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머티즘을 널리 알린 건 제임스(William James)와 듀이(John Dewey)다. 제임스는 정신이나 행동이 기능하는 방식, 적응하고 생존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며 기능심리학을 주창했고 그렇게 관념이 정해지는 방식과 행동의 역할, 생존방식에 대한 연구를 했다.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이 불명료한 개념을 명료화시키는 도구로 믿을만한 기준을 졀정 짓는 것을 의미한다면 제임스는 그 신념이 진리인지 아닌지까지 결정짓는 가치론까지 밀고 나갔다. 제임스에게 믿어서 현실에 좋은 것 또는 좋게 작용하는 건 참이다. 제임스의 유일한 기준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잘 인도해 주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진화론에서 전제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방식, 실용주의 개념과 가깝다.
제임스는 어떤 아이디어든 현금 가치를 갖지 않으면 쓸모 없다고 말한다. 어떤 개념이나 생각, 심지어 학문들도 실생활에서 어떤 식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현금 가치라 한다. 이렇게 나가면 서로 다른 견해, 주장, 종교, 철학을 모두 껴안을 수 있다. 신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갖지 않은 사람의 삶에 비해 유용한 차이를 낸다면 그 신앙은 정당하고 그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철학들도 진리를 파악하는 경쟁적 수단으로써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퍼스가 결과의 만족의 의미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사실 파악의 만족으로 보았던 것을 제임스는 가치론적인 관심으로 전환하면서 심리적인 만족이라는 인간 중심적 생각으로 옮겨갔다. 또한 퍼스는 의식과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있다고 확신했지만 제임스는 그 경계는 나눌 수 없다고 보았다. 퍼스는 우주는 끝없이 진화하는 것이지만 분명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라 언젠가는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고 제임스는 인간 또한 우주의 일부로 끝없이 변화하기에 우주의 본 모습은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퍼스는 제임스의 생각과 선을 그으며 그렇다면 자신의 철학은 프로그머티시즘이라고 말했다.
전세계에 프래그머티즘을 알린 듀이는 제임스의 편에 섰다. 듀이는 퍼스의 의심 상황을 문제 상황이 발생한 것 또는 의사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으로 보고 동시에 이를 탐구의 시작으로 본다. 여기서 관념이 도구로 등장해 실험적인 가설을 행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A가 아닐까?'와 같은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의 진위를 현실의 결과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참이면 신념으로 확정되고 행동으로 옮겨지며 그것이 거짓이면 다시 관념을 수정하고 다른 가설을 세워 그 진위를 찾아간다.
듀이는 관념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 지침이라 생각하고 그 행위의 결과 또한 계속 검사받고 수정되어야 한다. 플라톤 지지자들이 생각하듯 생활 경험에서 분리된 것도 아니고 경험론자들이 보듯 수동적으로 인식되는 대상도 아니라 본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 경험을 밀고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실험적 행위가 얻어내는 성과의 피드백으로써 변증법적이다. 이렇게 듀이는 퍼스와 제임스를 종합해 프래그머티즘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단순한 심리적 상황의 수정을 넘어, 사회 현실적 상황을 수정하는 것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다. 이렇게 사회적 개조를 이루는 것이 탐구의 끝이라 생각했다. 이런 주장은 사회적 참여를 이끌었고 이를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렀다.
듀이는 진리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 보았다. 직면한 문제란 것은 시대화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해결 방법도 그렇기 때문이다. 진리의 진위여부마저도 끝없이 수정되는 것이라 진리란 그저 보증된 주장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