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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R. Barthes, 1915-1980)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 -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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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G Barthes)는 언어의 보이지 않는 규칙으로 랑그 이외에 스틸(style)을 제시했다. 랑그가 모국어의 문법 체계와 같은 것이라면, 스틸은 문체 스타일을 의미한다.이는 개인이 무의식중에 쓰고 있는 언어적 감각을 의미한다. 고유의 속도와 리듬감, 음감, 운율, 호흡 등을 말하며 글에서는 문자의 형태로써의 인상이나 비유, 문장의 호흡 등이 이에 속하고 흔히 문체로 번역한다. 개인의 무의식적 선호에 근거하는 것이다. 랑그가 언어 사용을 외부로부터 규제하는 것이라면 스틸은 개인의 내부에서  규제한다. 우리를 규제하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글을 쓰는 행위, 글 쓰는 방법 등을 의미하는 에그리튀르(e'criture)로, 우리말에서는 보통 글쓰기나 복합적인 글쓰기로 번역한다. 에그리튀르랑그스틸과 다른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틸이 개인적 선호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다. 

 

어느날 한 A가 글쓰기에서 1인칭 표현을 '나는'에서 '제가'로 바꾸었다. 그 이후 A의 글쓰기는 좀 더 점잖아지며, 어딘가 격식을 갖춘 사람들의 말투와 태도들이 스민다. 그 학생은 자신도 모르게 '제가'를 사용하는 점잖은 사람들의 습관과 사고를 강요 받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약 깡패의 에크리튀르를 선택한다면 그의 글쓰기는 은어와 삐딱한 태도 등이 따라 붙을 것이고, 판사의 에크리튀르를 선택한다면 권위적이고 냉철한 언어와 태도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에크리튀르는 선택할 수 있지만, 일단 에크리튀르를 선택하고 나면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에크리튀르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사용될 경우 '패권을 쥔 어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적 차원의 어법으로 확대되었을 때는 아주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집단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나 편견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비평에서 '사회 속의 언어에는 가부장적이거나 남성우월적인 언어들로 스며들어 있으며, 나아가 이런 성이데올로기가 찬양되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롤랑은 <에크리튀르의 영도>에서 편견과 태도들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에크리튀르에 대한 염원을 카뮈의 <이방인>에서 그 예를 찾고 있다.  

 

롤랑소쉬르의 발상을 사회현상 속에 충실히 확대해 나갔다. 이런 그의 기호학은 랑그에 구성되고 제도화된 문화의 해명을 목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이다. 그러나 롤랑은 기호학의 한계를 느낀다. 기호학으로는 문화를 해명할 수 있을뿐, 아무 것도 실천할 수 없었다. 이에 의미 형성의 기호학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하나의 텍스트에서 의미가 무한히 생성되는 것이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한다는 소쉬르의 전제를 전복시키며 후기구조주의로 나아간다. 

 

롤랑은 작품과 텍스트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작품이란 주로 책이라는 형태를 띠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개념과 일치한다. 저자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조자이고, 우리는 그 동안 이 작품들 속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며 글을 읽고 비평한다. 또한 그 속에 기술되고 있는 것은 문화적인 약호에 따라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롤랑은 이런 작품이란 개념을 버리고 텍스트라는 개념을 말한다. 직조물을 의미하는 텍스트는 단순한 글의 직조만을 의미하지 않고 주제나 문체, 원고, 매수, 동시대적인 사건, 다른 텍스트에 대한 생각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고 독자 역시 독서를 시작하면서 활동을 개시하는 주체, 문체 등 앞서 언급한 것들이 활동하는 장이다.

 

이런 텍스트의 기원은 이전의 많은 텍스트들 또는 다양한 저자들의 의견 등이 뒤섞인 곳이며,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 또는 자본주의의 산물들이 들어앉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창조자인 작품의 저자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인용자만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작자는 존재감을 상실한다. 여기서 저자의 죽음이 나온다.

 

텍스트란 조용한 산책과 같다. 단순히 길을 걷는 행위가 아니라, 길가의 돌멩이와 산새의 지저귐, 시냇물의 졸졸 흐르는 소리 등이 어우러져 마음속에 울려 펄지는 그런 산책 같은 것이다. 이제 단순히 길을 걷는 작품과 달리, 독자는 이 텍스트 안에서 글 속을 유유히 산책하며 단어와 여백이 걸어오는 숱한 말들을 음미하고 되받아친다. 그런 이유로 글의 진원지는 이제 독자가 된다. 여기서 독자의 탄생이 나온다. 

 

글의 진원지는 저자가 아닌 독자다. 독자에게서 텍스트의 의미가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든 상관없이, 독자는 텍스트 안에서 독자 내부에 자리 잡은 다양한 견해들과 어우러지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텍스트의 의미의 진원이 된다. 이렇게 해서 롤랑은 하나의 기표는 하나의 기의에 일대일 대응한다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에서 탈피한다. 작품의 독해가 하나의 의미를 캐는 것이라면 텍스트의 독해는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독자 나름대로 해석, 발굴 창조하는 것이고 독자의 수만큼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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