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0505 ~18551111)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세번 결혼한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일곱 자녀 중 막내였다. 쇠렌의 아버지는 예수 의 은총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아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했던 개신교 신자여서 아이를 낳다 죽은 첫번째 부인 때문에 온가족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는 가족 전체에 미쳤고 쇠렌과 그의 형만을 남기고 두 번째 부인과 다섯 아이가 모두 사망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말이 실현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쇠렌은 평생 자살하고 싶은 우울한 삶을 살았고 한때는 우울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벗어나려 쾌락에 탐닉하는 쪽으로 반항의 노선을 잡기도 했다. 그의 반항이 끝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저서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 전율>, <반복>, <불안의 개념>, <철학적 단편들>,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들>, <철학적 단편들에 대한 추신>, <기독교론>, <죽음에 이르는 병>, <기독교 안에서의 훈련>, <교훈적 강화>, <스스로에 대한 비판> 등이 있다.
쇠렌은 헤겔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가 개념과 추상을 현실과 개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개인은 거대한 변증법적 진행 과정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단계들 중에 한 측면에서만 개인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쇠렌은 헤겔이 추상적인 관념에 집착하는 추상적인 사유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추상적 사유도 결국은 언제나 구체적인 하나의 개인으로 귀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별적 인간 의지와 선택은 최고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를 필연적 과정의 단순 요소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다. 개인은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자신의 절대적 관심 또한 자기 자신의 현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존적 존재로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실존이란 본질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본질을 중요시하던 철학사에서 언제나 무시되던 개념이다. 쇠렌은 개인의 실존 문제를 제기하면서 철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실존은 단순히 존재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존이란 항상 어떤 상황속에 놓인 나일 수 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동적인 인간이다. 양자택일적 상황을 실존적 상황이라고 하고 실존이란 항상 이런 결단의 상황에 처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실존적 인간에게 보편과 본질을 추구하는 객관적인 진리는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진리란 객관적인 것의 불확실성을 깨닫고 자신의 실존에 깊이 침잠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체적인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에겐 세 가지 발전 단계가 있다. 미적 단계에서 인간은 모든 가능한 쾌락의 영역에 대한 낭만적 추구로 권태와 삶의 고통을 벗어나려 하지만 바람직한 인격적 경험을 이루진 못한다. 이것은 윤리적 가치에의 참여를 촉발한다. 윤리적 단계에서의 충족은 의무와 복종에의 헌신과 객관적 도덕에의 헌신이라는 수단에서 구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격적 결여로 완전한 공허와 공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단계에서는 신앙안에서만 존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종교적 비약을 계속 반복한다. 쇠렌은 종교란 반드시 경험해야만 하는 범주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신 앞에 선 단독자",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한 그루의 외로운 소나무"라고 묘사했다. 이런 표현은 어떤 지식이나 외부의 인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 앞에 오직 혼자서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며 신에게 나아가는 주체성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부패하고 권위적이던 종교계과의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말년에도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한다며 덴마크 교회를 꾸준히 비판했다.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