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주륙이동 논의는 주자는 학문 추구에 편중했고 육상산은 덕성 중시에 편중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당시에 이미 있었다. 그러나 주자학의 최종 목적도 우리 마음의 전체대용(全體大用 : 온전한 본체와 광대한 작용)을 밝히는 것이었으므로 존덕성은 일반 도학자들의 공통 목적이었다. 따라서 상산이 도문학을 그다지 중요시 않았다는 말은 옳지만 주자가 존덕성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말은 옳지 않다. 이 점은 단지 두 사람의 학문 방법 혹은 수양 방법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결국 주륙의 차이는 단지 그들이 논한 학문방법 혹은 수양방법의 차이에만 있는 것인지 여부는 극히 주목해야 할 문제이다.
주자학은 유심론보다는 현대의 신실재론에 가깝다. 이 점에 주목하면 주륙의 차이가 그저 학문방법 혹은 수양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철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이정의 철학 내에 이미 존재했다. 이천 일파의 학설은 주자에 이르러 완전히 발전했고 명도 일파의 학설은 상산과 양간에 이르러 상당히 발전했다. 한마디로 이 두 학파의 차이점을 표현하면 주자 일파의 학은 理學, 상산 일파의 학은 心學이라고 할 수 있다. 왕양명은 『상산전집』의 머리말에서 "성인의 학은 심학"이라고 말했는데, 이 '심학'이라는 명사는 성산 일파가 주자와 다른 이유를 대변한다.
주자는 '性卽理', 상산은 '心卽理'라고 말했다. 불과 한 글자 차이가 두 사람 철학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주자에 따르면 마음은 리와 기가 합하여 생긴 구체적 사물이니 절대로 추상적인 理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속의 理는 이른바 性이니 마음속에 理가 있으나 마음이 理는 아니다. 따라서 주자의 체계에서는 性卽理라고만 말할 수 있고 心卽理라고 말할 수 없다. 상산의 心卽理 또한 주자의 心, 性 구별을 반대한다. 어록은 말한다.
백민이 상산에게 물었다.
"性, 心, 才, 情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대의 이런 논의는 지엽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대만의 잘못이 아니라 온 세상의 폐단이다. 요즘 학생들의 독서는 글자 해석에 불과하고 핵심을 구하지 않는다. 性, 心, 才, 情은 다 같은 물건이고 말만 우연히 다를 뿐이다. ... 굳이 말하자면 하늘에 속한 것이 性이고 사람에 속한 것이 心이다. 이것들은 내 친구에 따라 말한 것이고 사실은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
주자가 본 실재는 두 세계가 있는데, 하나는 시공 안에, 다른 하나는 시공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상산이 본 실재는 단지 하나의 세계, 즉 시공 안에 존재한다.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고 그 세계는 마음과 일체가 되므로 "우주는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곧 우주"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心學이라는 말은 오직 상산 일파의 도학만 지칭될 수 있다. 상산은 말했다.
사람은 목석이 아니니 어찌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음은 오관 가운데 가장 존귀하다. 「홍범」은 "생각함이 예지이고 예지는 성인을 만든다"고 했고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단은 바로 이 마음이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것이 이 마음이다. 이 마음이 있고 각 마음마다 이 理가 구비되어 있으니 心은 곧 理이다.
주자에 따르면 "천하에 性이 없는 사물은 없는데", 사물이 생성될 때 그것이 타고난 理가 곧 그것의 性이므로 목석에도 그 性은 있지만 목석에 지각은 없다. 즉 목석에 性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목속에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산이 여기서 목석에는 없다고 여긴 心은 곧 주자가 말한 心이다. 또 상산에 따르면 心은 사려할 수 있는데, 주자도 "영명한 기능은 心이고 性은 아니"라고 말했다. 주자에 따르면 "仁은 性이고 측은은 情이니 마음에서 생기는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마음은 性과 情을 통괄한다. 측은의 情은 "사랑의 理"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으로서 형이하의 존재이니 "마음에서 생기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산은 "사단은 바로 이 마음"이라고 했으므로 그가 말한 心은 주자가 말한 心이다. 양간은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로 명철하고 그 자체로 영명하다"고 했으니 그가 말한 心은 곧 주자가 말한 心임을 더욱 명확히 한다. 이로써 보건대, 상산 일파가 말한 心은 곧 주자가 말한 心이니 心卽理는 실제로 性卽理와 다르다.
이 점이 바로 주륙 철학의 근본적 차이다. 상산은 "하늘에 속한 것이 性이고 사람에 속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心과 性은 "모두 다 같은 물건일 뿐"이라고 여겼다. 상산이 말한 하늘에 속한 性과 사람에게 속한 心은 동일한 세계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이른바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상산은 말했다.
천리와 인욕의 구분은 지당한 이론이 아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理, 사람에 속한 것을 欲으로 여기면 천상계와 인간계는 다른 것이 되괴 만다. ....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미하다"는 『書』의 구절에서 해석자들은 인심은 인욕, 도심은 천리를 지칭한다고 여겼는데, 이런 해석은 옳지 않다. 마음은 하나다. 사람에게 어찌 두 마음이 있겠는가?
즉 "천상계와 인간계는 다른 것"이라는 설을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자의 체계에서 두 세계는 다르다.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無極而太極"의 구절이 있다. 주자는 이 말이 "형체는 없으나 理는 있는" 태극을 형용한다고 주장했다. 상산과 그의 형 사산은 『易』「계사」는 단지 태극만 언급했으니 태극 위에 다시 무극을 더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태극도설」은 「통서」와 부류가 다르니 염계가 지은 것 같지 않다. 혹은 그의 학문이 미숙했을 때 지었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전한 것인데 후인이 변별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주자와의 왕복 논변은 당시 커다란 논재이었다. 앞의 내용을 보면 상산의 철학에는 오직 시공 속의 세계만 존재하므로 이른바 "형체는 없으나 理는 있다"는 주장을 근본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상산은 말했다.
형이상의 존재의 측면이 道이고 형이하의 존재의 측면이 器다. 하늘과 땅 도 器이니, 사물을 낳아 덮고 싣는 데는 그 理가 있다.
이 조목만 보면 상상의 철학도 주자와 근본적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상산은 주자에게 보낸 「태극도설」논변에서 이렇게 말했다.
『易』 대전에 "형이상이 존재가 道'"라고 했고 "일음일양이 道"라고 했으니 음양도 이미 형이상의 존재일진대 하물며 태극이랴?"
음양을 형이상의 존재로 여겼다. 즉 상산이 말한 형이상의 존재는 주자가 말한 형이상의 존재와 의미가 다르다. 정명도, 정이천 형제도 『易』「계사」의 이 구절을 해석한 적이 있다. 명도는 "음양은 형이하의 존재인데 또 道라고 했으니.... 원래 이것만이 道일 뿐이니 이를 묵묵히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라고 했고 이천은 "일음일양이 道"라고 했으나 "道가 음양은 아니며, 일음일양인 까닭이 道"라고 말했다. 이 두 해석의 차이가 바로 주륙의 차이였다.
음양을 형이상의 존재로 여기면 형이상의 존재도 시공 내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므로 형이하의 존재와 같은 세계 내에 나란히 존재하게 된다.
상산 철학에는 오직 하나의 세계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이상과 형이하를 언급했다. 그러나 양간에 이르면 이런 분열은 폐기된다. 양간은 말했다.
"형이상의 존재는 道요, 형이하의 존재는 器다"라고 하여 道와 器를 분리시켰는데 도대체 器기 道를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말인가? 「계사」의 작자도 편견이 이와 같을진대 후세의 학자들이야 더 무엇을 바라랴?"
이른바 형이상과 형이하는 주자의 해석에 따라야 비로소 명확한 의미를 지니는데, 주자의 체계에 따르면 器는 道와 동일한 세계 내에 있지 않다. 이는 육상산 학파가 승인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양간은 참으로 지당하게도 「계사」의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별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주륙철학의 근본적 차이는 주자도 대략 언급했다. 주자는 불교의 性 논의는 "생긴 그대로가 性"이라는 고자의 주장과 같다고 여겼는데 주자의 체계에 따르면 마음은 형이하의 존재이므로 구체적 개체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주자는 마음을 性으로 여김은 "바로 '생긴 그대로가 性'이라는 고자의 주장과 같다"고 여겼다. 상산이 죽자 주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절로 조문을 갔는데 상이 끝난 얼마 후에 '애석하게도 고자가 죽었다'고 말했다." 주자는 불교와 상산을 고자에 비유했는데 둘 다 모두 마음을 性으로여겼기 때문이다.
주자의 후학 중에도 상산을 고자에 비유한 사람이 있었다. 진순은 말했다.
불교는 마음의 작용을 性으로 인정하니, ....단지 氣만 인정했고, 저 理는 언급한 적이 없다. ...요즘 근거없는 주장을 일삼는 자들이 즐겨 性命을 논하면서, 늘 순전히 불교의 '작용이 性'이라는 의미를 채용하면서도 성인의 말로 거짓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은 "생긴 그대로 性"이라는 표현은 고자의 설에 불과하다.
만약 이 점에서 육상산이 禪에 가깝다고 지적한다면 육상산은 진실로 주자보다 더욱 禪에 가까웠다.
상술한 것을 보면 주륙의 철학은 실로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들이 도학의 대립적인 두 학파를 형성한 것은 실로 까닭이 없지 않았다. 心學의 경우 상산과 양산은 사실상 그 단초만 열었을 뿐이고 그 대성은 왕양명을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주자와 대항한 인물은 육상산과 양간이 아니라 250년 뒤의 왕양명이었다.
중국철학사 / 펑우란 / 박성규옮김 / 주륙이동
눈에비친햇빛