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George Edward Moore, 1873-1958)는 UK 런던 교외의 노우드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연구하고 연구원이 된 뒤에 강의를 하며 정신철학과 논리학의 과장을 역임했다. 러셀과 교류했고 <관념론 반박>, <외적 세계에 대한 증명>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 <윤리학의 원리> 등을 펴냈다.
무어는 관념론을 거부하고 우리가 지각 행위를 통해 인식하는 물질적 대상들의 세계는 존재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에 따르면 인식이 정신적인 것이므로 인식의 대상도 정신적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고 외적 대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외적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상식적 믿음에 동의하는 이유는, 상식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 상식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상식의 부정은 비일관적 요소를 발생시키곤 한다는 사실이 상식을 부정해야 하는 이유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언어적 표현을 자세하고 세밀하게 조사하는 것,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을 살피는 것이 철학적 문제들의 발생과 그 문제들에 대한 부적절한 해결 등의 원인이 되는 애매성과 비명료성을 드러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답변보단 질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개념이 여러 부분에 다양하게 사용되므로 그 다양한 쓰임들을 구분하고 그 쓰임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들을 살핌으로써 일상적 표현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지금까지 윤리학은 문제들을 부정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해야 하는가?" 이 두 질문은 다른 문제들과 혼동되어 왔다. 선은 내재적인 것과 외재적인 것이 있다. 내재적 선이란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들의 속성이다. 이는 분석이 불가능하다. 노랑이 단순 개념이듯, "좋은"이란 개념 역시 그렇다. 모르는 사람에게 "노랗다"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듯 "좋은" 역시 그렇다. 자연적 속성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좋은"이란 개념은 비자연적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분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쾌함이나 바람직함 등과 같은 자연적 속성들이 "좋은의 부가적인 성질이 될 수 있어도 이것들 자체가 선을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좋은"이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외재적 선이란 궁극적으로 내재적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선한 것들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교류에 있어서의 기쁨과 미적 대상에 대한 즐거움"이 선한의 것의 전체가 된다. 전체란 유기적 통일이다. 어떤 전체에 대한 선을 평가하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과의 유기적인 관계에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선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쾌락이 일어나는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선하다"와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는 등가적이다. 둘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