학으로 옮겨서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75세 되던 2007년 6월 8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인 초기에는 전형적인 분석철학자였던 그는, 분석철학과 결별하고 프래그머티즘의 부활을 외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로티는 자신의 성장 환경과 지적 여정을 <트로츠키와 야생란>이란 제목의 자서전으로 발간 하였는데, 이 책에는 그가 분석철학에서 네오프래그머티즘으로 전향을 한 이유에 대해 직접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15세에 플라톤을 읽고 20세까지 플라톤주의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모든 철학자들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적인 진리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역사성에 눈을 뜨게 되고, 그러한 헤겔의 교훈을 체득한 철학자로서 듀이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데리다를 통해 하이데거를 접하게 되고, 다시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듀이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데카르트주의 비판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책이 바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쓰고 있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로티는 인식론, 분석철학, 형이상학 등을 포함한 모든 체계적인 철학의 종언을 고했다. 로티의 철학적 입장은 네오프래그머티즘, 인식론적 행동주의, 탈 근대시민 자본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그의 관심은 세세한 철학적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메타 철학적인 물음이었다. 그는 기존의 철학이 갈수록 전문화, 세분화, 지역화 되어 세상과 담을 더욱 높게 쌓고 있으며, 특히 분석 철학자들이 형식 논리학과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세상과 소외시키고 있다고 보았다.로티는 이러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실천적인 대화를 지속해 나간다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프래그머티즘 전통과 로티 2-1. 프래그머티즘이란?프래그머티즘은 한국에서 주로 실용주의라고 번역된다. 1870년대에 C.S.퍼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19세기 말에 W.제임스에 의해 전 세계에 퍼졌으며 20세기 전반(前半)에 와서 G.H.미드와 J.듀이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프래그머티즘은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관점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형이상학적인 여러 장치들을 벗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일상적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 중시된다. 곧 인간 중심의 철학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2. 프래그머티즘과 네오프래그머티즘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계승, 부활시킨 로티는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규정은 그것이 ‘진리’ ‘지식’ ‘언어’ ‘도덕’ 등등의 개념과 같은 철학적 이론화의 대상에 적용된 반본질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것’ 이란 ‘믿기에 좋은 것’이라고 하는 제임스의 정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제임스의 요점은 진리란 본질을 갖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프래그머티즘에 대한 두 번째 규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위적인 것에 대한 진리와 존재에 관한 진리 사이에는 어떤 인식론적 차이도 없고, 사실과 가치 사이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차이도 없으며, 도덕과 과학 사이에는 어떤 방법론적 차이도 없다. (중략)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규정은 다음과 같다: 프래그머티즘은 대화적인 것 이외에는 탐구에 있어서 어떤 제약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대상, 마음, 언어 등의 본성에서 나오는 전반적인 제약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동료 탐구자의 언급에 의해 제기되는 소소한 제약만이 있을 뿐이다.” 반본질주의, 사실과 가치의 통합, 반형이상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러한 규정은 로티가 대부분 제임스와 듀이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내린 프래그머티즘의 성격 규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로티의 기본적인 철학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3.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 - 반표상주의 3-1. 인식론적 기초주의 비판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이 갖는 철학적 특징은 ‘반표상주의’ 이다. 그리고 이것은 넓은 의미의 반플라톤주의 이다. 여기서 말하는 플라톤주의란 그의 이데아론에서 전개된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한다. 진리의 세계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서양철학의 역사를 지배하는 관점인데 로티는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상 | 본질 |
억견 | 진지 |
우연 | 필연 |
상대적인 것 | 절대적인 것 |
생성, 소멸, 변화 | 영원, 불멸 |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 | 영속적인 것 |
오른쪽에 해당되는 것이 반표상주의가 부정하는 것이다. 반표상주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플라톤이 말하는 영원불멸 하며 궁극적인 진리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로티는 플라톤주의의 전통이 근대 인식론과 현대의 언어 분석철학 속에 계승되어 내려온다고 하는 관점에서 철학사를 바라보고 있다. 근대인식론자들의 ‘오성’ 개념과 현대 분석철학에서의 ‘언어’가 그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으며, 로티의 일차적인 작업은 그런 개념들 속에 숨어있는 표상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그것이 절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근대인식론의 표상주의 및 인식론적 기초주의의 입장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표상주의란 진리 인식의 주체인 주관과 인식 대상인 객관을 이원론적으로 전제한다. 이런 이원론적인 대립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이다.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물리적인 세계와 독립해서 존재하고 사유하는 정신의 실재이다. 데카르트가 마음이라는 비물리적인 실재를 ‘발명’해낸 것은 그가 우리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찾아서 그 위에 모든 지식의 체계를 다시 엄밀하게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식의 궁극적인 기초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인식론적 기초주의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경험론자인 로크나 독일 관념론의 주창자인 칸트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 인식론적 기초주의의 틀 안에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 번슈타인은 철학자들이 지식의 기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데카르트적 불안’ 이라고 표현했다. 데카르트의 ‘마음’의 발명이나 로크와 칸트의 정합적이지 못한 인식론적 설명들이 모두 ‘거울 메타포’를 이용해서 인간의 지식을 설명해 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로티의 관심은 전통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를 해체하고, 모든 인식론적인 이분법적 사고의 틀(기초주의와 반 기초주의, 실재론과 반실재론, 주관과 객관 등)을 허물어뜨리고,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적 불안에서 이제는 우리가 벗어나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찾는 일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3-2. 인식론적 행동주의표상주의의 기본적인 전제는 이원론적인 태도이다. 첫째로 주객이원론(혹은 심신이원론)은 객관적인 진리와 그것을 표상할 수 있는 주관적인 인식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본질과 형상의 이원론이다. 주객이원론에서 전제된 저 바깥에 있는 객관의 본질이 바로 진리의 원천이 된다. 로티의 반표상주의는 이러한 표상주의들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진리의 정당화 문제에 있어서 특권적인 지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문제는 사실상 오늘에도 심리철학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데카르트가 마음이라는 것이 비 물리적인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한 이래로 철학자들은 인간의 마음만이 갖는 속성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왔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신체가 느끼는 고통의 감각과는 별개로 마음이 느끼는 고통의 감각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것이 신체와 별개로 마음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로티는 ‘제거적 유물론’ 으로 이를 부정한다. 그런 심리적 사건으로서의 고통의 감각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로티는 악령이 병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원시부족의 예를 든다. 이 원시 부족에게는 배가 아픈 것이 곧 악령의 증거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배가 아프면 악령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의학의 발달로 여러 가지 병원균의 이름이 그 악령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시대적인 맥락에 따라서 변하거나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로티는 심리적인 사건으로서의 감각과 관련된 단어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 우리가 복통과 악령을 연결시키지 않고도 살 수 있듯이, 심리적인 사건을 나타내는 감각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더라도 우리가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복통을 일으킨 사람을 통해서 악령을 보았을 것이다. 악령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관찰명사’ 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악령을 보는 사람은 없다. 로티는 소위 우리가 관찰명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개 이런 식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단어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감각이라는 것은 관찰명제임으로 이런 식으로 우리 언어 습관에서 마음에 관한 언명들을 제거할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두뇌 작용과 관련한 생리학적 언명들일 것이다. 로티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예로 안티포디안의 예를 들고 있다. 안티포디안은 지구와 동일한 언어, 생활, 환경, 기술, 철학을 가진 또 하나의 지구이다. 하지만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딱 하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역사에는 데카르트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주관과 객관의 문제, 마음과 물질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이들은 고통의 느낌을 신경섬유의 자극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아기가 뜨거운 난로로 향할 때 엄마는 “아기의 C-섬유가 자극받겠어요” 라고 말한다. 안티포비안에게 있어서는 모든 감각이 마음에 의한 주관적인 표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번호가 매겨진 신경섬유에 자극이 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로티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원론자들의 현상/실재의 구분이 반드시 주관적 표상과 객관적 사태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신경섬유의 자극을 통해서도 현상적인 표현은 가능하다. 여기서 로티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비롯되는 자아와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그림이지, 마음에 관한 우리의 상식적인 어휘 전부를 부정하고, 이를 인위적으로 없애거나 그러한 언어를 대치할 인공언어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로티가 생각하는 자아는 데카르트식의 비물질적인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신체의 윤곽으로 제한된 개별적인 인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자아의 실재를 이루는 것은 인간 행위의 내적 원인으로서 호르몬, 양성자, 신경섬유, 신념, 욕망, 질병, 다중인격 등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항목들을 포함한다. 한편, 세계는 이러한 신체적인 윤곽의 경계 안에 제한된 개별적인 인간을 둘러싼 나머지 부분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제시되는 자아의 모습은 심리상태에 대한 정신적 기술과 신체 상태에 대한 물리적 기술을 통해 동등하게 서술되는 것이다. 자아를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심리 상태와 신체 상태를 두 개의 존재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의 두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자아를 심리 상태와 신체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언어 학습의 결과(습관) 이다.
그렇다면 참과 거짓을 구별해 줄 판단 근거로서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로티는 지식이 철저하게 명제와 명제간의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지식의 정당화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신념의 옳고 그름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과정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의 세계에서 본질을 발견함으로써 진리를 인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세계는 우리에게 신념과 욕망을 제공하는 원인일 뿐이고 그 신념과 욕망이 올바른가 아니면 추구하기에 합당한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것은 나의 대화 상대자들인 주변의 동료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올바른 실천의 기준이 사회적인 합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회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그것을 비판할 기준이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나치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 것이 아닐까 한다.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담론의 힘은 우리가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충분한 전거를 이미 가지고 있다. 즉, 공동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노력은 대화를 요구하며, 이런 대화를 통해서 궁극적인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 전체론적 언어관로티는 그의 저서인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철학은 자연의 거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식이나 언어, 이성 등이 세계의 참모습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는 발상은 양자 간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인식의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로티는 이를 부정한다. 특히 인식의 주관을 형성하는 언어는 인간이 창안해 낸 방법적인 언어의 기술과 또한 해석의 꾸러미로서 투명할 수가 없으며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피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듯이 우리는 언어의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이러한 로티의 관점에서는 해석되지 않은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언어적 해석을 거치지 않은 선험적 인식이라는 것도 성립될 수가 없다. 로티에 의하면, 언어적 해석을 뛰어넘어서 언어와 상응 관계에 놓여 있는 실재나 자연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언어적 해석을 행하는 맥락에서 문제의 대상으로 파악될 때에야 비로소 대상화될 뿐이다. 게다가 언어의 의미는 결국 사회적 정당화의 절차를 거쳐 통용되는 것이므로, 언어란 ‘사회적 실행’이다. 언어세계는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체계 없이 변화하는 우연성을 가지며 언어의 우연성은 언어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려 있다는 언어의 개방성과 관련이 있다. 로티의 전체론적 언어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로 표현되는 언어와 생활세계 사이의 관계론으로부터 비롯된다. 네오 프래그머티즘의 특징은 모든 개별적인 언어놀이를 생활세계의 맥락으로 고집한다는데 있다. 결국 로티는 우리가 어떤 언어놀이를 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언어문화 속에 태어나지고, 그 언어를 말하는 가운데 그 문화를 활성화한다. 우리는 그 문화에 불가분하게 구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것의 보존에 기여한다. 심지어 우리는 외국어로 말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말과 관용구를 선택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장기에서 말(馬)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반적인 게임을 이해해야만 하듯이, 언어란 어떠한 규칙들, 즉 언어에 있어서 단어들의 다양한 용법을 모두 규제하는 규칙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일련의 활동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규칙’이란 어떤 특정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를 전제로 하는 관습, 습관 그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삶의 형태가 다른 존재와는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삶의 형태의 일치가 실천을 통해 확인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의 실제 행동을 위한 기준을 구성하는 것은 규칙 사용의 인간 관행이고, 규칙을 사용하는 이런 방식을 옹호하기 위한 정당화나 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티의 요점은 우리는 자유롭게 다른 언어를 택하여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언어의 우연성과 언어의 문화 상대성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문화로 이동할 수도 없다. 로티에 의하면, 유럽은 서구 문화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또한 서구 문화의 현재 상태는 어휘의 점진적인 변천으로 소급될 수 있다. 세계를 묘사하는 낡은 은유들은 사멸될 것이며, 새로운 것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어떤 은유와 어휘들이 이 세계를 가장 적절하게 기술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어휘를 판단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판단을 위한 객관적인 근거란 언어의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티에 의하면, 우리의 언어는 사실상 역사적 우연성의 산물이다. 로티에게 합리성이란 현재 손안에 있는 언어에서 논증들을 함께 엮어 배열하는 일이다. 반면에 상상력은 그러한 언어를 넘어서는 능력, 바꿔 말해서 새롭고, 낯설며, 비합리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낱말들과 이미지들을 꿈꾸는 것이다.
5. 자문화중심주의와 연대성5-1 자문화중심주의 로티는 역사적이지 못한 기준에 의해 인간의 삶과 문화의 기반을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불신하면서, 실용주의를 역사주의와 연결 짓는다. 로티는 역사적 상황이나 맥락을 뛰어넘는 초월성이나 보편성의 추구는 무의미한 강박관념의 소산이라고 비판한다. 로티의 실용주의는 모든 것을 우연과 기회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객관성이나 절대성의 추구를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로티는 합리성의 규제적 성격을 강조해 이상화된 합리적 수용가능성을 주장하는 퍼트남의 견해나, 의사소통의 장에서 담론의 선험적 조건에 대한 논의를 통해 합리성을 옹호하려는 하버마스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로티에 의하면 ‘흥미 있는 질문은 어떤 주장이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장이 우리의 신념과 욕구에 충분히 정합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로티가 합리성 대신에 정합성을, 그리고 진리의 발견 대신에 합의의 모색을 옹호한다면, 그의 철학관은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의 관점에서는 그것 자체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란 허용될 수 없다. ‘자명하게 밝혀진 가치’와 같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로티의 반정초주의가 가치, 도덕, 사회문제 등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당연히 가치의 우연성과 역사성을 인정하는 문화적 주관주의로 귀결될 것이며 이것은 남의 문화적 가치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상대주의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로티는 상대주의의 개념이 어떠한 신념도 다른 신념 못지않게 좋다는 견해를 의미하거나 진리란 용어로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만큼이나 여러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라고 한다면, 자신의 입장은 결코 이에 편입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이런 식의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응수한다. 그가 그런 식의 상대주의를 지양하는 것은 이러한 상대주의가 현실적, 실천적으로 불가능한 무제약적인 관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아와 언어의 우연성을 수용하는 역사주의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아무것이나 좋다는 식의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지양하려는 로티의 요청은 그의 자문화중심주의로 이어진다. 로티가 채택한 자문화중심주의란 우리들의 사회와 같은 특정 사회에서 탐구 분야에 따라 달리 쓰이는 친숙한 정당화의 절차에 의거한 서술과 동떨어진 진리나 합리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으며, 갖자 자기들 자신의 공동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입장이다.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는 모든 것의 우연성을 수용한다. 우리가 더 이상 어떤 것도 섬기지 않고, 아무 것도 신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어느 것이든 시간과 기회의 산물로 취급하는 그런 관점을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화 역시 역사적 우연성의 산물이며 그것이 좋지 못한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문화를 기준점 또는 출발점으로 삼아 반성적 균형유지의 실용주의적인 테크닉을 적용해 나가자는 것이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로티에게서 철학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자기문화에 대한 방어의 논리, 자기문화에 대한 비판이 된다. 로티의 관점에서는 철학이란 문화나 문명을 놓고 그 향방에 대하여 논란을 벌이는 넓은 의미의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5-2 대화, 연대성,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로티에게는 역사성을 초월한 것은 진리개념이든 합리성이든 의미 없는 것이다. 오류가능주의와 개방성을 전제로 하는 자문화중심의 개념체계들을 초월하는 규범성이란 의미가 없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적 실행을 점진적으로 개선해가자는 개량주의며, 그러한 범주를 벗어난 정초주의적 발상의 논거들은 전혀 수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내재주의이다. 로티는 이 경우 자문화중심주의가 타 사회에 대하여 배타성을 띤다는 우려는 기우이며, 충분히 개방적인 자문화중심주의는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면서, 오히려 내재주의의 철저화를 통한 역사주의를 강조한다. 로티는 초문화적, 초역사적인 준거점이 없이도 기존의 제도와 사회적 실행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로 연대성을 든다. 로티는 우리는 연대성을 위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로티에 의하면, 반정초주의에 입각한 실용주의자는 이성, 본질, 합리성 등의 개념에 매달림이 없이 우리가 끊임없이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보며, 성공을 담보해 주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보증도 인식론적 보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실용주의자는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로티에게서는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대화만이 인간의 존재를 깨닫는 궁극적 지표이다. 의식의 확실성, 인식의 정당화는 인간과 대상, 관념과 대상간의 대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는 비통상적 담론이다. 통상적 담론은 이미 기존의 사회적 실행에 의하여 그 쓰임새가 인정된 것, 즉 언어 공동체의 합의된 규약에 따라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된 것 이라면, 비통상적 담론은 통상적 담론과 달리 반드시 합의에 이르도록 하는 강요가 없으며, 다양한 진술이 가능한 담론이다. 그러나 로티의 대화는 반드시 합의를 도출해야한다는 강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티가 강조하는 사회적 합의는 퍼트남 식의 규제적 합리성의 이념을 배경으로 한 합의가 아닌 상상력을 동원한 참신한 메타포의 설득을 전제로 한 합의이다. 로티가 말하는 메타포란 기존의 언어 규칙을 위배하거나 전혀 생소한 규칙을 제안하는 것 등을 가리키며, 이른바 비통상적 담론에 속하는 언어행위이다. 모든 것이 우연과 기회의 산물임을 직시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 역사주의자는 어떤 주장이 실재와 대응됨을 보이려는 노력을 헛수고라고 여기기 때문에, 논증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논증이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중립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오히려 노력할 것은 참신한 메타포를 창안하여 설득을 행하는 일이다. 관건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켜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갈 메타포의 창출이라는 것이다. 참신한 메타포는 애초에 낯선 소리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안목을 얻게 해주고 설득을 행하게 되면 통상적 담론의 일부로 편입된다.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의 제안도, 기발한 예술작품도, 천재적인 발명품도 참신한 메타포의 일종이다. 메타포는 기존의 것을 개선해 가는 도구이자 자유 확대의 구체적 수단인 셈이다. 로티는 이런 관점을 미리 정해진 어떠한 틀이나 속박도 거부하는 견지라는 의미에서 낭만주의라 부른다. 이와 같이 매우 극단적인 유명론의 입장에서 삶의 우연성과 역사를 받아들이는 자를 로티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궁극적인 어휘조차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로티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란 무엇보다 잔인성을 가장 혐오하는 인물이며, 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따라서 그것이 시간과 기회를 넘어 선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역사주의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은 비교적 낙과주의적인 면모를 나타내게 마련이어서 고통이 장차 감소될 뿐만 아니라 결국 다른 인간에게 굴욕 당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티가 주창하는 자유자의자는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휴머니스트로서 진리나 객관성 혹은 합리성 따위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축성 있게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인물이다. 로티는 칸트의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 자아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로 대치해야만, 우리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이념이 구체화된다고 본다. 진리는 현실에 일치하고, 공동체 생활의 실천을 통해 발견된다는 실용주의의 탐구에서는 오직 대화의 제재만이 가능하며, 대화의 끊임없는 지속을 통해 상호 이해를 통한 문화적 지평을 열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강대웅
'로티(R. Rorty, 1931-2007) > 리처드 로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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