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함께 등장한다. 사르트르가 내세운 인간 이성이 환상이라는 것을 밝히고 냉전처럼 하나의 이념을 세우는 것을 거부, 기반이 다른 각각의 현대 철학이 본격적으로 관심 갖기 시작한 언어에 기반하고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관찰 가능한 것만을 과학으로 간주한 실증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든다. 보이지 않는 심층 구조가 더 큰 개념이라 보고 현상학과 실존주의에 대해선 법칙성을 부각시켜 과학주의로 응대한다.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 마르크스, 프로이트 더 나아가 칸트에게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소쉬르에 의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건 인정하는 분위기다. 오래전, 사람들은 언어가 사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혁명적이게도 소쉬르는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강의를 시작했다.
만약 언어가 사물의 이름이라면 언어가 사물의 어떤 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 양, 영어 Sheep, 프랑스어 mouton이라는 단어에는 양과 관련된 어떤 연관성도 어떤 공통점도 없다. 언어기호는 글과 음성 등 기호를 표현하는 기표(시니피앙signifiant)와 그 기호가 나타내는 뜻을 의미하는 기의(시니피에signifie)로 나뉜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 어떤 필연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 둘은 자의적으로 결합시킨 것이지 인간이 실제로 나타내려는 사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이라는 점이 언어기호의 본질이다.
또한 사물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고 그것을 나타낸 것이 언어라는 믿음이 있었다. 소쉬르의 말을 빌면, 만약 언어가 미리 분류된 사물의 이름이라면 사물 하나에 이름 하나가 정확히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말 양은 영어의 sheep과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영어에서 살아 움직이는 양은 sheep이지만, 죽어 식탁에 오른 건 motton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가오리와 문어를 따로 지칭하지만 영어에는 이 둘을 한꺼번에 지칭하며 혐오스런 생물을 표현할 때 devifish라 한다. 이렇듯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이름이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이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어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언어체계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소쉬르는 문법체계를 의미하는 랑그와 그 체계 속에서 개개인이 발화하는 언어적 행위를 의미하는 파롤로 구분한다. 말을 배우고 특정한 장소에서 실제로 언어를 발화하거나 글을 씀으로써 언어를 사용한다. 이를 파롤이라 한다. 이를 통해 언어는 활용되며 변화한다. 하지만 그 언어를 사용할 때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체에 의해 수용된 언어적 관습에 기인해 그것을 사용한다. 우리가 문법을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기본적인 문법 체계에 어울리게 사용함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문법 체계가 랑그이며, 동시에 기표의 체계이기도 하다. 랑그는 파롤을 통해서만 구체화될 수 있지만 파롤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파롤을 지배하는 규칙이다.
기호학의 연구대상은 랑그다. 그동안의 언어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통시적으로, 역사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언어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연구가 소홀히 한 공식적인 차원, 즉 동시대 안에서 언어 자체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연구하는 것 또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한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의미가 그 자체로 의미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언어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체계와 관계망 속에서 의미를 지우려는 구조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소쉬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언어의 논의들을 통해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지운다. 그 이전의 서구 세계는 자아나 코기토, 의식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를 경험하는 중심에 인간을 두었다. 모든 것이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내가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며, 나의 표현은 이런저런 매개체를 경유해 표출되는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생각한다. 마음 속의 어떤 생각은 사실 언어로 표현함과 동시에 생겨난다. 그것은 독백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실물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사회 공동체의 합의와 그에 따라 체계와 규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이며, 내가 많이 들어 익숙한 표현이나 어떤 책에서인가 인상 깊게 읽은 내용까지 생각의 일부가 되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을 벗어난 순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 안에 나는 주체가 아니고 사회 공동체의 언어를 말하고 생각하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이제 탈이성의 시대가 열렸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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