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칠남매 중 맏으로 태어나 카말돌레세수도원과 피사대학에서 공부했다. 연구와 강의, 집필의 삶을 보냈고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후에는 국가의 감시하에 별장에서만 지냈다.
당시에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는 구형의 물체이고 태양과 달 등 5개의 구형 혹성들은 지구의 둘레를 복잡하게 회전운동하고 각각의 고정된 별을 가지며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17세기가 되면서 지구도 다른 혹성들처럼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모든 혹성들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는 믿음이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그것의 둘레를 도는 혹성이라고 주장했다. 수학을 통해 우주의 운행방식을 기술하고 설명하려고 했던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가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궤도운동을 하는 혹성"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갈릴레이는 물체의 낙하 속도는 무게에 의해 좌우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에서 각기 다른 무게를 갖는 구형의 물체를 떨어트린 것으로 유명하다. 아리스토렐레스가 무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매개물의 저항이란 것으로 인식을 돌렸다. 즉, 두 물체의 낙하속도가 다른 것은 무게가 아니라 공기의 저항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진공상태에서는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기 때문에 두 물체가 똑같이 떨어지는 것을 뒷받침했다. 이로 인해 관성의 법칙을 발견하고 운동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 주장했다. 이는 운동하는 물체는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정지할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걸 통해 당시 지구의 영역과 천체의 영역을 분리해서 파악했던 닫힌 우주관을 지상에 적용되는 법칙을 통해 우주도 관찰할 수 있다는 무한한 우주관으로의 돌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609년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측하고이를 통해 발견한 것들을 기록한 <별의 사자>란 책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달은 완전한 구형이 아니며 지구와 마찬가지로 산, 골짜기, 분화구 등을 갖는 별이라 주장했고 목성의 둘레를 도는 4개의 위성을 발견했다. 또한 4년 후 금성이 달과 비슷한 위상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태양의 둘레를 궤도 운동한다는 증거로 사용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달과 태양은 표면에 아무 것도 없이 매끄러운 완전한 구형이라 주장했던 것들을 반박하는 것이고 또한 당시 사실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성경 - 여호수아>에 나오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그리고 달아 너는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그러자 태양이 거기에 머물고 달도 그리하리라"와 같은 구절들을 신화나 동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갈릴레이의 주장을 가설로 다룰 수는 있어도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161년 <크리스티나대공비에게 부치는 편지>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를 드러냈고 이에 또 종교계와의 마찰을 빚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갈릴레이가 자신의 주장을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며 종교계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검열을 받지도 않고 연구도 조용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신학의 근시안적인 교조주의 때문에 실제 과학의 발전이 조롱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계속해서 신학자들과 부딪쳤고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갈릴레이는 1632년 <두 가지 주요 우주설에 관한 대화: 프톨레마이오스설과 코페르니쿠스설>을 출판했다. 이 새로운 천체설을 점검하는 대화체로 구성된 저서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종교재판소에서는 책의 판매를 전면 금지 시켰다. 이런 종교계의 맹비난과 재판회부로 위축된 갈릴레이는 책에 대한 수정을 약속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무기징역이 언도되었고 이후에는 감형을 받아 가택연금되었다. 이 기간에 운동법칙에 관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을 저술했고 로마에서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네덜란드에서 출판했다.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