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미학의 철학적 기초 - 피히테와 슐레겔을 중심으로
I.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문학가의 한 사람인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1~1829)의 미학사상과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철학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이다. 낭만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던 당대의 중요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던 슐레겔은 자신의 미학을 피히테의 철학체계로부터 이끌어내려 시도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양자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 보임으로써 독일 낭만주의 미학의 이론적 토대 내지 철학적 기초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우선 슐레겔이 당대의 시대적 경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슐레겔에게 미친 피히테 사상의 영향을 개관한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그의 미학사상이 피히테의 철학과 어떤 관련을 지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특히 1795년에 출간된 슐레겔의 <그리스 시의 연구에 대하여>라는 논문 속에 표명된 “미의 역사” 3단계를 조명해 본다. 그는 이 글에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당시 낭만주의에 이르는 미의식과 예술의 발전과정을 3단계로 도식화하고 있다.
1. 그리스 로마의 예술 - 미의 자연 상태
2. 근대의 예술 - 자유로운 개성과 독창성
3. 낭만주의 예술- 근대적 대립의 극복
따라서 여기서는 슐레겔이 제시하는 “미의 역사” 발전 과정과 피히테의 철학에서 자연과 자유, 그 대립의 극복으로 이해된 역사 발전의 3계기와의 연관성을 조명함으로써, 양자의 사상적 연속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슐레겔과 피히테
1795년부터 1800년에 이르는 예나시절 슐레겔은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과 함께 낭만파 잡지 아테네움(Athenäum 1798-1800)을 창간하고 당대의 독일 낭만주의 사조를 이끈 선도주자였으며 노발리스(Novalis)와 더불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이렇듯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자였던 슐레겔은 당대의 시대적 특성을 3경향으로 특징짓는다. 프랑스혁명, 피히테의 <학문론>,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피히테는 이들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3 경향들”(die drei größten Tendenzen unseres Zeitalters)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여기서 “경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슐레겔은 위에서 언급한 3 계기들이 근본적인 해명과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단지 경향일 뿐이라고 부연한다. 따라서 “경향”이란 표현은 앞으로 전개와 발전을 통해 보다 완성되고 지양되어야 할 단지 단초의 제시와 같은 소극적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우리는 슐레겔이 자유, 평등, 박애로 대변되는 프랑스혁명의 정신과 피히테의 변증법 철학, 괴테의 예술정신을 당시 독일 낭만주의의 주된 흐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3가지 계기들로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단지 '우리 시대의 경향들'이라는 소극적 표현을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모티브로 하여 스스로 보다 발전적인 전개와 완성을 지양해 나아가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시대에 대한 슐레겔의 평가 속에서 우리는 당대의 철학(피히테), 예술(괴테), 정치(프랑스혁명)의 주요 경향들을 수용함으로써 그 속에 놓여있는 가능성과 싹을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보다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고, 그가 앞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스스로에게 제시한 과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그의 낭만주의 미학 사상과 피히테의 “학문론”(Wissenschaftslehre)과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슐레겔 미학의 이론적 모델은 피히테의 “학문론”으로부터 찾아질 수 있다. 슐레겔 자신이 피히테의 “학문론”을 언급하면서 스스로를 '피히테의 제자'라고 표현한 점은 양자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준다. 슐레겔은 독일 낭만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피히테의 철학에서 찾는다. 그는 라이프니츠, 칸트, 라인홀트, 피히테로 이어지는 독일 철학자들의 계보 속에 스스로를 편입시킴으로써 독일 관념론 철학과의 정신적인 친화성을 보여준다. 특히 슐레겔은 노발리스와 같은 다른 낭만주의자들처럼 스스로를 칸트의 계승자로 간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피히테의 제자'임을 강조하면서 당대의 피히테 사상과의 교감을 시도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시도한 '사고방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프랑스 혁명에 비견되지만, 슐레겔에게 있어서는 보다 가까운 동시대인인 피히테의 <학문론>이야말로 프랑스혁명에 비견될 수 있는 위대한 정신적인 유산으로 간주된다. 당대의 낭만주의를 주도하는 슐레겔의 눈에 칸트는 단지 독일관념론 철학의 기초를 제공했던 이미 낡고 구태의연한 사람으로 보였고, <순수이성비판>은 단지 <학문론>의 체계를 예비한 입문서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칸트 자신이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의 저술은 학설(Doktrin) 자체나 체계(System)가 아니라 예비학(Propädeutik)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슐레겔이 보기에는 라인홀트가 비로소 3비판서를 하나의 원리로 결합시키고자 시도했고, 피히테야말로 초월철학의 체계를 고유하게 발전시킨 최초의 선구자다. 이런 맥락에서 슐레겔은 자신을 피히테의 제자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렇듯 낭만주의 미학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슐레겔이 피히테의 사상적 계승자임을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피히테 자신은 미학적 문제에 관해 어떤 관점도 표명하지 않았으며,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슐레겔과는 달리 피히테에게 예술은 다소 낯선 것이었고, 피히테의 주된 관심사는 미학적 문제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슐레겔도 인정했듯이 피히테에게 미학적 문제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피히테의 관심은 자신의 체계를 건축하려는 목표에 주로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슐레겔은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한다.
“학문론은 너무 좁다. 예술도 마찬가지 권리를 지니며, 또한 여기에서 이끌어내어져야 한다.”
피히테에 있어 미학의 결여는 슐레겔에게 하나의 결함으로 여겨졌고, 그는 이 부족함을 채우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슐레겔이 특히 주목했던 것은 피히테의 <지식인의 사명(Einige Vorlesungen über die Bestimmung des Gelehrten)> 속에 나타난 역사철학이었다. 즉 피히테의 특히 역사철학이 슐레겔의 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슐레겔이 피히테의 <지식인의 사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1795년 8월에 형에게 쓴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양자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은 5번째 강의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피히테는 학문과 예술이 인류의 번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루소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루소가 “예술의 진보가 인간의 타락의 원인”이라는 전제로부터 결론적으로 자연상태에로의 회귀를 최종적인 목표로서 주장하는 데 반해, 피히테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로서 우리 앞에 놓인 것이 결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자연상태일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피히테는 루소의 생각을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 인류가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성경이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듯, 수고로운 노력과 노동에 의해서란 사실을 루소는 간과했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본질은 동물과 달리 자연상태에 머무름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도덕적 품성의 도야에서 찾아지며, 만일 이것이 도외시 된다면, 인간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다시말해 인간의 참된 특성은 이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런 관점에서 황금시대 또는 파라다이스를 잃어버린 과거에로의 회귀를 통해 찾고자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며, 이를 이끄는 주도적 힘은 자유라는 점을 강조한다.
슐레겔의 경우에도 피히테의 관점과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자연적인 고대 그리스 문화에 열광하고 추구해야할 예술의 최종적인 범형으로 간주하는 당시 낭만주의자들의 회귀적인 태도나 루소의 일방적인 생각에 슐레겔은 반대한다. 황금시대는 우리 뒤에 놓인 과거가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이며, 역사란 변증법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피히테의 철학적 사유를 미학의 영역에 적용시키고자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1795년에 출간된 <그리스 시의 연구에 대하여>라는 글이다. 여기서 슐레겔은 미의 역사를 1) 미의 자연 상태라고 특징지울 수 있는 그리스 로마의 예술과, 2) 자유로운 개성과 독창성의 발휘로 특징지워지는 근대의 예술, 3)자연과 자유의 대립의 극복을 모색하는 낭만주의 예술로의 이행이라는 3단계로 구분한다.
슐레겔 전집의 편집자인 벨러(E. Behler)의 지적처럼, 우리는 용어사용에 있어 피히테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이 저술에서 자연과 자유의 상호규정(Wechselbestimmung) 내지“상호작용(Wechselwirkung)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또한 시인의 시작활동을 자유로운 자기규정성(Selsttätigkeit)의 표현으로 특징짓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양자의 깊은 연관성은 외양적인 용어사용의 일치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구조에 있어서 찾아진다. 자연과 자유의 대립을 통해 지배되는 역사의 변증법적 구조를 예술의 영역에로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사유 구조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하에서는 양자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슐레겔이 설정한 미의 역사 3단계와 피히테의 철학 속에서 자연과 자유, 그 대립의 종합이라는 변증법적 구조와의 연관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III. 낭만주의 미학
1. 그리스 로마의 예술 - 미의 자연상태
슐레겔에 있어 미의 역사 속에서 보여지는 위대한 발전단계들은 의식의 역사 속 계기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슐레겔의 미학과 피히테의 철학 사이에는 친화성이 엿보인다. 슐레겔은 피히테의 역사철학에 유비시켜 자연이 지배적인 우위를 점하는 이 최초의 시기를 미의 자연상태(Naturzustand des Schönen)라고 부른다. 고대는 자연스러운 예술로서 특징지워진다. 이는 자연본성에 전적으로 종속된 예술이며, 자연을 지배하는 순환의 법칙에 종속되는 자연의 산물들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안내자다. 그에 따르면 고대는 미의 자연상태를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순환운동은 모든 고대 시의 역사 속에서 지배적이다. 따라서 고대의 시는 이성의 인도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규정되는 예술작품으로서 나타난다기 보다는, 생명력의 법칙에 따라 동종적인 것과 이종적인 것의 분리와 결합을 통해 형성되고 분절되며 자라나 꽃이 피고 마침내는 소멸되는 자연의 산물로서 나타난다.”
그리스는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자연적인 순환의 진행 속에서 자연스러운 예술에서 가능한 최고의 완전성에 도달했다.
“그리스 시의 역사는 미와 예술의 완전한 자연사다.”
그리스의 시는 자연스러운 시의 준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고, 모든 개별적인 산물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가장 완전하다. 그리스 예술의 이렇듯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비밀은 예술가의 개성적인 요구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에 있다. 고대 그리스 예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예술가가 전적으로 배경에 머물러, 유형적인 보편성을 드러내준 데서 성립한다. 근대를 특징짓는 예술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표현은 그리스 예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슐레겔은 그리스 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자연법칙에의 완전한 종속에서 성취된 자연스러운 형성의 산물이라고 특징짓는다.
2. 근대의 예술 - 자유로운 개성과 독창성
미의 역사에서 두 번째 단계는 자유가 주도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시기다. 한편으로 미와의 자연적인 유대로부터 해방됨을 통해, 또한 이 잃어버린 낙원을 자유롭게 새로이 창조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특징지워진다.
“근대인의 더 나은 취미는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에 의한 독자적인 작품이다.”
근대 예술은 더 이상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다. 근대의 예술성은 지성의 해방과 결부된다. 이제 지성이 자연의 자리를 대신하여 등장한다. 지성은 계속적으로 분리시키는 요소다.
“고립시키는 지성은 자연의 전체성을 분리시키고 개별화 출발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개별화된 부분들로부터 자의적으로 새로운 전체를 재구성한다. 그러나 이런 재구성된 전체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전체가 지닌 유기적 연관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슐레겔은 근대를 화학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지성의 화학적 절차는 결국 고대를 지배했던 자연적 유대를 해체시키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자기의 고유한 위치를 지니고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의 일부였던 유기적 세계관을 파괴시킨다. 근대의 본질은 무질서와 파괴, 관점의 분산을 뜻하며, 이는 개성의 강조, 예술에서 독창성의 추구에로 이끈다.
지성의 해방은 결과적으로 고대와 달리 근대 예술의 목표를 독창성과 개성에서 찾게끔 만들었다. 근대의 시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달리, 학문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고, 흥미있는 작품이 관심을 끌게 된다. 고대의 예술이 이상적인 미, 보편적인 전형을 추구했다면, 근대 예술은 이렇듯 흥미있는 것의 추구로 인해 보다 외적 현실에 가까와지고, 독특한 특징이나 성격의 드러냄을 목표로 하게 된다.
자연적 예술과 인위적인 예술의 본질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전자가 자연의 질서에 종속하는 한, 순환적 형식의 구조를 지니는 데 반해, 후자는 인간의 무한한 실현능력을 전제로 하는 진보적인 역사관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는 점이다. 즉 인간성의 점진적 실현이라는 개념은 완성을 향해 끝없이 전진하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다. 근대는 결여의 양상 속에서 출발하지만, 미의 절대적인 규준에로 무한히 가까이 가려는 노력 속에서 스스로를 전개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의 예술과 미의 역사를 서술하는 슐레겔의 관점에 피히테의 시각이 수용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피히테는 <지식인의 사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을 인간은 버릴 수 있고, 또 모든 것을 인간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지만, 완성에의 가능성만은 그럴 수 없다.”
피히테는 인간의 본질을 자연과 대비한 자유로서, 스스로 무한히 완성을 지향하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데, 슐레겔이 볼 때 이런 피히테의 생각은 근대적 정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의 모든 가능한 개별요소들과의 완전한 합일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 일반의 사명을 성취하는 것을 전제하며, 다시말해 절대적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인간이 인간이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리고 신이 되지 않는 한에서 후자가 불가능한 만큼, 전자도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들의 완전한 통일은 최종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인간의 사명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목표에 무한히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고 또 해야하는 일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슐레겔이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미의 역사를 서술해 나감에 있어서 적용한 이론적인 모델은 자연과 자유의 대립 구도 속에서 철학적 모티브를 전개했던 피히테로부터 차용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또한 자연성에 기초한 고대 예술 정신에 대한 서술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근대 예술의 특징 서술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피히테의 사유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슐레겔은 피히테의 사유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피히테의 사유는 자연과 자유, 유한과 무한의 대립을 통해 수행되며, 또한 실재와 관념의 종합을 관념의 양태 속에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정하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한, 피히테의 사유는 슐레겔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채 싹을 제시하고 있을 뿐인 이른바 경향에 불과한 시대인 근대성에 속한다. 따라서 슐레겔은 이제 이런 근대성을 극복하는 과제를 낭만주의에 넘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슐레겔이 제시하는 미의 역사의 세 번째 발전단계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3. 낭만주의 예술- 근대적 대립의 극복
미의 역사 마지막 단계는 자연과 자유의 종합으로 이해된다. 자연의 질서 속에 있었던 미가 자유의 산물로서 재발견된다. 이것이 낭만주의 예술이 추구하는 목표다. 분리시켜 다루어진 자연과 자유, 양자를 매개함을 통해 근대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낭만주의 정신이 추구하는 목표이자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다.
앞서 자유를 특징으로하는 근대는 자연을 모범으로 하는 고대에 대한 반정립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자연과 자유의 화해를 목표로 하는 마지막 단계인 낭만주의 예술이 뜻하는 바는 결코 자연적인 고대에로의 단순한 회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슐레겔에 의하면 오히려 이와 반대로 낭만주의는 근대의 영역 위에 스스로의 근거와 토대를 발견해야 한다. 근대를 특징짓는 자유로운 표현과 흥미있는 것에 대한 추구가 일면적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비록 근대의 자유가 취미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야 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으로 긍적적인 가치를 지닌다. 반정립으로서의 근대성은 세번째 단계로 이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근대의 관심과 흥미는 객관적인 고대의 미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보다 고차적인 주관과 객관의 종합과 최고의 아름다움의 실현을 위한 필수 전제다. 따라서 슐레겔에 의하면 미의 역사는 3 계기를 포함하며, 여기서 세 번째 계기는 첫 번째 계기의 단순한 반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고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근대의 결함을 드러내 주며, 또한 근대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무시하지 않고 양자를 포용함으로써 실현되야 할 더 나은 발전과 연관해서만 유익한 것이다. 따라서 슐레겔은 여기서 이중적인 과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중적인 방향으로 통일울 추구해야 한다. 뒤로는 그것의 성립과 전개의 최초의 근원에로, 앞으로는 그것의 발전의 최후의 목표에로”
이러한 미의 역사 속에서 근대성은 무엇보다 고대를 지배한 유기적인 통일의 상실과 분열을 통해 특징지진다. 유기적인 통일의 시대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슐레겔이 낭만주의 미학에 제시한 과제는 이런 분리와 분열의 극복에 있다. 슐레겔은 이런 통일의 추구를 위해 형 아우구스트와 함께 낭만파 잡지 <아테네움>을 만들어 독일 낭만주의 사조의 이론적인 기초를 제시했다.
“낭만주의 시(die romantische Poesie)는 진보적인 보편시(eine progressive Univeralpoesie)다. 그 사명은 단순히 모든 분리된 시의 종류들을 다시 결합하고 시와 철학과 수사학을 연결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 시의 사명은 시와 산문을, 창작과 비판을, 예술시와 자연시를 때로는 혼합하고, 때로는 융합하는 데 있고, 시를 생기있고 사회적으로 만들고, 삶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며, 위트를 시적으로 만들고, 예술의 형식을 모든 종류의 품위있는 교양적인 소재로 채우고 유머에 의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있다. 그것은 시적인 모든 것을 포괄한다.”
슐레겔은 자신이 구상한 낭만주의 시를 초월시(Transzendentalpoesie)라고도 명명했다.
“그것에 있어 하나이자 모든 것은 관념(Ideales)과 실재(Reales)의 관계인 시가 존재한다. 이는 철학적인 예술언어로 비유해서 표현한다면 초월시(Transzendentalpoesie)라고 불려져야 할 것이다. 이 시는 관념과 실재의 절대적인 차이(absolute Verschiedenheit)와 함께 풍자시(Satire)로 시작해서, 중간에는(im Mitte) 비가(Elegie)로서, 그리고 마침내 양자의 절대적인 동일성(abosolute Identität)과 더불어 목가(Idylle)로서 끝난다.”
슐레겔은 진보적인 보편시로서, 시와 철학을 결합한 낭만주의 시의 프로그램을 <아테네움> 속에서 전개시켰다. 이미 이 잡지를 창간하기 전인 1797년에 슐레겔은 다음과 같은 구상을 제시한다.
“모든 예술(Kunst)은 학문(Wissenschaft)이 되어야 하고, 모든 학문은 예술이 되어야 한다.: 시(Poesie)와 철학(Philosophie)은 결합되어야 한다.”
이런 계획은 자신의 친구였던 노발리스와도 공유된 생각이라고 보인다. 노발리스도 학문들 간의 분리는 천재성의 결여에 기인한 것이고, 시를 통해 이런 분리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낭만주의 시를 통해 상이한 학문들 사이에 은폐된 연관이 밝혀진다면, 보편적인 학문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학문들을 시적으로 만들고자하는(poetisieren) 계획을 세웠고, 이런 생각을 노발리스는 자신의 낭만주의 철학의 주도 원리로서 삼았다. 이렇듯 계획 속에서 노발리스는 슐레겔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피히테의 계승자로 이해했다. 관념론의 역사에 있어,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마술적인 관념론'이라고 명명했던 그의 고유한 기여는 피히테의 체계에 왕관을 수여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히테의 업적은 하나의 학문, 즉 철학을 보편적인 학문으로 고양시키고, 나머지 학문들을 그 변양으로서 포섭했다는 것이다. 노발리스에 따르면, 피히테가 철학에 대해서 수행한 작업은 나머지 모든 학문들에 대해서도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슐레겔과 마찬가지로 분리된 개별 학문들 간의 경계를 넘어 “모든 학문은 하나”라는 모토 아래 잃어버린 통일을 회복시키고자 시도했다.
이런 “낭만주의 시”의 정신은 칸트의 철학 정신을 계승한 피히테의 초월철학과 독일관념론의 변증법적 사유로부터 그 이론적 기초를 차용한 것이다. 낭만주의자인 슐레겔과 노발리스가 추구한 새로운 미학의 본질은 피히테의 학문론을 미학의 영역에로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점에서 낭만주의 미학 이론가인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스스로 명명했듯이 피히테의 제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피히테가 제시한 이론적 기초 위에 낭만주의의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자 했음을 드러내준다.
IV. 맺는 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 슐레겔이 미의 역사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전적으로 피히테의 철학으로부터 사상적 모델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미의 역사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미학을 구축하기 위한 실마리를 발견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미의 역사를 전개시키는 데 적용된 이론적 모델은 피히테가 <지식인의 사명> 속에서 개진한 역사철학적 사유의 단초들로부터 이끌어 낸 것이다. 또한 슐레겔은 자신의 미학에서 초월시(Trnszendentalpoesie)라는 핵심적 개념을 피히테의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의 모델로부터 발전시켰다.
슐레겔의 독창성은 이렇듯 초월철학의 모델을 미학의 영역에 전이시켰다는 데 있다. 슐레겔은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피히테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과제를 설정했다. 그리고 이런 극복은 피히테의 학문론의 제한된 좁은 영역으로부터 예술과 미의 영역으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슐레겔이 피히테의 학문론에 있어 큰 결함으로 아쉽게 생각한 것은 이와 같이 미와 예술의 영역에로까지 원리를 확장시켜 체계적인 도출을 시도하지 못한 채 제한된 영역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슐레겔의 관점에서 볼 때, 피히테의 학문론의 체계는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체계의 완성을 위해서는 충분한 전개와 광범위한 적용이 하나의 원리로부터 도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슐레겔은 초월철학의 모델을 예술과 미의 영역에 적용함을 통해, 스스로가 피히테의 초월철학의 진정한 확장을 시도했다고 확신했다. 이로써 슐레겔로 대변되는 독일 낭만주의 미학은 그 이론적인 기초에 있어 피히테로 대변되는 독일관념론 철학과 깊은 유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