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깽이 스캔들
2001년 겨울 비트겐쉬타인에 관한 흥미로운 책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 공저의 '비트겐슈타인의 포커Wittrenstein's Poker'인데, 저자들은 1945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어느회의실에서 일어난 '부지깽이 스캔들'의 내막을 밝히기 위해 여러가지 해석을 만화경처럼 펼쳐놓는다. '부지깽이 스캔들'은 철학사의 유명한 스캔들로, 초청 강사로 케임브리지에 온 칼 포퍼와 논쟁을 벌이던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실에 있던 난로에서 부지깽이를 꺼내들고 포퍼를 위협하다가 이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사건을 일컫는다. 전체주의와 맑스주의를 비판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일약 유럽의 지식인 스타로 떠오른 포퍼가 같은 고향 출신(오스트리아 빈)에다 같은 유대계 지식인인 비트겐슈타인을 견제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의 아성인 케임브리지의 모럴 사이언스 클럽 회의장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흐를 터인데, 그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버트란트 러셀이 논쟁의 심판관을 자처하며 앉아 있었다.
집요하리만치 비트겐슈타인에게 맹공을 퍼붓던 포퍼의 칼날을 버티지 못한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부지깽이를 집어들어 포퍼를 위협했다. 그러자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던 버트란트 러셀은 근엄하게 비트겐쉬타인에게 부지깽이를 내려놓으라고 말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항상 당신은 날 오해하죠"라는 말을 남기며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말 많은 호사가들에 의해 부풀려졌다. 1961년 위르겐 하버마스와 논쟁을 벌였고 1970년에는 허버트 마르쿠제와 혈전을 벌였던 집요한 논쟁가이자 합리주의자인 칼 포퍼는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사건을 자신의 승리로 귀결짓지만,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전립선 암으로 세상을 등지면서 20세기 최고의 철학서로 꼽히는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만을 남긴 채 조용히 죽어갔다. 오직 그의 제자들만이 '부지깽이 스캔들'에 관한 포퍼의 진술이 거짓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비트겐슈타인의 포커'의 저자들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 철학적 배경 등을 상세히 검토하며 비판적 합리주의자인 칼 포퍼와 '언어 게임'이론을 주장한 비트겐슈타인의 충돌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개연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한 가지 더 제시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섹슈얼리티와 관련이 있는 사항이었다.
칼 포퍼가 20세기 초엽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논리실증주의에 젖줄을 대준 비트겐슈타인을 '반증'하기 위해 철저히 비판의 칼날을 준비해온 반면, 칼 포퍼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던 이 신비한 몽상가 비트겐슈타인은 그 즈음 자신을 괴롭히는 애정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저울질을 하며 회의장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포커'의 저자들은 부지깽이를 들었던 날의 비트겐슈타인의 당시 심리적 풍경은 논쟁을 촉발한 한 가지 이유일 뿐이라고 못박으며 그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관심은 그 날 오후 비트겐슈타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애정 문제를 추적하는 데 있다. 사실 역사적 인물들의 과거와 비문을 끈질기게 뒤쫓아다니며 '누가 게이인가?'를 묻는 도착적인 질문의 한계와 위험성이 항시 도사리고 있지만, 자기 내면 속에 호모포비아와 동성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가진 채 6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번민에 사로잡혔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삶과 섹슈얼리티의 미묘한 봉제선을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음에 분명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호모포비아
그를 니체와 프로이트 등의 20세기 위대한 철학자들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주저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을 넘어 시대적 유행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는 자신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사용하는 용법에 따라 무수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 유명한 '놀이이론'을 제안했는데, 정작 자신의 이름이 수많은 의미와 맥락들 사이를 방황하며 회자되리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시, 소설, 연극,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지금껏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은 지금도 도처에서 재맥락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영미 비평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옥스퍼드의 테리 이글턴이 시나리오를 쓰고 영원한 퀴어영화의 선각자인 데릭 저먼이 연출을 맡은 실험 영화 '비트겐슈타인(1993년)'을 제외하고는 인간 비트겐쉬타인의 성애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드러낸 대중 매체는 그다지 많지 않다(한국에서도 정초신 감독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제목으로 연쇄 살인마에 관한 형사 스릴러 물을 현재 제작하고 있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수많은 전기물 중에서 그의 동성애를 언급했던 전기는 1985년 월리엄 바틀리의 저서가 처음이었다. 이 전기가 출간되자마자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들의 비난과 질타가 잇따른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였다. 그의 충실한 제자이자 친구였던 노만 말콤조차 비트겐슈타인을 다룬 책에서 단 한 마디도 그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아서 에반스를 비롯한 퀴어 이론가들에 의해 90년대 중반부터 부분적으로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이 논의 과정에서 비로소 그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껏 밝혀진 것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 시절 한적한 공원 등지에서 했던 쿠르징(동성애자들이 파트너를 찾아 돌아다니는 행위)을 기점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4월 29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최상류층 부르조아 가정에서 태어난 루디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양모 공장으로 떼돈을 번 자신의 아버지 뒤를 따르기라도 할 것처럼 기술학교에 다녔는데(그 집안의 어마어마한 재산은 나중에 유대계인 비트겐슈타인 가족 목숨 값으로 나찌에게 지불한 돈이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나찌가 강탈한 총자본의 3%에 해당되는 기염을 토해낸다), 당시 그는 프로이센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던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Sex and Character'를 읽고 그에게 깊은 공명을 느끼게 된다. 한때 칼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부르주아 철학의 부엉이인 양 통렬하게 단죄당했던 오토 바이닝거는 천재의 삶이 아니면 죽음을 택해야 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베토벤이 생을 마감했던 집에 들어가 젊은 나이에 자살한 시대의 기인이었다(최근 개인적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새롭게 오토 바이닝거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오토 바이닝거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논리-철학 논고'가 출간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때때로 오토 바이닝거의 책을 인용하곤 했다. 저명한 미국의 퀴어 이론가인 아서 에반스는 어쩌면 젊은 날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던 호모포비아, 유대인혐오증, 여성차별적 생각들, 더 나아가 '논리-철학 논고'가 내장하고 있는 신비주의도 오토 바이닝거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가정한다('Critique of Patriarchal Reason', Arthur Evans, 1997년).
오토 바이닝거와 비트겐슈타인 모두 유대계이면서 게이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들 모두는 자신의 몸 속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극구 부정했다. 비엔나의 한적한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동성애자 파트너를 찾고 다녔던 비트겐슈타인은 과연 대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러한 자기혐오증은 비트겐슈타인이 버트란트 러셀과 인생의 연을 맺었을 때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1908년 19살 나이에 영국으로 혼자 유학을 간 비트겐슈타인은 공학에 관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수학에 흥미를 느껴, 친구들의 권유로 버트란트 러셀의 '수학의 원리들'을 읽고 다짜고짜 그를 찾아가게 된다. 당시에도 이미 20세기 최고 지성인 중 하나로 꼽히던 버트란트 러셀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적 자질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좀 귀찮은 생각이 들은 버트란트 러셀은 자신을 좇아다니는 이 빈 출신의 학생에게 '뭔가'를 써오라고 주문하기에 이르렀는데, 몇 달 후 비트겐슈타인이 가져온 노트의 첫 문장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영국의 어떤 학생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한 러셀은 그에게 철학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후에 이 고약한 천재 제자가 러셀에게 '자신의 이론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혹평을 가하기 이전까지 사제로서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의 소수 정예 엘리트 서클인 '사도 클럽'의 꼭대기를 장악하고 있는 동성애자 지식인들, 특히 나중에 1930년대 전세계 공항에 직면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수정하는 기획안을 제출한 JM.케인즈는 버트란트 러셀이 이 잘 생긴 오스트리아 출신의 천재를 독점하려 든다며 비난하기에 이르른다. 동성애자인 케인즈의 눈에도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한 자자한 젊은 비트겐슈타인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수고'를 발간하고 '상식을 옹호함'의 무어와 러셀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 강단에 둥지를 튼 이후에는 러셀을 점점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는 프리섹스를 주창하고, 핵무기 금지, 동성애차별법에 대한 철폐을 외치는 이 과격한 무신론자 영국 신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에 걸쳐 이혼을 하고 결혼을 하는 당시 러셀의 모습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걸핏하면 '철학을 하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독일 철학자들의 오래된 강령을 들먹이며 쇼펜하우어, 니체, 오토 바이닝거로 이어지는 여성차별적 철학자들의 계보를 따를 것을 종용하던 비트겐슈타인의 눈에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 해방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수용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유명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적 영성은 버트란트 러셀의 철저한 무신론과 대척될 수밖에 없었다(그는 러셀에게 때때로 종교를 가지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대변하는 '철학적 탐구'가 발간되었을 때는 그 내용이 러셀의 논리학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어서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상상력 풍부한 사가들은 어쩌면 1945년 겨울에 일어났던 '부지깽이 스캔들'은 비트겐슈타인을 혼내주려는 러셀이 적수일 법한 칼 포퍼를 끌어들여 만든 음모극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온화한 영국 신사 러셀은 끝까지 자신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자서전에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열정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며 우월한, 그가 아는 가장 완벽한 천재의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두 권을 제외하고는 생전에 책을 써내지 않고(이후에 발간된 저서는 그의 미간행 유고이거나 제자들이 받아적은 강의노트다), 강의 시간에는 제자들은 개의치 않은 채 혼잣몽상에 빠져들다가 '난 형편없는 훈장이구먼!'소리를 연발하던 이 신비한 철학자의 모습에서 그의 섹슈얼리티를 탐색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톨스토이의 '복음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반복해서 읽으며 종교적 명상에 깊이 침참하길 좋아하는 이 괴팍한 철학자는 나찌와 재산 협상을 벌일 만큼 많은 재산을 모두 형제들에게 양도하고 그 자신은 나무 책상과 걸상, 치장하지 않은 평범한 집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즐겼다.
철학의 소임을 '수수께끼'를 푸는 일로 정의하고 철학적 문제를 '언어적 경련'으로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침묵'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어놀이의 깊은 수렁에 잠수해 있다가 진절머리가 나면 하드 보일드 탐정 소설을 읽거나 먹을 것을 사들고 영화관을 찾았다. 전쟁을 방불케하는 강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아무 제자나 붙잡고 측은한 눈초리로 '영화 보러 갈 생각 없나?'를 물어보는 그였다.
다시 부지깽이 스탠들로
아서 에반스는 '논리-철학 수고'를 '초기 비트겐슈타인'으로 '철학적 탐구'를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 정의내리는 철학사가들의 다소 거친 구분을 그의 섹슈얼리티에도 적용한다.
그에 따르자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표현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채 외려 반대 급부로 자신의 내면 속 여성성을 '여성혐오'로 위장한 초기 호모포비아가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면, 프란시스 스키너Francis Skinner, 벤 리처드Ben Richards와의 동성애 관계는 그가 자신의 섹슈얼리티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낸 후기 비트겐슈타인 시대에 속하는 솔직함의 지표들이다.
이런 구분은 억지스러운 데가 있다. 외려 에반스 자신이 분석한 대로 오토 바이닝거와 비트겐슈타인의 호모포비아는 자기 실존의 극단적 주장을 가능케 했던 유럽 모더니티의 불안을 자기 내면 속의 소수자들, 즉 여성성, 유대인, 동성애를 박해하고 억압함으로써 해소하려는 일그러진 자아의 모습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애정 문제에 있어선 극도로 절제를 할 만큼 조심스러웠던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은 '논리-철학 수고' 전후에도 볼 수 있었다. 딱 한 번 심각하게 결혼을 고려한 비트겐슈타인은 조카의 소개로 알게 된 비엔나의 멋쟁이 여성인 마구어리테와 노르웨이 통나무집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팔꿈치가 다 헤어진 프록코트밖에 모르는 이 무심한 남자는 단 둘만의 여행인데도 결혼하자마자 이내 줄행랑을 놓은 차이코프스키보다 더한 무관심으로 하루 종일 그녀를 방치한 채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할 뿐이었다. 당연히 결혼이 성사될 리 없었다.
반면 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에 케임브리지에서 알게 된 동년배 친구인 데이비드 핀센트와 노르웨이로 여행했을 때는 고급 호텔의 숙박비를 포함한 여비 일체를 지불하며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당분간 데이비드 핀센트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죽은 다음, 함께 지냈던 시기에 관해 회상에 잠긴 어조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데이비드 핀센트와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얻지 못한다. 그들 관계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종국을 맞았는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자신의 사적인 메모와 일기를 당시 유행했던 암호문으로 적을 만큼 자기 신상에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던 비트겐슈타인이니만큼 그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순간순간 격정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의 행동거지 속에서 어리숙하고 서툰 감정 처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놀이' 개념의 아이디어가 축구시합이 벌어지고 있던 운동장에서 문뜩 착상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다이슨은 비록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옆 방에 기거하고 있던 케임브리지의 학생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초대로 그의 방에 들어와 차를 함께 마신 게 계기가 되어 둘은 상당히 친하게 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몇 개의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이후 졸업반이 된 다이슨이 자신의 방에서 트렁크를 꾸리고 있는데, 며칠간 보이지 않던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방에 성큼 들어와 한 마디 말을 휑하니 남겨놓고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 마음은 점점 더 어리석어지고 있다네!"
과연 뭐가 어리석어지고 있다는 말일까? 곧 떠나게 될 다이슨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확인해서일까?
이처럼 충동적인 행동은 그의 생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벤 리처드와 함께 그와 연인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유력시되는 프란시스 스키너의 경우는 종교적 영성으로 위장된 비트겐슈타인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강의 시간에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벽을 바라본 채 타고르의 시를 읊기도 했던 이 괴팍한 천재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자연한 분위기가 점점 싫증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자신의 제자인 스키너와 함께 1935년 소련으로 훌쩍 떠났다. 그는 아예 소련에 이주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그 이전부터 그의 애제자인 스키너와 함께 러시아어를 배운 터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모스코바의 경직된 분위기를 몸소 체험한 비트겐슈타인은 소련이 케임브리지 이상으로 경직된 걸 깨닫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소련 여행에 얽힌 이 짧은 에피소드는 비트겐슈타인 전기에 있어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왜 갑자기 소련행을 결심하고 러시아어를 스키너와 함께 배웠는지, 그리고 그 여행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소련행 여행에서 스키너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항상 혼자 있기를 원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러시아어를 함께 배우면서까지 스키너와 함께 이주 계획을 짰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한 발 도약을 감행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 그를 연애의 감정 때문에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벤 리처드였다. 벤 리처드는 의대생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아예 케임브리지 대학을 그만두고 아일랜드로 이사갔을 때 벤은 그를 방문했고 그들은 탐정 소설을 함께 읽곤 했다.
벤 리처드는 이제 오십 후반에 접어든 비트겐슈타인의 감정을 온통 뒤흔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겨울 칼 포퍼에게 위협을 가하다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 '부지깽이 사건'이 있던 날, 어렸을 때부터 곧잘 사용하던 암호로 비트겐슈타인은 메모지를 채워넣고 있었다.
"B는 내게 사랑을 품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뭐가 남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이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악마들이 이 끈을 자아내어 손에 쥐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끊어버릴 수도 있고 살려둘 수도 있다."
그리고 '부지깽이 사건' 때문에 뒤에 남겨진 칼 포퍼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버트란트 러셀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고 제자들이 호사스럽게 수근덕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부지깽이가 이후 철학의 역사에 빛나는 스캔들로 남을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여전히 사랑의 담론에 빠져 있었다.
"사랑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진주이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 속에 품고, 다른 무엇과도 비꾸려 하지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사랑은 우리가 일단 그것을 소유하면 그 엄청난 가치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의 가치를 깨닫는다." ('비트겐슈타인의 포커' 中에서)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사랑의 논리학을 구성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칼 포퍼를 부지깽이로 위협했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다분하다. 논리 실증주의의 본산인 '빈 학파'에서 신격화되다시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수고'가 암송된 반면 내내 빈 학파로부터 푸대접을 받다가 '명제의 과학성은 반증 가능성에 있다'는 이론으로 복수의 칼날을 빈 학파에 가차없이 디밀었던 칼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러셀이 참관하고 있는 모럴 사이언스 클럽 세미나 회의실에서 철학적인 문제를 '언어의 수수께끼'로 소급하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철저히 까부셔 자신의 입지를 돈독히 하려는 야심을 내심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강의 시간에 독단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던 비트겐슈타인은 이름도 생소한 칼 포퍼라는 작자가 자기 주관의 세미나에서 독설을 퍼부으며 잘난 체를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느라 부지깽이를 집어들었다 뿐이지 그의 고민의 작은 신경줄도 건느리지 못하는 미미한 사건으로 치부했는지도 모른다. 세미나 중간에 자기 말만 마치고 회의실을 나가는 것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버릇이었다.
어쨌든 '부지깽이 스캔들'을 전후한 시점에 이 독단적인 노 철학자의 마음에는 사랑에 대한 고뇌가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포커'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회의실을 빠져나온 비트겐슈타인은 겨울 밤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벤 리처드와 새로 나온 탐정 시리즈를 읽기를 열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51년 62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하면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친구들에게 전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20세기 철학사의 거성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본문에 부지깽이를 집어들었던 그 날의 풍경, 벤 리처드에 온통 빠져버린 그 애정의 순간들도 기록되어 있었을까?
시민들의 '생활양식' 안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 생동하는 '언어'의 사용방식에 주목한 노 철학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채 '멋진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아서 에반스가 말하듯 그가 커밍아웃하거나 게이로서의 온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호모포비아'라는 딱지 붙인다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본인 스스로 '멋진 삶'이라고 표현한 그만의 삶의 그림을 모독하는 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 혹시 당신은 오히려 당신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좁은 강의실에서 제자들을 보며 당신이 느끼는 다른 열망과 다른 사랑에의 염원 때문에, '하나의 언어를 (다르게)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활양식을 상상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당신의 언어철학을 우리에게 슬며시 내민 것은 아닐까? 그 미묘한 '언어의 경련'의 결기 속을 유영하고 다니며 당신의 삶이 '경련'이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당신 말대로, '철학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나는 나의 출구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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