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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기독교

성경(Bible)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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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논란에 관해 서술하는 페이지.

 

1. 개요
2. 기독교의 시각
2.1. 진보적 신학자들의 입장
3. 주된 논란 소개와 목록
3.1. 성경 내부의 불일치 사례
3.1.1. 다윗의 병적 조사 문제
3.1.2아담 가족 이외의 인류
3.1.3. 브엘세바라는 이름은 어떤 유래
3.1.4.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
3.1.5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몇 년간 머물렀나?
3.1.6모세의 장인은 누구인가?
3.1.7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의 전쟁 때 이스라엘은 몇 명을 죽였을까?
3.1.8사울의 재위 기간
3.1.9골리앗을 죽인 자
3.1.10사울에 관한 기록의 모순
3.1.11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겐 아들이 몇 명일까?
3.1.12사울의 가족과 관련된 오류
3.1.13다윗은 몇 년간 헤브론을 다스렸나?
3.1.14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은 몇 명인가?
3.1.15다윗이 조사한 인구 수는 모두 몇 명인가?
3.1.16다윗이 죽인 아람 군사 수는 몇 명인가?
3.1.17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3.1.18성경의 뇌물 관련 기록
3.1.19. 시드키야는 여호야긴(여호야킴)의 삼촌일까 아들일까?
3.1.20. 여호람은 언제 왕이 되었을까?
3.1.21. 히스기야 왕 시절의 년도 표기 문제
3.1.22. 레위 자손들의 족보 불일치
3.1.23. 에스라와 느헤미야 기록의 모순
3.1.24. 아하지야가 왕이 될 대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
3.1.25. 유다 왕 아히시야는 어떻게 죽임당했을까?
3.1.26. 예후의 자손은 4대 동안 왕을 하리라?
3.1.27야훼는 아사에게 평안을 주었을까?? 전쟁을 주었을까??
3.1.28. 미칼의 자녀
3.1.29솔로몬은 하람에게 보수를 얼마나 주었을까?
3.1.30. 유대 후손 지파의 성읍들
3.1.31솔로몬의 궁전을 지을 때 감독 수는 몇 명인가?
3.1.32솔로몬의 신전에 쓰일 놋쇠 바다(물탱크)의 두께는?
3.1.33. 마아가(미가야)는 누구의 딸인가??
3.1.34엘리야의 수수께끼 1
3.1.35엘리야의 수수께끼 2
3.1.36. 므나쎄의 죽음
3.1.37. 이사야서의 예수 탄생 예언?
3.1.38. 예수의 족보 문제
3.1.39이집트 피난의 모순
3.1.40. 복음서 행적의 모순
3.1.41세례 받은 예수는 다음 날 어디에 있었나?
3.1.42기적의 순서
3.1.43. 야이로의 딸은 죽어 있었을까?
3.1.44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준 여인 일화 이야기의 불일치
3.1.45. 예수 언행의 일관성
3.1.46.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
3.1.47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몇 마리의 동물을 탔을까?
3.1.48.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3.1.49. 4대 복음서의 인용 오류
3.1.50. 요나서 인용
3.1.51예수의 동문서답
3.1.52베드로는 예수를 언제 부인했는가?
3.1.53예수는 언제 못 박혔나?
3.1.54. 십자가 처형 기록의 모순
3.1.55예수의 유언
3.1.56예수가 죽을 때 찢어졌다던 성전의 휘장은 언제 찢어졌는가?
3.1.57. 부활의 기록
3.1.58.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 재림에 대한 기록
3.1.60. 사도 바오로 문제
3.2. 역사 기록과의 모순
3.2.1.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비 에스더
3.2.2페르시아 역사 기록과의 모순
3.2.3다윗의 궁궐
3.2.4. 예수의 출생
3.2.5. 지형의 오류
3.2.6. 로마 제국에는 유월절마다 유대인 죄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3.3. 과학과의 모순
3.3.1. 우주의 나이
3.3.2진화론과의 모순
3.3.3.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
3.3.4. 노아의 방주
3.3.5. 노아의 방주 이후
3.3.6탈출기의 장대한 행렬
3.3.7. 생물 분류
3.3.8. 곤충의 다리가 4개?
3.3.9야훼의 살인 사건 수사법
3.3.10. 땅의 네 모퉁이
3.4.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
3.4.1원죄 문제
3.4.2. 악신을 부리는 야훼
3.4.3. 일부러 파라오의 마음을 조종해놓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 야훼
3.4.4. 희생된 욥의 가족들
3.4.6. 뒷통수 치기
3.4.7성차별적 서술들
3.4.8. 가나안 민족들에 대한 기록
3.4.9바빌론 아이들을 저주함
3.4.10예리코의 전투에서의 유아 학살
3.4.11다윗과 간통한 밧세바에 대한 처결 문제
3.4.12. 무신론자는 부도덕하다
3.4.14. 인신공양
3.4.15. 노예제
3.4.16. 조롱의 댓가
3.4.17. 불구자 문제
3.4.18. 인종차별
3.5. 현대 사회에서는 지킬 수 없는 부분
3.6. 잘못된 논란
3.6.1. 표절 논란
3.6.2. 니케아 공의회 정경 논란
4. 논란에 관한 논란
4.1. 4중적 해석법
4.2.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 성경 속 논란에 대한 문제
5. 성경내 몇몇 오류의 원인 분석
5.1. 논란의 원인 분석에 대한 결론
6. 학술적인 탐구
6.1.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
6.2. 신약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
7. 기타
8. 같이보기

 

"성경은 어느 부분을 믿어야 하고 어느 부분은 그렇지 않은지의 지식도 없는, 실로 거짓말 과 모순덩어리의 책이다" - 토마스 페인

"자신들의 도덕성이 문자 그대로 바이블에 기초하길 원하는 자들은 둘 중 하나다.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했거나." -존 셸비 스퐁[1]

"두 사람이 밤낮 성서를 읽었다. 그런데 내가 희다고 읽은 곳을 그대는 검다고 읽었다." - W. 블레이크

"적당히 읽어보면 성경은 무신론을 확신하는데 가장 강력한 힘을 주는 것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나에게 있어서 성경이 마땅치 않은 것은, 그것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1. 개요

경전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성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집필 및 내용을 둘러싸고 관련된 논란이 상당히 많다. 특히나 르네상스와 금속활자 탄생 이전의 필사본 시대에는 사소한 자구 차이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에 들어가면 사실 끝이 없다. 필사본 시대에 생긴 자잘한 사본들 간의 차이를 전문용어로 '이문'이라고 한다. 성서학계에서 나온 이 이문에 대한 유명한 말이 바로 성경 전체에 있는 단어의 수보다 이문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것. [2]

문제는 이 이문들이 자잘한 차이에 그치는것이 아닌 성경 구절간의 충돌로 인해 모순을 불러 일으키거나, 과학적 사실과 충돌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기도 하고, 비도덕적인 일들을 정당화 하는데 쓰이기도 하므로 이런 성경의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것은 비단 과학계나 철학계 등의 비종교적인 단체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중대한 일이다. 특히나 이런 경전의 비판적 해석이 배제된 근본주의적 종교집단 혹은 국가들이 어떠한 병크를 일으켜 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쉬울 것이다.

이런 성경의 문제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성경은 한사람이 작성한 서적이 아닌 오랜시간동안 수많은 저자들이 쓴 경전을 엮은 서적이며 작성 시기의 시대적 한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성경의 개별적 내용들이 그 안에서 묘사된 시대 이후에 쓰여졌다는 추정과 학설이 많고 기독교 내의 성서비평학계에선 이를 사실상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만큼 성경의 역사적 서술의 신빙성도 100% 신용할수 없다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3][4]

물론 전승 그대로 해당 시대에 쓰여진 책이라고 믿고, 설교하는 근본주의자도 많긴 하지만

참고로 Project Reason 이라는 기관에서 성경의 내용들을 분석하여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을 찾아본 결과 439가지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한다.#(여기서 말하는건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끼리 충돌한 모순'이 439가지 라는 거지 과학적이나 역사적으로 모순되는 것 까지 포함하면 당연히 그보다 훨씬 더 많다.)

2. 기독교의 시각

기독교 내에서 논란의 핵심중 하나는, 성경이란 야훼가 불러준 대로 기록한 경전인가, 아니면 인간의 창작물인가 이다. 이는 결국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로 고대 문헌에 대한 해석학의 발전, 중근동에 대한 고고학, 종교학, 역사학적인 연구성과가 쌓이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보면 알수 있듯이 문제가 많다.[5]

기독교 내 진보주의자들은 성경을 야훼에 대한 영감에서 발생한 문학적 창작물로 보며 '구원에 필요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경전'으로 규정하면서 경전을 모두 야훼의 말씀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에 대한 분석과 연구 자체가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하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밑의 주된 논란들에 대해서도 근본주의자들은 나름대로의 반박 주장을 펴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당연히 이렇게 양극으로 갈리는 주장들만 있는건 아니며, 신정통주의 신학처럼 성서비평학을 적극 수용하되,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는 인정하는 교단들도 세계적으로 상당하다는 걸 알아두자. [6]

결국 신비적, 고대적 요소로 가득한 경전을 신이 불러준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현대사회의 과학적, 합리주의적 사고와 충돌하고 논란에 휘말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진화론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비평적 해석학)이 사탄이라고 규정했다. 오늘날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이나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대한 논란과 비평적 해석은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하며, 사제들은 성경에 대한 비평적 해석과 논란점을 대학에서 배우긴 하지만 이를 설교하거나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다. 물론 진보적인 기독교 학자들은 모든 내용들을 인정하고 관련 서적 등을 펴내며 설명을 하려 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워낙 작은 상황이다.

사실 요즘엔 보수적인 신학교들도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추세이긴 하지만, 문제는 한국 그 어떤 주류 기독교 교단이라도 교회 내에서 교인들에게 성서 비평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거의 없다. 대한민국 기독교 종파 중 가장 개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조차도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교회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7] 학계와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447회(2007. 10. 13) 방영분을 참조할 것. 한신대 신학과[8] 교수이자, 한신대 총장을 역임한 채수일 교수는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과 나눈 인터뷰에서,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기장 계열 목사들조차 설교 시간에 한신대에서 배운 대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현실을 성토했다.

이에 대해서, "성서비평학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는건 당연하지만, 그저 신앙을 위해 모인 것일 뿐 성경의 오류에 대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검증하려고 교회나 성당으로 모인게 아닌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성서비평학에 입각해서 성경을 설교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애초에 성서비평학을 설교하느냐 마느냐는 개신교의 경우 목회자와 각 개교회의 자유라는 의견인 것

그러나 현대 사회의 교회에 있어서 성서비평학에 입각해 성경 내부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고 이를 현대 사회에 맞는 돈독한 신앙으로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자세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만큼 성서비평학을 일반 신자들에게서 아예 도외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할 것이다. 성서비평학을 수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성경을 오류투성이로 폄하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며(당장 신정통주의 신학만 자세히 파도 알 수 있다.) 십일조와 관련한 논쟁만 보더라도 성서비평학을 통해 교회가 기존의 기득권 중심의 성경 해석을 탈피해 변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2.1. 진보적 신학자들의 입장

진보적인 입장의 신학자, 성서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성경이 그들 나름대로의 신적 체험이 담겨 있으나 시대적 한계가 상호 모순이 많기 때문에 성경을 완전무결한 진리라고 보지는 않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신화를 연구할 때와 같은 시각으로 분석한다. 이는 어찌 보면 성서를 연구할 때 당연히 요구되는 자세인 것이,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구약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은 신화적 모티브를 여기저기서 따왔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는 바빌론 신화의 성경, 에누마엘리쉬에서 따왔다는 논문이 있다.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의 대홍수 이야기와 거의 똑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파헤친다고 해서 종교계 입장에선 이미 정립된 신학에 충격이 가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떤 모티프로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 사실 밑에서 언급하는 각종 오류부터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성경에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들이댄 신학자와 성서학자들이 직접 밝혀낸 것들이다. 

오늘날에는 어째 반기독교측에서 더 자주 써먹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현대인과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며 그것이 고대인의 지능이나 이해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고대인의 뮈토스적 세계관으로 체험한 하느님이 현대인의 이해와 다른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성서는 애초에 단일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의 그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며 그 개별 저자들 역시 여러 다양한 시대적 배경의 산물이므로 모순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주장한다.

3. 주된 논란 소개와 목록

성경에는 내부의 내용 불일치나 모순 및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거나, 실제 역사 기록 및 과학적 지식과 상충 되어 갑론을박이 오가는 내용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것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이는 한국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는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데, 본 항목의 상당 수 내용은 '바트 어만'의 관련 저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 고대 헬레니즘 시대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왔으며[9] 이미 밝혀진지 오래인 논란들의 경우엔 신학적인, 교리적인 반박이나 해석이 나와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괜히 신학이라는 학문이 2000년동안 치열하게 교리논박과 정립을 거듭하며 발전되어 온 게 아니다.

다만 그 반박이나 해명들이 기독교계 입장에서 신앙심을 위해 펼쳐진 논리이고, 확실한 논리적 근거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해석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런저런 신학적 가설, 설정을 덧붙이거나 가정하고, 교리로 덧붙여서 해명하는 식이라 종교적인 가치관을 배제하고 볼 때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게 문제다. [10] 또 몇몇 개신교의 경우는 반박의 논리성에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성경 논란에 대해 해명하려 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 중에는 심지어 토끼가 자기 똥을 먹으니 되새김질 동물이라는 몰상식한 주장도 있다(...)

이러한 논란 지적에 대해서, 기독교의 근간인 성경의 논란점을 비판하면서 기독교 교리나 신학을 제외하고 성경 서술 그대로를 가지고 비난이나 논란을 제기하는 건 신화학과 종교학에 대한 무지가 상당수 드러난다는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의 반박이 있다. 여기서 종교학자들의 주장을 넣지 않은 이유는, 종교학자들은 성경이 그들 나름대로의 신적 체험이 담겨 있으나 시대적 한계가 상호 모순이 많기 때문에 성경을 절대적 진리라 보지 않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신화와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의 특정 기록이 행해진 당시의 시대적 배경, 교리적인 설명을 고려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종교인에게는 가능한 해설일지 몰라도 비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성경 자체의 신성성(神聖性)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저작인 성경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유효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현대인과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라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성경에 기록된 비과학적/비합리적 내용들은 고대인과 현대인의 시각 차이 때문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한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듯 '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인간들이 썼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 관해서는 '전능한 신이 올바른 지식들을 전해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과 '당시의 인간들이 후대에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들을 모른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신이 그 수준에 맞춰서 책을 쓰도록 한다는 것은 넌센스'라는 비종교인들의 주장을 참고할 만 하다. 이런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이지만. 게다가 사실 이런 해명은 고대인들을 얕보는 처사다. 고대인들이 현대인보다 지식이나 사고의 폭은 뒤떨어질지 몰라도 결코 지능이 모자라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는게 아니다.

또한 성경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게 되면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 북유럽 신화와 다를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데꿀멍을 시전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대해 열린 시각으로 그 가치와 한계를 모두 인정하는 신학은 당연히 다른 고대 신화도 인간의 신적 체험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주장이다(종교다원주의). 일단 한국 내의 어떤 신학 대학도 이렇게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는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부정할 위험이 있기 때문. 보수적인 교단 계열의 신학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내에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계열 한신대 신학과에서조차 다른 종교 및 신화의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적지 않은 수의 모순이나 내용 불일치에 대해서는,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시대상 한계의 연장선상으로 필사자의 실수, 즉 오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상당수의 오류에 대해 설명이 된다. 근데 문제는 극단적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주장, 즉 전지전능한 야훼가 성경 필사에 직접 관여했다는 주장은 여기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필사에 직접 관여했는데 오기가 생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기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음 4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1. 신은 전지전능하며 성경 필사에 관여했다. 그런데 오기가 나왔다. 이는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관여하지 않았다는 모순된 비판점을 낳는다

2. 신은 존재하나 성경 필사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이 경우는 신이 관여하지 않은 기록물인 성경이 신의 말을 전달한것도, 신 자체를 진실되게 서술한것도 아니란 말이 된다.

3. 신은 실존하지 않으며, 오류와 오기가 많은 것은 그 시대 저자들의 시대적 한계이다.

4. 신은 존재하며 성경 저자에게 감동을 주어서 성경을 쓰게 했지만 기계적으로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에게 맥락이나 메세지, 환상 등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쓰게 했기 때문에 당시 시대적 배경이나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이 그냥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진보적 기독교 교단의 주장이다. 단, 이 경우에는 신이 이러한 논란들과 오류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손 놓고 있었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3.1. 성경 내부의 불일치 사례

3.1.1. 다윗의 병적 조사 문제

다윗에게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여 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야훼가 했다고 나오나, 역대기상 21장 1절에는 그것을 사탄이 시켰다고 나온다.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사무엘하 24:1)

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였다. (역대기상 21:1)

기독교 인간이 죄를 저지르면 하나님이 베푸는 가호가 사라지고 악령이 그 틈을 탈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마치 욥기에서처럼 하느님이 사탄에게 명령하여 인구조사를 시켰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문서비평학적 관점에서는 성서학자들은 사무엘기와 역대기를 집필한 집필진의 관점의 차이나, 말락 야훼 설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구약 초기까지의 야훼는 선악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였으며, 바빌론 유수 이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야훼에게서 악한 성향을 분리하여 사탄에 이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야훼가 가공된 존재라는걸 시사하는데, 전지전능한 야훼가 유대인들의 사회/문화적 변동에 따라 성향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그 야훼도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걸 증명하기 때문이다.

3.1.2아담 가족 이외의 인류

인류 유일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카인과 아벨 중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다른 마을'로 갔다는 기록이나 카인이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세기 4:14)

대개 카인과 아벨 이외의 많은,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에 대한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렇게 되면 성경 상의 시간대를 따라갈 때, 카인과 아벨이 장성해서 아벨이 죽는 시점까지, 아담과 이브는 '사람들'이 다 장성해서 '마을'을 이룰 정도로 자식들을 많이 낳았다고 나온다. 물론 근친이라고 해도 부부 한 쌍이 마을을 이룰 정도로 자식을 낳았다는 게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기도 하다. 물론 성경 기록을 따라가면 창세기 시절 사람들은 장수했으므로 설명이 안되는 건 아니다. 또한 카인의 아내가 갑자기 나오는데(...) 카인은 아내를 어떻게 만났으며 그 자손들은 어떻게 아내를 맞이하였을까?

한국의 주류 개신교 종파는 레위기에서 야훼가 근친상간을 금하는 법률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근친에 의한 종족번식이 만연했기 때문에 카인의 아내를 아담과 하와의 딸로 해석한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이미 존재하던 네피림들이 있었기 때문에 네피림들과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을 구분할 때, 하느님의 자손들과 사람들의 딸로 나뉜다는 해석도 한다. 하지만 네피림의 대한 언급은 카인과 아벨 시대보다 훨씬 뒤인 노아의 홍수 전후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그릇된 성경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과 진보적 기독교 해석에서는 아담의 히브리어 뜻이 사람임에 주목하여 과 하와, 그리고 카인과 아벨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사람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1.3. 브엘세바라는 이름은 어떤 유래

그 때 아비멜렉이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아브라함을 찾아와 제안하였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는 함께 해주십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고 맹세해 주십시오. 나와 내 혈육 일족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이오. 내가 당신에게 신의를 지켰듯이 당신도 당신이 정착해 사는 이 곳 사람들과 나에게 신의를 지키겠다고 하여주십시오."

 

"예, 맹세하지요." 하고 승낙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의 우물을 빼앗은 일을 따졌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나는 모르오. 당신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었고, 오늘날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일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과 를 끌어다가 아비멜렉에게 주었고, 두 사람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어린 암양 7마리를 가려내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어린 암양 7마리를 무엇하러 따로 골라내시오?" 그는 "이 어린 암양 7마리를 받으시고, 이 우물은 내가 팠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거기에서 서로 맹세했다고 해서 그 곳을 브엘세바라고 하였다. (창세기 21:22-31,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주인공이며,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맹세로 인해 브엘세바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다음 기록을 보자.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아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고 그 곳에 천막을 쳤다. 그의 종들은 거기에서도 우물을 팠다. 어느 날, 아비멜렉이 친구 아후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사악을 찾아왔다. 이사악이 그들에게 "내가 미워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야훼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고, 그대와 우리 사이에 조약을 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다. 우리는 그대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잘 대접해 주었으며 떠날 때에도 편안히 보내주었다. 그러니 그대도 우리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라. 그대야말로 정녕 야훼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사악은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셨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서로 서약하여 조약을 맺고, 이사악의 환송을 받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떠나갔다. 바로 그 날, 이사악의 종들이 저희가 파던 우물에서 샘 줄기가 터졌다고 와서 알렸다. 이사악은 그 우물을 세바라 불렀다. 그래서 그 도시를 오늘날까지 브엘세바라고 부르고 있다. (창세기 26:25-33,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이사악이 주인공이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고, 이사악이 이름을 지어 브엘세바라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전자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이외에도 창세기에는 여러가지 상이하거나 차이가 있는 구절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는데, 가톨릭의 성서비평학에 따르면, 창세기 성경 집필은 야훼계, 엘로힘계, 사제계라는 세 서술 그룹에 의하여 바빌론 유수 시기에 그간 전해지던 창세기의 전승을 모아 서술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하느님에 의한 천지창조가 두번 묘사되거나, 창세기 1장과 2절의 하느님의 이름이 다른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나, 이사악이 자기 아내 레베카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등의 모순과 의아한 점이 모두 설명된다. 즉 서로 다른 서술집단이 같은 전승을 가지고 서술한 것을 함께 한 권의 창세기 경전으로 수록했기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것.

3.1.4.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 공동번역성서)

하느님은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40일간 광야에서 악에게 유혹받은 예수는 어째서 시험을 받은 것인가? [11]

여기에 관해서는 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입각해 성자는 신성과 인간성을 모두 가진 존재로서 취급되어지기때문에 인간 예수로서 유혹을 받았으며,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예수가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 뿐만 아니라 성자 하느님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수단으로서 성경 내에서 이용되었다는 해석이 내려져있다. 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이기때문에, 교파마다 달라지는 해석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악을 행하도록 유혹할 작자가 아니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 항목내를 보면 악행을 권장하는 부분이 많다(....). 당장에 아브라함에게 자기 자식을 죽이라 명령을 내린다던가, 예리코의 전투에서 죄다 죽이고 처녀만을 취하라는 식으로 학살과 강간을 권장하는 등 악행을 명령한 구절이 많다. 그리고 3.4.3을 보면 알겠지만 파라오가 악한마음을 가지도록 조종한것도 야훼다(...)

3.1.5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몇 년간 머물렀나?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살며 400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창세기 15:13,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외국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있으면서 종살이를 하며 학대를 받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6, 공동번역성서)

이 기록들에서는 공통적으로 400년간 이집트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머무른 것은 430년 동안이었다. (탈출기 12:40)

탈출기에서는 430년이라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반올림

 

'400년'이라는 기록은 '400 년'(…)으로 본다는 이야기.

다만 이는 적기 방법에 따른 귀차니즘으로 인해 생략된 것일 수도 있다(...).

3.1.6모세의 장인은 누구인가?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탈출기 3:1, 공동번역성서)

모세의 장인 호밥은 켄 사람이었는데, 그는 유다 자손들과 함께 종려나무 도시로부터 올라와 아랏 남방에 있는 유다 사막에 이르러 아말렉족과 어울려 살았다. (판관기 1:16, 공동번역성서)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가운데 켄 사람 헤벨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문중에서 떨어져 나가 케데스 근처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판관기 4:11, 공동번역성서)

일단 미디안과 켄은 다른 지역이다. 또한 모세의 장인 이름이 탈출기에는 제사장 이드로라 되어 있고, 판관기에는 호밥이라 되어 있다.

 

모세가 자기 장인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청하였다. "우리는 이제 야훼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잘 대접해 드릴 터이니, 우리와 같이 갑시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잘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소." (민수기 10:29, 공동번역성서)

이런 구절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명백한 모순이다. 게다가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도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아마도 켄 족속이 "미디안 족 내의 소 부족"(Gordon J. Wenham, TOTC, 4:105)이거나, "정치적 동맹 부족"(Robert G. Boling, AB, 6A: 57)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호밥을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민수기 10:29)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호밥의 후손을 "켄 사람"(사무엘상 15:6)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증거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사료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대해 '켄' 족속이 유목민족이라 미디안 족과 함께 살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몽골족은 유목민이라 떠돌아 다녔으니 제주도에 와서 살았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중근동의 지역이니 비유 자체는 안맞지만 결론은 근거가 없는 추측이라는 것.

또한 이드로와 르우엘이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전무하며, 아브람과 아브라함, 야곱과 이스라엘, 요셉과 사브낫바네아, 기드온과 여룹바알, 솔로몬과 여디디아, 다니엘과 벨드사살, 사울과 바오로는 모두 이름이 바뀌게 된 유래가 나와 있거나, 같은 텍스트 안에서 두 이름이 같이 언급되어 동일인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데 왜 이드로와 르우엘만 그 모양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이것을 두고 몇몇 기독교인들은 나중에 가면 모세가 첩(에티오피아 여인)도 들이는데 그냥 2번 결혼했다고 치자고 끼어맞추기를 시전하기도 한다(...).

3.1.7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의 전쟁 때 이스라엘은 몇 명을 죽였을까?

그 때 전 이스라엘군에서 뽑힌 10,000명 정예 부대가 기브아 정면에 나타났다. 싸움은 치열하였다. 베냐민 사람들은 자기들이 앞으로 얼마나 비참한 일을 당할지 까맣게 몰랐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눈앞에서 베냐민을 치셨다. 그 날 이스라엘군은 칼 쓰는 베냐민 군 25,100명을 죽였다. 베냐민 군은 자기네가 패하였음을 알았다. 이스라엘군이 베냐민 군이 보는 데서 뒤로 물러선 것은, 기브아 주변에 복병을 배치해 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복병은 재빨리 기브아에 밀려 들어가, 온 성 주민을 쳐죽였다. (판관기 20:34-37, 공동번역성서)

이렇게 해서 그 날 죽은 베냐민 전사자 총수는 25,000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쓰는 용사들이었다. 그러나 600명은 광야를 통과하여 림몬 바위까지 도망쳐서 4달을 그 바위 있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다시 베냐민의 민간인들에게로 돌아와서, 그 성 사람과 짐승을 만나는 대로 칼로 쳐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성읍들에도 닥치는 대로 모조리 불을 놓았다. (판관기 20:46-48, 공동번역성서)

두 기록은 같은 전쟁을 말하고 있는데도 전자는 25,100명, 후자는 25,000명으로, 100명의 차이가 발생한다.

귀찮아서 반올림 했겠지

3.1.8사울의 재위 기간

성경에 기록된 사울 왕의 나이와 재위 기간이 말 그대로 엉망이다. 사무엘상 13장 1절은 히브리 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래된 사본 - 사울이 왕이 된 것은 1살 때였다. 그가 이스라엘을 2년 간 다스렸다. (사무엘상 13:1)

그리고 중요한 건 각 번역마다 수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1살이 중요한게 아니다

사울이 1 살때 왕이 된 뒤, 2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사무엘과 멀어지고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경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공동번역 - …

개역개정 -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

개역한글 -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

새번역 -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42해였다.

현대인의 성경 - 사울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째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그 중에서 3,000명을 골라 2,000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나머지 1,000명은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있게 하였으며, 남은 백성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신세계역 - 사울은 통치를 시작할 때에 ? 살이였으며 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新共同譯 - サウルは王となって一年でイスラエル全體の王となり、二年たったとき、

NIV - Saul was thirty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over Israel forty-two years.

KJV - Saul reigned one year; and when he had reigned two years over Israel,

NASB - Saul was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to reign, and he reigned forty two years over Israel.

新改譯 - サウルは三十歲で王となり、十二年間イスラエルの王であった。

口語譯 - サウルは三十歲で王の位につき、二年イスラエルを治めた。

공동번역에서는 생략해 놓았고, 다른 판본들도 서로 다른 숫자를 집어넣어 놓았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한 말이다.

그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키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워 40년 동안 다스리게 하시다가, 그를 물리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13:21~22, 공동번역성서)

사도 바오로의 말과, 구약의 각 판본마다 사울 왕의 나이와 재위 기간이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다.

3.1.9골리앗을 죽인 자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 대해서도 엘하난과 다윗으로 각각 나와 있어 상호모순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다윗은 칼도 없이 팔매돌 하나로 불레셋 장수를 누르고 쳐죽였다. (사무엘상 17:50, 공동번역성서)

곱에서 불레셋 군과 또 한 차례 싸움이 붙었을 때 베들레헴 사람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대는 베틀 용두머리만큼 굵었다. (사무엘하 21:19, 공동번역성서)

그 후에 다윗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나단이란 예언자가 나타났다. 번제물을 위하여 기름기를 따로 떼어놓듯이, 다윗도 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뽑혔다. 그는 마치 염소를 데리고 놀듯이 사자를 다루었고, 어린 을 데리고 놀듯이 을 다루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거인을 죽이고 자기 백성의 치욕을 씻었다. 팔매돌 하나로 골리앗의 콧대를 꺾었다. (집회서 47:1~4, 공동번역성서) 

집회서는 개신교에서는 없는데?

또 다른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의 창대는 베틀의 용두머리만큼이나 굵었다. (역대기상 20:5, 공동번역성서)

엘하난의 공이 다윗에게 흡수되었다는 해석과 다윗의 본명이 엘하난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전부 가능성이 낮다.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의 반면, 엘하난의 아버지는 야이르라고 기술되어 있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다. 

사실 야이르와 이새도 동일인물

 이하 자세한 사항은 엘하난을 참조할 것.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는 성서에는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엘하난이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독교 측의 해석은 골리앗은 다윗에 의해 죽었고 엘 하난은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해당 링크의 주장은 결국은 '필사 오류'라는 것.

3.1.10사울에 관한 기록의 모순

우선 다음 두 기록을 보자.

사무엘은 기름 1병을 꺼내어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추며 이렇게 선언하였다. 야훼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시는 것이오. 그대는 야훼의 백성을 지배하시오. 그대는 사방에 있는 적의 세력으로부터 이 백성을 구해 내어야 하오. 야훼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몫인 이 백성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신 표는 이것이오.
오늘 그대는 나를 떠나 가다가, 베냐민 지역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오. 그들은 그대의 부친이 그대가 찾아다니던 암나귀를 찾아냈으므로 나귀 걱정은 놓았지만, 그대들이 걱정되어 '내 아들이 어찌 되었느냐?' 하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알려줄 것이오. 거기에서 다시 다볼에 있는 상수리나무 쪽으로 건너가시오. 거기에서 그대는 하느님을 예배하러 베델로 올라가는 세 사람과 마주칠 것이오. 한 사람은염소 새끼 3마리를 안고, 한 사람은 떡 3덩이를 가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술 1자루를 메고 올 것이오. 그 사람들이 그대와 인사를 나누고 떡 2덩이를 줄 터이니 받으시오.
그리고 나서 불레셋의 수비대가 있는 하느님의 언덕에 이르면, 산당에서 내려오는 예언자들의 무리를 만날 것이오. 그들은 거문고를 뜯고 소구를 치고 피리를 불고 수금을 뜯으며, 신이 들려 내려올 것이오. 그때 야훼의 기운이 갑자기 내리덮쳐, 그대도 그들과 함께 신이 들려 아주 딴 사람이 될 것이오.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대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시오. 나도 뒤따라 그대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번제와 친교제를 드리리다. 나와 만날 때까지 7일간 기다리시오. 그 때에 가서 그대가 할 일을 가르쳐주겠소."
사울이 사무엘을 뒤에 두고 길을 떠나자, 하느님께서 그의 속마음을 새롭게 하셨고, 그 날로 이런 조짐이 모두 일어났다. 사울은 종을 데리고 그 언덕에 이르렀을 때, 과연 예언자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하느님의 기운이 사울에게 내리덮쳐 그도 신이 들려 그들과 한데 어울렸다. 그래서 사울을 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그가 예언자들과 함께 신들린 것을 보고는 서로 키스의 아들이, 저게 어찌 된 일이냐.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던가? 하며 수군거렸다. 거기에 있던 사람 하나가 "이들이 도대체 누구네 집 아들이냐?" 하고 묻는 바람에 "사울도 예언자들 중 하나더냐?" 하는 속담이 생겼다.
사무엘상 10:1-12,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사무엘상을 조금 더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사울은 다시 군졸들을 보내면서 "다윗을 침대째 들어 오너라. 내가 죽여버리겠다." 하였다. 군졸들이 와서 보니 침대에는 머리에 염소털로 짠 것을 씌워놓은 그 집의 수호신이 뉘어져 있었다. 사울이 미갈에게 "어쩌자고 이런 속임수를 써서 내 원수놈을 빠져 나가게 하였느냐?" 하고 야단치자 미갈이 아버지에게 "빠져 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고 꾸며대었다.
다윗은 이렇게 몸을 피하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사울이 자기에게 한 일을 고하였다. 그는 사무엘과 함께 나욧으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사울은 다윗이 라마의 나욧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군졸들을 보내어 그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보니 예언자들 한 무리가 사무엘 앞에서 신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사울의 군졸들에게도 하느님의 신이 내려,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버렸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고 또 군졸 한 무리를 보냈으나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는 3번째로 다시 군졸들을 보냈으나 그들도 신들린 상태에 빠져버렸다.
할 수 없이 사울 자신이 라마를 향해 나섰다. 그가 세구라는 곳에 있는 큰 물웅덩이에 이르러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웬 사람이 라마에 있는 나욧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라마에 있는 나욧으로 가고 있는데, 그에게도 하느님의 신이 내려 라마에 있는 나욧까지 줄곧 신들린 상태로 걸어갔다. 사울도 옷을 벗어 던지고 사무엘 앞에서 신들린 상태에 빠져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사울도 예언자들 중의 하나더냐!"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사무엘상 19:15-24, 공동번역성서

그런데 자세히 보면 희한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자의 기록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이런 속담이 생겼다 되어 있고, 후자의 기록은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사자들을 보낸 후에 이런 속담이 생겼다 되어 있다. 또 마지막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양쪽이 완전히 다르며, 이외에 세부사항들 또한 다 다르다.

3.1.11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겐 아들이 몇 명일까?

(사무엘상 17:12, 공동번역성서) 그 때 유다 베들레헴에 이새라는 에브랏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다윗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 8형제를 둔 이새는, 사울이 왕노릇 할 무렵에 이미 나이가 많았다.

(사무엘상 17:14, 공동번역성서) 다윗은 막내였다. 세 형들은 사울을 따라갔고

(역대기상 2:13, 공동번역성서) 이새가 낳은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맏아들 엘리압, 둘째 아비나답, 셋째 시마,

(역대기상 2:14, 공동번역성서) 넷째 느다넬, 다섯째 라때,

(역대기상 2:15, 공동번역성서) 여섯째 오셈, 일곱째 다윗.

전자에서는 다윗이 8번째 아들이며 이새에게 아들이 8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후자에서는 다윗이 7번째였고 아들은 모두 7명이라고 한다.

3.1.12사울의 가족과 관련된 오류

(사무엘상 14:49, 공동번역성서) 사울에게는 세 아들, 요나단, 이스위, 말기수아와 큰딸 메랍과 작은딸 미갈이 있었다.

(사무엘상 14:50, 공동번역성서) 사울의 아내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이었다. 그의 사령관은 삼촌 넬의 아들 아브넬이었다.

(사무엘상 14:51, 공동번역성서) 사울의 아버지 키스와 아브넬의 아버지 넬은 아비엘의 아들이었다.

이제 다음을 보자.

(역대기상 9:39, 공동번역성서) 넬은 키스를 낳았고 키스는 사울을 낳았다. 사울은 요나단, 말기수아, 아비나답, 에스바알을 낳았다.

사무엘상 14장에서는 사울의 아들이 3명이라 하고 역대기상 9장에서는 4명이라 한다. 또한 넬이 사울의 숙부인 동시에 사울의 할아버지로 나온다.

3.1.13다윗은 몇 년간 헤브론을 다스렸나?

그는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유다 가문의 왕노릇을 했다. (사무엘 하 2:11, 공동번역성서)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는 33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사무엘 하 5:5,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헤브론에서의 다윗의 통치가 7년하고도 6개월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40년이다.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다. (열왕기상 2:11, 공동번역성서)

여기에서는 7년으로, 전자의 기록과 비교할 때 6개월의 차이가 발생한다.

3.1.14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은 몇 명인가?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자리를 옮긴 뒤 후궁들을 더 얻어 아들딸을 많이 낳았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삼무아, 소밥, 나단, 솔로몬, 이브할, 엘리수아,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리아다, 엘리벨렛이었다. (사무엘 하 5:13-16, 공동번역성서)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은 아래와 같다. 시마, 소밥, 나단, 솔로몬. 이 넷은 암미엘의 딸 바쎄바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이브할, 엘리사마, 엘리벨렛, 노가,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리아다, 엘리벨렛 등 아홉을 더 낳았는데, 이들이 모두 다윗의 적자들이다. 그 밖에 후궁들이 낳은 서자들이 있었고, 다말이라는 공주도 있었다. (역대상 3:5-9, 공동번역성서)

사무엘 하에는 노가가 빠져 있다. 그리고 역대기상에선 엘리벨렛이 2명 나온다. 사무엘하와 역대기상을 비교하면 사무엘하의 족보가 역대기상의 것보다 2명이 모자라게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3.1.15다윗이 조사한 인구 수는 모두 몇 명인가?

요압이 왕에게 보고한 총 민병대 수는 칼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에 80만, 유다에 50만이었다. (사무엘 하 24:9, 공동번역성서)

보다시피 칼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에는 80만, 유다에는 50만이라 한다.

 

병적 조사한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했다.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110만이 있었고 유다에는 47만이 있었다. (역대기상 21:5, 공동번역성서)

여기서는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110만, 유다에는 47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1.16다윗이 죽인 아람 군사 수는 몇 명인가?

아람 군은 진을 치고 다윗 군과 맞붙어 싸웠으나, 마침내 이스라엘군에게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다윗은 아람 병거대 700명과 기병대 40,000명을 무찌르고 적의 사령관 소박을 쳐죽였다. (사무엘하 10:17-18, 공동번역성서)

아람 군은 대진하고 있는 다윗을 맞아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이스라엘군에게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다윗은 아람 군 병거병 7,000과 보병 40,000을 죽이고 사령관 소박도 쳐죽였다. (역대기상 19:17-18, 공동번역성서)

전자의 기록은 700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후자는 7,000명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이건 반올림이라고 해명할 수도 없다.

3.1.17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사무엘하 8:13, 공동번역성서) 다윗은 돌아오는 길에 소금 골짜기에 사는 에돔 사람 18,000명을 쳐죽여 이름을 떨치고,

(역대기상 18:12, 공동번역성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사해 골짜기에 사는 에돔 사람 18,000명을 쳐죽이고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전자는 다윗이, 후자는 다윗의 신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1.18성경의 뇌물 관련 기록

너희는 뇌물을 받지 마라. 뇌물은 멀쩡한 눈을 가려 올바른 사람들의 소송을 뒤엎는다. (탈출기 23:8, 공동번역성서)

'뇌물을 받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신명기 27:25, 공동번역성서)

위선자의 무리는 그 씨가 마르고, 뇌물을 좋아하는 자의 천막은 타버린다네. (욥기 15:34, 공동번역성서)

모리배는 집안에 해를 끼치고, 뇌물을 멀리하는 사람은 복된 삶을 누린다. (잠언 15:27, 공동번역성서)

임금이 정의로 다스리면 나라가 튼튼히 서지만, 마구 긁어들이면 나라가 망한다. (잠언 29:4, 공동번역성서)

아무리 지혜로워도 탐욕을 내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뇌물을 받았다가는 망신을 당한다. (코헬렛 7:7, 공동번역성서)

 

그런데, 잠언의 기록은 이와 상반된다.

뇌물은 요술방망이 같아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 없다. (잠언 17:8, 공동번역성서)

다만 이 구절의 전체적인 문장은 '뇌물을 쓰는 사람의 눈에는 뇌물이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이 없다. (‭잠언‬ ‭17‬:‭8‬ RNKSV)' 이다.

은밀히 안기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몰래 바치는 뇌물은 거센 분노를 사그라뜨린다. (잠언 21:14, 공동번역성서)

뇌물을 받지 말라 하면서 뇌물을 주는건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것이 뇌물을 주라는 권장은 아니라고 본다. 잠언의 전체적인 기조는 이 문서 첫 6절의 성경구절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반적인 사회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서술은 오히려 앞뒤도 안맞을 뿐더러 오히려 권장하는것처럼 충분히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대목임엔 분명하다.

3.1.19. 시드키야는 여호야긴(여호야킴)의 삼촌일까 아들일까?

(열왕기하 24:17, 공동번역성서) 바빌론 왕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마따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키야로 바꾸도록 하였다.

(역대기상 3:16, 공동번역성서) 여호야킴의 아들은 여고니야요, 그 아들은 시드키야이다.

삼촌이면서 아들이다(…)

무슨 족보가 이래

 성경에 자주 보이는 근친상간 문제는 차제하더라도 생물학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이다.

3.1.20. 여호람은 언제 왕이 되었을까?

(열왕기상 22:52, 공동번역성서) 아합의 아들 아하지야는 유다 왕 여호사밧 제17년에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위에 올라 2년간 다스렸다.

(열왕기하 3:1, 공동번역성서) 유다 왕 여호사밧 제18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위에 올라 12년을 다스렸다.

 

17년에서 2년이 경과하면 19년이지 18년이 아니다. 다만 햇수로 세면 모순이 해결된다.

3.1.21. 히스기야 왕 시절의 년도 표기 문제

(열왕기하 18:9, 공동번역성서) 히즈키야 왕 제4년, 곧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7년에 아시리아 왕 샬마네셀이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열왕기하 18:10, 공동번역성서) 3년 만에 함락시켰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것은 히즈키야 제6년, 곧 이스라엘 왕 호세아 제9년이었다.

 

불과 1절 차이인데도 모순이 생기고 있다. 히스기야 4년+3년=히스기야 7년이 되어야 하며, 호세아 7년+3년=호세아 10년이라야 맞다.

다만, 이 점도 햇수로 3년일 수 있다. 예수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2일 뒤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사흘 만에라고 하는 예시를 보더라도.

3.1.22. 레위 자손들의 족보 불일치

우선 다음을 보자.

(대상 6:16)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며

(대상 6:17) 게르손의 아들의 이름은 립니와 시므이요

(대상 6:18)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대상 6: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말리와 무시라 이 레위 사람의 집들이 그 종족을 따라 이러하니

(대상 6:20) 게르손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 립니요 그 아들은 야핫이요 그 아들은 심마요

(대상 6:21) 그 아들은 요아요 그 아들은 잇도요 그 아들은 세라요 그 아들은 여아드래며

(대상 6:22) 그핫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 암미나답이요 그 아들은 고라요 그 아들은 앗실이요

(대상 6:23) 그 아들은 엘가나요 그 아들은 에비아삽이요 그 아들은 앗실이요

(대상 6:24) 그 아들은 다핫이요 그 아들은 우리엘이요 그 아들은 웃시야요 그 아들은 사울이며

(대상 6:25) 엘가나의 아들들은 아마새와 아히못이라

(대상 6:26) 엘가나로 말하면 그 자손은 이러하니 그 아들은 소배요 그 아들은 나핫이요

(대상 6:27) 그 아들은 엘리압이요 그 아들은 여로함이요 그 아들은 엘가나며

(대상 6:28) 사무엘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엘이요 다음은 아비야며

(대상 6:29) 므라리에게서 난 자는 말리요 그 아들은 립니요 그 아들은 시므이요 그 아들은 웃사요

(대상 6:30) 그 아들은 시므아요 그 아들은 학기야요 그 아들은 아사야더라

이 기록에 따르면 에비아삽은 레위로부터 7대, 앗실은 8대, 다핫은 9대이다. 엘가나는 6대다.(그핫 자손) 또 야헛은 레위로부터 4대, 심마는 5대, 그리고 세라는 8대이다.(게르손 자손) 또한 여기서 말리는 레위로부터 3대다. 립니는 4대이다.(므라리 자손)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구절들로 족보를 따져 보면 희한한 일이 생긴다.

(대상 6:31)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대상 6:3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대상 6:33)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대상 6:34)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여로함은 엘리엘의 아들이요 엘리엘은 도아의 아들이요

(대상 6:35) 도아는 숩의 아들이요 숩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마핫의 아들이요 마핫은 아마새의 아들이요

(대상 6:36) 아마새는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아사랴의 아들이요 아사랴는 스바냐의 아들이요

(대상 6:37) 스바냐는 다핫의 아들이요 다핫은 앗실의 아들이요 앗실은 에비아삽의 아들이요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요』

(대상 6:38)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며』

(대상 6:39) 『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저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베레갸는 시므아의 아들이요

(대상 6:40) 시므아는 미가엘의 아들이요 미가엘은 바아세야의 아들이요 바아세야는 말기야의 아들이요

(대상 6:41) 말기야는 에드니의 아들이요 에드니는 세라의 아들이요

(대상 6:42) 아다야는 에단의 아들이요 에단은 심마의 아들이요 심마는 시므이의 아들이요

(대상 6:43) 시므이는 야핫의 아들이요 야핫은 게르손의 아들이요 게르손은 레위의 아들이며

여기서는 에비아삽은 레위로부터 5대, 앗실은 6대, 다핫은 7대이다. 엘가냐는 11대다. (그핫 자손) 또 야핫은 레위로부터 3대, 심마는 5대이며 세라는 8대다. (게르손 자손) 마지막으로 말리는 레위로부터 4대다. (므라리 자손) 에비아삽, 앗실, 다핫,엘가나,애핫, 말리의 대수가 틀렸다. 헤만과 아삽은 몇 대수나 차이가 나는데도 형제라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족보 자체가 둘 중 하나는 잘못되었거나 혹은 둘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23. 에스라와 느헤미야 기록의 모순

모순이 매우 많은 관계로(...) 일단 구절 내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 양측의 모순이 발견되는 구절은 모순, 아닌 부분은 o표시하였다.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의 자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바로스 자손이 이천 일백 칠십 이 명이요 (o) 스바댜 자손이 삼백 칠십 이 명이요(o) 아라 자손이 칠백 칠십 오 명이요 (모순1)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 십 이 명이요 (모순2)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삿두 자손이 구백 사십 오 명이요 (모순3)삭개 자손이 칠백 육십 명이요 (o) 바니 자손이 육백 사십 이 명이요(모순4) 브배 자손이 육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5) 아스갓 자손이 일천 이백 이십 이 명이요(모순6)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 육십 육 명이요 (모순7) 비그왜 자손이 이천 오십 육 명이요(모순8) 아딘 자손이 사백 오십 사 명이요 (모순9)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 팔 명이요(o) 베새 자손이 삼백 이십 삼 명이요 (모순10) 요라 자손이 일백 십 이 명이요 (o) 하숨 자손이 이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11) 깁발 자손이 구십 오 명이요 (o) 베들레헴 사람이 일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16) 느도바 사람이 오십 육 명이요(모순16123+56=179) 아나돗 사람이 일백 이십 팔 명이요 (o) 아스마웨??(아스마웹) 자손이 사십 이 명이요 (o)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o)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 이십 일 명이요(o) 믹마스 사람이 일백 이십 이 명이요 (o)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 이십 삼 명이요 (모순12) 느보 자손이 오십 이 명이요 (o) 막비스 자손이 일백오십육명이요(모순13-느혜미야엔 없음) 다른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삼백 이십 명이요 (o) 로드와 하딧과오노 자손이 칠백 이십 오 명이요(모순14) 여리고 자손이 삼백 사십 오 명이요 (o) 스나아 자손이 삼천 육백 삼십 명이었더라 (모순15) (에스라 2장 1절-35절)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바로스 자손이 이천 일백 칠십 이 명이요(o) 스바댜 자손이삼백 칠십 이 명이요(o) 아라 자손이 육백 오십 이 명이요(모순1)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 팔백 십팔 명이요(모순2)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삿두 자손이 팔백 사십 오 명이요 (모순3) 삭개 자손이 백 육십 명이요 (o) 빈누이 자손이 육백 사십 팔 명이요(모순4) 브배 자손이 육백 이십 팔 명이요 (모순5) 아스갓 자손이 이천 삼백 이십 이 명이요(모순6)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 육십 칠 명이요(모순7) 비그왜 자손이 이천 육십 칠 명이요(모순8) 아딘 자손이 육백 오십 오 명이요(모순9)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 팔 명이요 (o) 하숨 자손이 삼백 십 팔 명이요 (모순11) 베새 자손이 삼백 이십 사 명이요 (모순10) 하립 자손이 일백 십 이 명이요 (o) 기브온 사람이 구십오 명이요 (o)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일백 팔십 팔 명이요 (모순16-188) 아나돗 사람이 일백 이십 팔 명이요 (o) 아스마웨??(벧아스마웹) 사람이 사십 이 명이요 (o) 기럇여아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이 칠백 사십 삼 명이요(o) 라마와 게바 사람이 육백 이십 일 명이요 (o) 믹마스 사람이 일백 이십 이 명이요 (o)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일백 이십 삼 명이요(모순12) 기타 느보 사람이 오십 이 명이요 (o) 기타 엘람 자손이 일천 이백 오십 사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삼백 이십 명이요 (o) 여리고 자손이 삼백 사십 오 명이요 (o)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 이십 일 명이요 (모순14) 스나아 자손이 삼천 구백 삼십 명이었느니라 (모순15) (느혜미야 7장 6절-38절)

그리고 다음,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 칠십 삼 명이요 임멜 자손이 일천 오십 이 명이요 (o) 바스훌 자손이 일천 이백 사십 칠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일천 십 칠 명이었더라 (o)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 사 명이요 (o)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일백 이십 팔 명이요(모순17)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구 명이었더라(모순18)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여기까지 일치)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 삼백 구십 이 명이었더라 (o)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육백 오십 이명이요 (모순19)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 (에스라 2장 36절-64절)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 칠십 삼 명이요 임멜 자손이 일천 오십 이 명이요 (o) 바스훌 자손이 일천 이백 사십 칠 명이요 (o) 하림 자손이 일천 십 칠 명이었느니라 (o) 레위 사람들은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 사 명이요 (o)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일백 사십 팔 명이요(모순17)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팔 명이었느니라 (모순18)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살매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비스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바슬릿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느니라 (여기까지 일치)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소베렛 자손과 브리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핫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몬 자손이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 삼백 구십 이 명이었느니라 (o)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육백 사십 이 명이요 (모순19) 제사장 중에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 (느혜미야 7장 39절-65절)

마지막으로,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모순20) 말이 칠백 삼십 육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o)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더라 (o)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모순21)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그 본성들에 거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그 본성들에 거하였느니라 (에스라 2장 65절-70절)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사십 오 명이요 (모순20) 말이 칠백 삼십 육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o)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느니라 (o)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방백은 금 일천 다릭과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 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다릭과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 칠 벌을 드렸느니라 (모순21)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이 다 그 본성에 거하였느니라 (느혜미야 7장 67-73절)

3.1.24. 아하지야가 왕이 될 대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

아하지야는 22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년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 아달리야였다. (열왕기하 8:26)

아하지야는 42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년간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오므리의 손녀로서 이름은 아달리야라고 하였다. (역대기하 22:2)

열왕기하에는 22세로, 역대기하에서는 42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3.1.25. 유다 왕 아히시야는 어떻게 죽임당했을까?

유다 왕 아하지야는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벳하깐 길로 도망쳤다. 예후는 그의 뒤를 추적하며 "저놈도 쳐죽여라." 하고 명령하였다. 아하지야는 병거를 타고 이블르암 근처의 고갯길을 달리다가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고 므기또로 도망하였으나 거기에서 죽었다. (열왕기하 9:27, 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아합 가문의 죄를 다스리다가, 유다 군 장교들과 아하지야를 모시는 왕의 조카들을 만나 죽였다. 아하지야는 사마리아에 가서 숨어 있다가 끌려왔다. 예후가 그를 죽이자 사람들은 "그래도 한마음으로 야훼만 찾던 여호사밧의 아들인데." 하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마침내 아하지야 집안에는 왕노릇 할 만큼 강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역대기하 22:8-9, 공동번역성서)

열왕기하의 기록에서는 예후가 직접 쫓아가서 죽였다 되어 있고, 역대기하에서는 예후의 군사들이 예후에게 끌고 와서 죽였다 되어 있으며, 죽임을 당한 지역도 서로 차이가 있다.

3.1.26. 예후의 자손은 4대 동안 왕을 하리라?

(열왕기하 10:30, 공동번역성서) 야훼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마음에 들도록 일을 잘하였다. 나의 뜻대로 아합 가문을 잘 처치하였다. 그러므로 네 후손이 4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리라."

예후를 대수에 포함하면 예후의 3대손까지 이스라엘의 국왕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후 내용에서 정말 예후의 3대손까지 왕이 되었는가 확인해보자.

(열왕기하 10:35, 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돌아가 사마리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열왕기하 13:1, 공동번역성서)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아하지야의 아들 요아스 제23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17년 동안 다스렸다.

(열왕기하 13:9, 공동번역성서) 여호아하즈는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돌아가 사마리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아스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열왕기하 13:10, 공동번역성서) 여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 제37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16년 동안 다스렸다.

(열왕기하 13:13, 공동번역성서) 여호아스는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로 돌아가 사마리아에 있는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여로보암이 왕위에 올랐다.

우선 여기까지 나온 대수는 예후-여호아하즈-여호아스의 3대이다.

 

(열왕기하 14:23, 공동번역성서)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지야 제15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41년간 다스렸다.

(열왕기하 14:29, 공동번역성서) 여로보암이 선조들과 함께 잠들어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곁에 안장되자, 그의 아들 즈가리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열왕기하 15:12, 공동번역성서) 야훼께서 예후에게 "네 자손이 4대까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으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요아스 이후로 2대가 더 나온다. 즉, 예후-여호아하즈-요아스-여로보암-즈가리야로 예후를 포함하면 5대가 된다. 사실은 예후를 뺀 4대까지 왕이 된다는 구절이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긴 하다.

3.1.27야훼는 아사에게 평안을 주었을까?? 전쟁을 주었을까??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전쟁을 하였다. (열왕기상 15:16, 공동번역성서)

나라가 평온하였기 때문에 그(아사)는 유다 성읍들을 요새로 만들 수 있었다. 야훼께서 평화를 주셔서 여러 해 동안 전쟁이 없었다. 그는 유다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 야훼를 찾았더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우리가 당신을 찾았으므로 이 땅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런 때를 놓치지 말고 성읍들을 다시 세우자. 성벽을 둘러쌓고 성문을 만들어 달고 빗장을 만들어 꽂자." 그들은 성 쌓는 일을 잘 마치게 되었다. (역대기하 14:5-6, 공동번역성서)

이후 아사 왕 제35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역대기하 15:19, 공동번역성서)

열왕기상과 역대기하의 기록이 서로 모순된다. 

전쟁과 평화??

3.1.28. 미칼의 자녀

사무엘하에는 다윗의 아내 미칼에게 죽을 때까지 자녀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그 뒤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사무엘하 6:23, 공동번역성서)

역대기에는 미칼이 자녀를 두었다고 나와서 상호모순이 된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다윗이 언약궤를 되찾으며 춤추는 모습을 본 미칼이 웃자 저주 

나 너랑 안놀거임 쀼쀼

 처럼 한 말이므로 그 이전에는 자녀를 가졌을 수 있다. 즉, 한 구절만을 가지고 해석을 확대한 셈.

마소라 본문 사무엘하 21장 8절에서는 미칼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드리엘에게 낳아주었다"는 것은 사울의 큰딸 메랍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서기관의 필사 오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마소라 본문에 집착하는 유대 전통에서는, 미칼이 메랍의 다섯 아이를 입양해서 양육했다고 한다(b. Sanh. 19b).

그리고 사무엘하 21:8에서 다른 판본에서는 사무엘의 다섯 아들이 전무 메랍의 자식이라고 하지만, 킹제임스판에서만 미갈의 자식이라고 되어있다. 성경 판본끼리도 내용이 통일되질 않는다.

공동번역 - 왕은 사울이 아야의 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아르모니와 므비보셋, 사울의 딸 메랍이 므홀라 사람 바르질래의 아들 아드리엘에게 낳아준 아들 다섯을 잡아다

개역개정 -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NIV -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KJV - But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whom she bare unto Saul, Armoni and Mephibosheth; and the five sons of Michal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brought up for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NASB - So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Armoni and Mephibosheth whom she had borne to Saul, and the five sons of Merab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3.1.29솔로몬은 하람에게 보수를 얼마나 주었을까?

(열왕기상 5:11,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솔로몬은 히람 왕실의 양식으로  20,000섬과 찐기름 20섬을 공급하였다. 솔로몬은 해마다 이만큼씩 히람에게 보냈다.

(역대기하 2:9, 공동번역성서) 채벌 기술자들에게 본인은 양곡을 대어주겠습니다.  20,000섬, 보리 20,000섬, 포도주 20,000말, 기름 20,000말을 당신의 일꾼들에게 대어주겠습니다."

동일한 이야기인데 보수가  20,000석만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르다.

3.1.30. 유대 후손 지파의 성읍들

네겝 쪽으로 에돔과 접경하고 있는 유다 후손 지파 남단 성읍들은 아래와 같다. 캅스엘, 에델, 야굴, 키나, 디모나, 아드아다, 케데스, 하솔, 잇난, 지브, 텔렘, 브알롯, 하솔하다따, 크리욧헤스론 곧 하솔, 아맘, 세마, 몰라다, 하살가따, 헤스몬, 벳벨렛, 하살수알, 브엘세바, 비즈요드야, 바알라, 이임, 에셈, 엘돌랏, 그실, 호르마, 시글락, 마드만나, 산산나, 르바옷, 실힘, 엔림몬. 이렇게 모두 29성과 그 변두리 천막촌들이다. (여호수아 15:21-32)

모두 35개의 성읍인데 이를 29개의 성읍이라 말하고 있다.

천막촌들인가 보지

3.1.31솔로몬의 궁전을 지을 때 감독 수는 몇 명인가?

(열왕기상 5:29, 공동번역성서) 솔로몬은 또 짐 나르는 사람 70,000만과 돌깨는 사람 80,000을 산악 지대에 두었는데

(열왕기상 5:30, 공동번역성서) 그 외에도 일을 감독하는 솔로몬의 고급 관리 3,300명이 있었다.

(역대기하 2:17, 공동번역성서) 그 중에서 70,000명을 짐꾼으로 징용하고 80,000명은 산에서 돌 떠내는 일을 시켰다. 그리고 그 일꾼들을 부리는 감독으로 3,600명을 뽑았다.

성경의 기록대로라면 300명의 차이가 난다.

3.1.32솔로몬의 신전에 쓰일 놋쇠 바다(물탱크)의 두께는?

(열왕기상 7:26, 공동번역성서) 바다 모형의 두께는 한 뼘이며, 그 가장자리 테는 나리꽃 무늬로 잔의 테처럼 만들어졌다. 이 바다 모형에는  2,000말을 담을 수 있었다.

(역대기하 4:5, 공동번역성서) 바다 가장자리의 두께는 한 뼘 나비였다. 그 가장자리는 잔의 가장자리와 비슷하게 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바다 모형에는 물을 3,000말 담을 수 있었다.

동일한 이야기에 대해 하나는 2,000말, 하나는 3,000말이라 한다.

3.1.33. 마아가(미가야)는 누구의 딸인가??

(열왕기상 15:1-2, 공동번역성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18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왕의 어머니는 압살롬의 딸인 마아가였다.

(역대기하 13:1-2, 공동번역성서)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된 것은 여로보암 왕 제18년이었다. 그는 3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로서, 이름은 미가야라고 하였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보다시피 부친의 이름이 다르다.

3.1.34엘리야의 수수께끼 1

엘리야의 이야기도 어설픈 부분이 상당하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아하시야가 왕이 병이 들어 엘리야를 찾는데, 50인 대장에게 엘리야를 불러 오도록 명한다. 50인 부장은 즉시 부하 병사 50명을 인솔하고 엘리야를 찾아간다.

50인 대장을 부하를 딸려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들이 으로 올라가 보니, 엘리야는 마침 산 위에 앉아 있었다. 대장이 "하느님의 사람이여, 당장 내려오시오. 어명이오." 하고 외치자, 엘리야는 그 50인 대장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다.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너 대장과 함께 너희 50인 부대를 삼켜버릴 것이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 내려와 대장과 함께 그 50인 부대를 삼켜버렸다. (열왕기하 1:9~10, 공동번역성서)

이런 짓이 2번 반복되어 순식간에 102명의 장병들이 불에 타죽는다. 2번씩이나 파견됐던 장병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단 1명도 없다고 성경에 쓰여 있다. 그런데 3번째 파견된 50인 대장의 말을 살펴보면

왕은 3번째로 50인 대장을 부하를 딸려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는 에 올라가서 엘리야를 만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소인과 이 군인 50명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미 2차례나 하늘에서 이 내려와 50인 부대를 대장과 함께 삼켜버렸습니다. 이제 이 목숨만은 아껴주십시오." (열왕기하 1:13~14, 공동번역성서)

성경에 따르면 첫 번째와 2번째, 도합 102명이 모두 하느님의 불에 타 죽고,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바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3번째의 50인 대장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고 있다. 앞서 간 부대원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유추가 가능할 수 있으나,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타 죽은 것'은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누군가 제3의 목격자가 있었을까? 아니면 엘리야 자신의 증언일까? 혹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광경을 보았다는 추측도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3.1.35엘리야의 수수께끼 2

열왕기에 기록된 엘리야의 기적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되는 부분이 있다. 열왕기상 18장 부근을 보면, 엘리야 한 사람이 갈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여 명과 기적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자기 앞으로 다가오라고 말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허물어진 야훼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엘리야는 일찍이 야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신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의 수대로 돌을 12개 모았다. 엘리야는 그 돌 12개로 야훼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는 곡식 2가마 정도 들어갈 만큼 큰 도랑을 팠다.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물을 4동이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그는 그렇게 한 번 더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3번을 붓자 이 제단 주위로 넘쳐흘렀고 옆 도랑에 가득 괴었다. (열왕기상 18:30~35, 공동번역성서)

돌로 단을 쌓고, 단 둘레에 곡식 2가마가 들어갈 만큼의 도랑을 팠다고 한다. 그리고 물 12통을 길어다가 제물과 나무에 부었더니, 모두가 물에 푹 젖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을 열심히 부어댄 것은, 젖은 상태에서 불이 붙는 장면을 연출하여 더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기 위함인데, 지금 이 시기 중동 지방은 성경에 따르면 엘리야의 예언에 따라 야훼에 의하여 3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동네는 우물의 깊이만도 자그마치 200~300m가 넘고, 가뭄이 아니더라도 와디(wadi=wady)라 하여 물 없는 뿐인 살벌한 동네다. 이런 지방에서 3년의 가뭄 뒤에 12통씩이나 되는 물이 어디서 났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인 아합조차도 마시고 세수할 물이 없어서 찾아 헤맸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부은게 사실 물이 아니라 기름이었다는 개드립같은 주장도 있다(...) 다만 가르멜 산의 위치가 지중해 연안의 바닷가이니, 바닷물을 길어다 부었다고 하면 설명이 된다.

일부 기독교계의 해석은, 갈멜 산이 거대했고 거의 모든 지형이 나무와 숲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어디선가 물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본다. 이스라엘은 원래 부터 6개월 동안 건기였고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곳인데 그런 이스라엘 중에서도 갈멜 산은 특히나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3년 동안 물이 없었어도 가축이나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 당연히 그 정도는 물을 얻어낼 순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강이 그리 크지 않아서 말라 붙어도 곳곳에서 웅덩이가 숲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다만 엘리야 당시의 갈멜 산의 기후적 특징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외에도 이상한 대목이 또 있는데,

그들은 준비한 황소를 받아 잡아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오, 바알이여, 대답하소서." 그러나 대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예언자들은 자기네가 만든 제단을 돌면서 절뚝거리는 춤을 추었다.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바알은 이니까, 더 크게 불러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 중인지, 아니면 여행 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보아라." 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자기네 의식을 따라 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렸다. 한낮이 지나 제사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커녕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열왕기상 18:26~29, 공동번역성서)

시기상 엘리야의 차례가 되어 번제물에 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기 전에, 바알의 예언자들이 먼저 나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사를 지내도 바알의 응답이 없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바알 예언자들이 제사 지낼 때,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에 엘리야가 백성들을 시켜 1. 단을 쌓고 2. 도랑을 파고 3. 나무를 준비하고 4.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5. 통 4개로 (없는) 물을 3번 길어다 붓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분명히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은 지났을 텐데, 다음을 보자.

제사 드리는 시간이 되어 예언자 엘리야가 앞으로 나와서 외쳤다. "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이제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제가 한 모든 일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 한 것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주십시오. 응답해 주십시오. 야훼여,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열왕기상 18:36~37, 공동번역성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은 벌써 지났건만, 아직도 그 제사 드리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임 슬립

 여기에 대해서는 어차피 상대방 하는 일이 뻘짓이라서 의도대로 안 될 걸 아니까, 미리 준비했다가 저녁 제사 시간 때 딱 내놓았을 수도 있다는 식의 해석도 나오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분명히 저녁 제사 드릴 시간에 이르러서야 1. 단을 쌓고 2. 도랑을 파고 3. 나무를 준비하고 4.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5. 통 4개로 (없는) 물을 3번 길어다 붓는 작업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서술에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일 뿐이다.

3.1.36. 므나쎄의 죽음

구약 시절 유다 왕국의 왕 므나쎄에 대한 기록이 다르다.

(열왕기하 21장 16절, 공동번역성서)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온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므나쎄의 나머지 사적과 행적,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므나쎄가 그 선조들과 같이 잠들자, 우짜 정원이라고도 하는 왕실 정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므나쎄가 마음을 고쳤다는 기록이 전혀 없이, 그냥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기하의 기록은 다르다.

(역대기하 33장 11~16절, 공동번역성서) 야훼께서는 아시리아 왕의 군대를 끌어들이셨다. 아시리아 군 장교들은 므나쎄를 갈고리로 끌어내어 놋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곤경에 빠지자 므나쎄는 자기의 하느님 야훼께 빌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앞에 굴복하고 빌었다. 그러자 야훼께서는 마음이 움직이시어 그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앉게 해주셨다. 므나쎄는 그제야 야훼야말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그는 기혼 서쪽 골짜기에다가, 다윗 성 물고기문에 이르기까지 외곽성을 쌓아올렸다. 오벨 밖으로 돌아가며 성을 아주 높이 쌓아올렸고, 유다의 요새화된 성마다 군대와 장군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신상들을 치워 없애버렸다. 야훼의 성전에 있던 우상을 떼어내고 야훼의 성전 언덕과 그 밖에 예루살렘에 세웠던 제단들을 허물어 성 밖에 내다 버렸으며, 야훼의 제단을 세운 다음 그 위에다 친교제물과 감사제물을 바치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예배하라고 유다인들에게 일렀다.

므나쎄가 바빌론에 잡혀갔다 돌아온 뒤 회개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는, 열왕기하의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사실은 므나쎄가 둘?

3.1.37. 이사야서의 예수 탄생 예언?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사야서 7장 13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탄생이 구약에서부터 이미 예언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을 살펴보자.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서 7:13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서의 해당 구절을 살펴보자.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서 1:21-23

보다시피 마태오는 이사야에서 예언했던 일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구약에 나온 해당 구절만 글자 그대로 볼 때는 예수에 대한 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통 기독교계에서는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언급할 때 이사야서 7장 13절만을 읽게 하는데, 그 뒤로 계속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해당 구절은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자.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12]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13]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너와 너의 겨레와 너의 왕실을 치게 하실 터인즉, 그 날은 에브라임이 유다와 갈라지던 날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불행한 날이 되리라. 이사야서 7:16

보다시피, 이사야서 7장 13절에서 임마누엘이라 언급된 아기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 전에 두 왕, 즉 아람왕 르신과 에브라임왕(이스라엘)이 당시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다고 유다왕 아하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뒤로도 임마누엘이라 이름 붙여진 아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야훼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다. "너는 큰 판을 가져다 거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라고 새겨라." 그래서 나는 믿을 만한 증인으로 사제 우리야와 여베레키야의 아들 즈가리야를 세웠다. 그리고 내가 여예언자를 가까이하였더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야훼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다. "이 아기의 이름을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라 하여라. 이 아기가 아빠 엄마라 부를 줄 알기도 전에 사람들이 다마스쿠스의 보화와 사마리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아시리아 왕에게 가져다 바치리라." 이사야 8:1-4

이후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인데, 이 '아들'은 예수가 아닌 제사장 이사야의 아들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라는 아이다. 또한 이 아이가 크기 전에 다마스쿠스와 사마리아를 앗수르가 쳐서 없앤다는 이야기며, 동정녀가 아니고 자기 아내와 동침한 결과다.

다만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이 서술은 개신교에서도, 가톨릭에서도 문자 그대로는 아하즈에게 주는 약속의 표지라고 본다. 다만 후술할 4중적 해석법 등의 성서해석과 주해를 도입해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이 구절에서 동정 마리아에 의한 예수 탄생의 '예표'를 해석하였다고 보는 것. 문제는 이 구절이 기독교계에서 너무나 유명해지다 보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문자 그대로 예고한 것이라고 오해하게 된 것이다.

3.1.38. 예수의 족보 문제

마태오 복음서과 루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가 서로 다르다. 두 사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장문의 족보를 나열한다.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유대인의 믿음과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으로 본다. 여기까지만 일치한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야곱'이라고 하는데 루카 복음서는 '헬리'라고 말한다. 두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족보라는 게 고작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벌써 할아버지부터가 다르다. 그 위로 다윗이 나올 때까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계보가 다른 족보라는 것은, 대부분 성서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성경 왜곡의 역사>의 저자 바트 어만이 저술한 <예수 왜곡의 역사> 63쪽을 보면, 루카 자신이 예수의 족보라고 밝히고 있다고 적고 있다. 바트 어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3대를 빼버리는 등 무리하게 14대로 맞춘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를 가지고, 이런 방식이 유대인들의 정통 족보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를 보였다. 더욱이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전근대였던 만큼, 그 시대에 살았던 저자가 여자의 족보를 적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3.1.39이집트 피난의 모순

예수의 갓난 아기 시절 이집트 피난과 관련해서도 이상한 점이 있다.

박사들이 물러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오 복음서 2:13~15)

보다시피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가 태어난 후 이집트로 도망을 쳐서 헤로데가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고 한다. 그럼 루카 복음서를 살펴보자.

여드레째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 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루카 복음서 2:21~22)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태어난 후 8일만에 율법이 정한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루살렘(헤로데 왕의 도성)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보다시피 내용이 불일치한다. 한편 일부 기독교 해석에서는 율법이 정한 정결 예식이 다 끝난 후에 동방박사들이 도착하고 예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 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설명도 이상하다. 성경의 기록상 예수가 태어나고,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만난 것은 분명히 베들레헴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들의 주장대로라면, 1.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가, 2. 8일 후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3. 도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동방박사들을 만났다는 것이 된다. 모순이 된다는 것.

3.1.40. 복음서 행적의 모순

4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행적이 불일치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 예수의 성전 정화 이야기가 앞부분(2장 13~25절)에 나오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뒷부분(21장 12~13절)에 나오므로 상당한 시차가 발생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 지역에서만 가르쳤고, 유대 지방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유일하게 생애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갔을 뿐이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와 유대에서 비슷하게 가르침을 펼쳤다'고 나온다. 한편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주로 예루살렘'에서 설교했고, 갈릴래아에서의 설교는 드물었다고 나온다. 이는 전승 자료를 가지고 복음사가들이 서술한, 지향점과 방점을 두고자 하는 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데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이 드물었다는 것은, 고향에서의 예수 멸시를 강조하는 해석인 식이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사건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 쓰인다고도 한다. 또는 복음사가들이 수집한 자료를 일정한 '의도'에 따라 배열할 때, 그 의도 때문에 차이가 났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를 공생애의 시작에 둔 것은 예수의 모든 행적을 집약적으로 표출하는 사건이 성전 정화라고 생각한 것이며,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를 공생애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둔 것은 이러한 행적 서술로 예수의 모든 공생애 행적을 마무리하고자 한 까닭이다. 더욱이 예수의 성전 정화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3.1.41세례 받은 예수는 다음 날 어디에 있었나?

마태오 복음서마르코 복음서루카 복음서, 즉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에 광야로 나가고 악마에게 시험을 받는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고 '곧' 광야로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예수가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에게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았고(1:29~34), 이튿날 예수를 다시 보고는 예수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언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런 선언이 분명 이틑날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예수는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1:35~52), 대외적 활동을 시작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다(2:1~11).

3.1.42기적의 순서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카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서 2장 11절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서 2장 23절
예수께서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의 카나에 다시 가셨다. 거기에 고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파르나움에서 앓아 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셔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사정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 고관은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길에 마중 나와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전해 주었다. 그가 종들에게 자기 아이가 낫게 된 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1시에 열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돌아오신 뒤에 보여주신 2번째 기적이었다.
요한 복음서 4장 46~54절

이상하지 않은가? 첫 번째 기적이 있은 뒤 많은 표적이 있다고 해 놓고서, 2번째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갈릴래아에서의 2번째 기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본문에서는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돌아오신 뒤에 보여주신 2번째 기적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의 문장을 놓고 볼 때, 저 구절의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돌아온 뒤"는 단순히 시점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다만 서술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신 뒤 갈릴래아에서 보여주신 2번째 기적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야 정확하기 때문.

3.1.43. 야이로의 딸은 죽어 있었을까?

마르코 복음서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에게 찾아와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한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야이로라 하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마르코 복음서 5장 21~23절)

그러나 예수가 야이로의 집으로 따라가려는 찰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나타난다. 예수는 그녀부터 치료해준다.

군중 속에는 12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서 5장 25~34절

그 후 야이로의 집에서 하인들이 달려와, 예수에게 너무 늦었다며,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타이르고 야이로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살려낸다.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마르코 복음서 5:35~43

마태오 복음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다.
마침 그 때에 12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며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만 쳤다. 그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간 뒤에 예수께서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는 곧 일어났다. 이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마태오 복음서 9:18~26

마태오 복음서에서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은 후에 예수를 찾아간다. 여기서 야이로가 예수에게 바란 것은, 치료가 아니라 죽음에서 되살려주기를 바란 것이다. 

넌 이미 죽어있다

3.1.44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준 여인 일화 이야기의 불일치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로 씻은 여인의 일화는 성경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로, 종종 목사들의 설교에 등장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를 포함한 공관복음서에서 그 내용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있다. 일단 각각 복음서에서 정황을 어찌 묘사하는지 살펴보자.

그 때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분개하여 "이렇게 낭비를 하다니! 이것을 팔면 많은 돈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텐데."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언제까지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하자 그들은 은전 30닢을 내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 26:6-16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거기 같이 있던 몇 사람이 매우 분개하여 "왜 향유를 이렇게 낭비하는가? 이것을 팔면 300 데나리온도 더 받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터인데!" 하고 투덜거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참견하지 마라.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으니 도우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 14:3-11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시몬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이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는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복음서 7:36-48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거기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여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1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300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 12:1-8

덧붙여,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요한 복음서 11:2)

보다시피 4복음서에서 말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다. 정리해보면,

1. 향유를 부은 여인

마태오 복음서: 신원미상의 한 여자

마르코 복음서: 신원 미상의 한 여자

루카 복음서: 그 동네에 죄인인 신원미상의 한 여자

요한 복음서: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

2. 장소

마태오 복음서: 베다니아의 문둥이 시몬의 집

마르코 복음서: 베다니아의 문둥이 시몬의 집

루카 복음서: 한 바리사이의 집

요한 복음서: 베다니아의 라자로가 사는 곳

3. 행위

마태오 복음서: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부음

마르코 복음서: 매우 값진 향유 곧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머리에 부음

루카 복음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에 부음

요한 복음서: 비싼 향유를 가져다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음

4. 다른 사람의 반응

마태오 복음서: 제자들이(복수임)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책망함

마르코 복음서: 어떤 사람들이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책망함

루카 복음서: 주인인 바리사이가 "그 여자는 죄인인데!!" 하고 중얼거림

요한 복음서이스카리옷 유다가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함

5. 예수의 답변 혹은 반응

마태오 복음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고 예수는 그러지 않으므로, 그 여자가 좋은 행동을 하였다는 식의 이야기

마르코 복음서마태오 복음서와 동일 내용

루카 복음서: 빚진 자의 빚 탕감 예화를 들려주고, 여자에게 죄 사함의 은사를 베품

요한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마르코 복음서와 유사한 이야기

3.1.45. 예수 언행의 일관성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용서에 관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예수는 '완벽한 용서'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준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21~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7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7번뿐 아니라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런데 베드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고작 한 문단 앞에서 예수가 이미 용서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문단 앞에서, 예수는 무한의 용서를 가르치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15~18절)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여라.' 한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3번만' 용서받을 기회를 주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무한의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가? 게다가 이 구절에서, 3번을 용서해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예수의 말은 예수가 평소 자비와 사랑을 설파하며 죄인들도 사랑하라고 했던 그의 언행과 모순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의문이 지나친 비약에 가깝다고 본다. 예수가 전한 기독교의 핵심 가치는 회개를 통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듣지 않거든이란 뜻은 일반적으로 회개를 하지 않는 원수, 죄인들이나 불신자들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들에게도 회개를 바라며 사랑하라는 것이기 가르침의 핵심 때문에 뉘우치는 자는 몇번이든 용서해주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의 단죄가 이어질 것이기에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가톨릭 교회에서 위의 해당 구절(15~18절)은 파문의 성서적 근거로 쓰인다.

3.1.46.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는 말한다.

'은 으로, 는 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마태오 복음서 5장 38~42절)

그러나 예수는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잡혀갔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뺨을 치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젓이 말해 왔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곁에 서 있던 경비병 한 사람이 "대사제님께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며 예수의 뺨을 때렸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 하셨다. (요한 복음서 18장 20~23절)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제사장의 부하에게 하는 말의 경우는, 부당한 외부 압력에 맞서 굴종하지 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예수의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은 '불합리한 것에 무조건적으로 굴종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되 일어설 필요가 있을 때는 분연히 일어서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왜 예수의 성전 정화가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자.

또한 오른뺨과 왼뺨의 비유는, 익히 알려진 것과 정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는 노예에게나 하는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즉, 오른뺨을 맞았다는 건 노예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며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그에 대한 반발로, 뺨을 때린 사람과 자신이 동등한 인간임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만 이럴 경우,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예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요구하는 뜻이 된다.

3.1.47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몇 마리의 동물을 탔을까?

(마르코 복음서 11장 2~8절) "맞은편 마을로 가보아라. 거기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 1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보내실 것이라고 말하여라." 그들이 가보니 과연 어린 나귀가 길가로 난 문 앞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푸는데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왜 나귀를 풀어 가오?"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자 그들은 막지 않았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예수께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앉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루카 복음서 19장 30~35절) "맞은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보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1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 나귀를 풀어오너라.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들이 가보니 과연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요한 복음서 12장 12~14절)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은 그 이튿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보시고 거기에 올라앉으셨다.

마르코 복음서루카 복음서요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1마리의 나귀를 탔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2마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 21장 2~8절) "맞은편 마을로 가보아라. 그러면 나귀 1마리가 매여 있을 터인데 그 새끼도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무어라고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어줄 것이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시온의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14]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얹어놓았다. 예수께서 거기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기도 하였다.

3.1.48.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나 신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 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 그래서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 하신 말씀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한 기록은 다 이루어지고 있다."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주님, 여기에 칼 2자루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그만 하면 되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복음서 22장 35~38절)

'세상이 흉흉해지니 준비를 하라'고 한 말이라고 기독교 측에서는 해명을 하지만, 앞뒤 문맥으로 봤을 때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다.

조금 후에 이스카리옷 유다와 로마 제국 군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려고 몰려왔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사라고 시킨 그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친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라고 말한다.

그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버렸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12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고는 무리를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마태오 복음서 26장 51~56절)

이 때에 시몬 베드로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복음서 18장 10~11절)

기독교인들은 위의 언급에서 예수가 말한 '검'은 진짜 검이 아닌 영적인 의미로 주장하는데, 예수가 말한 '검' 이 진짜 '검' 이라면 돈주머니와 식량자루도 진짜 돈주머니와 식량자루일텐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검' 과 식량자루와 돈주머니를 가지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예수에게 검만 보여주었는데도 예수가 말한 검이 진짜 검이었다면 베드로에게 "그만 하면 되었다."가 아닌 '잘봤다, 그런데 전대와 주머니는 어디 있느냐?'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예수의 제자는 12명인데 베드로는 검 2개만 보여주었으므로. '족할' 리가 없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며, 만에 하나 예수가 말한 '검'이 진짜 '검' 이라 할지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예수는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 고 했는데 '흥하다' 는 '번성하여 잘되어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는 '칼을 사라'라고 했지 '칼로 번성하라' 나 '칼로 잘되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또 이 말을 십자가 처형 때 두 죄수와 함께 못 박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또 이에 대한 가톨릭의 해설은, 칼은 준비하라는 구절은 제자들(사도들)과 나아가 신자들에게 세속에 맞선 영적 투쟁을 일깨워주는 용도로 사용된 일화라고 본다.

또한 제자의 수가 12명이니 칼도 12자루가 되어야 하는데, 칼 2자루만 보고 족하다 할 리가 없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도 있는데, 2자루로 족하든, 12자루로 족하든 그것은 사람마다의 개인 차에 불과하다. 애초에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12자루의 검이 있어야 족하다고 느낀다는 보장도 없다. 또 예수가 말한 칼이 실제 칼이라면 어째서 함께 언급한 식량 자루와 돈 주머니는 찾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는데, 식량 자루와 돈주머니야 부피가 꽤 나가고 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띄니 굳이 묻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칼을 사라'라고 했지 '칼로 번성하라' 나 '칼로 잘되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는 주장도 애초에 예수가 칼을 사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 칼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나 그렇게 꾸짖고 훈계하고 기적을 부려 피해자의 떨어진 귀를 도로 붙여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당 구절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성경 주석에 따르면 칼이 실제 물건이 아닌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며, "그만 하면 되었다."라는 예수의 대답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 해당 문맥 자체만 보면 거기에 대한 근거가 없다.[15]

3.1.49. 4대 복음서의 인용 오류

4대 복음서에서는 심지어 구약 구절을 잘못 풀이하여 그리스어로 옮겨둔 부분까지 존재한다.

이를테면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의 주장을 반박하여 구약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예수가 인용한 구절은 구약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다. 그리스어 구절 자체는 예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로 들리지만, 원래의 히브리어 구절은 예수가 주장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구절들이다.

예수가 정통 바리사이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고 일부러 유대성서를 그리스어로 오역한 것을 일부러 인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 이상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만 쓰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는 수많은 유대인 가운데 1명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구약을 인용하고, 그것을 예수가 인용한 것인양 꾸며 놓았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7장 6~7절에서 예수는 이사야서 29장 13절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잘못 번역된 구절을 인용한다. 또 사도행전 15장 13~18절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구절은 아모스9장 11~12절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7장 9절에서 마태오는 즈카르야가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말한다.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사도행전에서도 히브리어 구약을 잘못 인용한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자기 말을 입증하려고 구약을 인용하지만, 그 인용문은 그리스어로 전혀 잘못 번역된 구절이다. 원래의 히브리어 구절은 뜻이 전혀 다르다.

사도행전 15장 13~41절에서,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히브리어 원전을 왜곡한 그리스어 구절을 인용하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기원 직후 구약은 70인 역이라고 불린 그리스어 판본이 정경으로 취급 받았는데, 70인역은 번역이 문제가 있다. 그 번역을 그대로 갖고 오면서 생긴 문제점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행전과복음서를 보면 예수나 사도들이 왜곡된 히브리어 경전 구절을 가지고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는 번역의 문제로 돌릴 것이 아니다. 명백한 오류인 것. 번역 실수를 한 것이, '후기의 집필자'들이 아니라, 복음서와 서간에 의하면 예수와 사도들이다.

3.1.50. 요나서 인용

마태오 복음서 12장 40절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예언했다.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계산을 잘못한 것인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 정오에 죽었고, 일요일 이른 아침에 살아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땅 속'에서 예수는 단지 이틀 밤만을 보냈다는 것이 된다.[16][17]

유대인의 하루는 우리와 달리 저녁부터 밤을 포함한 점심까지를 하루로 본다. 그렇게 계산하면 금요일 정오가 매우 짧은 하루가 되고,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이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 저녁까지 사흘로 맞아 떨어진다. 위의 수요일설과 목요일설은 쉽사리 접해보지 못한 정보로 출처확인이 필요하다.

3.1.51예수의 동문서답

(요한 복음서 13장 36~38절)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장담하자,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정말 잘 들어두어라. 새벽 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요한 복음서 14장 5절) 그러자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럼 이제 몇 장 뒤 예수의 반응을 보자.

(요한 복음서 16장 5~6절)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한 말 때문에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몇 장 앞에서 분명 베드로와 토마스가 예수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3.1.52베드로는 예수를 언제 부인했는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사건도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서 14장 27~3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이 2번 울기 전에 너는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더욱 힘주어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은 말을 하였다.

(마태오 복음서 26장 31~35절)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이 울기 전에 너는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대체 어느 쪽이 맞는 것인가? 이 1번 울기 전인가, 2번 울기 전인가?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삶>의 저자인 존스턴 체니는 "베드로가 이 1번 울기 전에 3번, 또 이 2번 울기 전에 3번, 총 예수를 6번 부인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3.1.53예수는 언제 못 박혔나?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성찬을 베풀고 다음 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15:25)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다르다. 요한 복음서에는 성찬을 베푼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이후 예수는 유다에게 배신 당해 출두하고, 감옥에서 밤을 보낸 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빌라도가 판결을 내린 때는 정확히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12시쯤이었다."(19:14)

많은 사람들이 이 모순을 해결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준비일'을 무슨 뜻으로 썼는지를 간과한 결과이다. 그 준비일은 '안식일'의 준비일이었지, 유월절의 준비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마르코 복음서에서 이 날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 날이 아니라, 안식일 전 날이었다는 말이다. 금요일 오후에는 안식일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날을 준비일이라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모순이 확인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목요일 밤에 유월절 음식을 먹고 다음 날 아침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았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게다가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정오에야 사형 판결을 받고 그 후에 끌려 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일부 교인들은 이런 차이가 발견되는 이유를 유대인마다 그 주의 다른 날에 유월절을 기념했기 때문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지 않은 일부 종파가 성전 관리자들이 잘못된 달력을 따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런 종파들과 어울리며 도성 밖에 있지 않았다. 예수는 분명 예루살렘에 있었고 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은 단 하루밖에 없었다.

3.1.54. 십자가 처형 기록의 모순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복음서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과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유대인 장로들의 심리를 받고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리를 받지만, 형을 선고받지는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지 않고, 곧바로 로마의 법정으로 끌려간다. 그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게다가 공관 복음(마태오,마르코,루가)에선 재판 과정에서 예수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관해 길게 말을 한다.

3.1.55예수의 유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말이 복음서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시편 22장 1절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을 예수가 마지막으로 외쳤다고 나온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편 31장 5절의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운명한다고 나온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목마르다.'라고 말한 뒤, '이제 다 이루었다.' 하고 운명한다.

이것이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상칠언(십자가상에서의 7가지 말)'이다. 복음서마다 말이 달라서 약간 의아함을 느낄 수 있는데, 주류 기독교계의 해석은 저 7가지 말을 예수가 모두 했다고 본다. 보편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 23장 34절)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카 복음서 23장 43절)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복음서 19장 26-27절)
5. "목마르다." (요한 복음서 19장 28절)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복음서 19장 30절)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카 복음서 23장 46절)

3.1.56예수가 죽을 때 찢어졌다던 성전의 휘장은 언제 찢어졌는가?

(마르코 복음서 15:37-38)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2폭으로 찢어졌다.

(루카 복음서 23:45~46) 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 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2폭으로 갈라졌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성전의 휘장이 예수가 숨을 거둔 이후에 찢어졌다고 기술하는 반면,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죽기 전에 찢어졌다고 기술한다.

기독교의 해설은 이 부분이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유대교에 대한 시각차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살아있을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부분적 거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구약과 신약을 가리지 않고, 성경 속 대부분의 책들이 이러한 의도와 지향점을 두고 집필되었다. 또 신자들도 이렇게 초래된 성경 내용의 세부적인 차이점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러한 시각 차이를 따로 기술하지 않고 사실 관계를 다르게 쓺으로서 나타낸다는 것이 영 껄쩍지근하다는 문제가 남는다. 집필 의도에 따라 사실이 다르게 기술되었다는 것 사실은 그 자체로서 해당 기록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원래 사실을 변개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1.57. 부활의 기록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다르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5절에서, 예수의 여성 제자들 몇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동굴 속에서 흰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 24장 4절에는 동굴 속에서 '문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다 마태오 복음서 28장 2~3절에서는 두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9절과 마태오 복음서 28장 9절에서 부활한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지만, 루카 복음서 24장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갈릴래아가 아닌 예루살렘 근처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게다가 사도행전 1장 4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가라는 신성한 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한다.

3.1.58.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 재림에 대한 기록

예수는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이 죽기 전에 재림의 계시를 목격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그의 예언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다. (루카 복음서 9장 27절)

그 때가 되면 와 과 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루카 복음서 21장 25~32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19]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속에 몰아넣고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며,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4장 4-11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마태오 복음서 16장 28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4장 34절)

하지만 '그 세대'가 다 지나가고 모든 제자들이 죽어서 묻힌 지[20] 대략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일 가운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하스 페르쯔라도 있나보다

 사실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시한부 종말론적 시각이 상당히 보인다.

사실 예수의 재림이 왜 이렇게 안오냐는 주장은 지금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신약성경 베드로2서 3장에선 재림이 언제 오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내용이 언급된다. 베드로2서의 집필 시기를 감안하면, 서기 70년대의 초대 교회 시기부터 이런 논란과 논박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또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 교리에서 언젠가 일어날 세상 전체의 환난과 심판, 종말'과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이 중첩되어 예언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현 기독교의 주류 시각 중 하나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위의 복음서에서의 언급은 이스라엘의 예언임과 동시에 요한묵시록의 프리퀼 버전이란 것. 대부분의 신학계의 정설이다. 위에서 언급된 마태오 복음서 24장의 내용대로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경에 로마 제국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한편 신학 견해 중 하나일 뿐이긴 하지만, 루카 복음서에 나온 대로 사도 요한은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환시로 보았고 그 내용을 묵시록으로 남겼다. 

환상으로라도 보긴 본 거다

3.1.59이스카리옷 유다의 최후

이스카리옷 유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마태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따라 다르다. 전자는 목을 매서 숨졌다는 기록, 후자는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쏟아져나와 죽었다는 기록.

(마태오 복음서 27장 3~10절)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30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대사제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 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하며,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은 오늘날까지 "피의"이라고 불린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 사람의 몸값, 은전 30닢을 받아서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값을 치렀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사도행전 1장 16~18절) "교우 여러분, 예수를 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빌려 예언하신 말씀은 정녕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는 본래 우리 열두 사람 중 하나로서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판 돈으로 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이 모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을 그들 말로 '아겔다마'라고 불렀습니다. '피의 '이란 뜻입니다."

보통 목을 매달았는데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설득력이 부족한데, 보통 목을 매면 줄이 끊어져서 떨어지더라도, 배가 터져서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의 외상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실질적으로 추락하여 사람의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면 대략 15m 이상의 높이라는 이야긴데, 당시 예루살렘 성읍이나 지리적으로 높은 몇몇 곳을 제외하면 그 정도 구조물이 없었을 뿐더러, 목을 매달고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그 높이까지 기어 올라가서 목을 매단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는다. 

차라리 걍 뛰어내리지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유다는 예수를 판 값으로 산 에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라고 하는데, 당시 유대의  근처에, 그 정도로 높은 위치에 목을 매달만한 구조물은 전무했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에는 "유다가 은전 30냥에 예수를 팔지만, 막상 예수가 체포되자 죄책감에 못 이겨 그 은전들을 대제사장들에게 팽개치고 죽었고,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샀다"고 나온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샀고 그 밭에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어 상호모순이 일어난다.

3.1.60. 사도 바오로 문제

(사도행전 9장 3~8절) 사울(=바오로)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뒤에 바오로는 그 사건을 다시 이렇게 말한다.

(사도행전 22장 6~9절) "길을 가다가 오정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이 나타나 내 주위에 두루 비쳤습니다. 내가 에 거꾸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적힌 바오로의 증언은, 갈라티아서에 적힌 그의 증언과 모순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앞에서 언급한 경험을 한 후, 눈이 멀게 된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나 그의 기도로 눈을 뜨게 된다. 그 직후 예루살렘으로 간 바오로는 바르나바의 소개로 여러 제자를 만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오로는 2번째로 예수를 보고, 이방인들에게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바오로가 직접 썼다는 서간에서는 전혀 다르다.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는 아나니아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개종 체험 후 3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이어서 그는 다시 열정적으로 기술한다.

(갈라디아서 1장 20절)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며느리도 몰라요

3.2. 역사 기록과의 모순

3.2.1.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비 에스더

에스더 항목 참고.

3.2.2페르시아 역사 기록과의 모순

역대기하의 저자는 페르시아의 제3대 왕 다리우스 1세 때의 사건을 제1대 키루스 2세(고레스)왕 때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1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나는 그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계시기를 비는 바이다. 그 하느님은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시니, 유다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을 짓도록 하여주어라. 원주민들은, 여기저기 몸붙여 살다가 아직 살아 남은 유다인이 있거든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에 가져다 바치도록 자원예물도 들려 보내고 과 과 세간과 가축도 주어서 보내어라."(에즈라 1:1~4)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1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아래와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그 하느님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 (역대기하 36:22~23)

B.C. 586년, 유다 왕국이 멸망될 때, 바빌로니아는 수많은 히브리(이스라엘)인을 잡아간다. 이 사건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후 중앙 아시아와 중동 지방은 페르시아 제국으로 통일된다. 자연히, 히브리 포로들도 페르시아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 2세(B.C. 558~529)가 세우고, 그 아들 캄비세스왕(B.C. 529~521) 때에 크게 발전하고, 캄비세스가 암살된 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 1세(B.C. 521~486) 때 전성기를 이룬다. 전성기를 이룬 다리우스 1세는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장려하면서도, 피정복 민족의 풍습과 종교를 인정하고, 바빌론으로 잡혀온 히브리인들을 돌려보내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며 전 국토를 민족에 따라 20개의 주(州)로 나누어 총독을 두고, 다시 '왕의 눈', '왕의 귀'라는 감찰사를 배치하여 총독을 감독케 하는 '중앙 집권 정치'를 폈던 강력한 군주였다.

헌데 위의 역대하의 기술을 보면 알겠지만, 성경은 페르시아의 제3대 왕 다리우스 1세 때의 사건을 제1대 키루스 2세(고레스)왕 때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건 마치, 조선의 국왕 이성계가 한글을 반포했다라고 기술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키루스 2세도 정복한 이민족들에게 매우 관대한 정책을 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있어, 히브리인들의 귀국을 허용한 것이 키루스 2세 시대가 맞다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당대의 기록이 더 많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확정할 수 없는 문제다.

3.2.3다윗의 궁궐

열왕기상 10장에 의하면 다윗의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고 하며, 다윗의 궁궐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발굴이 된, 다윗의 궁으로 추정되는 궁궐은 일명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Large Stone Structure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구조물을 발굴한 고고학자 Eilat Mazar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굴된 이 건물의 벽의 한 변은 약 2.5~3m 두께로 동서로 30m에 이른다. 발굴 팀들은 다윗의 도성을 하나의 마을 규모로 추정한다. 마을은 10헥타르 정도의 4천명 정도 거주를 하는 지역이였다.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Rolf Krauss는 "지방 둥우리"라고 말한다. 이 다윗 궁의 유적의 경우 부족 국가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즉, '추장의 저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능한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결과로는 성서의 사아라임으로 확인이 된 곳이 고고학자 Yosef Garfinkel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는데 발굴이 된 유적과 그 곳에서 발견이 된 유물이 해석되면서 기원전 10세기 경 다윗의 유다왕국이 어느 정도의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고 있다.

3.2.4. 예수의 출생

예수의 탄생시기에 대한 묘사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인구조사를 위해 본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시기에는 그 같은 인구조사가 없었고, 인구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향으로 돌아가서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퀴리니우스가 인구조사를 할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 어법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AD 6년으로서,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가 헤로데 왕 치하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로데 왕은 BC 4년에 이미 죽어 있었다.(...) 

유령왕

루카 복음서는 '유대 임금 헤로데 때에(1장 5절)'(적어도 BC 4년 이전)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6개월 간격으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했는데, 예수가 인구조사 때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대략 10년 동안을 임신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아우구스투스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적에 호적 조사를 실시한 해(CE 6년)에 태어났으며, 마태오에 따르면 헤롯 왕이 죽고 아들 헤롯(안티파스)이 왕위에 오른 해(BCE 4년)에 이집트에서 돌아왔다고 나오는데,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의 말기에서 '헤롯 대왕이 죽을 때 까지의 총독은 바루스'이며 그 전의 총독은 '사투르니누스'였다고 한다. 퀴리니우스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퀴리니우스는 언제적 총독이며, 누가가 말하는 호적 조사는 언제 있었던 일일까? 역사가 요세푸스는 퀴리니우스가 호적조사를 행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적어놓았고 이를 통해 호적조사가 일어난 시기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헤롯 아켈라우스가 망명 중일 때의 일을 해결하러 온 것인데,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이것은 최소한 AD 6년 이후의 일이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의 말기에서 헤롯 대왕이 죽을 때 까지의 총독은 바루스이며 그 전의 총독은 사투르니누스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퀴리니우스가 BC 6년 즈음에 연임해서 끼어들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루카와 마태오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역사에서는 AD6년 경에 일어난 호구 조사를 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낳기 직전 겪고, 예수는 BC 4년에 이미 죽은 헤롯 대왕 치세에 태어났다는 것이 된다.

3.2.5. 지형의 오류

복음서의 설명과 실제 지형에 차이가 있다.

(마르코 복음서 7장 31절) 그 뒤 예수께서는 티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시돈은 정반대 방향에 있을 뿐 아니라, AD 1세기에는 시돈에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없었다. 띠로에서 곧바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마르코 복음서 5장 1~13절)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매어둘 수가 없었다. 쇠사슬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묘지와 산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하였다.
그는 멀찍이서 예수를 보자 곧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예수께서 악령을 보시기만 하면 "더러운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수효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악령들은 예수께 "저희를 저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의 2,000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태오 복음서 8장 28~34절)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소리질렀다.
마침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예수께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들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마귀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 속에 빠져 죽었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읍내로 달려가서,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사람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와서, 예수를 보고는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애꿏은 돼지떼가 죽어서 생긴 생명윤리적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게라사(오늘날의 예라시)는 바다에서 동남쪽으로 50km나 떨어져 있다. 게라사에서 예수가 내쫓은 악령들이 들어간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서 몰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돼지 떼가 진짜로 산 넘고 물 건너 50km를 폭풍질주하여 몰사했다면 여러 의미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여기 나온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가다라 지방을 필사하면서 잘못 기록했다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이건 우스개지만, 돼지 1마리를 대략 한화로 최소 14만원으로 잡으면, 돼지 2,000여 마리의 가격은 대략 2억 8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3억에 가까운 손해를 입은 애꿎은 양돈업자들 지못미.

게다가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귀 들린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1명이라 되어 있다.

3.2.6. 로마 제국에는 유월절마다 유대인 죄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신약을 보면, 복음서 말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유대 총독이었다던 본시오 빌라도가 바로 그다. 복음서의 기록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서로 그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긴 해도, 예수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들이다. 또한 여기에는 다음의 기록들도 덧붙여져 있다.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본시오 빌라도가 죄인 바라빠와 예수를 놓고 둘 중에 누구를 풀어줄지, 유대인 군중들에게 물었다는 것.

함께 복음서의 기록들을 확인해보자.

명절이 되면 총독은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빌라도는 모여든 군중에게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 27:15-18)

명절 때마다 총독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 때에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던 폭도들 가운데 바라빠라는 사람이 있었다. 군중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전례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달라고 요구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의 왕을 놓아달라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대사제들이 예수를 시기한 나머지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5:6-10)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17절은 없음. 아마 이 부분에서 본시오 빌라도가 죄수를 놓아주는 유월절의 관례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자 온 무리가 일제히 "그 사람은 죽이고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그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그 뜻을 밝혔으나 그들은 굽히지 않고 "십자가형이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빌라도는 3번째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하고 말하였으나, 무리들은 더욱 악을 써가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마침내 그들의 고함소리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빠는 그들의 요구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 마음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루카 복음서 23:16-25)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강도였다. (요한 복음서 18:38-40)

그런데 여기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다. 해마다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이 독특한 관례의 근거나 선례를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짤막한 구절을 제외한 신약 및 구약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것이 로마 제국의 관행이었음을 말하는 성경 외의 증거 자료도 전혀 없다. 이런 관행은 요세푸스의 <유대사>에도 1줄도 나오질 않는다. 타키투스, 플리니, 수에토니우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까지, 당시의 저작가와 역사가들의 저술에서도 이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힌트가 있다면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본시오 빌라도의 말일 것이다. 빌라도는 위에서 보다시피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즉, 로마 제국 총독과 피통치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생긴 관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관행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복속된 뒤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구약성경에 유대인들이 매년 유월절에 자신들의 죄수를 석방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해당 민족에게 전혀 없던 관례가, 단지 사법권이 로마 제국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복음서에 따르면 바라빠는 민란을 꾸미던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 자였다. (마르코 복음서 15:6) 당시 로마 제국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반란의 예를 보면 잘 알겠지만, 특히 반체제와 관련된 소요를 엄중하게 처벌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 제국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마다, 민란을 꾸며서[21] 체포된 바라빠와 같은 유대인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는 것은 실로 비상식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복음서 저자의 당시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한계에서 온 명백한 오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3.3. 과학과의 모순

3.3.1. 우주의 나이

성경에 따르면 우주와 지구는 단 6일만에 창조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빅뱅이론에 의한 팽창속도를 기반으로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면 약 137억 9800만 년(±3700만 년) 정도이며 지질학자들이 밝혀낸 지구의 나이만 해도 45억년이다. 또한 성경에서는 태양계가 우주 최초의 행성계라고 나오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3.3.2진화론과의 모순

성경에 따르면 지구가 창조되고 나서 바로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인류는 지구상의 최초의 생물이 아니며, 지구가 탄생한지 몇억년 후에 생겼다. 그마저도 바로 딱! 하고 생긴게 아닌 원시세포에서 부터 시작하여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여 양서류가 되고 거기서 더 진화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한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서는 인류 이전에 지구에 존재했던 공룡의 존재도 스킵해버린다(…)

3.3.3.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신은 전지전능 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시간을 지배하고 다루는 능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 내에서 단 한번도 신이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묘사는 다뤄지지 않았고 또한 인간을 만들려고 마음먹었을때 카인의 후예들과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결합하면서 극도의 타락할 것이라는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였고, 결국 인간들이 타락하자 인간을 만든것을 후회하며 노아의 일가족과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고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쓸어버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점으로 알 수 있는건 신은 미래를 미리 알지 못하며, 시간의 역사가 어떻게 어떻게 흘러갈지를 미리 정해놓는 것 역시 불가능 한데다 인간들이 타락했을때 역시 과거로 돌아가서 시간의 역사를 바꾼다던가 하는 식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쓸어버리는 방법을 사용한걸 보면 과거나 혹은 미래로의 시간 여행은 불가능 한 듯 보인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본인이 직접 현실, 우주, 시공간의 차원을 창조한 신인데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건 다소 아이러니한 부분, 혹은 시간이란걸 설계했을때 부터 바꿀 수 없게 설계했다고 하면 애초에 '전지전능'이라던 신의 능력과 모순된다.[22]

물론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는 과학이 발달하고 그로인한 인류의 상상력의 폭도 넓혀져 현재에는 대중화 된 소재라 여러 창작물에 등장한다지만 당시 고대인들의 시점에서 시간여행이란 개념이 없기에 고대인들이 서술한 서적내에서 등장하지 않는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는건 그 서술속의 신 또한 고대인들의 창작물이란 소리랑 다를게 없다. 고대인들의 지식 한도 내의 존재란 이야기니

3.3.4. 노아의 방주

영화 노아에서 묘사된 전 지구적 홍수

노아의 방주와 전 지구적 홍수에 대한 과학적 모순들

노아의 홍수는 창세기에서 분명히 전 지구적인 사건이라고 언급되나 지질학적 연대기에서 전 지구적 규모의 홍수 사건의 증거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창조과학회 같은 단체에서는 고지대에 위치한 소금 호수, 산 정상에서 발굴되는 조개 화석,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홍수 설화 등이 노아의 홍수의 증거라고 우기고 있으나, 이것들은 각 지역에서 국지적인 홍수, 혹은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전 지구적인 홍수의 증거라고는 볼 수 없다. 가령, 산 정상에 위치한 소금 호수가 노아의 홍수 때 생긴 것이라면, 전 세계의 모든 산 정상에 위치한 소금 호수의 생성 시기는 동일한 시기, 그것도 40일 이내로 일치해야 한다.[23] 그러나 짧게는 수백만 년, 길게는 억 년 단위로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 성경 속의 자연과학적 오류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오류로 손꼽히는데, 기록된 사건의 규모가 천지창조 다음으로 가장 거대하고, 성경 내에서 사건의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24]

무신론 측에서 비판한 영상이 있는데(위에 삽입한 링크) 이 영상에선 과학과의 충돌로만 까는게 아닌 도덕적으로 봐도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과학적으로 봤을때 실제로 있었을리는 만무하고[25], 도덕적으로 봤을때 모든 인간이 악해졌다고 단정짓는것부터 해서 그렇다고 전부다 익사시키는것으로 해결하는것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좋은 방법이라 볼수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신의 능력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강제로 마인드 컨트롤하여 고쳐버리거나, 만약 이런 방법이 내기치 않는다 싶으면 그냥 자신의 능력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공중에서 사라지게 하는게 더 나앗을 것이다.) 거기다 노아의 가족 외의 다른 인간들 혹은 방주에 있던 동물 한쌍 빼면 모두 사망했으므로 근친상간 외엔 번식할 방법도 없다(...)정도로 요약할수 있다.

3.3.5. 노아의 방주 이후

노아 방주 사건 이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노아 식구들 뿐인데, 이들로서는 지금의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이 존재할 수 없다. 노아 시대 때는 아직 유전자 풀이 다양하지 못했는데 분화되었다면서 창조설로 모순을 해결

궤변

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화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닌 생물학으로만 끝나는 것도 아닌 진화사회학론 같은 인문학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과학'이니 창조설같은 유사과학으로는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일각에선 노아의 세 아들이 세 인종의 조상이 됐다는 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결국 이것도 말이 안되는 소리다.

노아의 방주는 이후 아라랏산에 도착한 후로 방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태까지 수많은 탐사팀이 아라랏산의 온갖 곳을 뒤져봤는데도 노아의 방주에 대한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여러번 아라랏산에서 노아의 방주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사실 전혀 아닌것 혹은 우연한 것 등을 그럴싸해 보이게 억지로 끼워맞춘 경우거나 조작한 경우가 전부이다.)

3.3.6탈출기의 장대한 행렬

탈출기의 40년 방황은 있을 수가 없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라므세스를 떠나 수꼿으로 향했는데, 딸린 식구를 빼고 장정만도 60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많은 잡식구들이 따라 나섰고 와  등 가축들도 떼지어 따랐다. (탈출기 12:37~38)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인들이 야훼의 인도를 받아 탈출할 때, 첫날은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숙곳이란 곳까지 행군했다고 한다. 이집트 탈출에 동참한 사람은 유아와 여자 및 잡족을 제외하고, 장정만 헤아려도 60만 가량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정이란 

가나안 노략질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군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집트 탈출 때의 히브리인은 줄잡아도 300만 이상은 됐을 것이다. 젊은 장정에게는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늙은 장정에게는 자식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각종 가축들까지 포함하면 생명체가 적어도 1,000만 이상은 됐을 것이다. 이집트 탈출은 히브리인의 생활 자체였으므로, 거기에는 가재 도구를 비롯한 생활 필수품 일체가 함께 움직이는 거대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실제 라암셋과 숙곳의 거리는 약 40km 쯤 된다. 행군할 때의 앞뒤 사람(생명체)의 거리를 1m로 가정하면, 60만 명 항오(行伍)[26]의 길이는 600km가 되며, 300만 명 항오의 길이는 3,000km가 된다. 가축까지 포함된 생명체가 1,000만이라면, 그 항오의 길이는 자그마치 10,000km가 된다. 여기서는 간단히 계산하기 위하여 60만과 1,000만을 빼고 가장 그럴싸한 300만명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인 300만명의 항오 행렬의 길이가 3,000km라는 말이다. 그러면, 라암셋과 숙곳 사이(40km)에는 75열 종대로 늘어서야 된다.

이렇게 75열 종대로 서고도, 맨 앞사람은 숙곳에 이르렀으나 맨 뒤의 사람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 탈출 사건이 있을 법했던 시절에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방 사이에는 좁은 길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75열 종대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남녀노소, 병자, 임산부가축 및 가재도구 등 일체가 포함된 사람과 가축과 가재 도구 등 일체를 계산에 넣으면, 적어도 2,000만 생명체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의 라암셋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400km 쯤 된다. 따라서, 여기에다 300만 명을 늘어 세워도 7~8열의 종대가 된다. 2,000만 명을 400km 거리에 늘어 세우면 50열 종대가 된다. 맨 앞의 50명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해도, 맨 뒤의 50명은 아직 이집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게 된다.

이에 대한 구약성경 내부 묘사와 기독교계의 해석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에 대한 벌로 하느님이 죄악을 저지른 세대에게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원래대로라면 금방 갈 수 있었던 광야에서 40년동안 계속 해매게 된 것도 우상숭배에 대한 벌이라는 해석. 때문에 이 40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신학 내에서 신앙과 희생이라는 의미로 대단히 중요한 숫자이다.(사순절 등) 또 탈출기에 나오는 수치는 서사시적으로 과장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대단히 많다.

3.3.7. 생물 분류

레위기 11장에 보면 야훼가 직접 내리는 명령에서, '낙타와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으므로 먹지 말라'는 말이 있다.

새김질하는 짐승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이라도 다음과 같은 것은 먹지 못한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사반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레위기 11:4~6)

그런데 낙타는 굽이 갈라졌으며, 토끼는 발가락이 갈라져 있는데다 그 전에 아예 굽이라는 것이 없으며,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히브리어 원어 단어를 살펴보면 '찢어지다'란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문제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도 성립이 안되는게, 토끼의 발은 찢어져(갈라져)있다.

'토끼가 자기 똥을 먹는 행위를 되새김질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지만, 생물학의 기본만 알아도 이런 말은 못한다. 혹시나 해서 설명하자면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반추 위(ruminant stomach) 또는 되새김위를 가진 포유류 소목(偶蹄目)의 일부(기린 · ·사슴 등)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소화관(위)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서만 이루어진다.

토끼는 초식동물이기는 하지만, 초식 동물 모두가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의 일부 동물만이 되새김질을 한다. 토끼는 토끼목 토끼과에 속하는 동물로써 되새김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이런 논리면 동네 똥개도 되새김질 동물

이처럼 고대의 문헌에서 생물을 관찰하고 묘사한 글들은 현대에 와서는 대단히 모호하고 부정확해 보이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이 없을 때 작성된 문헌이라, 당대의 지식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에서 쓰이는 '종(種, Species)'의 분류는 17~18세기에 대략적으로 나타났으나, 이후로도 지속적인 연구를 거치면서 새로운 지식을 쌓으며 세부적인 변화를 거쳤다. 그나마 기반이 잡혀 있던 17~18세기와 현대를 비교해도 종의 정의와 개념, 분류에 차이가 있는데,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아예 없었던 고대의 지식은 현대의 지식과는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

뜬금없이 박쥐를 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 그냥 '날개 달리면 다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라서 그렇다는 것. 

근데 사실 현대인들도 크릴이 새우인 줄 안다

3.3.8. 곤충의 다리가 4개?

네 발로 걸으며 날개가 돋은 곤충은 다 너희에게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네 발로 걸으며 날개가 돋은 곤충 가운데서도 발뿐 아니라 다리도 있어서 땅에서 뛰어 오를 수 있는 것들은 먹을 수 있다. 그러니 곤충 가운데서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각종 메뚜기, 각종 방아깨비, 각종 누리, 각종 귀뚜라미이다. (레위기 11:20-23, 공동번역성서)

"All fowls that creep, going upon all four, shall be an abomination unto you. Yet these may ye eat of every flying creeping thing that goeth upon all four, which have legs above their feet, to leap withal upon the earth ; Even these of them ye may eat; the locust after his kind, and the bald locust after his kind, and the beetle after his kind, and the grasshopper after his kind. But all other flying creeping things, which have four feet, shall be an abomination unto you." (Lev. 11:20-23)

일단 이 구절에서, 한글 성경에 곤충으로 번역된 단어가 20절과 21절의 원래 단어로 살필 때도 날개가 있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곤충이나 벌레 등속을 총칭하는 것이 옳다고 기독교인들과 창조과학자, 주류 신학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왜 곤충의 다리가 4개라고 기술되었느냐고 따지면, 창조과학자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곤충의 다리가 4개라는 것이 아니라, 4개의 발로만 기어다니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해명한다.

문제는 날개가 있는데 기어다닐 때 뒤의 3번째 1쌍을 쓰지 않고 4개의 다리로만 기어다니는, 그러한 곤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에 대해 창조 과학자들은 먹을 것이 허가된 메뚜기와 베짱이, 귀뚜라미 같이 뛰는 다리가 있는 곤충들의 경우, 그 뛰는 다리를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라는 변명을 한다. 다리이긴 하지만 단지 '발'의 기능만 하는 '4개의' 다리와는 다른 의미의 다리라는 것이다. 즉, 2가지 종류의 다리가 있는데,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데 이용되는 다리와 '뛰는 다리(21절)'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메뚜기과 곤충들은 기어다닐 때도 3번째 다리를 같이 사용한다(…). 메뚜기가 기어다닐 때 3번째 다리 1쌍을 땅에 안 닿게 치켜들고 앞의 네 다리로만 기어다닐 리가 없다. 게다가 먹는 것이 허가되지 않은,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이 대체 어떤 곤충이나 벌레를 의미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창조과학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이에 대해 창조과학자들은, 위의 질문에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뜬금없이 꿀벌의 3번째 다리의 해부학적 구조가 앞의 4개의 다리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꺼내지만, 그렇다면 꿀벌이 기어다닐 때 3번째 다리는 땅에 닿지 않게, 앞의 2쌍으로만 기어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또 다시 데꿀멍을 시전한다(…).

앞의 되새김질이나 발굽 문제와도 연관되는데, 창조과학이나 성서무오설을 제외한 종교계에서는 성경은 과학 서적이 아니며 이런 것은 성경의 구워논리로서의 권위에 하등 중요하지 않아고 본다. 반면, 성경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은 야훼의 신성성에 대한 신빙성을 지극히 떨어뜨린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실존했다면, 당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3.9야훼의 살인 사건 수사법

타살된 시체만 있을 뿐 살인범을 알 수 없을 때, 야훼가 진두 지휘한 재판이 성경에 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시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시체가 발견될 경우에는, 너희를 대표하는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나가서 그 시체가 있는 곳에서 주변 성읍들에 이르는 거리를 재어라. 그리하여 그 시체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 어느 성읍이든,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멍에를 메고 일한 적이 없는 어린 암송아지를 끌어와 (신명기 21:1~3)

전지 전능한 신 야훼는 살인범을 체포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고, 엉뚱하게도 시체가 있는 곳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동네 장로들로 하여금 송아지를 가져오라고 한다.

물이 늘 흐르는 골짜기로 끌고 내려가서, 보습을 대본 적이 없는 곳을 찾아 거기 물가에서 그 암송아지의 목을 찍어라. (신명기 21:4)

사람 죽고 다시 애매한 송아지가 죽는다.(...) 계속 살펴보자.

그 시체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모두 그 골짜기에서 목 찍힌 암송아지에 대고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하여라. '우리의 손은 이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했습니다.' (신명기 21:6~7)

시체가 있는 곳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의 모든 장로들은 죽은 송아지의 피로 손을 씻으며, "우리는 죽이지도 않았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을 보면,

'야훼여, 주께서 구해 내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벗겨주소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없는 피가 흐르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그들은 그 피의 책임을 벗게 된다. (신명기 21:8)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죽이는 것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송아지의 피로 손을 씻으며 "죄없는 피가 흐르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해야 살인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죄없는 자의 피를 흘리는 일을 송두리째 뿌리뽑아야 한다. 야훼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신명기 21:9)

여기서 나온 것은 살인 사건과는 관계 없는 동물 희생을 통한 종교적 속죄 행위라고 보는게 기독교 종파들의 입장이다. 신학적으로는, 신정정치 체제였던 유대 시기 보편적이었던 구약식 동물 대속으로 공동체의 죄를 씻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살인범을 잡은 것도 아니고, 피살자를 되살려 준 것도 아니며, 애매한 송아지만 하나 죽인 셈이다. 무엇이 정직한 행동이고 무엇이 무죄한 자(죄 없는 자)를 죽인 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일까? 종교적 권위를 앞세워 진상을 덮어버린 셈이다.

3.3.10. 땅의 네 모퉁이

요한의 묵시록 7장 1절[27]과 이사야서 11장 12절[28] 등에도 지구가 평평한 것처럼 묘사된 구절들이 있지만, 해석하기 애매해지거거나 번역에서 원래 의미가 희미해진 것들이 많다.

사실 중세의 모든 학자들이 이 구절을 곧이 곧대로 믿을 정도로 관찰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 당시의 학계의 주류 견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근거로 한 천동설이 대세였고, 이는 당연히 둥근 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플랫 에러 참조. 다만 이 구절들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 탄생한 것이 평평한 지구 학회이다.

3.4.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

성경은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21세기인 현대와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청동기 ~ 고대 말기의 전근대 사회 가치관의 괴리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 속 내용과 성경을 사용하는 기독교, 유대교 등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은 이렇게 되면 성경의 신성성이나 절대성, 성경의 종교적 가치까지 사라지게 된다고 본다.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적 기독교인 뿐 아니라, 성경을 무오하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야훼가 실존한다고 믿는 대다수의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에서 시대 초월적인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반면, 성경은 절대적 진실은 아니지만, 애초에 과학 사실이나 고대 윤리를 전하기 위해서 쓰인 책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구원 논리를 쓴 책이라고 보는 온건 성향 종교인들도 있다. 이들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구절이라도,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정복 전쟁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타민족 학살이 아닌, 악과 맞써 싸우는 신앙인의 자세를 찾는다던지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야훼가 개입해서 성경 집필에 관여했다면 당연히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항상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성경의 내용이 21세기 현대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며 각종 모순이 가득한 것을 설명할 길이 없어지고, 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야훼가 실존하므로 성경에서 시대초월적인 가치를 찾는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모순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3.4.1원죄 문제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인류는 일단 선악과를 먹었기에 원초적인 죄가 성립됬지만, 그것을 통하여 인류를 멸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끝없는 긍휼함이며 끝없는 인자함이라고 한다. 사실상 앞에 위치한 세 가지의 끝없는 것들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성립되며,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죄 개념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건 근본적으로 자유의지와 전지전능의 말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 말이라고 주장한다. 애초에 야훼가 전지전능하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터,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이 선악과로 타락할 것임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정신 이상으로 인한 무죄 평결의 사유에 해당한다.

또한 원죄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 밖의 입장에서는 연좌제스러운 전근대적 발상의 산물일 뿐이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아담과 이브인데, 왜 그로 인해 인류가 대대손손 죄를 이어 받아야 하는가? 내가 먹지도 않은 선악과 때문에 덮어놓고 나를 죄인이라고 하더니만 뜬금없이 예수를 보내 있지도 않은 죄를 사해줬다는 언급에 어이가 없게 느껴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원죄 개념에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개로 자주 쓰이는 유머도 있다.

A: 내가 개를 암수 한 쌍 키웠는데 말이야. 내가 아주 이 개들을 예뻐했어. 그래서 안방에서 길렀지.

B: 정말 아꼈나 보구만.

A: 그런데 하루는 내가 삼겹살을 구워다 먹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급한 전화가 왔어. 그래서 나는 먹고 있던 삽겹살을 그냥 두고 나가야 했지.

B: 개들이 먹으면 어떡하려고?

A: 그래서 개들을 불러서 앉혀 놓고 단단히 이야기해 두었지. 이 삼겹살을 먹지 마라. 먹으면 정녕 너희가 죽을 것이다.

B: 그리고 나서?

A: 그리고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한 시간쯤 뒤에 돌아왔다네.

B: 개들이 삼겹살을 안 먹었던가?

A: 웬걸. 다 먹어 치웠더군.

B: 화가 많이 났겠구만. 그래서 어떻게 했나?

A: 안방에서 마당으로 내쫒아 버렸지.

B: 그리고?

A: 그 개들이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들도 죄견(罪犬)이라고 해서 마당에 그대로 두고, 그 새끼의 새끼들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그렇게 취급해 줬다네.

B: 아니 먹은 개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새끼 개들이 삼겹살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그건 너무 심하지 않나? 그 새끼 개들이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A: 그래도 한번은 타지에 있던 내 아들이 와서 그 개들을 용서하라면서 나에게 삼겹살을 사 줬다네. 나는 그래서 개들에게, "내 아들이 너희 대신 내게 삼겹살을 사 줬다는 것을 믿는 개마다 죄를 사해 주겠다"라고 이야기했지.

B: (...)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저런 식으로 성경에 나온 글자 그대로만 보고 선악과를 먹었다고 연좌제로 물려받는 대역죄인같은 원죄 개념 이해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본다.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원죄는 엄밀히 말하면 직접적 죄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초래된 악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에 가깝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창조된 인간에게 스스로 살아갈 자유의지가 있는 한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경향성도 인간에 대대로 내재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창세기의 선악과 에피소드는 이런 원죄 개념을 유대 문학적인 우화 장치로 설명했다고 볼 뿐인 것. 기독교 신학에서는(심지어 성서근본주의 종파마저도) 위의 예시처럼 간단하게 원죄 개념을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아두자. 다만 이렇게 원죄 개념이 설명되어져도, 원죄의 근원이 된 자유의지 허용의 문제와 관련한 악의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은 여전히 제기될 수 있다.

또 기독교 신학에서는 죄로 치우치는 인간의 경향성을 원죄로 표현하지만, 단순히 악으로 치우치는 경향성을 로 표현한것은 우화로서 원래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매우 부적합한 표현이라는 주장도 많다. 경향성과 죄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데, 죄라는것은 어떤 일을 저지른 뒤에 붙는 평가이고 경향성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알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결국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지 연좌제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 경향성으로 해석한다면 유전적으로 그런 경향성이 이어지니 문제가 없어보여도 원죄라는 원 표현을 따른다면 (내면적 경향성으로 짓게 되는)죄를 대대로 상속하게 한 셈이니 사실상의 연좌제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이 문서 내에서 알수 있지만 연좌제를 부정하는 서술도 성경 내부에 있기 때문에 자가모순이 되버린다는 주장도 있다. 

게임으로 치면 제작자 스스로가 버그가 걸리는 부분을 일부러 남겨놓고선 버그가 일어났다고 게임을 까는거랑 큰 차이가 없다

 

근데 연좌제 부정하는 이야기 바로 전페이지에선 연좌제로 차별하는 구절이 들어있다

 거기다 여성 차별 부분에도 하와의 죄를 가지고 여성에 문제가 있으니 차별 해야한다는 식으로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다 본 관점에서의 해석에 의한 구절도 있다.

3.4.2. 악신을 부리는 야훼

성경엔 분명 '야훼는 인자하시다'고 나오며, '야훼는 너무도 선해서 악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원죄설)이 마주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사울 왕이나 아합 왕을 죽일 때에 야훼를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악신'을 부리고, '거짓말하는 영'을 시켜서 그 둘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짓말 하는 영을 시켜서 사람을 죽이고 악신을 부리는 것이 공의로운가?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에는 공의의 야훼와, 사랑의 야훼가 나오는데, 선하고 인자하시다는 사랑의 야훼이고, 벌을 주시는 부분은 공의의 야훼라고 해석을 하는데, 여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살인자를 처형하는 것도 공의로운 것이므로 야훼의 위의 행위도 공의롭다고 주장한다. 또 악의 위에 있는 전능자, 악을 지배하는 신이라는 신학적 이미지도 도출해 낸다. 때문에 말락야훼라는 개념도 만든적이 있을정도

하지만 성경이 집필될 당시 기준으로 공의로웠다는 이야기는, 그렇다면 21세기 현대의 보편적 윤리관에는 당연히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쓰도록 한 책이 시대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며 결국 그 시대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창작물로서의 한계를 가지므로 창작된 존재라 비판할수도 있다.

3.4.3. 일부러 파라오의 마음을 조종해놓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 야훼

탈출기(가톨릭)/출애굽기(개신교)에 따르면, 파라오는 스스로 이스라엘 인들을 억류한 것이 아니라, 야훼가 그런 마음이 들게끔 조종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다고 이집트에 재앙[29]을 내렸다. 그 이유가 또한 황당한데, 파라오를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자신에게 반(反)하게 해야 자신이 재앙을 내리고 기적을 보이며 이집트인들에게 스스로가 강하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논리를 보여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여,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베풀어 내가 얼마나 강한지 그 증거를 이집트 땅에서 드러내리라. 파라오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손을 들어 이집트를 호되게 쳐서 나의 군대,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집트인들은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탈출기 7:3~5)

여기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성격은 다른 수많은 신화나 교훈처럼 사람의 인도에 있는데 '그냥 하느님이 다 좋게 만들었으니 에브리띵 이즈 오케이' 해버리면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으니 적당히 악역도 필요하고 선역도 있어야 권선징악이 되지 않겠느냐고 본다. 실제로 이 부분의 경우 이야기의 서사구조상 신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반항할 때 어떻게 된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극선하다는 신이 악도 직접 만들어버리게 되는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종교 세계관에서는 하느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끊임없이 관계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그냥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움직이면 안 되는가?" 내지는 "야훼가 학살자가 아니라면 '대량 학살 말고도 다른 수단을 통해서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는가?"(심지어 이집트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도!)는 반박이 비종교적 입장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애초에 전지전능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야훼가 맘만 먹는다면 굳이 학살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야훼는 굳이나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살해하는 대량 학살의 방법을 사용 했다는 점, 그나마도 야훼 스스로가 파라오가 완강한 마음을 먹게끔 조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성경의 전근대적이고 시대 한계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3.4.4. 희생된 욥의 가족들

다음 욥기의 구절을 살펴보자.

야훼께서 사탄에게,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 (욥기 2장 3절, 공동번역성서)

보면 알겠지만 욥기에는 야훼가 욥을 시험하려고 충동적으로 사람(욥의 자식들과 하인들)을 죽이고 재산(양과 낙타)를 빼앗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있다. 심지어 욥에게 극심한 피부병까지 주었다. 결과적으로 욥에게 더 많은 재산과 하인, 새 가족, 건강을 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면 이전에 죽은 욥의 가족과 하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뭐든지 나중에 돌려주기만 하면 이렇게 함부로 시험에 들게 해도 된다는 것일까?

게다가 본문을 보면 야훼 스스로가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으므로, 사탄이 그랬대요(…)라는 기독교인들의 해명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다는 표현은 욥기 초반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탄이 야훼에게 '인간은 당신께서 이래저래 여러 축복과 혜택을 주니까 순종하는 것이지 다 뺏고 시련을 주면 금방 돌아서 버릴 거다' 라는 식으로 도전했고, 그에 야훼가 응하여 '그럼 그렇게 해봐라' 라고 '사탄이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므로 전후 맥락을 제외하고 저 부분만을 보고 야훼가 '직접' 욥에게 저런 고통을 겪게 했다고 보기엔 비약이 크다고 주장한다. 또 신자들에게 고난받는 신앙인의 모범을 욥을 통해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논박을 펼친다.

그러나 이는 야훼의 속성을 볼 때, 야훼는 어차피 전지전능하여, 욥이 자기를 배반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전지전능한 통찰력을 지닌 야훼가, 이미 욥이 배반하지 않을 것임을 다 아는 상황에서도 사탄의 내기에 응하여 욥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는 것이 되어 버리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욥기의 저자도 이게 석연치 않자, 뒷부분에 야훼와 욥의 대화에서 야훼의 말을 통해 무마시키려 시도한다. 해당 대화에서 야훼는 내가 베헤모스와 리바이어던을 만들고 다룰 정도로 강하고 복잡한 존재인데 고작 창조물인 너희가 뭘 안다고 설치는가? 라는 논리로 욥기를 끝낸다. 하지만 이건 전혀 근본적인 해명이 될 수 없다. 전형적인 무지에 호소하는 논리.라고 하겠다.

3.4.5금송아지 사건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관련자들이 대부분 살해당하는데 정작 이 숭배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론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다. 물론 아론이 어느 정도 강요를 받은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금송아지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거나 실제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도 관련자가 모두 살해당하는 가운데 아론 만이 별다른 벌을 받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론이 회개를 했기 때문일까? 그럼 다른 사람들 가운데 회개한 자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동생이 모세라서

이에 대해서는 아론이 최초의 대사제로 임명될 사람이며, 탈출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위인이라 하느님이 아꼈다는 견해도 나온다.

3.4.6. 뒷통수 치기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화평하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하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30]로 삼아 부려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할 생각이 없어서 싸움을 걸거든 너희는 그 성을 포위 공격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붙이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밖에 그 성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원수들에게서 빼앗아 주시는 전리품을 너희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신명기 20장 10절~14절)

전지전능한 야훼께서 전쟁할 때는 이렇게 하라면서 직접 제시해 주시는 가이드 라인 되시겠다. 가만히 보면 참으로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데, 치고자 하는 성에 접근해서는 화평을 맺자고 낚시질을 시도하여 성에서 그 화평 교섭을 믿고 성문을 열어주면 그 성의 거주민들을 노예로 잡아 부리고, 만약 화평을 맺자는 낚시질에 걸리지 않으면 공격해서 다 쳐죽이고 여자와 가축과 아이들을 전리품(...)으로 차지하라는 명령이다. 화평을 맺겠다고 하면 노예고, 안 맺겠다고 하면 살해당한다.

이 점에서 성경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야훼의 개입이 있었고, 성경이 실존하는 야훼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해당 구절에서의 전지전능한 야훼의 명령과 사고 방식은 그 당시의 전근대적인 히브리족의 사고의 수준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3.4.7성차별적 서술들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창세기 3장 16절)

남자와 동등한 대상이 아닌 상명하복의 관계로 여자를 규정하고 있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 (민수기 31장 17절~18절)

남의 땅을 침략하고 다른 민족을 약탈할 때, 처녀들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죽이라고 하는 구절이다. 야훼의 명령으로 여성을 약탈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처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별한 거지

그런데 그 고발이 사실이어서 그 여자가 처녀였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아비의 집 문 앞에 끌어다 놓고 친정이 있는 성읍의 시민들이 돌로 쳐죽일 것이다. 그는 제 아비의 집에 있을 때 몸을 더럽혀, 이스라엘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부정한 짓을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뿌리뽑아야 한다. (신명기 22장 20~21절)

결혼을 했는데 처녀가 아니면 돌로 쳐 죽여도 정당하다는 구절이다. 참고로 현재 유대교계에서는 투석형을 행하지 않고 있고, 기독교계에서도 간음한 여인과 예수의 일화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투석형을 폐기하였고 행하지 않는다.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를 다른 사람이 성읍 안에서 만나 같이 잤을 경우에는, 둘 다 그 성읍 성문 있는 데로 끌어내다가 돌로 쳐죽여야 한다. 그 처녀는 성읍 안에서 당하면서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일 것이요,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범했기 때문에 죽일 것이다. 이런 부정한 짓을 너희 가운데서 송두리째 뿌리뽑아야 한다.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를 다른 남자가 들에서 만나 겁탈했을 경우에는, 그 여자를 겁탈한 남자만 죽여야 한다. 그 처녀는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므로 손댈 것까지는 없다. 이것은 이웃에게 맞아죽은 것과 꼭 같은 경우이다. 그 일을 당한 곳이 들이므로, 약혼한 그 처녀가 소리를 질러도 와서 건져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22장 23~27절)

실제 강간이 벌어질 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현대 가치관으로 볼 때 매우 억울할 수 있다. 강간당할 때 협박이나 구타 등 여러 이유로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면, 강간이 아니라 화간으로 처리한다는 이야기. 고대 사회의 전근대적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율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성읍 안이 아닌 들에서의 강간에 대해서는 여성을 처벌하지 않으니 딴에는 진보적이라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데 한 사람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셈으로 손을 내밀어 상대편 불알을 잡았을 경우에는, 그 여자의 손을 잘라버려야 한다. 조금도 애처롭게 여기지 마라. (신명기 25장 11~12절)

 

이쪽도 참으로 전근대스럽기 그지없는 부분. 최악의 경우 남자를 의사양반에게 보낼 수도 있고 

내가 고자라니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남편을 도울 수 있지만, 그래도 손을 자르는 건 좀 

아니 많이

 심하지 않은가? 매우 요상하고 전근대적인 내용으로 이래저래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여자가 아기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1주간, 월경하는 동안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아기의 포경을 잘라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여인은 30일하고 3일간, 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이 되기까지 집에 있어야 한다. 거룩한 물건에 결코 닿으면 안 된다. 기간이 차서 몸이 깨끗하게 되기까지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계집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2주간, 월경하는 동안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그리고 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하게 되기까지 66일간 집에 있어야 한다. (레위기 12장 2~8절)

또 신약성경에도 여성을 차별한다고 보여질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디모테오1서 2장 11~15절)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고린토1서 14장 34~35절)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고린토1서 11장 3절)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고린토1서 11장 7~10절)

아내 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처럼, 아내도 모든 일에 자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에페소서 5장 22~24절)

이 모든 게 대놓고 성차별을 권장하는 구절이라 여성들에겐 매우 불쾌한 구절들이다. 실제로 페미니즘 신학을 연구하는 여성 신학자들이나 여성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에 자주 불쾌감을 표시한다.

사실 아직도 유대교는 여성을 아래로 두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게 유대인들이 이혼할 때 하는 게트(Get)란 풍습이다. 이는 남편이 이혼하는 아내에게 "너를 다른 남자들에게도 허가한다."라는 내용이 써진 종이를 주는 의식이다. 이 종이가 없으면 그 여성은 다른 유태인 남성과 재혼할때 상당한 애로사항이 생길 수도 있다[31]. 이는 명백히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둔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이걸 보면 고대 때도 중동 지역의 여성 인권은 시궁창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하와의 잘못 때문에 대대로 여성들을 차별해야 한다는 연좌제를 통한 차별도 들어있어 

밥먹듯 어기는

 신명기 24장을 어기고 있다.

이는 이는 해당 구절들이 기록된 시기의 전근대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저 구절을 바탕으로 여성 교우들을 차별해서는 안 될 것이며, 현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나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머리를 가려야 한다 같은 구절도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현대에서 받아들일 의미 자체는 복장을 단정히 하십시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32]

3.4.8. 가나안 민족들에 대한 기록

그들(가나안 민족)을 가차없이 전멸시키시려고, 야훼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고집을 세워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야훼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쓸어버리게 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 11:20)

밑에도 기술하겠지만,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가나안을 먼저 침략하여 노략질 한 것은 야훼와 이스라엘인들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4.9바빌론 아이들을 저주함

시편 137편은, 바빌론 사람들에게 처참하게 파괴당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는 기도인데, 도중에 보면 그들의 아이를 바위에 메어 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을 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알겠는데,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지?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같은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 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3.4.10예리코의 전투에서의 유아 학살

구약 성경에 따르면, 이집트를 탈출해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던 가나안을 침략하였다고 나와 있다. 직접 확인해보자.

(신명기 20:16~17)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또한 이런 전통(?)은 후로도 이어진다.

(사무엘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전하였다. "야훼께서 나를 보내시어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소. 그러니 이제 야훼의 말씀을 들으시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떼와 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이젠 아예 빼도박도 못하게 유아 살해를 야훼께서 직접 명하셨다(...). 이제 예리코의 전투를 살펴보자.

(여호수아 6장 20~21절)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건 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온 세상을 창조한 사랑 넘치고 전지전능하다는 야훼가 자기를 믿지 않는 자유의지를 행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준답시고 전멸시키는 것도 충격과 공포지만 젖먹이 아기까지 죽이는 짓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말 그대로 극단적인 편애 행위. 신자들이 이 내용을 옹호하거나 미화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주로 예리코는 아기를 인신공양하는 사악한 집단이기에 진멸당해 마땅하다고 한다. 그런데 '''제물로 바쳐질 그런 아기를 구하지도 않고 같이 죽였다(...). 한 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드립.

이에 대해 R.A 토리[33]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암세포?

가나안과 예리코의 장정들 뿐 아니라 힘 없는 노인과 아녀자, 갓난 아기까지 죽이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이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 민족의 죄악이 심각했다고 봐야한다. 이 죄악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에 심각한 패해를 주는 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암세포를 제거해내야 했다. 암세포를 절제하는 수술은 매우 무서운 수술이지만, 나머지 건강한 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도덕적인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전술했지만, 갓 태어난 아기는 그 부모의 죄와는 상관없다. 

연좌제도 아니고

 또한 가나안과 예리코인들이 그 정도로 타락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설사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지전능하다는야훼가 교육이나 제도 정비를 통해 교화하는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냈을 법한데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떤 변명을 덧붙이더라도 이러한 학살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학살자들도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온갖 변명과 핑계, 명분을 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것.

역사상 유명한 학살자들도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온갖 변명과 핑계, 명분을 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좀 더 도발적으로 말하면, 이게 홀로코스트와 뭐가 다를까? 나치스가 할 만한 변명에 똑같이 대입해보자.

유대 민족의 장정들 뿐 아니라 힘 없는 노인과 아녀자, 갓난 아기까지 죽이라고 한 히틀러의 명령이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 민족의 죄악이 심각했다고 봐야한다. 이 죄악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에 심각한 폐해를 주는 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암세포를 제거해내야 했다. 암세포를 절제하는 수술은 매우 무서운 수술이지만, 나머지 건강한 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히틀러는 인류를 위해 도덕적인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정당 방위?

만일 가나안 인들과 예리코인들이 멸절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인들과 예리코 인들에게 멸절됐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정당 방위였다.

청동기 시대의 전쟁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스라엘의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더욱이 야훼가 전지전능하면 굳이나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시키지 않더라도 새로운 땅 하나 정도는 뚝딱하고 만들어서 이스라엘 인들을 거주하게 하면 될 텐데...

•예수가 오기 전이라서?

부모들의 타락으로 인해 아이들도 오염되었을 것이며 이는 예수의 복음으로만 치유할 수 있는데, 당시는 예수가 오기 전이었다.

부모의 타락으로 아이들이 오염되었다는 말도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유아는 타락한 시대상과는 관계된 죄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게다가 전지전능하니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터, 갓난아이를 죽이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의 가능성마저 미리 끊어버릴 정도라면 처음부터 가나안과 예리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으면 되었을 게 아닌가?

•구약 시대니까 당시 시대 가치관의 한계로 보자

성경에서 여리고 성 전투의 시점은 분명히 구약이고, 이방인들의 믿음과 구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시점은 신약이다. 즉 구약 시대에는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만의 야훼였으므로 성경에 쓰인 기록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다. 처음부터 모두의 구원자로 기록되지 않았고, 여리고 전투 당시에는 선택 받았다는 유대인만의 야훼였던 시대에 쓰여졌으므로 성경의 중심 사상에서 전체를 놓고 보면 벗어나지만 쓰인 시점만을 놓고 보면 문제가 없다.

구약 시대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구약 레위기에서 야훼는 스스로도 분명, 부모의 죄로 그 자식을 죽일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놓고 자신을 믿지 않는 아말렉의 젖먹이 아기까지 참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구약이 쓰여졌던 그 당시 시대를 감안해도 야훼의 행위는 21세기 현대의 보편 타당한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비윤리적이며 잔악하기 때문에 기독교 외부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구약 성경의 비윤리적 내용을 21세기 현대에 가치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이들은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가나안과 예리코의 아이들은 타락한 사회에 있느니 차라리 죽어서 하나님 품에 있는게 나았을 것이다.

죽은 아이들은 천국으로 간다는 가톨릭 등의 현대 교리에 따른 논증이다. 다만 이 교리를 적용한다고 해도 그 방법에 있어서 대단히 비윤리적이라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무지에 의거한 논증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광대해서 지각이 제한된 인간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전형적인 무지에 의거한 논증이다.

•구약을 완성하는 신약성경

기독교 측에서는 윤리적, 율법적, 신앙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던 구약 시대를 완성하는 신약의 가치를 강조하며, 이러한 점들을 구약 시대의 한계로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다시말해, 이 부분에 대해서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동일하게 존중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구약이 원본이라면 신약은 패치(?)와 같은 개념이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충돌하는 부분은 신약에서의 관점이 더 완전한 관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신약에서 예수에 의해 야훼의 성향이 다르게 그려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야훼가 구약에서 저지른 이러한 학살 행위를 미화하거나 덮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만물이 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야훼가 명한 예리코의 학살이 이루어지는 동안 예수도 그 야훼의 우편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덧붙여 참조하면 그런 예리코의 유아 학살 행위를 직접 시행한 것이 예수(=야훼)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성경이 좀 틀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여기에 대해 상당수의 보편교회 신학자들과 개혁적인 개신교인들은 성경에 나온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사실 근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가톨릭, 한국기독교장로회, 감리교와 예장 통합 측의 부분적 교세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서도 구약의 야훼의 학살을 애써 무시하며 조롱해도 상관 없지만 성경이 신화도 섞여있으며 왜곡도 섞여있고 편집과 필사상의 비의도적 오류도 있으며 고대인들의 낙후된 세계관과 유대인들의 민족성 등이 섞여있는 경전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문단의 비판은 사실 조금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 개신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이 신화도 섞여 있으며 왜곡도 섞여 있고 편집과 필사 상의 비의도적 오류도 있으며 고대인들의 낙후된 세계관과 유대인들의 민족성 등이 섞여 있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한계점이 존재하는 경전이라면,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와 같은 다른 신화와 다를 바가 대체 무엇이냐 라는 비판적 의문이 생길수밖에 없다.

또 이에 대해 구약외경인 <지혜서> 12장에는 예리코를 비롯한 가나안인들의 죄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나안들에게 내린 하느님이 신중한 징벌 - 당신의 거룩한 땅에 살던 옛 주민들, 당신께서는 그들의 가증스러운 관습 때문에, 마술과 불경한 제사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셨습니다. 아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음복한다며 사람의 살과 피에다가 내장까지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광란의 의식이 한창 벌어질 때에 그 참가자들을, 힘없는 생명들을 살해한 그 부모들을 당신께서는 저희 조상들을 통하여 멸망시키시어 모든 땅 가운데에서 당신께 가장 값진 이 땅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훌륭한 이주민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인간이기에 당신께서는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 군대의 선봉으로 말벌들을 보내시어 저들을 조금씩 멸망시키게 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싸움터에서 저 악인들을 의인들 손에 넘기실 수도 무서운 야수나 엄중한 말씀으로 단번에 퍄멀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조급씩 심판하시어, 저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물론 당신께서는 저들이 근본부터 악하고 악을 타고났으며 그들의 사고방식이 영원히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저들은 처음부터 저주받은 종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저지른 죄를 당신께서 용서하신 것은 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지혜서 12장 3절~11절, 가톨릭 성경)

그러나 구약 성경의 가나안 관련 서술은 교차 검증이 제대로 되는 역사적 기술이 아닌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인들을 진멸시켰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혜서의 해당 서술은 후대 유대인들의 아전인수격인 서술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논란이다. 또한 가나안인들이 불의한 사회 체제를 가졌으므로 몰살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서술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을 충분히 가질 수 있기도 하다.

또 불의한 사회체제를 가졌다고 해서 젖먹이 아기까지 다 칼로 몰살시키는 것은 전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온갖 살육과 학살을 저질러 온 자들도 온갖 핑계와 변명을 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지혜서의 해당 서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한 해명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예리코의 전투를 비롯한 가나안 정벌에 대한 가톨릭 교황청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분노는 우리가 하느님 자신이신 사랑에 대해 어긋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 사는 사람, 선을 벗어나 사는 사람은 그럼으로써 그 분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은 부정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분노는 지배욕에 찬 독재자가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내적인 논리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 곧 우리를 지탱해주는 사랑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공허와 어둠 속으로 빠져 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는 이른바 사랑의 영역에 존재하지 못하고, 분노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하느님의 형벌은 하느님께서 벌금을 부과하시고 사람에게 무엇인가 제재를 가하시는 데서 재미를 느낀다는 의미의 형벌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형벌은 우리가 실제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노선으로 들어서고 올바른 삶을 벗어날 경우에 느끼게 되는 당연한 결과들의 표현입니다. "

3.4.11다윗과 간통한 밧세바에 대한 처결 문제

우선 다음의 기록을 보자.

어떤 자가 남의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다가 붙잡혔을 경우에는 같이 자던 그 남자와 여자를 함께 죽여야 한다. 이런 부정한 짓을 이스라엘에서 송두리째 뿌리 뽑아야 한다. (신명기 22:22)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일 수 없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죽을 사람은 죄지은 바로 그 사람이다. (신명기 24:16)

보다시피 아비가 자식의 죄 때문에, 혹은 자식이 아비의 죄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며, 각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만 책임지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들켰을 경우[34]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이도록 되어 있다.

그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나는 네 상전의 딸과 아내들까지 네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딸들까지 너에게 주었다. 그래도 모자란다면 어떤 여자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나를 얕보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죽였다. 암몬 군의 칼을 빌려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사무엘하 12:7~10)

야훼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준 아이에게 중병을 내리셨다.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베옷을 걸친 채 밤을 새우며, 어린것을 살려달라고 맨땅에 엎드려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늙은 신하들이 둘러서서 일어나라고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더불어 음식을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기는 마침내 7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사무엘하 12:15~18)

분명 자기가 내린 율법에서는 연좌제를 금해놓고 정작 사무엘하의 기록에 의하면 간통과 불륜을 저지른 다윗과 밧세바는 살고, 죄 없는 아기가 부모의 죄로 죽게 된다.

신명기의 이야기와는 모순되게 분명 연좌제를 금지한다 했음에도 처벌 방식은 영락없이 연좌제다. 불륜의 주체인 다윗과 밧세바는 왜 처벌받지 않는데 아무런 죄없이 태어난 갓난아기는 뭐가 되는가? 야훼 스스로 내린 율법을 스스로 어긴것이나 다름없는 처사다.[35]

죽이는 주체가 야훼면 야훼 자신은 율법을 초월한 존재니 문제 없다 할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야훼의 명령으로 연좌제로 사람을 죽이는것도 율법에 맞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연좌제로 처벌할때 야훼가 시켰다하면 정당화 될테고 그러면 연좌제를 금지한 신명기의 이야기는 뭐가되는가? 결국엔 야훼 스스로가 어김으로서 율법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는 셈이다. 그럴거면 뭐하러 연좌제를 금지했는가? 연좌제로 벌을 주고서 그게 야훼의 명령이었다고 한다면 율법을 넘어서 정당화 가능할텐데 그럼 율법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신명기 23장을 보면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연좌제를 금지하는 율법 바로 전장에 연좌제로 처벌하는 구절이 나와있다(....)

물론 24장에선 어디까지나 연좌제로 죽는것만 이야기 했다고 넘어갈순 있지만... 결국 연좌제가 금지인건지 아닌지 명확하지 못하다.

3.4.12. 무신론자는 부도덕하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장 1절)

어리석은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한데다가 좋은일은 안한다고 말하고 있다(...). [36] 그렇다보니 이 구절을 토대로 무신론자를 공격하는 기독교측의 해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무신론자들도 이 구절에대해서 자신들에 대해 공격하는 구절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이다. 외국의 무신론적 성경비판 사이트에선 이 구절에 대해서 Fool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부분까지 비판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본다. 한국의 교회들도 시편 14장을 근거로 무신론자를 공격하는 말도 많다. 이 구절을 인용해 무신론을 비난하는 말이 많자 이런식으로 반박하는 영상도 올라왔다.[37]

이에대해서 이 구절이 무신론자가 비도덕하다고 단정짓는게 악인들은 모두 무신론자 즉 무신론자=모두 악인은 아니지만 악인들은 모두 무신론자라는 역으로 말하면 악인중에선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없다고 말하는것으로서 잘못된 선악관을 심는 구절이라는 의견이 있다. 무엇보다 어리석은자=Fool의 원래 의미는 어리석은자가 아닌 도덕심이 부족한 자라는 의미였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쪽으로 보더라도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훼(or알라)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된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로 히틀러나 스탈린이 무신론자였고 그들은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예수쟁이의 헛소리가 있는데 히틀러는 자기 스스로가 카톨릭 교도라 밝혔기에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고[38]

그렇다고 카톨릭신자 모두가 히틀러같은 악인이란 소리는 아니다!

 스탈린은 그가 무신론자라 악행을 저지른게 아닌, 공산주의를 근거로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애당초 모든 악인이 무신론자란것도 무신론에는 악한 경향성이 있다는 해석을 낳을 여지는 남는것이다. 반대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선하다는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는 오류도 범할수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때 당시엔 야훼=국가체제나 다름없으므로 야훼를 부정하는것은 곧 체제를 부정하는것이 되므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악행과 동일시 되더라도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본래 종교란것이 당시에 도덕이나 법체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것이므로 신을 부정하는것=도덕과 법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왕권신수설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조차도 무정부주의자를 디스하는 이야기가 되버리는데다가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권위는 국민이 국가에 내린것으로 보며 저 이야기의 정 반대가 된다(...). 결국 이 이야기들은 고대인들에겐 국가에 권위를 내리는 합리적 방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점에서도 무신론자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다른 사상을 가지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이야기였고 국가체제, 도덕, 철학등이 발전해서 더이상 신의 권위가 필요 없어진 이후에는 국가체제, 도덕, 철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현재 이 구절의 의미는 야훼의 교리를 잘 따르고 법을 잘 지키자 정도가 되니 큰 문제는 없을수도 있다.

3.4.13호모포비아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로마서 1장)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장)

아주 대충 요약하면 레위기에선 동성애자는 죽어야 하며 로마서에선 동성애자는 천하의 개쌍놈들이며 고린도 전서에선 니들 천국 못간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요약하면 동성애자는 쳐죽여야 할 천하의 개쌍놈들이며 천국은 국물도 없다

 심지어 로마서는 신약 성경이라 구약은 전근대적이라 그렇다는 식의 쉴드도 칠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딱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동성애를 하는것도 아닐 뿐더러 그들이 동성애를 한다고 딱히 도덕적 문제를 야기하는것도 아니다. 물론 동성애를 하면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없는건 아니지만 반대로 동성애자중에 악하지 않은 사람은 훨씬 더 많다.

이 몇구절이 미친 영향은 엄청난데 이 구절들 때문에 동성애는 죄악시 되었고 그들을 박해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비기독교권에도 동성애에대한 적대의식이 퍼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만큼[39] 사실상 동성애자들에게 악의 근원이나 다름없고 심지어 종교를 배척하는 공산주의에서도 그런 동성애 박해 문화의 영향으로 동성애자를 박해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정말 진보적인 일부 개신교 계열의 교단이 아닌 이상 온건한 측의 기독교 종파들(특히 카톨릭)마저도 동성애자들의 결혼엔 반대하고 있으며 그 외엔 동성애자를 저 구절 그대로 볼정도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특히 로마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저 당시에는 정말로 인간의 타락이 극에 달해 이성과의 성적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동성에게까지 눈을 돌려 쾌락을 추구하는, 쉽게 말해 성적 쾌락에 중독되다시피 한 시대였고 바울은 그런 성적인 타락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 마디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속된 말로 광적으로 발정나서 성적 윤리고 뭐고 자신의 욕망만 채우던 상황이었던 것. 개신교 계열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근거로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도 이런 시각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상식적으로, 한 도시국가의 남자 전체가 순수한 동성애자인데 천사를 강간하려고 벌떼같이 몰려드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에 대해선 호모포비아 참조

3.4.14. 인신공양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레위기 27장)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장) #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사사기 11장)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사사기 11장)

레위기 27장에선 명확히 인신공양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창세기와 사사기 양쪽 모두 제물을 바치는 방식이 번제물인데 이게 뭔가 하면 제물의 팔다리를 자르고 머리를 자른 후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뒤 불로 태워서 그 연기를 제물로 바치는것(...) 

몰라 그거 뭐야 무서워

창세기에선 어디까지나 

다행히도

 미수로 그쳤지만 사사기에 대해선 진짜로 번제물로 바쳤을것이라 보는 시각이 크다. 현대의 성경들은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바쳐지지 않고 처녀로 살다 죽는걸로 끝냈지만 이런 해석은 12, 13세기에나 나왔다고 한다. 이에대해서 or로 해석하냐 and로 해석하냐에 따라 달라지고 or라면 번제물로 안바쳤다는 식의 해명도 있긴 하지만 처녀로 살다 죽는게 한참 뒤에나 나온 부분이란걸 생각하면 그냥 번제물로 바쳐졌다고 보는게 편하다(...)

하지만 12, 13세기의 학자들이 고친것처럼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야만적 신앙에서 

Be폭력

 비폭력 종교로 변화했고 결국 이 산제물에 대해선 한참 전부터 해결 되었으니 기독교인들은 신학자들에게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것에 대해

 감사를 하도록 하자.

3.4.15. 노예제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때려 당장에 숨지게 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 종이 하루나 이틀만 더 살아 있어도 벌을 면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1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And if a man smite his servant, or his maid, with a rod, and he die under his hand; he shall be surely punished. Notwithstanding, if he continue a day or two, he shall not be punished: for he is his money (출애굽기 21장 20~21절, KJV)

If a man beats his male or female slave with a rod and the slave dies as a direct result, he must be punished, but he is not to be punished if the slave gets up after a day or two, since the slave is his property. (출애굽기 21장 20~21절, niv)

종을 때려 죽이면 형벌을 받지만, 하루나 이틀 연명하면 형벌을 면한다. 다시 말해, 죽지 않을 만큼만 패면 괜찮다는 이야기. 그리고 명백하게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노예 해방을 감행할 때, 반대파들이 "노예제는 성경이 명하는 권리이고 법"이라고 주장했다.일

일부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대하여 출애굽기 21장 16절에 사람을 훔쳐서 팔거나 자기 손에 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라고 되어 있으며, 이것은 사람들을 납치해서 팔아 넘기는 노예 상인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라고 주장한다.

즉 다시말해 당시 이민족들에 비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수준의 사회 제도였다는 것. 기독교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런 법을 제정한 이유가 잔혹한 노예 제도가 이스라엘 시대의 노예 제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이들은 성경에서의 노예 제도는 일종의 파산법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대엔 재정에 문제가 생겨 빚을 갚지 못하게 될 때에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빚을 못 갚으면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데 모세가 제정한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와 다르게 한 사람이 빚을 못갚게 되면 채권자나 다른 부자에게 가서 자신을 종으로 팔고 싶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만약 그 사람이 동의하면 그는 빚을 갚아주고 거처를 제공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도록 가령 목수,미장이로 훈련시켜 급여를 주면서 부렸고 저축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리고 6년이 지나면 7년째 그들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켜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정부가 개입을 하는 대신 사람들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종 제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경이 이를 노예 대신 종이라고 번역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노예 제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 있었던 잔학한 노예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맹점이 있으니, 이들이 근거로 제시한 출애굽기 21장 16절의 구절에 명시된 것은 같은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이스라엘의 종 제도가 비교적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는 내집단 도덕이었지, 타민족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유대인 내수용 내집단 도덕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야훼의 명령으로 예리코의 학살 같은 사건을 저지르고 심지어 자랑까지 해 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쨋든 본 항목에 게재된 출애굽기 21장 20~21절에 의하면 종은 주인의 재산이라고 본 것은 맞다..[40] 더욱이 성경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고대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도 노예에 대한 처우가 좋았는지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히브리 사회에서 종이라는 개념이 파산 상태의 개인을 회생시켜 재사회화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대체 왜 본 항목의 구절에서 그 개인을 다른 개인의 소유물 내지는 재산으로 명시했는지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일언반구도 없으며, 주인이 종을 때리더라도 이틀 동안만 살다가 죽으면 주인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될 수 없다. 즉, 기독교인들은 본문에 게재된 출애굽기 21장 20~21절에 대한 직접적 해명을 회피하고 그걸 쉴드쳐보겠다고 다른 구절들을 가져왔다는 것이다.[41] 따라서 성경 내에서 언급되는 종이 파산자를 회생시키고 재사회화 시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가 당시 여성의 인권을 일부 신장시켰다 해서 지금도 여성의 인권이 높은 종교가 아니듯이, 상대적으로 본다고 해서 구약이 허락하는 노예제를 반박하기는 힘들며, 성경 내부에 산재해 있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성과 시대적 한계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3.4.16. 조롱의 댓가

(열왕기하 2:23~24)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 2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였다. 

이런 미친

하지만 이에 대해서 정확한 해석이 아니고 오해받은 것, 또는 그저 야훼에게 기도한 결과일 뿐이란 해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엘리사 항목을 참조.

3.4.17. 불구자 문제

우선 다음 성경 구절을 보자.

야훼께서 그를 꾸짖으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를 만들고 눈을 열어주거나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게 하느냐? 나 야훼가 아니더냐? (출애굽기 4:11)

야훼가 병자나 불구자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레위기의 율법을 보면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의 후손 대대로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하느님께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소경이든지 절름발이든지 얼굴이 일그러졌든지 사지가 제대로 생기지 않았든지 하여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다리가 부러졌거나 팔이 부러진 사람, 곱추, 난쟁이, 눈에 백태 낀 자, 옴쟁이, 종기가 많이 난 사람, 고자는 성소에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중략- 몸이 성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하느님께 양식을 바치러 가까이 나오지 못한다. (레위기 21:16~21)

분명 야훼는 자신이 불구자와 병자들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래놓고선 그 불구자와 병자들더러 예배도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신학자들은 이것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위생적인 측면에서 구별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성막과 성전 주변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에) 장애인을 성소로 오지 못하게 하는 구절은 고대 유대 민족 특유의 선민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여기서 배웠나보다

 이러한 제한은 신약 시대 이후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교리에서 사라진다.

3.4.18. 인종차별

마태복음 1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마태복음 15:22-24)

위 구절에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에게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하자 예수는 자신이 유대계 사람들만을 위한다고 그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가 단순히 여자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었으면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나, "가나안" 여자라서 부탁을 거절했기 때문에 인종차별의 여지가 있다.

성경에서 보이는 인종차별은 이뿐만이 아니다. 위 구절과 관련된 또 다른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에서 예수의 대답이 가관이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 [예수가] 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5:25-26)

아까 그 가나안 여자가 다시 간절하게 요청하니 예수는 그 여자를 포함한 가나안 사람들을 "개"로 비유하여 자신이 돕지 않는게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성경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선민사상을 잘 반영한다.

3.5. 현대 사회에서는 지킬 수 없는 부분

 

이하의 내용에 한하여 다중 관점이 적용됩니다.

본 문서 혹은 본 문단은 문서 수정에 관해 이어진 토론 결과, 이하에 한하여 다수 의견을 병기하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본 항목에 있어서는 한정적으로 다중 관점을 따르는 것이 인정됩니다. 만약 이 문서를 수정하고 싶으시거나, 다수 의견 병기에 있어 이의를 가지신 분은 해당 토론란에 와서 토론해 주세요.

 

현대 윤리에 비추어 보아도 문제가 되지 않아도, 현대 사회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반면, 이러한 점의 대부분이 현대 기독교에는 해당되지 않으며(심지어 일부 조항은 유대교에도) 해석하는 사람과 교단에 따라 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부분이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이걸 지키려면 고기에서 피를 100%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당장 모든 고기를 못 먹게 된다.(...) 정 지키고 싶다면 채식주의자가 되면 된다.또한 피를 먹지 말라는 부분을 확대해석해서 수혈을 받지 않고 있지만, 그럼 사고로 수혈이 꼭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얘네
  • 지상 생물 중에서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을 수 있다고 되어 있으며 이외의 동물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그 주검을 만지지도 말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돼지는 새김질하는 동물이 아니므로 (성경을 따른다면) 먹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 생선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 즉 두족류를 먹을 수 없다.
  •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을 수 없다. 즉 마블링을 먹어선 안된다.
  • 아이를 낳으면 일 년 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국내법에서는 정해진 도축장 이외의 장소에서 허가 없이 동물을 도축해서는 안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제사 규정이 드러나 있다. 근데 애초에 성전이 없어 제물을 바칠 수도 없다(…).
  • 두 종류 이상의 재료로 된 옷을 입어선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고분자 물질[42]로 구성된 합성섬유로 된 옷을 입을 수 없다.
  • 여자는 남자 옷을 입을수 없고. 남자는 여자 옷을 입을수 없다. (신명기22:5) 남장여자 여장 남자들 지못미. 유니섹스는 어떨까
  • 군 진영 안에서는 화장실을 설치할 수 없다. (신명기23:12)
  • 난간이 없는 지붕을 만들수가 없다. (신명기22:8)
  • 아내는 격투중인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음낭을 잡을 수 없다. (잡으면 손목을 잘라야 한다.) (신명기25:11~12)이건 인도주의적이잖아, 의사양반!
  •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법 대부분. 안식일에 일을 했다던가.(민수기15:32~36) 시온산에 들어간 동물이라던가. (히브리서12:20) 무당이라든가.(출애굽기22:18) 혼전순결을 잃은 여자라든가.(신명기22:20~21) 부모님 말씀을 거역했다던가. (신명기21:20~21)

유대교 중에서 근본주의적인 종파는 투석형 등을 제외하면 아직도 위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유대교의 경우에도 구약의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미슈나, 탈무드 등의 신학 해설을 통해 유화적으로 부드럽게 현대 사회에 적용시키는 편이다.

 

또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아후 사도들의 신학적 논쟁을 통해 율법에서 신자들을 해방[43]시켰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이며 십계명을 제외한 구약의 자잘하고 삶의 제약이 심한 율법들은 강제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식 교리이다. 특히 제사에 관한 내용, 식생활에 관한 내용은 더욱 그러하다. 다만 십일조 같은 경우는 아직도 고집하는 개신교 종파들이 많아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돈 되는 것만 인정

여기에 대해서는 도적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도록 해석되는 대목은 그 자체로 현재도 비판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으며[44] 사실상 사문화되거나 의미만이 남은 구절은 구절 자체일 뿐,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린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

3.6. 잘못된 논란

3.6.1. 표절 논란

과거 이 항목에는 성경에 나온 예수의 이야기들이 타 신화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담겨있었으나, 시대정신에 나온 내용들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무신론 서적들[45]에도 예수의 이야기가 다른 종교의 것을 표절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무신론 서적들이 성경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구약의 몇몇 예화들의 중복[46]을 두고 '신성한 경전의 출처가 잡다하다'라고 까기도 했고,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예수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서술[47]이 전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고 까기도 했다. 도킨스나 히친스 등이 성경 자체에 대해서도 공격하는데, 이들이 '예수 신화 표절론'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할까? 결국 명백한 '표절' 근거는 없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예시를 들자면,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러셀 서양철학사>에서, '에페소스의 디아나'숭배가 성모 마리아 흠숭으로 변화하였다는 것, 이사야서가 실은 여러 명의 저술이 혼합된 것이라는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를 하지만, 미트라 종교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은 '당시에 그런 종교가 있었으며, 초기 기독교와 경쟁적인 관계였다'가 전부이다. '표절'이 아니다. [48]

즉 기독교의 여타 신화 표절론은 학술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별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기타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돌아다니는 유사 종교 비교표니 태양신 호루스와 예수의 유사성 이니하는 떡밥들은 전부 시대정신에서 나온 거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시대정신이라는 저작물 자체가 사실상 유사역사학 및 음모론적 불쏘시개라는 것을 감안하면, 표절론은 헛소리에 가깝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3.6.2. 니케아 공의회 정경 논란

다빈치 코드의 영향으로 인해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 목록을 정했다는 논란도 있는데, 그런 적 없다.[49] 니케아 공의회는 과연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건지, 아니면 하느님이자 인간인지를 결정한 공의회이므로 그리스도교 사상에는 매우 중요한 공의회이긴 했지만, 성경 목록을 정한 적은 전혀 없다. 다빈치 코드는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역사적인 사실과 무관하다.

4. 논란에 관한 논란

4.1. 4중적 해석법

4중적 의미의 해석은 중세까지 유행하던 해석방법으로 성경해석을 4가지 의미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필로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에 의해 3중적 의미의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4중적 의미의 해석으로 정립되었다. 1.역사적 의미 혹은 문자적 의미 (sensus historicus or literalis)란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 2.교훈적인 의미(senus tropologicus)란 교훈과 도덕적 시정(the correction of morals)을 찾는 것 3.풍유적인 의미(sensus allegoricus)란 문자적 의미 이상의 다른 의미를 설명하는 것 4.영적 의미(sesus anagoricus)란 신비적으로 혹은 공적으로(mystically or openly) 사용되는데, 듣는 자의 마음이 하늘의 것들(heavenly things)을 묵상함으로써 감동받고 훈계를 받는 것.4중적 의미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해석해 본다면 문자적(literal)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문자적 도시이며, 풍유적(allegorical) 의미로는 교회를 의미하며, 도덕적(tropological) 의미로는 인간의 영혼을 언급하며, 영적(anagogical)인 의미로는 하늘의 도성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와는 교회를, 노아의 방주는 십자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4중적 해석법을 도입할 경우, 이 문서에서 지적되는 성경에 관한 논란을 둘러싼 상당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비기독교 입장에서는 기독교 입맛에 맞춘 성경 해석방법아니냐는 합당한 비판이 제기될 수는 있다. 밑의 비판 단락 참조.

일단 문제는 이러한 사중적 해석법을 성경에 체계적이고 주체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이 기독교 교계에 정립되어 있냐는 것인데, 대체 성경의 어느 부분까지를 역사적으로 보며, 어느 부분까지를 교훈적 의미로, 또 어느 부분까지를 풍유적 의미 및 영적 의미로 보아야 할까? 그 기준이 사실상 정립되지 못한 점이 큰 문제이다.

세계 기독교의 50~60%를 차지하는 가톨릭정교회 등의 보편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의 해석이 그 기준이라 성경 해석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으므로 해석에 있어서 일관된 견해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는 현재 지구상에 개신교 종파의 수는 대략 무려 2만여개에 달하는(...) 교파들이 있는데, 또한 각 종파마다 저마다 옳다고 내세우는 성경 해석법은 당연하게도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거룩한 공교회'의 해석은 대체 이 2만여개의 종파의 교회 중 어느 공교회의 해석을 말하는 것인가? 기독교 연합체인 WCC나 WEA에서는 각 기독교 종파를 아우르는 성경의 4중적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국내 외 어떤 기독교 연합체나 어떤 공의회라도 각 종파를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는 성경 해석의 4중적 해석법의 기준을 제시한 적은 없다.

가까운 예로, 국내 기독교 메이저 교단 중 가장 보수적인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와 가장 개혁적이라는 기독교 장로회 사이에는 성경 해석에 있어 차이가 많은 편인데, 특히 예수교 장로회 쪽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문자적 해석을 주로 하며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반면, 기독교 장로회 쪽에서는 성서 비평을 통한 해석을 위주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지양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장의 경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 상당수를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 하는 반면, 기장의 경우에는 사회 구원과 연결 지어 해석하며 여러 사회 운동과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보수 쪽인 예장 쪽에서는 기장의 이러한 성경 해석에 대해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하며, 심하면 이단이라는 언급도 심심찮게 하며 대단히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 이러한 개신교 교파 간의 차이를 기독교 연합체에서 통합하여 공통된 성경 해석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주장부터가 교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에 가깝다. 애초에 개신교는 통제받지 않는 성서 자유해석이 원칙이기 때문.

개신교 내 종파들 간의 문제 뿐만 아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계의 성경에 대한 해석도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구약 인물들의 영이 지하로 내려 갔다는 구절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를 연옥 교리에 대한 근거로 해석하지만, 개신교 계에서는 이런 해석들을 전면 부정하며 연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또한 복음서의 내용 중에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는 구절에서도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이 구절을 베드로에 대한 교황권의 부여로 해석하지만 이 해석 역시 개신교 계에서는 전면 부정하고 있다. 물론 교회 일치 운동 등이 현대에 활발히 일어나는 점도 무시해선 안되지만, 교계의 교리적인 소통은 지지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설사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계의 모든 종파들을 아우르는 초교파적인 성경의 4중적 해석법에 대한 기준안이 적용되어 성경의 상당수 논란이 해결되었다고 봐도 여전히 역법/숫자 상의 상충 및 상호 모순, 이문 현상이 일어나는 부분이 많다. 애당초 야훼의 뜻과 개입으로 쓰여졌다는 성경이 집필되고 필사되던 시점에서조차 그러한 오류들이 산재했던 것이 현실인데,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야, 기준을 세운다고 세워서 해석해 봐야 해석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간단한 예로, 신약 성경에 산재하는 모순과 사본들 사이의 이문들의 문제는 4중적 해석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만 해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내용을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기 때문이며, 이외에도 교파 간의 갈등이나, 개인의 신학적 고찰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내용에 변경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필경사의 부주의[50]나, 오/탈자 등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오류와 모순들과 이문들[51]문제들은 4중적 해석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이 글에 기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이라 그런지 논의의 대상이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정교회나 성공회, 각종 오리엔탈 정교회의 분파들 같은 기독교계 종파들[52]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성경 해석을 발전시킨 이런 종파들까지 초교파적인 4중적 해석안의 주체여야 할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만 합의를 보는 것도 이 문단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정교회나,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등도 독자적인 성경 해석법을 발전시켜 신자들 입장에서 교리적인 모순 자체는 해결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전통을 무시하고 성경 해석을 통일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에 가깝다. 성경의 모순점을 해결하려고 한 신학 이론이 4중적 해석법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교파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한쪽 입맛에 맞는 성경 해석만을 강요하는 것도 무리가 가득한 주장이라는 것도 알자.

4.2.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 성경 속 논란에 대한 문제

결론적으로 보면,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애초부터 모든 기독교 종파를 해석하는 통일되고 권위있는 해석이란 전무하며, 성경의 어느 구절이 비유인지 어느 구절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기준 역시 없고 여기에 대해선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개신교 내부의 2만여개의 종파들마다 저마다의 성경 해석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은 시궁창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또한 해석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유아 학살이나, 곤충이 네 발로 기어다닌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부분 내지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불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풍유적/영적 해석 으로 땜빵하는게 아니냐는 비기독교인들의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다시말해 하필 성경 내에서 발견되는 여러 상호 모순이나, 타민족 학살, 여성 차별, 동성애 증오, 유아 살해 및 대량 학살 등의 전근대적/비윤리적 부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때만, 즉, 야훼와 기독교에 불리한 부분을 질문하게 되면 바로 위와 같은,'전지전능한 야훼의 뜻이라 미천한 인간을 알 수가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사실 다 똑같은 야훼의 뜻'''인데, '야훼가 인간을 사랑한다'와 같이 듣기에 좋고 긍정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모르는 것 없이 술술 이야기 하다가, 왜 유독 '야훼가 아말렉의 젖먹이 아기들을 죽였다'같은, 비윤리적이고 전근대적인 구절에만 이르면 '인간은 알 수 없다'고 나오는 것인가?라는 지적.

'전지전능한 신의 뜻이라 인간은 모른다'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이 사실일 경우, 야훼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듣기에 좋은 부분은 인간이 잘 알 수 있도록 해놓았으면서, 유독 자신의 비윤리적이고 잔악하고 야만적인 부분만 인간이 알 수 없도록 해놓았다는 말이 된다.

성경 내부의 모순이나 비윤리적인 부분들 가지고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하다 보면 거의 항상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전지전능한 야훼의 뜻을 한낱 미물인 우리 인간은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 얼핏 들으면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기독교계를 보면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해당 구절에 반영된 구절이 종파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나, 야훼의 뜻을 이야기하는데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독교도의 교리논박도 말이 통일되지 않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해석의 근거를 물어보면 대부분 성령의 힘이라느니, 영적 눈으로 봐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성령이 영적 눈을 틔워주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53]에서 답답하다는 말이 많다.

또 기독교계의 성서해석은 주로 성경이 진리라는 교계의 입장을 먼저 내세우고 나서 성경의 논란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론에도 언급했듯 종교적 가치관을 차치하고 보면 말이 안되는 점들이 존재해서 지금까지 무수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자세히 관찰하면, '야훼가 인간을 창조했다', '야훼가 인간을 사랑한다', '예수가 인간이 되어 세상에 내려왔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예수가 인류를 대신해서 죽었다' 등등, 주로 야훼와 기독교에 유리하고 긍정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교리는 거침없이 분명한 야훼의 뜻이라면서 이야기 하며 이런 종류의 말을 할 땐 인간이 야훼의 뜻을 알 수가 없다느니 하는 말은 전혀 없다.

따라서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도 뭔지 모르는 대상을 그저 숭배해야 한다는 뜻인가?'에 대한 의문. 앞서 기술된 말이지만 개중 반종교 성향이 극심한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인간의 정신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정의를 지닌 초월자라면 크툴루나 야훼나 다를 게 뭐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며 성경(과 개중에는 유대교, 기독교까지)을 비판하곤 한다.

5. 성경내 몇몇 오류의 원인 분석

  • 대부분의 숫자 문제

사울 이외에도 나이나 집권 햇수, 대수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호적과 역법과 같은 기록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은 사회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이런 제도가 없으면 지방 풍습에 따라서 해(年)를 세는 관습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고, 출생일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다보니 자기 나이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도 매우 많아진다. 성경 기록을 내부적으로 참조하자면,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이전 까지는 아예 호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가공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어느 마을에 자기 나이가 100살이라고 주장하는 할머니가 있다고 해보자.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미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들이나 손자, 그외 아래 세대의 사람들은 그녀가 100살을 살았다고 믿어줄 수 밖에 없다. 실제로는 70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해도.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아들은 자신의 나이와 어머니의 나이를 셈하다가 실수를 하여 20 정도를 잘못 더해 버렸고, 자신의 어머니가 120살에 돌아가셨다고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이 마을은 오래되고 오류가 많은 역법으로 해를 세고 있었기 때문에, 1년의 길이가 다른 지방보다 더 짧았다. 나중에 기록가들은 구전 기록을 바탕으로 역법 보정을 한 결과, '200년을 살다가 죽은 할머니의 전설'이 버젓하게 기록된다.(…)

이렇게 전승 기록들은 후대에 문자 문화가 도입된 다음 증언을 채록하면서 과장과 왜곡을 거치면서 수년에서 수십년, 수백년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 문자 기록이 있는 사회라도 기억의 오차 등의 이유로 인해 출생 기록이나 집권 시기가 문헌에 따라서 몇년씩 차이 나는 경우는 흔히 비교적 있으며, 이런 사회에서도 하층민들은 아예 구체적인 출생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도 매우 많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도 고작 몇십년 전만 해도 본인이 말하는 나이, 주변인이 증언하는 나이, 족보나 호적 등에 기록된 나이가 1~2년에서 많게는 수년 정도 차이나는 일은 흔히 있었다. 행정 기록의 도움없이 민간에서 기억하는 연대기적 기술은 이처럼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다.[54]

  • 대부분의 산수 문제

이 문제도 간단한데, 고대인들에게는 수학(이라기보다는 산수)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 의무교육이 활발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사칙연산을 셈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지식이며 심지어 초등학생마저도 할 수 있다. 그러나,근본주의 유대교 하레디 집단의 사례를 보면, 더하기와 빼기는 둘째쳐도 18살에 곱하기와 나누기를 베우는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기초적인 사칙연산마저도 '성경에 포함된 지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우리가 현재 쓰는 아라비아 숫자는 사칙연산은 간단하게 되어 있어서 몇만자리 셈도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0과 자릿수의 개념이 없는 그 이전의 숫자들은 간단한 사칙연산도 상당히 어렵다. 히브리어 문자를 그대로 숫자로 활용하는 히브리 숫자 역시 마찬가지로, 이 문자를 사용한 계산이 그리 쉽지는 않다.

  • 생물학 문제

근대 박물학이 발달하기 전 까지, 지식인이라 해도 생물에 대한 이해는 변변치 못한 수준이었다. 지식인들은 동물이나 곤충, 식물을 그리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았고, 이런 현실에 존재하는 생물을 관찰하는데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이런 분야에 몰두할 경제적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 때문에 생물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현실과 동떨어졌거나 왜곡된 것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이러한 왜곡된 선입견들은 근현대까지만 해도 꽤 많이 남아 있었으며, 실증적인 연구에 따라서 하나씩 제거되고 없어지게 된다. 파브르의 곤충기 같은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생물 기록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일반인들도 동식물, 곤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데, 유대교에서는 특히나 '더러움'을 경계하여 유대교의 신학자, 사제 등은 동물을 더욱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곤충의 다리는 몇개인가?"같은 질문은 전혀 중요한 지식이 아니었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즉, 진지하게 생물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물에 대한 지식이 엉망이 되었던 것이다.

5.1. 논란의 원인 분석에 대한 결론

신실한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경과 성경 저자가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지녔다 하더라도, 성서무오설 신봉자가 아닌 이상 그것이 적어도 하느님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근거는 되지 않으며, 하느님 대한 믿음이나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이 주요 종교계의 해석이다.교황청에서도 본 항목에 나온 것 같은 성경의 상호 텍스트 간의 모순이나 현대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의 경우, 해당 내용을 부정하지 않고 당시 성경 저자의 시대적 한계로 분명히 인정을 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사실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

반면 종교에 비판적인 무신론, 불가지론 측에서는 성경 논란을 둘러싼 원인들은 결국 야훼의 전지전능성과 윤리적 수준, 성경 집필의 정확성 및 기타 각종 오류와 논란들을 들어 다른 종교와 경전, 그리고 다른 신화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한계를 성경이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야훼가 실존할 확률이 제우스오딘비슈누 등과 같은 타종교의 이나, 다른 형이상학적 존재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기도 한다.

6. 학술적인 탐구

6.1.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

구약을 이루는 24(가톨릭 46, 개신교 39)권의 책은, 유대인이 '토라'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을 제외하고는 통일된 체계도 없이 각각 읽혀져 왔다. 사실 Bible을 '성경'이라고 표현하는 발상이 '사서오경'에서 나온 것인데, 유교의 수많은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많은 책들이 기원전 1400년부터 400년 사이에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토라를 살펴보자. 유대인은 처음부터 하나의 집단으로서 존재해오지 않았다. 탈출기에 묘사된 출에굽사건을 계기로 하여, 기존에는 별개의 집단이었던 것이 하나로 규합된 것이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이 때를 기점으로하여, 역사적으로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 성립 이후에야 민족의식(Nationalism)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설상의 시조인 아브라함, 민족의 시조 모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 토라인 것이다. 창세기는 토라의 가장 앞장을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40년경 취합된 것으로 인정된다.

기독교인 중에서 기존의 성서무오설과, 성경은 비과학적이라는 양쪽 논리를 모두 비판하는 시각에서는 창세기는 세상이 창조된 과정이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은 하느님이 만드셨다"라는 지식을 전달하고,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범신론, 다신론과 그들의 신앙을 구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며, 기원전 1400년경의 사람들을 위해 당대에 불필요한 이야기는 최대한 빼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6.2. 신약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

우선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복음서들은 원래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특정한 저자가 없었던 것이다. 각 복음서는 각 그리스도교 분파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후대에 가상의 저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복음서들은 사실상 익명의 작품들이다. 복음서 안의 모든 내용은 중세기 대부분의 문서와 마찬가지로, 예외없이 대문자로 씌어져 있고, 제목이 없으며, 장이나 절의 구분도 없고, 실제로 낱말들 사이에 구두점이 없다. 이 복음서들은 유대인의 아람어로 쓰여지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어로만 쓰여졌다.

사실 복음서 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문제이다. 복음서는 예수를 일일히 쫓아다니면서 작성한 게 아니다. 사도행전 8장 25절, 사도행전 8장 4절 등에 나오는 듯이 처음 예수의 행적과 말씀은 성문화되어 전해진 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이런 구전복음(Oral Gospel)이 처음으로 문서화된 것이 대체로 기원후 50년정도라고 보고, 이런 원시적인 문서자료들과 구전자료, 그리고 복음사가가 자신의 기억들을 취합하여 작성한 복음서로서, 4복음서 중 가장 이른 마르코 복음서이 작성된 것이 기원후 70년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시작, 끝부분을 기반으로 좀 더 이른 시대(기원후 50년~60년)를 말하기도 한다.[55]

이렇기 때문에 복음사가들이 각자 사용한 자료, 그리고 그 자료들을 어떤 의미에서 배열했는가에 따라 복음서들의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복원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예수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작금의 복음서들은 종교적 경전으로서는 몰라도, 역사적 고증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서는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56]

또한 복음사가들은 복음서를 쓸 때 제각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위한 것이고, 마르코 복음서는 로마 이방인, 루카 복음서는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이 자신이 수집한 기록들을 나열하고 정리할 때 그들의 의도가 개입되었다.[57] 복음서 간의 차이가 나오는 것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주된 논란 목록'의 복음서 간의 차이에 관한 내용들도 상당 부분 이에 관련된다. 또한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일관된 '예수전'을 만드는 것이 위험한 일인 이유이기도 하다. 각 복음사가들이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배치해 놓은 사건들을 뒤섞어 버려서 성경의 해당 책이 주는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이 바뀌고 덧붙여졌다.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내용을 비판하는 주장을 무마할 목적으로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지적한다. 이외에도 교파간의 갈등이나, 개인의 신학적 고찰 등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내용에 변경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의 저술에서, 변해 가는 신학적 풍토의 요구에 발 맞추기 위해 원고가 계속 편집되고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오늘날 수 많은 판본의 원고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필경사의 부주의나. 일부 사람들이 주제넘게 원문을 고쳤기 때문이거나, 더러 교정자로 자처하여 제멋대로 첨가하거나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입증하기 위해, 바트 어만은 완전히 무작위로 복음서 일부를 선택했다. 이 때 선택된 것은 마르코 복음서 10장과 11장이었다. 그는 여러 초기 원고들 간에 다른 점이 얼마나 많은지 점검했다. 결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48곳 이상이 달랐다. 상호 비교하면 2곳만 다른 것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 3곳 이상이 달랐고 어느 경우는 6곳 이상이 달랐다.

학자들은 복음서 내용 가운데 후대에 추가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예컨대 원래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에서 끝난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고 여자들이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끝난 것이다. 소위 긴 결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초기원고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오늘 날엔 거의 모든 신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르코 복음서 참고.

참고자료 : 《성경 왜곡의 역사》(바트 어만[58] 저, 민경식 역, 청림출판)

7. 기타

 

신약,구약 내에서의 상호모순을 나타낸 시각화 자료이다. 큰 이미지로 보기. BibViz Project 홈페이지에서 모든 성경의 모순을 검색하고 찾아볼 수 있다. [59] 막대기 하나하나가 장(chapter)를 의미하며, 하얀 건 신약, 회색은 구약을 나타낸다. 막대기의 길이는 각각의 장들의 절(verse) 분량을 의미하고, 빨간 원은 모순되는 부분을 연결해놓은 것이다. 이 시각화 자료는 소설로 치자면 '세계관 내에서의 모순' 즉 서술상의 오류와 모순들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부분이나 학술적, 역사적인 모순까지 따져보면 이런 모순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이 웹사이트에 성경 충돌부분을 클릭하여, 댓글 부분을 보면, 충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기는 하다.

이러한 자료들이 있기에, 성경의 문자 그대로가 100%의 과학적, 실제적 진실이라고 여기는 극단적 성서무오설은 대개 개드립 취급 받는다. 다만 종교계에서도 성경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둘러싼 해석과 교리적인 절충을 적용하고 시도해 왔다는 점, 그럼에도 성경에는 논란이나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모두 숙지하고 도를 넘는 극단적인 성경 비난이나 성서무오설 등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자세가 성경을 탐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8. 같이보기


  1. [1] 미국의 성공회 주교로서 매우 진보적인 사상의 신학자
  2. [2] 개중에 중세 라틴어 성경이 된 불가타 판 성경과 그에 바탕을 둔 킹 제임스 성경(흠정역 성경) 등에 대한 논란이 많은 편이다.
  3. [3]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오늘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렇다' 등의 구절이 많이 나타나는 <사무엘기>, <여호수아기>, <창세기>, <롯기>, <판관기>, <열왕기> 등이 그 시대에서 몇십 년 후에 쓰여졌다고 저술하였다.
  4. [4] 예를 들어 가톨릭에선 창세기는 바빌론 유수 시대에 그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창세기 관련 전승을 문서화, 경전화한 책이라는 점을 공식적인 학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5. [5] 결국 성경은 절대 틀린게 없으며 그러므로 천동설, 창조론 등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6. [6] 흥미롭게도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에서도 이런 진보적 주장이 나온다.
  7. [7]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S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Y교회를 20년 이상 다닌 사람도, "주일 대 예배 때 목사가 성서 비평적으로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8. [8] 대한민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 장로회 계열 신학대이다.
  9. [9] 마찬가지로 중세 때는 이교도들에게, 근대 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10. [10] 이에 대해선 마찬가지인 창조설 논란도 참조
  11. [11]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는 분명 삼위일체인 야훼의 동등한 한 위격인 하느님이다.
  12. [12] 유다왕 아하스를 말한다.
  13. [13] 아람왕 르신과 에브라임왕(이스라엘)을 뜻한다.
  14. [14] 즈가리야 9장 9절
  15. [15]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성경의 어느 부분의 어디까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부분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하단의 성경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참조할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불리한 구절에 대한 해명을 할 때만 영적 의미가 어쩌고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다.
  16. [16] 요나서 1장 17절에 의하면 요나는 삼일삼야를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
  17. [17] 안식일이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토요일이 아니라 무교절에 포함된 절기 안식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학자에 따라 수요일설과 목요일설로 나뉜다.
  18. [18] 뜻은, "하느님이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듯 하다. 그만큼 괴로워 하셨다고 말한다.
  19. [19] 여기서 지진은 단순히 큰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20. [20] 이때 제자들은 뜨거운 기름이 끓는 가마 안에 들어간다든가, 물을 묻힌 동물 가죽 안에 갇히는등, 평범하게 죽지는 않았다.
  21. [21] 일각에선 바라빠를 열심당원이라고까지 추측한다.
  22. [22] 전지전능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창조해버리면 더이상 전지전능한게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하지 못하는걸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전지전능이 아니기에 전지전능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과연 전지전능한 자는 자신이 들 수 없는 바위를 창조할 수 있는가?"가 대표적인 예시
  23. [23] 노아의 홍수 때 40일 동안 격변이 일어났으므로
  24. [24] 예수의 사도 베드로가 노아의 홍수는 장래 있을 최후 심판의 예표라고 못박아두었다. 베드로후서 3장에 언급된다.
  25. [25] 모든 동물의 종을 모은다던가, 전 지구적인 홍수에 대한 아무런 지질학적 근거가 없다던가 등
  26. [26] 1줄에 5명씩 세우는 방식
  27. [27] 그 뒤에 내가 보니 땅 네 모퉁이에 천사가 하나씩 서서 땅의 네 바람을 제지하여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28. [28] And He will lift up a standard for the nations And assemble the banished ones of Israel, And will gather the dispersed of Judah From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NASB)
  29. [29] 장남들을 죽이고, 개구리 비를 내리고, 을 로 물들이고 등등.
  30. [30] 공동번역 성서에서 의도적으로 완곡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개역개정판에는 노비로, 영문 성경에는 slaves로 나와 있다.
  31. [31] 랍비의 주례를 받을 수 없다. 물론 대다수의 국가에서는 헌법이 최고법이니 강제성은 없어서 여성이 안 받을 수도 있고, 남성 쪽에서 안 줘도 이혼할 수 있다.
  32. [32] 다만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지에서는 이 구절에 따라 여성들이 미사포나 머리수건을 성당에 들어갈때 쓰기도 한다. 교리적으로 엄격히 정해진 건 아닌데, 많이들 관습적으로 쓴다.
  33. [33] 1856~1928 미국의 목사, 성향이 복음주의자다. 그의 1907년 저서 <성경의 난제 해석>에 잘 나와 있으며, 아래의 의견도 여기서 발췌한다.
  34. [34]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으로 번역했다.
  35. [35] 물론 현실적으로 봤을때 야훼가 벌로서 아기를 죽인게 아니라 아기의 죽음으로서 자기의 죄를 덮으려는 다윗의 조작일 것이므로 야훼와는 별 관련도 없을것이다. 비기독교 관점에선 그냥 왕혼자서 자기죄를 자기 자식한테 뒤집어 씌우고 자기 죄를 해결한 패륜아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36. [36] 하지만 도덕과 관련해서 무신론자들은 특별히 악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비종교적인 도시들이 종교적인 도시들보다 범죄율이 낮다는 분석도 있다.
  37. [37] 영상을 보면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무신론자는 애국자는 커녕 시민도 아니라는 비난을 했다는것도 알수 있다. 미국의 극단적인 기독교의 시각을 알수 있는 부분
  38. [38] 그의 개인적인 신앙과는 별개로 나치는 종교계에도 탄압을 가했으며 이에대해 교황이 시편 14장을 인용해 이를 비판했었다.
  39. [39] http://timetree.zum.com/116733/116741가 근거지만 부정확할 경우 수정바람
  40. [40] 영문 kjv와 niv에도 각각 money와 property로 기재되어 있다.
  41. [41]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은 본 항목에 게재된 출애굽기 21장 20~21절에 대한 직접적 해명을 회피하기 위하여 아예 해당 구절을 지워버리는 반달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42. [42] 2종류 이상의 화학물질로 구성
  43. [43]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제적 율법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시켰다고 표현한다.
  44. [44]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은 나쁘게 해석할 여지가 없지만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이라"는 구절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좋게 읽히지 않는 점이 다르듯이 명백히 문제가 있는 구절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관점
  45. [45]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
  46. [46] 아브라함이 왕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이야기 등
  47. [47] 이 문서에도 나오는 퀴리니우스와 헤롯 왕 등의 서술에 대한 불일치
  48. [48] 을유문화사 판 <러셀 서양철학사>(서상복 번역), 381페이지에 근거함
  49. [49] 천주교정교회개신교에서 모두 인정하는 보편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 정경 목록을 결정했다면, 아무리 마르틴 루터라고 해도 구약의 얌니아 목록을 받아들이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교회사에 대한 오류 중 반기독교로 인해 은근히 널리 퍼진 소문이다. 특히 천주교를 기준으로 할 때,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까지 성경 정경 목록은 성문법적으로 정한 게 아닌, 관습법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50. [50] 당시 신약 성경은 띄어쓰기가 없이 필사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오류가 상당했다.
  51. [51] 신약 성경의 이러한 이문 문제는 매우 심각해서, 바트 어만은 신약 성경의 전체 단어 숫자보다 이문의 수가 더 많다고 이야기 한다
  52. [52] 우리나라에서야 정교회와 성공회가 듣보잡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교회의 신도 수인 약 4억 명은 가톨릭의 약 13억명의 신도 수에 비하면 약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어떤 개신교 단일 종파보다도 큰 규모이며, 성공회도 전 세계적으로는 약 1억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성공회의 경우에는, 넓게 보면 개신교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53. [53] 성령이 감화 감동을 일으켜 영적 눈으로 풀이를 하는데, 그럼에도 왜 교파마다 해석이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가? 성령도 교파 별로 여러 종류가 있는가? 라는 의문. 또 성경을 해석하고 영적 눈을 틔워주는 전지전능한 성령이 있는데, 왜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가? 성령이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과 알 수 있는 부분을 골라서 해석을 해주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54. [54] 다만 이 경우는 족보나 호적 쪽이 오히려 틀린 경우가 많다. 특히 시골에서 심한데, 유아사망률이 높아 출생 후 1년정도 지나야 출생신고를 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
  55. [55] 해당 주장은 사도행전의 마무리가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식의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잡으면 1차 투옥 이전(기원후 58~60년), 늦게 잡아도 사도 바울 생전(기원후 65~68년)에 초본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의 시작에서 이미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고 말하였고 누가복음이 공관복음 중 가장 늦게 작성된 것으므로 여겨지므로 해당 주장에 따른다면 가장 먼저쓰여진 마가복음, 혹은 Q사본은 기원후 50년경에 정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56. [56] 가장 처음 마르코 복음서가 작성되었고,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 복음서을 참고하는 한편 마르코 복음서 이외 예수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일종의 어록집을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Q자료'라고 한다. 이 Q자료 외에 마태오와 루카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자료들은 마태오 특수자료(M), 루카의 특수자료(L)이라고 한다. 요한 복음서는 4복음서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집필된 것으로 기원후 100년경에 작성되었는데, Q자료는 물론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상당히 많은 다른 기록들이 존재한다.
  57. [57] 좀 값이 나가는 성경에는 각 복음서가 시작하기 전에 "저작 목적" 및 "저작 배경" 등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런 부분들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58. [58] 이 사람은 미국 기독교내에서 대표적인 보수적 신약학자의 수제자였지만,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성서연구에 따른 회의 때문에 불가지론자가 되었다고 잘못 알려졌는데, 바트 어만의 또다른 저서 "예수 왜곡의 역사" 후기를 보면 성경 연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온갖 부조리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신은 절대선이라는 것이 맞는 것인가(악의 문제)라는 신앙적인 회의감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59. [59] 이 웹사이트에서는 구절을 한쌍식 연결한것이 아니고, 한 토픽에 대해 같은 답과 다른 답들을 연결한것이다. 예를 들어, 지옥이 있다라는 토픽에서는 있다라고 하는 구절들과, 없다고 하는 구절들을 한번에 연결한 것이다. 이해가 안가면, 연결된 선 중 하나를 클릭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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