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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artre(1905-1980)

인간이란 그저 우연히 거기에 있는 존재 -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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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 - 1980)는 프랑스 출신의 실존주의 대표자로 파리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참전했고 <현대>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자유에의 길>, <구토>, 존재와 무> 등의 작품을 남겼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나 거절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하다. 

 

실존주의는 모든 인간의 개인적 실존의 조건들과 구조를 탐구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의식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어떻게 개별적 의식이 존재의 의미를 포착하는 가, 자유의 문제, 선택, 진정한 인격, 타인과 혹은 세계와의 관계, 오직 개인적 존재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떻게 개인에 의해 가치와 의미가 구성되는 가에 대한 성찰 등 실존주의의 주요한 관심사들을 연구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시론이라고 표현한다. 현상학은 의식의 내용들을 의식주체와 독립되어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처럼, 그것들이 지닐 수도 있는 다른 위상에 대한 언급없이 나타나는 그대로를 다루는 학문적 방법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기록만하는 작업이 아니라 의식의 내용들의 구조를 분석한다.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 가를 묻는 작업이다. 그렇게 해서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들의 유형을 밝혀내고자 한다. 현상학적 존재론이란 표현은 실재세계의 사실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의식 사이의 관계양상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 존재 양식의 일반적 특성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와 무(비존재)의 두 가지 존재 양상을 지닌다. 인간은 즉자(단순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대자(의식의 주체)적으로 존재한다. 즉자는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의 구분이 없다. 자각적 의식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존재에는 빈 공간이 없으며 무가 침입할 조그마한 틈도 없다. 존재란 그저 우연히 거기에 있을 뿐이다. 존재에 선행하여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연성이야말로 존재의 기본원리이다.  

 

의식은 대상이 될 수 없다. 두 양상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 둘을 하나로 용해시키려는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통합체다. 우리는 대상인 동시에 의식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의식은 무이기 때문에 미래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런 욕망은 인간의 자유 상황이다. 자유란 우리가 무엇이 아닌 지를 의식할 때 경험하는 무이다. 미래에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준다. 우리의 자유는 무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아무 것에도 근거하지 않으며 선택이 가치나 의미를 정한다. 어떤 행동을 하려면 우리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 숙고하기 위해 대상세계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공허함에도 우리의 행위는 투사될 수 있다. 우리의 선택행위에 있어 어떠한 행위의 선택은 자아를 선택하는 것이다. 자아의 선택이 존재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란 주어지는 것이며 선택하기 위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나의 선택은 나의 본질, 내가 존재하는 특정한 방식이다. 우린 특정한 상황에서 사려깊은 자아를, 혹은 충동적인 또는 다른 자아를 선택할 수 있다. 복종형일 수도 저항형 일 수도 있다. 존재는 본질에 선행하며 본질을 결정짓는다. 

 

사르트르는 무의식, 유전, 환경, 학습된 행동을 바탕으로 인간을 정형화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나 견해를 거부한다. 인간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우연적인 심적 불가환원의 존재이다. 인간은 어떤 속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비실체적 절대자다. 하지만 실존주의적 심리분석으로 인간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한다. 선택의 의미를 밝혀 원한다면 선택을 변경하도록 돕는다. 인간은 단순한 속성들의 집합이 아닌 유기적 통합체이며 개념화의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다. 인간에 대한 가능한 이해의 유형은 지식이라 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인생은 그가 자신의 인생에 전적인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올바르지 못한 믿음, 나쁜 믿음(bad-faith)은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다는 사실, 우리의 존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한 결과이다. 이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무거운 의무감에 버거운 사람은 도피처를 찾기 마련이다. 스스로 만들지 못한 의미를 기성의 가치와 역할을 받아들임으로써 해결하려 한다. 자유를 만끽하는 주체적 삶 대신에 자신에게 기계적으로 정해진 기능이 있다는 믿음을 부여받고 자신의 인생이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사물이나 대상으로 취급받길 원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자신의 실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속이며 환상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존재를 제도와 자연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도록 맡겨 버린다. 이는 인간의 의무를 포기하고 인간성을 구성하는 자유를 부정하며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것 역시도 인간의 자유이다. 인간은 불안의 경험이 싫어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특정한 선택을 결정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의 느낌은 유쾌함이나 모험심의 원천이며 대상들의 의미에 대한 쉴 새 없는 탐구로부터 해방시킨다. 

 

 

나쁜 믿음을 사는 인간은 경직된 정신 속에 사는 사람이다. 경직성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경직성은 인간과 절연한 상태에서 그 가치를 획득한다. 둘째는 그 가치는 대상들 속에 구현되어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경직성은 사물의 부조리한 우연성을 감지 못하게 하고 의미를 창조하는 공허감을 알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한 예술작품이 앞에 있을 때 경직성을 담지한 감상자는 자신만의 독자적 평가를 외면하고 그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  기성의 가치를 찾는다. 

 

사르트르의 이런 자유에 대한 철학은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이르러 모든 상황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조금 수정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간이 모든 상황에서 자유스럽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삶이 비활성적 실천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정확히 이런 영역이 원초적으로 결핍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한 인간은 모두 노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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