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 Husserl(1859-1938)/후설

후설과 현상학

반응형

 

분트(wilhelm Max Wundi)는 2+3=5와 같은 수학적 수식, 논리법칙 등이 모두 심리적 법칙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이를 심리주의라 한다. 모든 것은 반복되는 경험과 습관을 추상화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후설(Edmund Husserl)이 <산술의 철학>에서 이와 같은 식으로 주장하자 프레게는 수학의 법칙이 단지 경험과 습관을 추상화한 것이라면 사람마다 경험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값이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고 반박하며 수학과 논리학의 법칙은 인간의 마음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수학은 논리학의 일부라 보고 수리논리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후설프레게의 주장을 듣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수용하고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리고  '어떻게 봐도 누가봐도 자명한, 어떠한 전제도 없이 순수하게 경험적인 인식이 가능한가?라는 인식론적인 질문으로 나간다. 이를 현상학(phenomenology)이라 한다. 현상학은 이후 실존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후설은 위의 질문을 물고 늘어져 결국 우리의 의식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른다. 적어도 의식 위에서만큼은 수학적 진리나 논리적 진리가 진리로서 명료하게 입증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의식이 의식하는 대상과 이런 대상들을 의식하는 의식 자체의 작용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철학의 역사는 이런 의식이 의식하는 대상의 실체를 알고자 대상에 인과관계와 같은 인위적 인식 틀을 계속 투입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자명한 것도 순수한 경험도 아니다. 오히려 자명한 것은 이런 대상을 의식하고 있는 자체의 작용이다. 그 작용은 바로 의식이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으로서 지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 속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의식을 통해 후설은 철학, 과학보다 더 명증한 것을 얻었다고 확신했다. 과거의 질문들은 괄호에 묶어 넣어버리고 판단을 중지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명료한 것,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대해 논의하고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의식이 무엇인가를 지향하며 끝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인가를 지향하며 의식 속에 흐르는 사유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면서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므로 과학보다 더 정확한 앎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가장 순수한 경험적인 사유다. 현상학은 이렇게 대상에 대해 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결국 대상의 본질보다는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노출시키는 현상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더없이 본질적이다. 인간이 사물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말한다. 근대는 실증과학으로 세계관을 규정하려 했다. 실증과학이 주는 번영에만 눈이 멀어 가치와 같은 문제를 도외시한 것이다. 거기에 사회, 인문까지도 모두 산술화하고 단순 개념화하면서 인간의 삶과 역사를 모두 추상화해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이제 철학은 생활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생활 세계란 학문적으로 수립된 객관의 세계와 대립되는 세계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아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세계다. 객관적 세계는 원칙적으로 온전히 지각할 수 없지만 생활 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드러남을 통해 직관할 수 있고 실재적으로 명료하게 경험 가능한 세계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루는 학문으로 삶의 숨겨진 원천들을 밝히고 비인간성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후설은 일상에 대한 지식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명료한 경험 위헤 수립하고자 했다. 

 

 

눈에비친햇빛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