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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哲學

주왕조 이후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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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버그 채에 의하면 주왕조 이후 중국 철학은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원전 3세기 진한시대다. 진시황 정치적 사상을 하나로 묶으려 의학, 역학, 농학을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웠다. 전한시대의 동중서는 유학을 통한 단합을 시도했다. 이 때의 유학은 도학을 가미한 사상을 말한다. 한나라 학자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금문학파는 분서갱유 이후의 책들을 분석하는 학파로 공자를 무관의 제왕으로 등극시켰고 고문학은 분서갱유 이전의 책들을 분석하는 학파로 공자는 성인의 한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은 공자와 유교의 진정한 해석을 두고 부딪쳤으나 금문학은 위작을 만들어내는 풍토를 조성하며 후한에 이르면 크게 쇠퇴한다. 이 때에는 도가와 더불어 인도에서 불교가 들어와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 위세가 너무나도 대단해서 815년에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칙령을 발표하고 사원 4만동을 헐었다. 도가는 불교와 합쳐져 서로의 개념과 용어들을 빌려오며 강력한 선불교를 만들었다.  

 

송명시대에는 신유학이 주류였다. 신유학은 유학의 부활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들이 유학자들이긴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선불교학자들의 사유에 자극을 받고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선학자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건 정적의 상태지만 신유학자들에게는 영속적인 활동의 상태다. "천체는 한결같이 움직이고 군자는 쉬지 않고 자신을 개선하려 한다." 이런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활동하는 정적과 고요한 활동의 개념을 만들고 마음은 거울인데 거울은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지만 표면에 비치는 갖가지의 영상은 쉬지 않고 활동한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마음은 태양과 같다. 바람이 그 밑을 지나 사라지지만 태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다. 또 마음은 광대한 바다의 표면같다. 그 위에서 물결이 오르락내리락하나 전체적인 수면 자체는 그대로 잠잠하고 크게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활동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활동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은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고요하다. 이러한 정적과 활동의 융합은 가장 높고 훌륭한 마음의 상태다. 더우기 불교도들은 가시의 세계는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환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세계를 가공의 텅 빈 큰 빈 공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인간 자신의 주관과 공존하는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신유가는 외부 세계가 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반면 거기에 착각적인 실체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해결했다. 기는 후기 신유가의 우주 철학적인 형이상학적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유교는 대단히 현세적이고 본질적으로 인간적이다. 유교는 전적으로 인간관계를 다루고 초자연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신유가는 유불 창시 학파들을 모두 독단적이고 일방적이라고 매도함으로써 이 모순의 극렬함을 해소했다. 그들은 유교가 너무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반면에 불교는 너무 이상적이고 천상적이라고 말하고 이 두 극단을 융합하려 했다. 이 사상은 분기하여 합리주의적인 송학파와 이상주의적인 명학파가 출연한다. 송학파는 유교 사상의 전체 원리에 가깝고 명학파는 인도의 불교에 더 가깝다. 명학파는 송학파의 신유가를 지나치게 형식적이라 비판하고 한편 송학파들은 명학파의 신유가를 너무 주관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우주 안의 근본 진리가 이(理)로 의견을 일치했다. 유교는 불교 사상과 결부시켜 보려 하면서 송학파는 외부 세계를 관망하는데서 시작해 이를 하늘 또는 자연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학파는 불교를 유교로 가감시킬 목적으로 자신을 관조하는 데서 시작해 이를 마음이라 한다. 유가는 선진유, 한당유, 송명유, 청유 4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한당유와 청유는 경전을 중시 여겼다. 한당유의 공은 경전을 전하려 애쓴 것이고 청유의 공은 경전을 해석한 데 있다. 송명유는 경전보다도 성현을 더 중히 여겼고 낱낱이 따지는 것보다도 의리를 더 중히 여겼다. 선진 이래로 사상적으로 유가와 도가가 대립하고 있다가 송 이후에는 유가가 불가가 대립하게 되었다. 도가에서는 천지 자연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유교, 도교 대립의 모든 문제는 우주계와 인생계의 문제였다. 불학은 심성과 의식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유불 대립의 모든 문제는 심성계와 사물계의 모든 문제였다. 

 

선종은 불학의 종교 정신을 담박하게 일상의 인생 방면으로 돌리려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불학은 청정과 열반을 구하는 데 있다. 송명유는 선종을 영접해 인생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진유의 개인, 집안, 국가, 천하의 실제 인간 사회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그대로 불학상에 있어서 심성의 연구와 분석에 대한 모든 의견과 업적을 흡수, 유합했다. 송명유가 불학을 융합해 유가를 확대시킨 건 마치 역전과 중용이 노장을 융합하여 유가를 확대시킨 것과 같다. 송명유가 중국 철학 사상사에 공헌한 것은 불학을 전부 융화한 점이다. 송명유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불학은 참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유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기상을 가지고 발전했다. 

 

만주왕조와 중화민국은 사회적인 어려움, 정치적 불안정 및 지적 혼돈의 시대였다. 중화 민국의 시기는 어찌나 어지러웠든지 1949년에 이르러, 마침내 분리된 두 중국 정권, 즉 대만의 국부 정권과 본토의 공산 정권이 태동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전체 경향은 혼인과 가족과 같은 것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기존 제도가 비판의 대상으로 오르면서 회의적이고 파괴적이다. 이 시기는 신유학을 공격했다. 서구의 실증주의와 프라그마티즘을 큰 자극제로 삼고 과학, 사회적 발달 및 민주주의를 주축으로 삼으면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유교를 과거의 보수주의와 동일시하였다. 그들의 규합 구호는 공자와 그의 일파를 타도하자는 것이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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